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3]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해설]


[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바울이 직접 기록한 것과 <큰 글자>, 즉 분명하게 기록한 것을 보라 함으로 앞의 내용을 통해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하고 싶은 마음의 강도와 분명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바울은 다른 복음을 말하는 자들을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라고 조롱하듯이 말했다. 그들은 할례를 통해 뭔가 외부적이고 가시적인 어떤 표식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드러내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율법 보다도 할례에 집중했던 것 같다. 바울이 말한 <순수 복음>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어떤 가시적인 표식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바울의 복음>이 뭔가 허전한 어떤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누구나 알 수 있고, 본인도 확인할 수 있는 <표식>을 원했다. 그것이 <할례>였던 것 같다. 


 <가시적 표식>이 우리에게 주는 안도감은 무엇인가? 그것은 <확인증>과 같은 것이다. 그 가시적 흔적을 통해서 자신의 내용(구원, 의)을 확인할 수 있는 안도감이다. 그러나 이것은 금새 그릇되게 된다. 내용에 본질을 두기 보다는 그 흔적과 표식에 집중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원과 의라는 내용과 그 표식으로서의 할례와의 연관성에 오해가 생기고 그로인해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뜻'은 왜곡되기 시작한다. 


우리는 할례인 표식을 원한다. 그래야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다. 갈라디아서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는 할례까지 해야 복음의 본고장인 예루살렘 교회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같은 수준으로 인정받게 된다. 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있어야 한다는 것은 더욱 그럴듯하고 좋아 보이지만, 없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궁핍한 변명으로 보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13]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할례>를 주장하는 유대인들의 경우, 그들이 율법 전체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그 중에 <할례>를 강조한 것이 아님을 바울은 말한다. 유대인들도 율법 전체를 따르는 일에는 온전하지 못했다. 그들이 요구했던 것은 <할례>를 중심으로 한 몇 가지 사항 뿐이었다. 이들이 원한 것은 <율법> 전체라기 보다는 그 중에서 <육체적 자랑>을 할 수 있는 어떤 것에 대한 것 뿐이었다. 


이들은 종교적인 형식과 희생을 통해서 자신의 종교적 헌신과 흔적을 보여주길 원했던 것이라고 바울은 지적하고 있다. 기도든 금식이든 선행이든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잊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마 6장)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순수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입장에서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자랑할 것>을 찾는다면 바울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음을 말한다. 여기서 바울이 <십자가 표식>을 자랑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외부적인 표식으로 자신의 신앙의 내용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바울은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사역, 즉 하나님이 죄인들을 위해서 해주신 은혜로은 사역 외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과 세상을 대하여 내가 못박혔다는 것은 <순수 복음 안에서> 내가 세상을 향해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세상이 우리를 향해서도 자랑할 것이 없음을 말한다.(나나 세상 모두 복음 안에서는 아무런 자랑을 할 것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하나님이 실천하신 것이다. 세상은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박해하였다....)


 결론적으로 <순수 복음> 안에서 할례를 행하는 것이나, 무할례나 아무것도 아니다.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 정작 중요한 것은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이다. 새롭게 거듭나는 것, 실제적인 생명이 중요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생명>인 것이다. 겁데기의 흔적이 아니라, 내재적인 생명을 얻는 것이 <순수 복음>의 핵심이다.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다른 복음>은 <순수 복음>을 위해 부르심을 받고 그 일에 헌신해온 바울의 심령을 괴롭게 하는 것이었다. 전혀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비슷한 이야기같은데 다른 방식으로 복음을 왜곡하였기 때문에 자신이 해산의 수고로 낳은 갈라디아 성도들을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을 공격했다. <할례>를 통해 육체의 흔적이 필수적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흔적이라면, 예수의 흔적(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이 거치고 간 흔적)으로 충분함을 고백한다. 


다른 복음으로 미혹할찌라도, 당황하지 말고 <순수 복음>만 붙잡으면 끝-



 첨언, <순수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안에서 다른 부차적인 노력과 행위(할례와 절기 지킴 등)가 필수적이 아님을 강조하는 것을 강조하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충분성>을 다루고 있는 <골로새서>의 연구를 통해 보완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다음 성경공부는 <골로새서>로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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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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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해설]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바울의 복음은 '자유를 위한 부르심'이다. 그러나 이 표현은 바울의 논지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유를 위한 부르심'이란 말만 떼서 의미를 확대하는 것은 바울의 의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갈 5:1에서 바울의 언급한 '자유'도 마찬가지다.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라는 개념을 잘 못 이해해서 '방종'으로 나아갔던 사람들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바울이 복음 안에서의 자유를 말할 때, 그 자유는 단순히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의'를 통한 구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모든 사람들을 율법 혹은 마음에 새긴 율법(양심)에 의존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때가 차매, 그리스도 예수의 속량으로 말미암아 이제 '새로운 법,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의'로 구원을 이루시는 시대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법이 드러나면서, 이전 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로마서에서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의 전환이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이라는 표현으로 사용되다 보니, 그릇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여전히 이 '복음이 말한 자유'를 자기들의 방탕을 합리화하는 방식으로 오용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순수 복음'의 핵심은 교리적으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3,4장)를 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완전한 복음의 의미는 '새로운 종'으로의 부르심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을 단순히 교리(이론, 3,4장)와 적용(실천, 5,6장)으로 구분하는 것은 충분하지 못한듯 하다. 오히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복음은 총체적인 것으로, <율법의 종으로부터의 자유와 사랑의 종으로의 부르심>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자유를 육체의 기회(육체의 정욕을 합리화하는 기회)로 삼아서는 안됨을 바로 이어서 지적한다.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14절을 통해서 볼 때, 바울이 말한 복음 안에서의 자유가 '율법 자체'에 대한 단절을 의미하지 않음을 분명히 한다고 본다. 바울은 온 율법이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는 말씀으로 이루어짐을 분명히 하고 있고,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5:1)고 권면함으로서 오히려 참된 복음은 '율법의 완성, 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짐을 분명히 한 것이다. 


