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정리]


[성도 간의 세상 법정에서의 송사 문제]

1. 성도 간에 문제를 세상 법정으로 가져가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훗날) 세상이 교회로부터 심판 받을 텐데, 너희들이 지극히 작은 일을 판단하지 못하고 세상 법정의 판단을 의존해야 한다니 부끄럽다.


2. 교회 지도자를 어떻게 세운 것이냐? 너희 형제간의 문제를 판단할 만한 지혜로운 사람이 교회에 아무도 없단 말이냐? 어떻게 교회 성도 간에 서로 고발하게 만들며, 그 일을 믿지 않는 사람들 앞으로 가져가게 만드는가? 


3. 이미 피차 고발했다는 것이 너희 가운데 뚜렷한 허물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그들은 너희의 형제가 아니냐?

  : 너희 자신들도 불의하고, 음행하였으며 우상숭배와 간음을 행하고 도적이나 탐심을 가졌던 자가 아니냐? 너희가 그와 같은 처지에 있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로움을 받은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너희 형제가 그와 같은 문제로 인해서 교회 안에서 일이 발생했을 때, 세상 법정까지 가도록 하는 것은 삼가야 하지 않겠느냐? 그냥 불의를 당하고, 속임을 당하는 편이 나은 것이 아니냐?) 


4. 모든 것이 가하지만,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다. 가능하다고 무엇이든 하려고 해서는 안된다.(절제) 왜?

  1)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2)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3) 너희 몸을 창녀와 합할 것인가? 아니면 주와 합할 것인가?

   (1) 사람의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는 것이다. 

   (2) 너희 몸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너희 몸을 하나님께서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생각 정리]


1. 바울은 교회 공동체가 올바른 판단을 못내리고, 세상 공동체(가치관)에게 판단을 맡기는 자리로 나아간 것에 대해서 마음 아파했다. 


이 말은 교회 성도들간의 문제는 세상 법정으로 가져가면 안된다는 것이라기 보다는, 마땅히 교회 안에서 다루고, 다룰 수 있는 문제조차 세상 법정을 의존해야 하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표현한 말일 것이다. 이것은 고린도교회 공동체가 그만한 것도 제대로 판단할 수 없는 수준의 상태라는 것에 대한 바울의 안타까운 마음의 표현이다. 이런 분명한 문제조차 교회가 판단하지 못한다면, 훗날 종말의 중요한 판단을 내려야 할 교회가 어떻게 그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란 말인가!


교회는 세상의 수준보다 높은 혹은 더욱 고상한 판단을 내리는 공동체여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교회에 대해서 놀라게 되는 것이다. 무조건 용서하고 관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그러면 세상은 교회를 우습게 알것이다.) 갈라디아서의 말씀처럼, '온유한 심정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더불어 자신을 돌아보아 더욱 거록한 공동체로 성숙해져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받는 평가는, 교회가 세상만 못하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현실인가! 그것이 교회가 세상에서 조롱받게 된 이유이다. 


2. 복음은 '자유'를 말하지만, 그릇된 사람들은 '방종'을 따른다.


복음은 확실하게 '자유'를 강조한다. 갈라디아서는 그것을 선명하게 한다. 그러나 바울이 복음 안에서 말하는 '자유'는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라는 방식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즉,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라를 법으로 말미암아 <구속된 삶>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의롭게 되기 위해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법에서 자유롭게 된 것이다. 사람이 의롭게 되기 위해서 <율법>에만 묶여있었지만, 이제 그리스도 예수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서 <율법>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의를 얻게 되었다는 측면에서의 '자유'인 것이다. 


율법과 무관하게 살아도 된다는 '방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이 그릇된 이해를 풀기위해 늘 복음을 설명하면서 추가적인 설명을 해야 했다. 자유지만 방종이 아니다. 


