<약 2:14-26>

(정리하기) (질문하기) (묵상하기)

1. (설명)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는가.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는가?(14절)

(예시)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15절)

너희 중에 (말만 하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16절)

  - 그에게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말만하고

  -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원리)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17절)


(정리) 신자라고 하면서 말만 하고 실질적인 행동이 없으면 그것을 어떻게 참된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말이 안된다. 그런 믿음은 없다. 

(질문) 여기서 말하는 행함이 없는 믿음과 행위가 아닌 것으로의 믿음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묵상) 야고보가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말만 앞서고, 행함이 없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상식적인 측면에서 모든 종교나 도덕이 마찬가지다. 행함이 없는 종교나 도덕은 죽은 것이다. 야고보는 그런 측면에서 <행함없는 믿음/신앙>에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다. 

바울이 구원의 방법으로서 말한 오직 믿음은 우리 인간에게 구원의 조건이 없다는 측면에서의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리하면 야고보의 문제제기가 일반 종교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문제라고 볼 수 있지만, 바울이 말하는 <행위가 아닌 믿음>의 문제는 일반 종교와는 차별되는 구원의 방법을 말하는 것이다.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은 신앙이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을듯 하다. 참된 신앙이란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수반되고 희생이 수반되는 것이어야 한다. 평안을 잃고, 춥고 배고픈 사람들을 만나거든 그들을 평안하게 해주고 따듯하게 해주고 먹을 것을 나눌 수 있어야 참된 신앙인이라 말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이런 요소는 잊고 간과한채 구원의 방법으로서만 <행위 아닌 믿음>을 주장하니 초점도 못 맞춘 것일 뿐더러 오히려 말만 하는 종교인으로 비판을 받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2. (설명)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18절)

(첨언)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그러나)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19절)

  (원리)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20절)


(정리) 신앙은 행위로 증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말과 지식은 귀신들도 하는 것이다. 말만 하는, 행위가 없는 신앙은 헛된 것이다. 

(질문) 야고보는 믿음을 보이는 문제를 지적한다. 믿음은 보여야 하는 것인가? 

(묵상)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행위없는 구원의 방법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인간편에서 근거도 없는 것이고 보이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보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고보가 '믿음은 보여야 한다'는 취지로 말할 때 그 믿음은 바울의 것과 다른 것이다. 야고보는 믿음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지만, '신앙'이라는 의미를 생각하면 더 적절하다고 보인다. 신앙이 있다는 것은 신앙이 없다는 것과는 다른 구별이 존재한다.(자기 희생, 이웃 사랑의 가시적인 형태)

 

(예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 아니냐?

-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21절)

(원리)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다.(22절)

(말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의 의미이다.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다.(23절)

(결론)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다.(24절)

  (예시)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원리)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정리) 아브라함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믿음이란 그 행함으로 온전해 지는 것이다. 기생 라합도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영혼 없는 몸처럼 죽은 것과 다름없다. 

(질문)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자신의 믿음을 온전하게 보였다는 주장을 함으로 아브라함의 의롭게 됨이 아브라함의 행위를 통한 믿음으로 말미암음이라고 주장 했다. 이것은 바울의 주장과 비교할 때 어떤가? 

(묵상) 야고보는 여전히 믿음에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이어가고 있고 그 주장의 예로서 자신의 아들을 하나님께 바침으로서 자신의 믿음을 보인 아브라함을 들고 있다. 신앙이란 자신의 희생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행위로서 자신의 희생을 감수할 수 없는 신앙을 참 신앙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기생 라합도 목숨을 걸고 정탐꾼을 살려준 것이다. 믿음은 자신을 희생하는 행위를 따르게 된다. 이런 맥락이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믿음과 초점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롬 4장. 행위가 아닌 은혜로서의 믿음, 약속을 바라는 믿음)


[최종정리]

1. 행함이 없는 믿음(신앙)은 헛것이다.(17절, 20절, 26절)

2. 아브라함도 아들의 목숨을 드리려 했고, 라합도 자신의 생명을 걸었다.