따라서 복음으로 인해서 '방종'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은 복음을 자신의 정욕을 위한 근거로 받아들인 사람이지 '순수한 복음'을 온전히 받아들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또한 복음 안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인 것이다. 



 갈라디아서에서는 '순수 복음'이 왜곡될 수 있는 두 가지 변종을 보여준다. 하나는 '순수 복음'이 사람의 생각에 불완전하게 보인다는 것이다.(행위에 대한 요소가 하나도 없으므로... 허전하다.) 또 다른 하나는 '순수 복음'을 근거로 자기의 욕구(정욕)를 정당화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 두가지 모두를 경고한다. '순수 복음'에 다른 것을 가미(할례)하든지, 아니면 용도에 맞지 않게 오용(방종)하려고 할 때,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갈 5:19-21)




[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이 구절을 통해서 볼 때, 갈라디아서 안에 심각한 논쟁이나 분쟁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 갈등은 어느 정도의 도를 넘어 서로 '물고 먹는', 즉 죽자고 싸우는 형국이 되었을 정도로 심각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지 말라는 것이다. 서로 죽자 살자 싸우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옳고 그르냐를 떠나 피차 멸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사기 19-21장에 보면, 베냐민 지파 불량배들의 악행으로 인해 이스라엘의 11개 지파가 베냐민 지파를 전멸 시킬 뻔했다. 서로를 견제하고 권면하고 바로 잡아야 할 대상이지만, 형제란 서로 죽여서는 안되는 관계다. 가인이 아벨을 죽여서 안되는 것처럼, 11개 지파는 한 개의 지파를 전멸시켜서는 안되는 것이다. 교회 안의 성도들도 마찬가지다. 서로 죽자고 싸우는 것은 아니다. 살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어야 하고, 죽지 않을 정도로만 싸워야 한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안에서 발생한 구체적인 다툼에 대해서 아직 언급하지 않았지만, 심각한 갈등이 극단적으로 가지 못하도록 권면하고 있다. 서로에게 사랑의 마음으로 종이 될 것에 대해 권면하면서 말이다. 



[묵상]


해설을 쓰는 가운데 중간 중간 묵상의 내용이 있으므로 생략한다.



참고자료. 

'자유'란 오늘날 누구의 입에나 오르내리는 말이다. 자유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고, 다양한 사람이 자유를 주창하고 권한다. 자신의 나라를 위해 '민족 독립'을 얻은 아프리카 민족주의자가 있다. 식민 통치로부터의 자유다. 자유 무역, 관세 철폐를 믿는 경제학자가 있다. 중앙 통제가 자유 기업을 방해하기 때문에 그것을 싫어하는 자본주의자와 프롤레타리아를 자본주의의 착취에서 자유케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공산주의자가 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1941년에 처음 선언한 네 가지 자유가 있다. 그것은 '어디서나 말할 자유, 어디서나 예배할 자유, 어디서나 궁핍하지 않을 자유, 어디서나 두려워하지 않을 자유'다.

  - 존 스토트, 갈라디아서 주석, 173쪽.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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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문

2. 해설

3. 묵상



[1.본문]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2. 해설]


[6절]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만약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이른 시기에 썼다면(주전 49년 이전) 1차 전도여행의 기간을 대략 3년 이내로 보는데, 힘들게 복음을 전하여 세운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가 1,2년이 채 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다른 복음(거짓 복음)으로 거의 넘어가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거의 멘붕의 상태라고 봐야 할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의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할 때,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의 충동으로 돌에 맞아 거의 죽을 뻔 한 적이 있었다.




(행 14: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갈라디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돌아오는 길에 바울은 다시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오면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는 일에 다시 한번 힘쓰고 돌아왔었다.




(행 14:22-23) 『[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바울은 외부적인 환난과 박해를 염두하고, 이들의 믿음을 견고히 할 것에 대해서 당부하고 왔으나, 갈라디아 교회들은 외부적인 환난이 아닌 변질된 복음, 거짓 복음에 의해서 내부적으로 허물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도 바울의 허망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상하게 여기노라> 이해하지 못한다기 보다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든 바울의 심적 상태를 말하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7절] 다른 복음은 없다.