탐식에 사로잡힌 자들... 아무거나 자신이 먹고 싶고 먹을 수 있는 것은 다 먹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자유라는 이름으로 과거 전통이 부여했던 '가치관'을 무시했다. 심지어 윤리적인 가치관에서도 그와 같은 일들이 벌어졌다. 자신의 몸을 함부로 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복음 안에서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그것을 자신의 욕구(육체적 소욕)의 근거로 생각한 사람들이 고린도교회에도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성경이 가르쳐준 복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를 지지하는 근거를 '복음으로부터 뽑아, 복음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에 불과한 것이다. 


[적용 생각]


1. 교회가 성장한다는 것은 교회의 가치적 판단이 성장한다는 것이다.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교회가 그 일을 어떻게 판단하고 진행하는가가 그 교회의 성숙도를 드러내 준다고 할 수 있다. 예루살렘 교회에 '헬라파 과부와 히브리파 과부'간의 갈등이 생겼을 때, 사도들은 그 문제를 통해서 자신의 한계를 발견하고 오히려 자신의 본연의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고 그 일에 집중하게 되었다. 


또한 교회에 사도들이 아닌 '일꾼'일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도적인 장치가 따라와야 했던 것이다. 교회는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뭔가를 결정해야 하는 과정 속에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 결정과 과정을 중요시하면, 성장을 위한 계기로 삼아야 한다. 늘 최상의 선택만 할 수는 없다. 그런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전체적인 성숙이 함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2. 복음은 언제나 오해스럽기에 늘 보완되어 설명되어져야 한다.


갈라디아서도 그렇지만, 고린도전서도 마찬가지다. 바울의 전한 복음은 늘 어떤 대상들로 인해 오해를 받는다.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이 완전할 수 없다. 바울의 입장에서도 그렇고 받아들이는 고린도 교회의 사람들의 입장에서도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자는 듣는 자가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그와 같은 행동하는지 살펴야 한다. 그릇되게 이해하는 부분이 반드시 나타나게 될 것이고 그것을 수정하고 교정하는 것이 또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몫이어야 한다. 


복음은 완전하지만, 복음에 대한 설명은 늘 보완되어져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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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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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정리]


[교회 안에서 판단해야 할 사람들]


1.고린도 교회 안에 음행한 자를 용납하는 문제가 있었다.(이 음행의 정도가 심했다.) 음행도 큰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교회가 음행한 자를 통한히 여겨 좇아내지 않고, 교만하여 이들에 대해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은것.


2. 이와 같은 자들은 가만히 두면 누룩처럼 퍼져감으로 제거해야 마땅하다. 이들을 제거함으로 교회는 살아나게 된다.(육신은 멸하고, 영은 구원받게 해야 한다. 5절) / 유월절에 누룩을 제거하고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을 먹듯 이와 같은 자들은 교회에서 내어 보내야 한다.


3. 이전에 보낸 편지에서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고 명령한 말씀의 의미.

  1)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 우상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려며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그런 의미로 말한 것은 아니다. 


  2) 그 때의 의미는 형제라고 말하는 성도들 안에서 그와 같은 자와 사귀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다. 성도라고 말하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3)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판단하고 정죄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실 문제이기 때문이다. 너는 성도 안에 있는 대상에 대해서만 판단하고 죄인들에 대해서는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생각 정리]


1. 교회는 두 가지 차원에서 '죄'에 대해서 준비해야 한다. 


  1) '죄'가 발생하지 못하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거룩하고 경건한 공동체가 되도록 해야 한다.

  2) 그럼에도 '죄'가 발생했을 경우, 그 이후 '죄를 저지를 사람'을 처리하는 과정을 잘 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로 하여금 죄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게 하면서도, 연약한 사람으로서 공동체의 지도에 신뢰를 보낼 수 있게 된다. '죄가 발생한 후'에 대한 공동체적인 후속작업이 일관성이 없거나 혹은 좋은게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넘어가게 된다면, 그 공동체는 '죄'가 잘 자라나도록 환경을 조성해 주는 꼴이 되고 만다. 


따라서 공동체는 두 가지를 잘 준비해야 한다. 죄가 자라지 못하는 환경을 만들고, 드러난 죄에 대해서는 신속하지만, 지혜롭게 처리하는 준비를 잘 감당해야 한다.


