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논의

1. 기독교가 말하는 선한 사람이란 과연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 논의하려고 한다. 

2. 인간이라는 기계에 대한 기독교의 설명서에 대해서 논의하려고 한다. 


본격적인 논의 전 잠깐 확인하고 가야할 내용

1. 기독교 도덕이 인간이라는 기계를 올바로 움직이는 기술이라는 것이라면, 정신분석학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이 아닌가? 


  (1) 정신분석학자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의학 이론 및 기술과 프로이드를 비롯한 몇 몇 사람들이 거기에 덧붙여 놓은 일반적인 철학적 세계관을 아주 분명하게 분리해야 한다. 프로이드와 같은 사람은 신경증 치료에는 전문가지만, 일반 철학에서는 아마추어입니다. 그러니 신경증 치료에 대한 그의 말에는 귀를 기울여도 그의 일반 철학에 관한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 분별있는 태도입니다. 


  (2) 프로이드와 다른 이들이 첨가한 철학적 요소들만 제외한다면, 정신분석학 그 자체는 적어도 기독교와 배치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독교 도덕과 중복되고 있으므로 배워서 나쁠 것은 없다고 봅니다. 



도덕적 선택에는 두가지 요소가 관련되어 있다. 

1. 하나는 선택하는 행위


2. 다른 하나는 선택하는 사람의 심리적 소양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선택의 원재료가 되는 다양한 감정과 충동 같은 것들. 원 재료에도 두가지가 있다고 볼 수 있는데

  (1) 이른바 정상적인 재료로서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감정들로 이루어진 것들

     예) 실재로 위험한 사물을 보고 두려워하는 것 / 남자가 여자에게 느끼는 감정


  (2) 다른 하나는 잠재의식에서 무언가 잘못되는 바람에 생긴, 아주 자연스럽지 못한 감정들로 이루어진 재료들. 

     예) 고양이나 개미를 터무니없이 무서워하는 감정 / 남자가 남자에게 느끼는 비뚤어진 감정.

   * 정신분석 학자들이 하는 일은 두번째 종류의 속하는 비정상적인 감정들을 제거해 주는 것, 즉 선택하는 행위에 좀더 좋은 재료들 제공해 주는 것이다. 


  [소결론] 도덕은 심리학자들이 도우수 있는 영역이 아닌, 선택하는 행위 그 자체와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어서 설명한다. 전쟁에 나가야 하는 세 명의 청년들이 있다. 


첫째: 위험 앞에서 누구나 느끼는 두려움이 있지만, 도덕적인 노력으로 그 두려움을 극복하고 용감하게 싸웠다. 

둘째, 셋째: 그릇된 잠재의식 속에서 터무니없는 두려움이 너무 큰 나머지 도덕적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싸울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 정신분석학자가 그들을 치료했다. 첫번째 남자와 같은 상태로 돌려놓은 것이다. 정신분석학적인 문제는 여기서 끝나고, 이제부터는 도덕적인 문제가 시작된다. 둘째는 도덕적으로 두려움을 극복하고 전쟁터로 나가고, 세번째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먼저 챙긴다. 이때 이 두 사람의 태도는 순전히 도덕적인 문제로 정신분석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심리적 재료가 나쁜 것은 죄가 아니라 병이다. 따라서 회개가 아니라, 치료를 받아야 한다. 

사람은 원재료에서 나온 선택의 결과만을 본다.(왜곡된 재료들의 결과들로 말미암아 파괴적인 것들이 그 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원재료만 보고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원재료로 무엇을 했느냐를 보고 판단하신다.(그런 원재료를 가지고 어떻게 도덕적 선을 행하려고 했었는가로 판단하신다.) 마지막 날에는 과장된 자기 원재료가 제거되고, 왜곡되었던 자기 원재료도 모두 온전해 질 것이다. 그 때 어떤 사람에게는 거품이 사라지고, 어떤 사람에게는 큰 격려가 될 것이다.)


기독교 도덕을 선을 행하면 상을 주고, 악을 행하면 벌을 주는 것과 같은 거래라고 생각하는 것


1. 매번 선택을 내리는 행위는 그 결과보다 그 선택을 하게 되는 마음의 선택과 관련된 것이다. 

2. 인생이란 수없이 많은 선택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것들이다. 

3. 우리는 평생에 천국의 피조물로 자기 자신을 바꾸어 가든지, 아니면 지옥의 피조물로 바꾸어 가게 된다. 

4. 따라서 기독교 저자들의 이상한 고백, 생각으로 짓는 죄에 대해서는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끔찍한 행동에 대해서는 회개만 하면 다 용서받을 일처럼 간단하게 다루는 가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면 옳고 그름에 대한 지식이 더욱 선명해 진다. 


1. 깨어있는 사람은 자신이 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만, 자는 사람은 자신이 자고 있는 것조차 모른다. 