3. 신앙인이 말만 하고 자기 희생이 없는 것은 죽은 신앙과 다름없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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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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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여호수아 6장] 여리고의 성벽이 이스라엘 제사장의 나팔과 백성들의 함성에 의해 무너진 이야기다. 세상을 강력함으로 자신을 방어한다. 높은 벽과 스펙과 기득권... 언론의 장악.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함성으로 싸운다. 한 마음으로 이루어지는 백성들의 함성이 대적의 성벽을 무너뜨린다. 성은 무너진다. 곧 무너진다. 모든 백성들이 함께 함성을 지른다면.(12/19)

 

 

[정리1.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

 

1. 이스라엘로 여리고를 돌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1) 이스라엘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었다.
  2)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과 네 손을 넘겨주었다.
  3) 너희 군대는 그 성을 둘러 매 한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4)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감.
  4)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나팔을 길게 불 때 백성들이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르면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들은 앞으로 올라가라.
  5) 여호수아는 무장한 자들을 매 앞에 그 뒤로 나팔을 부는 제사장 7명, 언약궤를 맨 제사장 순으로 배치시켰다.

 

2. 여호수아의 명대로 진행된 이스라엘 백성들
  1) 실전배치: 무장한 자들 - 양각 나팔 일곱을 잡은 제사장 일곱 - 여호와의 언약궤 - 무장한 자들(후군) / 나팔을 불면서 행진했다.
  2) 백성들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다가, 여호수아의 명령이 떨어지면 그 때 외치라고 명함.
  3) 여호와의 궤가 그 성을 한 번 돌게 하고 그들이 진영으로 들어와서 진영에서 잔다.
  4) 둘째날도 동일한 방식으로 여리고를 한바퀴 돌고 진영으로 돌아왔다. 엿새 동안 이렇게 함.
  5) 일곱째날 새벽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전과 같은 방식으로 그 성을 일곱 번 돌았다.
   (1) 일곱 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명함
   (2)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다. 성과 그 가운데 있는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되 기생 라합과 그 집에 동거하는 모든 자는 살려주라. 우리가 보낸 사자를 살려주었기 때문.
   (3) 여호와께 바친 것이 온전하게 되기 위해 그 바친 물건에 손을 대지 말라.
   (4) 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다.
  6) 나팔 소리를 듣고 백성들이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졌고 백성들은 각기 앞으로 나가 그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했다.

 

3. 여리고를 점령하는 이스라엘
  1) 먼저 여호수아가 그 땅을 정탐한 두 사람에게 그 기생의 집에 가서 맹세한 대로 그에게 속한 모든 가족과 형제들을 이끌어 내어 이스라엘 진영 밖에 두라.(이들은 오늘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주하였다. 이들은 여리고 정탐군들을 숨겨주었기 때무이다.)
  2) 무리가 그 성에 있는 모든 것을 불로 사르고, 은금과 동철 기구는 여호와의 집 곳간에 두었더라.
  3) 여호수아가 맹세하게 하여 여리고를 저주함: 누구든지 여리고를 세우는 사람은 그 기초를 쌓을 때에 그의 맏아들을 잃고, 그 문을 세울 때에 그의 막내 아들을 잃으리라.
  4)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니 여호수아의 소문이 온 땅에 퍼진지라.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을 다시 풀어서 쓰기]

 

여리고를 시작으로 가나안 백성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두려움 가운데 있었다. 여리고는 모든 문을 닫고 출입을 통제했다. 철두철미한 방비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때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하나의 지시를 내린다. 군대로 하여금 여리고 성을 한 바퀴씩 돌도록 한 것이다. 엿세 동안을 그렇게 하는데 무장한 자들을 맨 앞에 그리고 나팔부는 제사장 7명 그리고 언약궤를 배치하여 성을 한 바퀴씩 돌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일곱째 날에는 성을 일곱 번 불고 제사장이 나팔을 길게 불면 백성들이 큰 소리를 외쳐 부르라고 한다. 그러면 성이 무너져 내릴 것이고 백성들로 올라가라고 한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에게 그와 같은 지시를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하고, 백성들은 그 지시를 따라 여리고 성을 돌았다. 여호수아는 성을 정복할 때 두 가지 사항을 미리 일러준다.  첫째 성의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라. 물건에 손을 대지 말라. 둘째는 라합의 집에 있는 자들은 모두 살려주라. 그것은 정탐꾼을 살려주었기 때문이다.