2. 교회 성도들이 판단해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교회 안 사람들인가 교회 밖 사람들인가?


  1) 바울은 일차적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대해서보다는 '교회 안' 성도라고 말하는 자들에게 대해서 엄격해야 한다고 말한다. 성도라고 말하면서,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사기치는 사람들과는 사귀지도 말고 함께 먹지도 말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성도라고 말할 자격이 없는 자들이다. 오히려 교회는 이들을 '판단하고 바로잡아'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교회는 '죄'에 대해서는 세상보다 더 엄격한 공동체다. 


  2) 반면, 교회 밖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하나님의 판단'에 맡기라고 말씀한다. 교회 밖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좀 더 관대해 질 것으로 말한다.(용서하거나 봐주라는 것은 아니다) 우리 몸의 일부라는 측면에서 대하지 말고(일부라는 측면이라면, 병든 곳을 도려내야 하지만) 다른 사람을 대하듯 좀 더 관대해지도록 하라는 것이다. 옳고 그름은 하나님께 맡기도록 하라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우리 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우리 몸의 자정능력으로 신속히 문제를 인식하고 고치도록 하고(아니면 의사에게 우리 몸의 병든 곳을 맡기든지), 우리 몸 밖에서 일어나는 일(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우리가 고치려고 하지 말고, '경찰'에게 맡기라고 바울이 제안하는 것으로 보인다. 세상의 죄를 지적하지 말하는 말이라기 보다는, 우리가 직접 재판하지 말라는 의미일듯 하다. 



[적용]


1. 우리 몸의 문제는 '의사'에게 맡기고, 다른 사람의 문제는 '경찰'에게 맡기자.


2. 죄를 예방하기 위한 구조적이니 노력과 개인적인 노력을 힘써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죄가 없다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언제든 발생하게 되는 죄에 대해서 공동체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책도 세워야 한다. 


  * 세월호 사건을 단순화 하자면, 죄를 예방하기 위한 구조적인 정책은 존재했으나 그것을 따르고 지켜야 하는 사람들의 개인적 도덕에 대해서는 검증하지 않았다. 검증이 오래도록 되지 않음으로 방치되었고 그곳에서 불법적인 관행이 생기게 되었다. 악이 구조화된 것이다. 구조화된 악은 권력과 밀착해있고, 그것을 고발해야 할 언론은 그들의 입을 닫았다. 최후의 경보까지 모두 구조적 악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세월호는 침몰했다. 개인적으로 세월호 참사와 관련하여 사회적으로 가장 비판을 받아야 할 대상 중에 하나는 언론이라고 본다. 언론은 사회 감시라는 기본적인 자신의 업무에 충실하지 못했다. 마지막 경보장치만 미리 울렸다면, 사태가 이렇게 가지 않았을 것이고 이 사건은 예방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언론의 역할을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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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시편 37:1-3] 오늘은 37편 중 1-3절만 다룹니다. 아니 3절을 통채로 외웁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불의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와 세상에서 악을 행하는 자에게 대해서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간략하게 묵상해 보았습니다. 오늘 이 말씀과 함께 하는 하루 되시길.


[옮기기/ 외우기]


1절.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소극적 권면)


2절.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하나님의 질서/심판)


3절.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적극적 권면)


[정리]

악을 행하는 자 때문에 불평하거나, 시기하지 말자.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의 생각보다 속히 베임을 당하고 쇠잔해 질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의 성실을 우리의 먹거리로 삼고 그를 의뢰하면서 선을 행해야 한다. 