2. 선한 사람은 선도 악도 알지만, 악한 사람은 선도 악도 다 모른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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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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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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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불멸한다는 믿음은 또 다른 차이도 만들어 내는데, 이 차이는 <전제주의>와 <민주주>의 간의 차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만약, 각 개인이 겨우 70년만 살다가 죽는다면, 아마 천 년 동안은 계속될 국가나 민족이나 문명이 개인보다 더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참이라면 영원히 살 인간에 비해 국가나 문명의 생명은 겨우 한 순간에 불과하므로, 각 개인은 국가나 문명보다 단순히 더 중요한 존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중요한 존재로 격상됩니다.(순전한 기독교,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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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믿음은 성도들로 하여금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해주고 있는 내용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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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루이스는 새로운 생명이 우리에게 어떻게 올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한다. 믿음, 세례, 성만찬. 대표적인 세 가지 통로를 말하면서, 새로운 생명이 어떻게 유지되고 어떻게 확장되어지는지에 대해서도 말한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구원론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토록 간결하고 담백하게 설명하다니...새롭고 놀랍다. 그리고 새 생명으로 초대까지 한다.


2-5 실제적인 결론.


1. 예수의 사역을 통해서 우리 안에 새로운 종류의 인간이 나타났고, 이 새로운 생명은 우리 안에도 들어올 수 있다.


2. 그렇다면 이 일이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평평한 옛 생명을 어떻게 얻게 되었는지 연상해보자)

  1) 새로운 생명은 우리와 상의하지 않고 진행되었고, 상당히 기이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에게 전파되는 방식 3가지>

   (1) 세례

   (2) 믿음

   (3) 신비한 행위(성만찬, 미사, 주의 만찬 등 다양한 이름을 불리우는 것들)


   * 루이스는 이 방식 말고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전파될 수 없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통상적인 방법이라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제기동에서 송내까지 어떻게 가냐고 물으면 저는 전철을 타라고 말해줄 것이다. 물론 버스로도 자건거로도 다른 방식으로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다 말하지는 않듯이 나도 이정도만 말한다. 신학적인 성향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믿음을 더 강조하길 원할 수도 있겠으나 기독교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세가지를 다 말할 것이기에 이 세가지만 말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 분명한 것은 예수가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새 생명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전달된다고 가르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니만큼 명백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루이스는 그렇게 말한 예수의 권위에 입각하여 그렇게 말한다고 한다. 



   * 권위에 입각하여 어떤 것을 믿는 다는 것은 믿을 만한 사람의 말이므로 믿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대부분의 것을 그런 권위에 입각하여 믿게 됩니다.(뉴욕을 가본적은 없지만, 사람들의 말을 통해서 믿게 됨, 노르만 정복 사건을 직접 본 사람은 없겠지만 역사적 증언을 통해서 우리는 믿게 됨, 이런 믿음을 부정하는 사람은 평생 믿을 것이 없게 됨)



3. 새로운 생명은 어떻게 유지되는가?


   * 그렇다고 해서 세례와 믿음과 성만찬만 있으면 그리스도를 본받으려는 노력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잘못이다. 우리의 자연적인 생명이 부모로부터 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노력없이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그 생명을 소홀히 다루다가 영영 잃어버릴 수도 있고 자살함으로 의도적으로 없앨 수도 있다. 따라서 생명을 유지하려면 영양을 공급해 주어야 하며 잘 돌봐야 한다. 그러나 역시 이것은 생명을 만드는 일은 아니고, 생명을 돌보는 일이라는 한계도 인정해야한다. 


  1) 우리 몸에 자연적인 생명이 있는 한, 그 생명은 몸을 회복하기 위해서 많은 일을 한다. 

   (1) 상처를 입었을 경우는 어느 정도까지는 상처를 스스로 치유할 수 있다. 

   (2) 상처를 절대로 입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 살아있다는 것의 증거다. 

   (3) 마찬가지로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회개하고 다시 일어나 몇 번이고 새롭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매번 그를 회복시킨다)


  2) 그리스도인이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여타의 사람들과 구별된다. 

   (1) 여타의 사람들은 선하게 삶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만족시키거나(신이 있다고 믿는다면), 아니면 적어도 자신이 선한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2)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선한 행동은 모두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 창 자체가 밝아서 햇빛을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라, 햇빛이 먼저 창을 비추었기 때문에 밝아지는 것처럼...

       *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있고, 그리스도 안에 내가 있다는 것은 실제로 그리스도가 우리를 통해 움직인다는 뜻.


4. 새로운 생명은 어떻게 확대되어 가는가?

   믿음: 정신적인 행위를 통해서

   세례와 성만찬: 물리적인 행위를 통해서


  이 생명의 전파는 단순히 사상의 전파만이 아니다. 사상의 전파보다는 진화, 즉 생물학적 사실 내지는 초생물학적 사실에 더 가깝다. 인간은 원래 순전히 영적인 피조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것이 떡이나 포도주 같은 물질을 사용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이유다. (하나님은 물질적인 것을 통해서 생명을 불어 넣어주시고 확대하신다.) 


  [반론] 그리스도를 들어 볼  기회를 얻지 못한 자들에게는 이 생명 수여의 방법이 불공평한 것이 아닌가?

  (1) 하나님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들어본 바가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가 없다. 우리는 다만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만 알 뿐이다. 

  (2) 여러분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의 운명이 걱정된다면, 여러분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주변으로 불려나가야 할 것이다. 