다른 복음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말하는 것인지 아직 알수는 없으나 다른 복음은,


7절. 갈라디아 성도들을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는 것이다.

9절. 바울을 통해 전해 받은 것과 핵심적인 관점이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 즉, 그리스도의 복음과도 다르며 바울 자신이 전한 복음과도 다른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표현은 바울 자신이 전한 복음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핵심에 있어서도 동일한 복음이라는 것을 말한다.


10절. 바울 자신이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 아님을 언급함으로서 <다른 복음>은 사람들을 만족하게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즉, 다른 복음은 복음의 본질에서는 떠났지만, 사람들의 이성이나 혹은 정서에 잘 들어맞는 형태로 변형된 복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지도자로부터 시작해서 일반 성도들까지 다수가 <이같이 속히 (참 복음으로부터) 떠나 다른 복음>으로 넘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위험성을 생각한다면, 그리스도의 복음과 유사하지만 다른 복음은 성도들에게는 매우 위험한 <독>과 같은 것이었다.



[8절]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바울이 저주를 선언하고 있는 구절이다. 복음의 핵심 내용을 변질시킨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가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그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혹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의 유력한 사도들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 역시 저주를 받을 것이다. 누구든지 바울이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9절)


바울이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임할 [저주]에 대해서 두 번이나 반복하여 언급하고 있다. 지금 갈라디아서를 쓰고 있는 바울의 심정을 엿볼 수 있는 표현이다.





갈라디아서는 인사말을 마치고 본론을 시작하면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 대한 책망으로 시작하고 있다.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감정이 중간 중간 충분히 뭍어나고 있는 성경이다. 따듯하고 온화한 감정은 아니지만, 그릇된 자식의 행실과 가치관을 탓하는 부모의 심정이 뭍어나고 있는 성경이다. 바울의 당황스러움이 드러나며, 감정적인 경고등도 모두 드러난다. 바울의 허망함과 안타까움이 모두 드러난다.


(갈 4: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바울은 언성을 높여 혼을 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이 목숨을 걸고 낳은 자식과 같은 교회 이기 때문이다.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고 첫 이방 선교를 통해서 얻은 첫 아이이기 때문이다.


(갈 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3. 묵상]


1. 바울이 전한 복음은 충분했지만, 듣는 성도의 이해와 확신은 불충분했다.

그래서 성도들이 잘못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만큼 우리들의 이해는 한계를 가질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바울만큼 분명하게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복음 생생하게 전할수 있는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그러나 사람의 말이라는 것은 불완전한 것이다. 듣는이의 이해와 상황에 따라 가변적인 것이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다.

그래서 복음은 다양한 상황과 입장 혹은 질문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다시 들려져야 한다. 복음은 입체적이지만, 우리는 한번에 한 면씩 밖에는 보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바울이 전해도 이와같다면, 우리는 복음을 알고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반복적으로 해야 한다. 바울의 서신을 통해서 해야 하겠지만, 야고보서의 말씀 속에서도 복음서의 말씀과 요한계시록의 말씀 속에서도 복음을 보는 수고를 해야한다. 구약도 다르지 않다. 구약의 말씀이 예수를 지향한다는 것은 우리가 믿는바다.

복음을 전하는 자도 마찬가지다. 바울이 전한 복음도 충분한 이해가 될 수 없다면 우리는 더욱 그렇다. 따라서 우리는 성도들에게 복음의 다양한 측면을 반복적으로 가르치는 수고를 해야 한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이단이 발생하는 그 지점은 정통교회가 잘 풀어가르치지 못한 부분임을 알아야한다. 충분한 설명을 해주지 못한 곳에서 [다른복음]이 자라는 것이다. 어찌보면 이단의 긍정적 역할은 정통교회의 사각지대를 보여줌으로, 우리로 보완할 것을 가르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복음은 전하는 자나 듣는 자나 반복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단순한 내용의 무한반복이 아니라 풍성한 내용의 다각적 반복이어야 한다.


2. 사람에게 이성적 정서적 합당함이 진리의 합당함과 다를 수 있고, 심지어 치명적인 위험성이 될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른 복음의 특징 중 하나는 <사람을 좋게 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과 이성에 부합하다는 특징을 가진다. 이 말은 복음이 사람의 이성과 감성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다른 복음]은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에 비해 그럼 측면에서 더 밀착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위험한 것이다.

복음으로서 하늘로부터 온 것임은 분명한데, 하나님의 진리에 가깝기 보다는 우리의 정서와 이성에 더 가깝게 여겨지기에 위험한 것이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은 이것을 구분할수 있어야 한다. 즉 복음의 내용의 핵심과 주변을 구분할수 있어야 한다. 이 구분이 어려우면, 우리 마음에 더 부합한 주제들인 주변에 있는 것들이 중심으로 들어오도록 허용하기 때문이다. 갈라디아 교회에서는 할례와 절기를 지키는 것들이 들어왔고 오늘날은 성공과 번영과 기적과 능력이 들어온 것이다.

갈라디아서를 통해 복음 내용의 중심과 주변이 무엇인지를 보는 안목을 배우는 기회가 되길 소망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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