일곱째 날 나팔소리와 함께 백성들이 외칠 때 성은 무너졌고, 백성들은 앞으로 나아가 성을 점령했다. 무리는 성의 모든 것을 불사르고, 은금과 동철 기구는 여호와의 집 곳간에 두었다. 여호수아는 여리고를 향해 저주하여 누구든지 여리고를 세우는 사람은 그 기초를 쌓을 때 맏아들이 죽고, 그 문을 세울 때 막내 아들이 잃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훗날 이루어진다.) 여호와와 여호수아에 대한 소문이 온 땅에 퍼졌다.


 

[정리3.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메시지와 묵상들]

 

1. 여리고 성의 철두 철미한 방어 시스템이 막지 못했다.

 

여리고는 이스라엘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철저한 방어 시스템을 가동했다. 그러나 여리고는 하나님과 그 말씀에 순종하는 백성들에 의해서 힘없이 무너졌다. 나름대로의 철저한 방어시스템이 하나님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백성들의 나팔소리와 함성 소리에 무너져 내린 것이다.

 

대적의 강력한 방어시스템도 결국 하나님 앞에서는 무력화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나팔소리와 백성들의 함성소리... 그것만으로 대적이 취하 최대한의 방어는 무력화되는 것이다. 물론 나팔소리와 백성의 소리만으로 된 것은 아니다. 철저하게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믿음을 통해서 역사한 것이고, 하나님은 자신의 방법을 철저하게 따르는 백성들 가운데서 강력하게 역사하신 것이다.

 

세상을 강력함으로 자신을 방어한다. 높은 벽과 스펙과 기득권... 언론의 장악.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함성으로 싸운다. 한 마음으로 이루어지는 백성들의 함성이 대적의 성벽을 무너뜨린다. 성은 무너진다.

 

 

2. 정탐꾼을 도운 기생 라합과 맺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힘쓰고 이는 모습 강조.

 

여호수아 6장은 여리고를 정복함에 있어서 기생 라합과 그 가족들의 생명을 보존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했다는 것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훗날 이들은 이스라엘 가운데 편입되는데, 이방 사람들인 이들과 맺은 언약에 있어서 신실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정탐꾼에게 은혜와 자비를 베푼 행위에 대해서 반드시 은혜와 자비의 행위로 갚아준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것이라 하겠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은혜를 은혜로 갚아야 한다. 은혜를 모르는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일 수 없다. 은헤를 베푼 사람이 어떤 사람일지라도, 나중에 상황이 역전되었더라도 그 은혜는 잊지 말아야 한다. 또한 언약은 언제라도 누구에게라도 신실하게 지켜야 한다. 오늘 본문은 은혜에 대한 보답과 언약에 대한 신실함에 대한 덕목을 충분히 가르치고 있다. 

 

3. 여리고 승리의 전리품은 모두 하나님의 집으로 옮겨야 함: 하나님의 전적인 승리

 

여리고 전투의 특이한 것은 전쟁의 전리품을 모두 하나님께 드려야만 한다는 것이다. 개인이 취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나머지는 모두 불태워야 했다. 이것은 여리고 전쟁에 있어서 온전하고 유일한 공로자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여리고 전쟁에 있어서 만큼은 인간의 공로를 조금이라도 챙겨서는 안된다.

 

나중에 아간이 자신의 것을 일부 챙긴것은 단순한 욕심에 대한 처벌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완전한 공로를 흠집내는 죄였기 때문에 엄중한 처벌을 받은 것이라 볼 수 있겠다. 하나님은 우리의 공로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분은 아니시다. 우리의 공로를 인정하시기에 상급도 주시고, 전리품도 갖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전혀 손 댈수 없는 영역이 있다. 구원에 있어서 우리가 의롭게 되는 칭의와 중생의 은혜에 있어서 우리가 조금이라도 공로를 취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아간과 같은 행위가 되고 마는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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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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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여호수아. 2장] 라합의 거대한 두려움 앞에서 작은 두려움(자기의 목숨)을 극복합니다. 그것이 라합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계기가 되지요. 두려움을 어떻게 다루는가가 우리의 운명도 역사도 바꾸게 됩니다. 부정한 권력은 두려움을 이용해 통치하려고 합니다. 그 작은 두려움을 극복할 때, 우리는 큰 구원을 얻게 됩니다. 