  [반론] 왜 지금 당장 와서 세상의 악에 대해서 전복시키지 않는가? 

  잘 모르지만, 하나님은 때가 되면 대군을 이끌고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 때가 언제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 일을 지체하시는 이유는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자진해서 그의 편에 가담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다. 전쟁을 다 이기고 나서, 혹은 패하고 나서 편을 옮기는 것이 무슨 상을 받을 수 있겠는가? 


그 때는 우리가 참으로 어느 편을 선택했는지 드러나는 때이고, 우리가 그 사실을 전에도 알았는지 몰랐는지 깨닫게 되는 때이다. 오늘 이 순간이야말로 옳은 편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의 때이다. 


우리는 지금 이 기회를 잡든지 버리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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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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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본 장에서 루이스는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이 상식적인 선택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예수의 사역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 사역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가에 대해서 말한다. 루이스는 영향력이 미치는 과정에 대한 설명(다양한 견해가 있으므로)에 대해서는 이해를 돕는 부차적인 것으로 보고, 본질은 암튼, 효력이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는 것에 강조점을 둔다. 그리고 루이스가 이해한 설명을 해본다.(대속, 인간의 상태, 회개의 개념, 회개의 필요성, 회개의 능력,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셔야 하는 이유, 대속의 개념 등)



<예수에 대한 판단>

우리는 그를 자기의 주장대로 하나님으로 보든지 아니면 그를 미치광이 혹은 그 보다 못한 자였을 것이라고 봐야 한다. 그런데 루이스는 아무리 봐도 예수를 미치광이나 그보다 못한 자라고 볼 수는 없다고 본다. 따라서 정말 경악스럽기는 하지만 그가 하나님이고 지금도 하나님이라는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예수는 이 땅에 왜 오셨는가?>

<예수의 죽으심이 어떻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인가?>


1. 성경은 예수가 고난 받고 죽임당하기 위해서 이 땅에 왔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1) 루이스는 예수의 죽음이 어떻게 우리에게 그와 같은 효과를 이루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이론들은 그 자체로 기독교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떻게 효력을 갖느냐에 대한 설명일 뿐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다양한 설명중 어떤 것을 택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임무는 아니라고 한계를 정한다. 


  2) 루이스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예수의 죽음이 효력을 갖는다는 것에 대해서 모든 그리스도인이 인정한다. 

    예) 우리는 음식을 먹으면 체력적으로 회복되고 원기를 되찾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비타민이나 단백질 이론을 통해서 더 구체적인 이해를 얻을 수는 있겠지만, 혹 그런 설명이 틀렸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원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음식을 먹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져온 영향력]

  (1)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무언가가 바깥에서부터 우리 세상으로 뚫고 들어온 역사의 지점이다. 

  (2) 우리가 원자도 그림으로 그려낼 수 없는 것처럼, 이런 사건을 완전하게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3) 음식이 우리에게 어떻게 효력을 주는지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음식을 먹음으로 효과는 얻을 수 있다.


2. 예수의 죽으심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 (기본)공식

  1)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죽임을 당했다.

  2) 그 죽음이 우리의 죄를 씻어 주었다. 

  3) 그가 죽음으로써 죽음의 세력이 힘을 잃었다.


  [루이스가 제안하는 하나의 이론]

   (1) 그리스도가 자원해서 우리 대신 벌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사면받았다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이론.

      : 어떤 사람은 사면해 줄 작정이면 그냥해 주면되지 왜 죄없는 사람에게 벌을 준다는 말인가? 질문할 수 있음.

     [답] 이 벌을 즉결재판소의 '처벌'로 생각하지 말고, '빚'으로 생각하면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죄값을 치른다'는 개념을 '계산을 치른다'나 '비용을 부담한다' 정도로 이해하면 쉬울 것이다. 


   (2) 인간이 빠진 곤경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 그것은 스스로 서려고 하는 것으로 자신의 주인인 양 행세하는 것이란 점이다. 타락한 인간은 개선의 필요가 있는 불완전한 피조물이 아니라 손에 무기를 내려놓아야 하는 반역자라는 것이다.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면서 그 동안 잘못된 길을 걸어왔음을 깨닫고 삶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 '회개'다. 회개란 수천 년 간 익혀 온 자기 만족과 자기 의지를 버린다는 뜻이다. 여러분 자신의 일부를 죽이는 것, 일종의 죽음을 겪는 것을 뜻한다. 


   (3)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를 해야 하는데, 회개를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가? 

      : 하나님이 도와 주실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이 도와 주신다는 것은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조금 넣어 주신다는 뜻이다. 그분 자신의 추론 능력을 우리에게 조금 빌려주셨고, 그분 자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조금 넣어 주셨기에 우리는 생각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어린 아이가 글을 배울 때, 부모가 함께 손을 잡고 글을 써주듯이 그가 우리 손을 잡고 있는 것이다. 


      : 사실 하나님은 회개와 관련하여 한번도 경험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돕기 위해 사람이 되어 사람으로서 경험해야 하는 자기 뜻을 포기하고, 고난을 겪으며 심지어 죽을 수도 있게 되었으므로 이 모든 일을 완전하게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써야 할 모든 과정을 함께 써내려갈 수 있는 존재가 되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이 되셔서 죽음까지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존재가 되셔야 했다. 


