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사수하여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너희가 얻은 그 자유로 육체의 (소욕)을 쫓는 기회로 삼지 말라는 것이다. 자유를 서로 사랑하는데 종된 것처럼 쓰라고 한다.

1.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신 것은 <자유>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는 인간의 자유(인권)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종교임에는 틀림없다. 인간으로서 가지는 기본적인 자유를 억압하려고 하는 것은 기독교적이지 못하다.
   : 그러나 갈라디아서에서도 언급했듯이 자녀가 어릴적에는 율법을 후견인으로 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도 잊지는 말자.(갈 4:1-7) 이것마져 부정하는 것은 그릇된 생각이며, 정당한 권위마져 부정하는 것이 되고 만다.
   : 반면에 자신은 어른이고 타인은 모두 어린이라는 관점을 가진 어른들도 조심해야 한다. 특히 젊은 목회자들이 영적인 어른인듯 성도들의 신앙을 유치한 어린이의 신앙으로 보는 것은 참으로 삼가해야 할 태도이다.
   : 청년들은 어른으로 대접 받아야 한다. 어른들에게 철없는 자녀로 보이겠지만 이들은 어른으로 대접 받아야 한다.

2. 그러나 바울이 강력하게 <자유>를 외친 후 곧 이어 <그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라>고 한 것을 주목해야 한다. 자유는 분명하지만, 그 자유가 방종을 허락하는 자유가 아님을 주지시키는 것이다.
   : 우리는 육체의 소욕(본능)대로 살도록 허락받은 것이 아니다. 그 자유라는 것은 또 다른 종된 삶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사랑의 종(13절)된 삶이다.
   : 성령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신비로운 삶이 아니다. 사랑의 종이 되어 사는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는 우리를 <자기 사랑의 종>에서 불러내어 <이웃 사랑의 종>으로 이르게 한 것이다. 결국 여전이 우리는 종이다. 누구의 종이 되느냐에 따라 <짐승>으로 생을 마감하기도 하고, <인간: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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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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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제: 바울, 율법과 복음을 알레고리로 해석하다.

갈 4장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을 인정하면서도, 율법의 임시적인 한계성을 지적한다. 우리가 자유자의 자녀 임에도 불구하고 성인이 될때까지 후견인의 지도를 받는 것처럼 율법도 우리에게 임시적으로 필요한(그래서 율법 아래에 어느 정도 있게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임을 말한다. 그러나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우리로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자리로 인도하셨다.

그런데, 이제 장성한 자가 되어 하나님의 약속받은 자녀로서의 유업을 이을 자인(3:29) 우리를 다시 율법의 종되는 자리로 이끌려하니(4:9)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_특정한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켜야 한다고 하고 또 그것을 지키는 것이 뭔가 있는 것같다는 생각에 이전의 복음(바울이 전한)보다 더 입맛에 맞는다 생각하여 많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그 내용으로 넘어가니 바울은 답답할 뿐이다.

이제 바울은 지금의 이 상황이 사라와 하갈의 잘 알려진 구약 이야기와 딱 맞아 떨어지고 있는 상황임을 간파하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알레고리 해석을 감행한다.

1. 하갈는 종이고, 하갈이 아브라함을 통해 난 이스마엘은 종의 자녀다. 마찬가지로 율법을 따르는 것은 종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2. 종의 자녀였던 이스마엘이 나중에 자유자의 아들(사라의 아들, 이삭)을 놀린 것(박해한 것)처럼 율법은 약속의 자녀인 우리들을 놀리고 박해한다.(지금 갈라디아 교회에서 율법을 강조하는 자들이 이와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3. 그러나 하나님은 종의 자녀인 이스마을을 내보내 아브라함의 유업(약속의 유업)을 받지 못하게 하지 않았느냐? 마찬가지로 다시 성도들을 율법의 종으로 만들고자 하는 그들의 노력은 헛될 것이고, 만약 그들을 가르침을 따라 다시 율법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하나님의 유업으로부터 분리될 것이다. 


바울은 논리적인 측면에서도, 그 논리가 우리의 개념 속에 쉽게 안착할 수 있게 설명하고 있다. 참 부럽다. 그러나 주의할 것이 있다. 바울의 성경의 어떤 이야기를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했다고 해서 우리도 그렇게 해석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주지 않는다. 바울은 사도다. 그는 성령의 특별한 간섭으로 오류없이 성경의 내용을 기록할 수 있는 인도함을 받은 사람이기에 알레고리적 해석이라도 하나님의 명확한 통제 아래 있다고 보기에 진리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 이야기를 임의적으로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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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장은 로마서에서 익숙하게 들을 수 있는 복음의 내용을 핵심적으로 요약하고 있다.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가 되었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약속되로 복된 유업을 얻게 된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란 말씀이다.

바울의 이런 설명을 통해서 갈라디아 교인들이 영향받은 <유사 복음>의 치명적인 문제점이 성도가 의롭게 되는 방법에 믿음과 더불어 율법을 추가하였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갈라디아인들은 이 논리가 더 매력적이고 설득력이 있었나 보다.

행위가 빠진 구원이란 사실 좀 인간적으로 허전한 감이 있다. 뭔가라도 해야 보상을 받는 것이 덜 부끄럽기 때문이다. 그런데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은 바로 그와 같은 것이 없으니 허전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인간적인 논리로볼 때 늘 뭔가 채워져야 할 허전함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그 <뭔가>를 채워주는 내용의 <다른 복음>을 전하니 입맛에 딱 맞을 수 밖에...

이와 같은 측면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핵심을 두 가지 측면에서 모두 강조해 주어야 한다.

1.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

2.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통해서 주어지는 구원이다.
   : 따라서 작은 율법적 행위를 의존하는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 은혜를 훼손시키는 것이다. (갈리디아 교회에서의 문제된 복음은 바로 이 부분의 메시지를 훼손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참고로, 성경에서 특히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서 '율법'과 '믿음'이라는 단어를 이해할 때, 믿음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 율법은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으니 잘 구분해서 읽으면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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