작은 두려움을 이겨야 합니다. 우리를 작게 만드는 그 두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인간됨을 포기한 채 살아갈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간이 되기 위해 우리는 작은 두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정리1.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1. 여호수아가 보낸 두 명의 정탐꾼이 위험에 처하다.

  1) 여호수아가 두 정탐꾼을 보내며 싯딤과 여리고를 엿보라.

  2) 정탐꾼들은 싯딤과 여리고를 정탐하고 나서 기생 라합의 집에 들어가 유숙하려 했다.

  3) 여리고 왕이 정탐꾼이 들어왔다는 정보를 듣고, 라합의 집에 군인들을 보내 잡도록 했다. 

  4) 이를 눈치 챈 라합은 정탐꾼을 옥상에 벌여놓은 삼대에 숨기고는, 여리고 군인들에게는 성밖으로 방금 나갔으니 따라가 보라고 거짓말을 했다.  


2. 라합이 두 정탐꾼을 구해 주면서 요청한 것/ 정탐꾼이 약속한 것

  1) 이 땅을 여호와께서 당신들에게 주신 것을 내가 안다. 너희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홍해를 마르게 하고 나오며, 요단 저쪽에서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을 전멸한 일을 우리가 익히 듣고 마음이 녹고 정신을 잃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하늘과 땅에 하나님이시다. 

  2) 청하노니,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우리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달라고 요청함.

  3) 정탐꾼들은 우리의 목숨을 살려준 것으로 우리도 너와 너희 집을 살리주리라.

  4) 라합의 집에서 성 밖으로 줄을 달아 이들을 도망하게 해주고, 이들로 산에 들어가 사흘 동안 숨어있어 추격자들이 찾지 못하면 그 때 내려와 유대 진영으로 돌아가라고 조언함.

  5) 정탐꾼들은 라합의 말대로 산에 숨어 있다가 사흘 후에 진영으로 돌아감

  6) 정탐꾼들은 자신을 달아 내린 창문에 붉은 줄을 매고, 그 집에 부모와 형제 그리고 네 아버지의 가족들을 다 집에 모으라. 그 안에 있으면 살려니와 그렇지 않으면 죽어도 책임지지 않을 것이다. 집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으면 그것은 우리가 책임지겠다고 약속함.

  7) 두 정탐꾼이 여호수아에게 고하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확신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았기 때문이다.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글을 다시 풀어서 새로 작성하기]


여호수아는 여리고를 침공하기전 정탐꾼을 보냈다. 이들은 싯딤과 여리고 정찰임무 중 기생 라합의 집에 머물게 된다. 그러나 여리고 안에 정탐꾼이 들어왔다는 정보는 여리고의 왕에게 전달되고, 왕은 그 정보에 따라 기생 라합의 집을 급습한다. 그러나 눈치빠른 라합은 군인들이 들어오기 전에 낌새를 채고 정탐군을 옥상에 벌여놓은 삼대로 숨겨놓는다. 그리고 군인들을 속여 성을 빠져나가 헛걸음 하도록 유도한다. 라합의 재치를 보게 되는 장면이다. 


라합이 이렇게 정탐꾼을 숨겨둔 이유는 인도적인 차원에서만은 아니었다. 실리적인 계산이 있었다.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위협적이었다고 생각하였고, 그들이 결국 여리고를 점령할 때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방법으로 위험한 일을 감행하고 있는 것이었다. 두 정탐꾼은 여인의 요청대로, 그녀와 그녀의 가족, 또 그 아버지의 가족들 모두 이 집에 있으면 살게 해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 집은 다른 집과 구별되게 창문으로 빨간 줄을 달아 내려놓아 다른 집과 구별하도록 했다. 


라합이 이와 같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했던 것은 하나님께 이들을 애굽에서 가나안 저편까지 인도하셨을 때 들었던 소문때문이었다. 라합만이 이들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라합으로 대표되는 여리고 백성 모두가 그런 두려움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호수아는 이와 같은 상황을 보면서 승리를 예감했다.