     <질문: 예수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죽음의 고통이 지극히 쉬웠던 것 아니냐?>

 

   그렇게 질문하는 것은 어떤 오해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가 하나님이시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 쉬웠다는 것이 우리가 그를 거절해야 할 이유가 아니라, 오히려 그를 의지해야 할 이유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1) 어린 아이의 손을 잡아 글씨를 지도하고 있는 어른의 실력이 어린 아이보다 낫기 때문에 불공평하다고 말하면서 그 어른에게서 배우지 않고 오히려 아직 글도 모르는 동료들에게 배우려고 한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짓이 어디있는가? 

    (2) 물에 빠진 사람이, 한 다리를 강둑에 두고 팔을 뻣어 손을 내민 사람을 향해서 불공평하다고 말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오히려 그 사람의 유리한 조건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자기 보다 더 강한 자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겠는가? 


    (3) 이것이 저자가 <대속>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그림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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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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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루이스는 현재 악이 권세를 장악하고 있다면, 그보다 윌등한 하나님은 왜 아무런 조치를 취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라는 질문은 한다. 루이스는 선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더불어 그 선한 세상이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일어나기를 원하신 것도 그의 뜻이라고 말한다. 루이스는 반대자들의 논리에 대응하면서 이제 그들을 궁지로 몰아넣는다. 이 장에서 본격적으로.



<이전논의들>

악에 대한 설명은 기독교적 관점과 이원론적 관점이 있는데, 생각해보면 악이란 선과 독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의 왜곡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선과 악을 대등한 관계로 보는 이원론의 관점은 적절치 않다. 오히려 기독교적 관점이 실재에 더 근접한다고 볼 수 있다. 


<새로운 질문들>

그렇다면 악한 권세가 현재 이 세상의 군주로 행세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된다. 만약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다면 하나님은 그야말로 이상한 분이 되고, 일치하지 않는다면 절대적 권세를 가진 존재의 뜻에 반하는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하는 새로운 질문으로 이어진다.


<루이스의 설명>

1. 자녀의 방을 깨끗하게 청소해 놓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뜻과 실제로 그 일을 행하는 자녀와는 차이가 있다. 

  1) 자녀에게 자유를 준것도 어머니의 뜻이었다. 

  2) 마찬가지로 분명히 어머니의 뜻한 바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뜻한 바로 인해 일어난 일이다.


2. 이 우주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들을 창조하셨습니다. 

  1) 자유 의지를 가졌다는 것은 옳을 일을 할 수도 있고 그른 일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것은 사랑이나 선 그리고 기쁨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자유 의지에 있기 때문이다.  

  3) 자유의지로 말미암아 전쟁 상태가 일어나는 한이 있더라도, 어쩌면 자유 의지를 통해서 나오는 진짜 선을 행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그것을 치러야 할 과정으로 생각하셨던 것으로 봐야 한다. 


<자유의지와 관련된 또 다른 질문들>

1. 하나님은 왜 이리 쉽게 부패하는 재료로 피조물로 만드셨을까? 

  좋은 재료일 수록 옳은 길로 가면 더 선해지지만, 그른 길로 가면 그만큼 더 악해지는 법이다. 소보다는 개가, 개보다는 어린아이가, 어린아이보다는 어른이, 어른 보다는 천재적인 성인이 더 그렇습니다. 초인적인 영도 마찬가지입니다. 


2. 어두운 권세는 어떻게 타락하게 되었을까?

  1) 인간이 확실하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임에는 분명하다.

  2) 그러나 우리 자신이 타락했던 경험에 비추어 보면 분명하다. 

   (1) 인간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욕심에 의해서 타락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성적인 문제와 관련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틀렸다. 성적인 것은 죄의 결과지 원인이 아니다. 

   (2) 사탄이 지은 죄도 이와 같은 죄이다. 

  3) 이런 사탄과 인간의 시도(하나님을 배제하고 스스로 가려는)는 성공할 수 없는 시도였다. 


    왜? 우리는 하나님을 넣어야만 달릴 수 있는 인간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휘발유를 넣어야 달리는 엔진을 만든것 처럼)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넣고 달리려고 할 때 문제는 발생하고 만다. 하나님을 제외하고 평화나 행복은 만들어질 수 없다.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문명과 제도들은 처음에는 잘 굴러가는 것 같으나 곧 비참과 파멸로 빠지게 되었다. 


3. 이와 같은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는가?

  1) 무엇보다 먼저 우리에게 양심, 즉 옳고 그른 것에 대한 분별력을 남겨 주셨다. 

  2) 좋은 꿈이라는 것을 인류에게 보내 주셨다.(인간에게 새 생명을 주는 신에 대한 이야기와 같은 희망)

  3) 하나님은 한 특정한 민족을 택하여 자신이 어떤 하나님인가를 수세기에 걸쳐 그들의 머리에 심어 주셨다. 

    : 그 민족인 바로 유대 민족이고, 그 심어주신 과정을 기록한 것이 바로 구약성경이다. 


4.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유대인 중에서 한 사람이 나타나 자신을 하나님으로 자처하면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는 권한이 자신에게 있음을 주장하며 다니는 사람이 나타났다.


  1) 이 사람은 범신론자는 아니다. 이 사람은 유대인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세상 밖에 계셨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이 진짜 하나님이 아닌 다음에는 이상한 사람으로 밖에는 인식할 수 없다. 


  2) 이 사람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준다고 하였는데, 이것도 이상한 행동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용서라는 것은 피해를 입은 사람이 피해를 준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것인데,  자신이 피해를 입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한다고 할 때 이런 일은 그가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죄는 하나님의 법을 깨뜨리는 것이며 그의 사랑에 상처를 내는 것이기에 그렇다. 


  3) 그런데 성경은 이런 사람, 예수에 대해서 우스꽝스럽거나, 자만심에 차있다는 인상을 받지 않았다. 우리는 그가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그의 말을 믿는다. 사실은 온유와 겸손과는 관계가 먼 이야기(자신을 하나님으로 묘사하는 말들)를 그가 많이 했다는 것을 잊은 채로 말이다. 이것은 예수를 단순히 도덕적인 스승 정도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사람들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서 하는 말이다. 예수는 그렇게 평가할 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판단의 결단을 촉구하는 루이스]

우리는 예수가 그의 말대로 정말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미치광이거나 그보다 못한 인간으로 여겨 그의 입을 틀어 막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며 그 발 앞에 엎드려 하나님이요 주님이라고 고백해야 할 것이다. 위대한 인류의 스승이니 하는 헛소리는 삼가해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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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믿는가?


2-1. 하나님과 경쟁하는 개념들


1. 우선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믿는가 말하기 전에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믿을 필요가 없는가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1) 그리스도인이라면 '기독교 외의 모든 종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틀렸다'고 믿을 필요가 없다. 

 

  2) 무신론자들이 믿는 것은, 세상 모든 종


교를 지탱하는 중심점은 하나의 거대한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다른 종교와의 차이에 있어서 기독교가 옳고 다른 종교들은 틀렸다고 생각한다는 뜻을 의미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틀린 것이 모두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정리]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는 다르기 때문에 차별성을 가지지만 그렇다고 모든 다른 종교를 전적으로 무시하지는 않는다. 다른 종교 속에서도 정답에 근접한 답이 있는 법이라는 열린 마음을 가진다. 


2. 믿음과 관련하여 인류를 나누는 기준

  1)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다수와 믿지 않는 소수로 나눌수 있다. 

     (1) 그리스도인: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 현대의 미개인들, 스토아학파, 플라톤주의자, 힌두교도, 회교도 등과 같음

     (2) 현대 유럽의 유물론자(소수)은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2) 하나님이 선악의 구분 너머에 있는 존재인가? 아니면 선한 존재 혹은 의로운 존재로서의 고유성을 가지고 있는가?로 구분해 볼 때


   (1) 범신론(선악의 구분 너머에 있는 존재): 헤겔과 힌두교도들

   (2)  선한 존재: 유대인과 회교도와 그리스도인


    [신과 피조물과의 관계] 범신론은 인간이 제 몸을 움직이듯 우주를 움직이는 존재가 바로 하나님이라고 믿는다. 우주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 기독교의 개념은 전혀 다르다. 사람이 그림을 그리고 작곡을 하듯 하나님이 우주를 창안하고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화가와 그림은 별개의 존재이기 때문에 그림이 파괴되어도 화가는 죽지 않는다. 


3. 기독교는 전투적인 종교다.(기독교가 믿는 것)

  1) 기독교는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다고 믿는다.

  2) 또한 기독교는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에서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잘못되어 버렸다.

  3)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다시 바로 잡으라고 명하신다. 

  4) 그것도 아주 큰 소리로 명하신다고 우리는 믿는다. 


  [이 믿음에 대한 무신론자들의 질문] 선하신 하나님이 만든 세상이 왜 잘못되었는가? 


이 질문에 대해 범신론자들은 암이나 빈민가를 보면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신적인 관점에서 보기만 한다면, 이런 것들 역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텐데' 라고 답한다. 무신론자들은 오히려 '지적인 존재가 만든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라고 쉽게 답을 할 수있을 것이다. 무신론자인 자신은 오랫동안 그리스도인의 답변에 귀를 막아왔었다. 


루이스의 질문은 세상이 너무 잔인하고 불의하다는데 있었는데, 생각해보면 <정의>니 <불의>니 하는 개념은 어떻게 갖게 된 것인가? 직선이라는 개념이 없이는 굽은 선이라는 개념이 없는 것이 아닌가? 세상이 악하고 굽었다고 인식하게 되는 것은 내 안에 선과 직선에 대한 인식이 선재하기 때문이 아닌가?(물고기는 축축하다는 느낌을 가질 수 없다. 내가 축축하다고 느끼는 것은 내가 물고기가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만약 우주에 아무 의미가 없다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아예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주에 빛이 없고 따라서 눈을 가진 생물도 없다면 우주가 어둡다는 사실 자체를 알 수 없는 것이다. 