[정리3.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드는 생각과 묵상들]


1. 여리고 백성인 기생 라합에게 기회가 왔다. 


라합은 정탐꾼 두 사람을 구원해 줌으로 훗날 여리고가 침략 받을 때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라합이 어떻게 이와 같은 기회를 얻을 수 있었을까? 정탐꾼은 기생 라합이 구원해 줄 것을 알고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우연히 들어간 집이 라합의 집이었고, 라합은 그들에게 호의를 베풀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기회가 있었다고 모두 라합처럼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정탐꾼을 신고해서 포상을 받았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라합은 기생이었지만, 여러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었는지 대략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호와 하나님을 신으로 모신 이스라엘 백성들을 막을 수 없다는 판단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라합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의 운명을 그 하나님과 그 백성에게 의지하기로 한 것이다. 라합은 정탐꾼이 자신의 집으로 찾아 왔을 때, 그 구원의 때가 왔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는 목숨을 걸기는 했지만, 그들을 의지하기로 정했던 것이다. 


구원을 스스로 이루어 낼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구원의 바람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찾아 올 수는 있다. 그 때를 잘 분별하여 잡으면(물론 잡든 다는 것도 '잡히면 다행이고 아니면 말고' 식이 아니다. 목숨을 건 결단이 있어야 했다.) 구원의 은혜를 얻게 되는 것이다. 라합은 여리고의 운명을 판단했다. 그리고 여호와께로 옮겨왔다. 우리도 우리 시대를 판단해야 한다. 우리 사는 이 곳을 판단해야 한다. 여기서 희망을 꿈꿀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희망을 찾아야 할 것인지 판단해야 한다. 난, 여전히 우리 나라에서도 희망을 말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 하나님은 두려움이라는 장수를 먼저 보내 상대를 제압한다. 


라합은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왜냐하면 이 백성을 이끌어 낸 여호와 하나님은 애굽 왕의 군대를 뚫고, 홍해를 마른 땅으로 건너고 그 잔혹하다는 아모리 왕 시혼과 옥을 오히려 섬멸하다시피 하고 이곳까지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행적은 연일 신문 1면을 장식하면서 여리고 사람들은 하루 하루 다가오는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들의 여호와 하나님을 걱정했다. 


라합은 그 두려움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대상이며, 라합의 고백 속에서 여리고 전체에 팽배한 두려움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를 여호수아는 파악했다. 그래서 그는 이 전쟁이 이기는 전쟁이라는 판단을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종종 상대적으로 하여금 두려움이라는 괴물을 보내 싸우지도 않은 채 이기게 끔 하실 때가 있다. 두려움이란 전의를 상실하게 만들어 버리는 힘이 있다. 여리고는 이미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3. 오늘의 이야기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우리에게 두려움을 조장하여 자신의 부당한 권세를 유지하려는 자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세상의 권세를 가진자들은 막연한 두려움의 위력을 잘 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통제하기를 원하는 대상들에게 <두려움을 조장한다> 


전쟁에 대한 두려움, 경제적 불안정에 대한 두려움, 변화에 대한 두려움.... 두려움으로 우리를 위축시켜 새로운 선택을 주저하게 하고 결국은 자신의 종이 되도록 한다. 그래서 한 쪽에서는 새로움을 추구하는 자들이 <쫄지말자>고 서로 격려하곤 한다. 거대 언론과 싸우기 위해 개인의 네크워크인 SNS로 결집하고, 거대자본에 항거하여 시민들의 자발적인 후원금을 모은다. 보수 권력자들의 힘을 규합하려고 할 때, 시민들은 개미떼처럼 다수의 힘으로 항거하려고 한다.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진리를 선택하고, 상식적으로 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승리를 위해서는 두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라합처럼 목숨을 걸 수 있어야 한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정신, 그러니 쫄지말자는 정신을 먼저 가져야 한다. 그리로 바로 보고 바로 읽어야 한다. 누가 될 것인가 하는 대세가 아니라 누가 되어야 하는가? 누가 되면 안되는가에 대한 판단을 해야 한다. 그로부터 파생되는 것은 그 다음에 생각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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