  [정리] 무신론자가 왜 세상이 불의하고 악한가? 라고 질문한다는 것은 이미 세상의 절대적 기준을 가진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틀에서 나올 수 있는 질문이다. 정말로 절대적 기준을 가진 신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이 잘못되었다라는 인식조차 갖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질문을 던진다는 것 자체가 신에 대한 인정인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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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일반적인 자연 법칙(중력과 같은)과 다른 <인간 본성의 법칙>이 실재하는 법칙(존재하고 영향력을 미치는 법칙)이라는 것을 논증한다. 



1. 일반적인 자연법치과 인간 본성의 법칙의 차이점


  1) 우리가 보통 말하는 자연 법칙은 엄밀한 의미에서 진짜 법칙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표현법에 불과하다.

    예) 돌이 <중력의 법칙>을 따른다는 말은, 돌이 떨어져야 하기 때문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법칙) 돌은 던지면 떨어지게 마련이다라는 뜻이다. 즉, 그 사실 너머에 무엇이 존재하여 마땅히 일어나야 하는 법칙이 따로 존재하는지 여부는 분명히 알 수 없다.(따로 다루어야 할 문제다.) 


  2) 그러나 '인간 본성의 법칙'이나 '바른 행동의 법칙'에 이르면 사정은 달라진다. 이 때의 법칙은 확실히 '인간이 실제로 늘 하는 일'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미 말한 것처럼(1장에서) 많은 인간들이 이 법칙을 따르지 않으며, 단 한명의 인간도 완전하게 따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 본성의 법칙은 인간의 실제적 설명과 차이를 드러내게 된다. 즉, 다른 무엇인가가 더 들어오게 된다. (인간은 실제로 어떻게 행동하는가?와 다르게 인간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더 있게 된다.)



2. 자연법칙에 대해서는 윤리적 평가를 할 수 없지만, 인간 본성의 법칙에 대해서는 윤리적 평가를 할 수 있다. 


  1) 자연 법칙을 따르는 대상을 향해서 좋다 나쁘다를 규정할 수 없다. 종종 그렇게 표현하는 것은 다만 그것으로 인해 내가 유익하다와 그렇지 않다 정도로 구분할 수 있을 뿐이다. (이 나무는 충분한 그늘을 제공하니 좋은 나무다. 그렇지 못하니 나쁜 나무다 / 이 돌은 모양이 영 나쁘다 와 같이)


  2) 그러나 사람들이  <그는 지금처럼 행동하면 안된다>라는 말을 할 때, 물질에 좋고 나쁘다는 평가를 하듯이 같은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 나의 이익과 불이익으로 평가할 수 없는 문제다. 


     (예) 기차에 먼저와서 창가에 앉은 사람과 나 몰래 내 가방을 치우고 앉은 사람으로 인해 우리는 둘 다 불편하지만, 전자는 비난하지 않지만, 후자는 비난한다.(불이익=나쁨)

     (예) 내게 유익을 준다고 할 찌라도 우리는 악하게 판단하기도 한다. 전쟁중에 적국의 배신자는 우리에게는 유익하지만, 우리는 그를 버러지로 여기기 때문이다.(이익=나쁨)



[정리] 중력법칙(자연법칙)은 단순히 무거운 물체가 움직이는 방식에 대한 사실에 불과하지만, '도덕률' 곧 '인간 본성의 법칙'은 단순히 인간이 행동하는 방식에 대한 사실이 아니다. 그렇다고 단순한 공상도 아니다. 인간은 이 생각을 도저히 없앨 수가 없다.(만약 이것을 없앤다면 우리가 인간에 대해 언급하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것들은 모두 헛소리가 되고 만다.) 따라서 <옳고 그름의 법칙> 혹은 <인간 본성의 법칙>은 여하튼 실재하는 것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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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챕터에서 저자가 말하려고 하는 주장은 간단하게 하면 두가지다.


1. 지구 위에 사는 인간은 누구나 일정한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기묘한 생각을 갖고 있으며, 그것을 떨쳐 버리지 못한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사람들은 그런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내용을 정리해 보자. 


1. 우리는 많은 다툼을 하면서 살아 간다.


2. 다툼의 근거는 <상대방도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고 기대되는 행동 기준>에 호소한다.

  1) 왜  그런 행동을 하지 않냐?라고 따지지 그런 기준따위는 집어치워!라고 말하지는 않는다.(기준을 부정하면 싸움이 형성될 수 없기에)

   2) 따라서 대부분의 싸움은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한 변명의 합당성의 문제다. 

   3) 이로 보건데, 두 사람 사이에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일종의 합의가 없다면 싸움은 무의미하다. 


3. 사람들은 이러한 옳고 그름에 대한 법칙 혹은 규칙을 자연법(Law of Nature)이라고 불렀다. 

  1) 오늘날은 자연법하면, 중력 법칙, 유전 법칙, 화학 법칙 등을 가리키지만


  2) 이전 사상가들은 <옳고 그름에 대한 법칙>을 <자연법>이라고 부른 것은 그것이 인간 본성의 법칙이라는 뜻에서 였다. 즉 중력의 법칙에 모든 인간이 지배를 받듯, 모든 인간은 <인간 본성의 법칙>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다. 


  3) 중력의 법칙은 우리가 선택할 수 없이 전적으로 수동적이지만, 인간 본성의 법칙은 우리에게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어서 거부할 수 있다. 


  4) 이런 법칙을 <자연법>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따로 배우지 않아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이것을 모르는 사람이 간혹 있을 수 있지만, 인류 보편적으로는 누구나 인식하고 있는 것)

   (1)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히틀러 조차 비난할 수 없다. 


  5) 문명이나 시대에 따라 도덕간에 차이가 나긴 해도, 그것은 전적인 차이라고 말 할 수는 없다. 

   (1) 예컨데 고대 이집트인, 바빌로니아인, 인도인, 중국인, 그리스인, 로마인들의 도덕들을 비교해 보면, 그것들이 서로 아주 비슷할 뿐 아니라 우리 시대의 도덕과도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게 된다. 

   (2) 가족애와 민족애에 대한 규정은 시대와 문화마다 다르겠지만, 이기주의가 높이 평가된 적은 단 한번도 없다. 

   (3) 아내를 몇 명을 두어야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달랐지만, 무분별하게 여자를 차지해서는 안된다는 것에는 공통적이었다. 


  6) <옳고 그름>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조차 자신의 입장에 반대되는 행동을 한다.

     예) 조약을 깨뜨리는 것은 공정하지 못해!와 같은.


  [소결론] 인간은 모든 문화와 시대 속에서 <자연법>으로 받아들이는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4. 그럼에도 이 자연법을 그대로 지키는사람은 아무도 없다.


  1) 우리는 이 자연법을 지키는데 실패했다.(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책을 사서 읽으라!)

  2) 우리는 많은 변명을 늘어놓고, 죄를 타인에게 전가하려고 한다. 

  3) 이것은 싫든 좋든 우리 안에 <자연법>이 얼마나 깊이 있게 존재하는가를 보여주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4) 우리는 자신의 나쁜 습성에 대해서는 여러 변명을 대고, 원인을 타인에게 돌리면서도 좋은 습성에 대해서는 늘 자기 공으로 돌리는 습성이 있다. 


  [소결론] 우리는 자연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기고 있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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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내용을 제가 이해하기 쉬운 논리를 따라 정리해 봅니다. 참고하세요.



1. 이 책에 실린 내용은 본래 방송에서 발표한 것이다. 그것이 나중에 3권의 책으로 나왔다.(1942-1944)


2. 이 책이 도움을 주지 못하는 분들: 기독교 <교파> 중 어디를 택할까 고민하는 분들.

   : 물론 저자는 영국 성공회의 평범함 평신도다.


3. 이 책을 통해서 하고 싶지 않는 것


  ...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을 저와 같은 입장으로 바꾸어 놓을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이래, 믿지 않는 이웃들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최상의 봉사, 그리고 아마도 유일한 봉사는 <모든 시대에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통적으로 믿어 온 바를 설명하고 수호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4. 저자가 교리적인 문제들에 대해 침묵하는 것에 대해서

  1) 모든 주제에 대해서 중립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2) 어떤 사안은 정말 중립적일 때도 있고, 때로는 논쟁에 대한 답이 아니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3) 그러나 어떤 사안에 대해서 분명한 자신의 입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순전한 기독교>를 설명하기 위하는 것이라는 목적 때문에 나의 입장에 대해서는 침묵하고자 한다. 


    예) 성모 마리아의 문제에 대해서 로마 카톨릭과 철저한 개신교 사이에 예리한 대립이 있기에 자칫 잘못하다간 논쟁의 중심으로 끌려가 버릴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이 주제에 대해서 침묵한다. 


  4) 그 주제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침묵하는 것도 아니다. 사안의 경중도 각자 견해를 달리하기 때문에.

  5) 이 책의 3부에서 도더을 다룬 몇 몇 문제들에 대해서 침묵한 것도 있는데, 그 이유는 저 자신이 당면하지 않은 유혹에 대해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 마땅치 않아서다. 

     예) 자신은 도박에 대한 유혹에는 매우 둔감하다. 이런 부분은 다루지 않았다. 또한 산아 제한과 같은 문제도...


5. 이 책의 분명한 목표와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저자가 한 노력

  1) 저자는 이 책을 쓰고자 할 때, 목표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모두가(모든 교파가) 받아들일 수 있는 공통점에 대해서만 다루려고 했다. 


  2) 검증을 위해 이 책의 2부의 초고를 네 명의 성직자(영국 성공회, 감리교, 장로교, 로마 가톨릭에 속한 성직자)에게 보내 자문을 구했고, 사소한 몇 가지 지적 외에는 다섯 명의 생각이 일치했다.(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검토를요청하지 않음. 교파보다는 개인과 학파간의 차이일 것이기 때문에)


  3) 그 간의 서평들과 저자가 받은 수많은 편지들을 통해서 판단할 때, 이 책이 다른 점에서는 흠이 있다 해도 최소한 이미 동의된 또는 공통적인 또는 중심적인 또는 순전한 기독교를 제시하는 일에는 성공을 거두었다고 본다. 


  4) 이 책은 기독교에서 유의미한 <최대공약수>를 찾아냈고, 그것은 비기독교적인 신념들 사이에 있는 간극을 명확히 하는데 일조했다고 본다.   


6. 그리스도인에 대한 정의: <기독교의 공통되는 교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란 뜻으로 제한 것에 대해서 


  1) 그 교리를 받지 않지만 나는 기독교인들보다 더 기독교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2) <신사> 문장을 수놓은 외투를 입고,상당한 땅을 소유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칭찬의 말로 변형됨.

  3) <그리스도인> 원래의 정의로 규정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나쁜 그리스도인>이라고 표현해야 한다. 


7. 이 책 순전한 기독교를 기독교의 교파와의 관계에서 비유하자면

  1) 순전한 기독교는 여러 방으로 통하는 문들이 있는 현관 마루와 같다.(여기까지가 자신의 역할이라고 말함)


  2) 그러나 마루는 기다리는 장소이거나, 방문을 열어볼 수 있는 자리 일뿐 의자와 음식이 마련되어 있는 곳은 방안이다. 

  3) 마루는 계속 머물며 살 곳이 못된다. 아무리 열악한 방이라도 마루 보다는 낫다. 

  4) 어느 문으로 들어가야 할지 결정을 하지 못했다면, 현관 마루에서 기다릴 생각을 해야지 아예 천막을 치고 야영을 할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여러분은 빛을 비추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한 방이 아닌, 그 집 전체에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규칙들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5) 페인트 칠에 현혹 되어서는 안된다. 예배 스타일이 어떤가를 볼 것이 아니라, 교리가 참된가? 거룩이 있는가? 나의 양심이 이쪽으로 나를 움직이게 하는가를 봐야 한다. 

  6) 그렇게 해서 방을 정하게 되었다면, 다른 방을 택한 사람들과 여전히 현관 마루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을 친절하게 대해주어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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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와 수녀의 차이
_자하철에서 생긴 일.(2012.7.2. 제훈교 월요반을 마치고 집에 가면서)

어제 저녁 늦게 용산에서 급행을 탔습니다. 전철칸을 이동하면서 빈자리를 찾았는데, 빈자리가 하나 보였는데 연세가 있으신 수녀님이 앉아계신 자리였습니다.

저는 자리에 앉아 음악을 듣기위해 이어폰을 꽂았습니다. 그리고 조금 후 다음역에서 많은 사람이 탔고 그 중에는 술취한 분이 수녀님 앞을 비집고 들어와서 그 앞에서 몸을 늘어뜨린채 손잡이를 잡고 있었는데, 제가 보기에도 자칫하면 수녀님에게 쓰러질 것 같은 불안감이 보였습니다. 술이 꽤 취했고 아저씨가 그리 교양있어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수녀님도 좀 당황하시고 움츠리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만약 이 아저씨가 수녀님에게 약간이라도 이상한 짓을 하거나 그러면 도움을 드려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마음 한편으로 이 아저씨의 불안함을 보면서 말입니다. 수녀님을 보호해 드려야 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약간은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것으로 인한 두려움도 있었지요. 그러나 주님도 그리하시지 안으시겠나는 생각을 하면서...암튼, 그 술취한 아저씨는 상당히 위태로워 보였습니다.

결국 수녀님은 짐을 주섬주섬 챙기시더니 자리를 피하시려는 것 같았습니다. 그게 나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괜히 험한 일 안당하시는게 낫겠다는 생각에.

그런데 수녀님은 술취한 그 분께 자리를 양보하시고는 자기는 멀리서 왔으니 술도 많이 드신것 같은데 자리에 앉아서 가시라는 것이다. 술치한 아저씨는 과도하게 고마움을 표현하셨다. 그리고 난, 수녀님이 자리를 옮기실 줄 알았다. 그런데 수녀님은 그 앞에 서시고 술취한 분의 쓸데없는 주정에도 성의껏 답해주셨다. 난 당황하며 그 모습을 다 지켜보게 되었다.

술취한분은 수녀님의 손을 잡고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했고, 수녀님은 그분의 횡설수설에도 귀 기울여 주셨다.

수녀님 본 인이 있는 곳은 강원도 인제인데, 거기서 노인들을 돌보시고 있다고 오늘은 일이 있어 멀리 부천에 가는 길이라고... 술 취한 분에게 인제 오실일 있으면 들리시라고...

부천역에 내리실때까지 술 취한 아저씨의 무례함을 거절하지 않으시고 따듯하게 대해주시는 것을 난 보았다.

이 장면을 보면서 난 생각했다.

목사인 나는 싸우려고 준비하고
수녀님은 품고 안으시려고 준비하시는 구나...

내 모습 속에서 오늘의 한국 교회를 보게 됩니다. 물질과 성공의 종이되어 버린 교회도 있지만, 싸우려고만 하는 교회도 적지 않다는 것을.. 명분은 충분하다. 나를 희생해서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것이 한국 교회의 양극단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가독교는 속물이거나 싸움꾼이거나. 나도 그 테두리 안에 있다는 것을.

어제 저녁 수녀님은 제게 많은 것으 가르쳐 주시고, 한국 교회에 대한 많은 교훈을 주시고 가셨습니다.

많은 짐을 손수 들고 가시는 연세 많으신 수녀님의 모습에서 신앙을 가진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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