[묵상] 

그리스도인 만큼 죄에 대해서 묵인해 주어야 한다고 가르침을 받는 곳도 없을 것이다. 작은 흠 하나까지 다 털어내려 한다면 문제가 크겠지만, 누구나 눈에 보이고 누가 해도 악행이라고 여겨지는 것까지 지적하면 안된다고 생각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참 이상한다. 성경을 보더라도 그렇지 않은데 말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런식의 교육도 받았고, 성경은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킬만 문장을 사용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악행을 하는 자들에 대한 불평과 시기를 금하라는 것이 그들의 죄를 보고도 가만히 있으라는 의미는 아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것은 악을 행하는 자들을 고발하고 신고했는데, 바로 심판을 받지 못하는 사회 구조와 모순을 보면서 세상을 향해서 불평만 하거나 혹은 하나님을 향해서 뭐하고 계시냐고 불평하지 말라는 것이다. 

지금 당장은 심판이 구부러지고, 더딘것 같지만 속히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불평해서 사회에 부정적인 행동을 하지 말고, 혹은 그들의 악행에 심판이 없는 것을 보고 그들의 삶을 따라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도 악행을 보면 그것을 막기 위해서, 더 큰 악으로 확대되지 않도록 판단하고(물론, 공정하게) 그것을 지적하거나 심각할 경우 국가권력의 힘을 의존하여 제지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우선이다. 물론 내게 그와 같은 죄의 요소가 없다는 입장에서의 정죄가 아니다. 나도 그와 같은 죄의 요소가 있기 때문에, 그것이 표출된 자의 형벌을 내가 실제적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야 그것이 내 안에서는 표출되지 않도록 경고를 얻기 때문이다. 내가 죄인이고 내 안에 그와 같은 죄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그것에 대해서 민감해야 한다. 더불어 단순한 고발이 아닌, 그 죄를 개선해 줄 수 있는 적절한 방법을 찾아 대응해 주는 것이 필요하리라 본다. 


판단하지 말고 불평하지 말라는 말을 너무 과도하게 적용하는 것이 문제가 아닌가 싶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3절 말씀일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 머무는 동안 그 분의 성실하심을 먹을 거리로 삼아, 늘 그분을 (공의로운 심판을) 의뢰하고 선을 행하기에 힘써라. 혹 세상이 불공정하고 모순되었다고 하더라도.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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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여호수아 18장] 유다와 요셉의 두 아들 지파(므낫세, 에브라임)를 제외하고 나머지 7개 지파는 가나안 땅 정복에 대한 진척이 지지부진하다. 자발성을 기대했으나, 이들은 소극적이었다. 여호수아는 머뭇거리고 지체하고 있는 이들을 향해서 더이상 지체하지 못하도록 제비뽑기(하나님의 섭리)라는 방식으로 이들을 움직이도록 한다. 말이 움직이지 않으면 기수는 채찍을 휘둘러서라도 말을 달리게 해야할 것이다. 




[정리1.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1. 유다와 요셉 지파 외에 땅을 분배받지 못한 지파들

  1) 유다 지파와 요셉 지파(므낫세와 에브라임) 외에는 자신의 땅을 분배 받지 못한 지파가 일곱이나 있었다. 

  2) 여호수아는 일곱 지파가 땅을 분배받지 못한 것을 그들이 머뭇거리고 지체하기 때문이라고 보고, 각 지파에서 세 명씩 선정하여 땅을 두루 다니며 그 땅을 그려가지고 오라고 명령함.

  3) 그들이 땅을 일곱 부분으로 나누어 오면 여호수아게 여호와 앞에서 제비뽑아 그대로 분배하는 방식으로 확정지어 주려고 했다. 

  4) 그들이 그 땅을 두루 다니면서 성읍들을 일곱 부분으로 책에 그려가지고 오자 여호수아는 제비를 뽑아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의 분파대로 그 땅을 분배 하였다. 


2. 베냐민 자손의 기업 분배(영토 설명)

  1) 베냐민을 위해 뽑힌 땅은 유다 자손과 요셉 자손의 중간 지역이었다. 

  2) 나머지 내용은 지도와 성경의 언급된 지명 참조.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내용을 다시 풀어서 쓰기]


땅 분배 과정에서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인 지파는 갈렙을 포함한 유다 지파와 요셉의 두 아들, 즉 므낫세와 에브라임 지파 뿐이었다. 이들은 원하는 지역을 정해서 달라고 했고, 정복하기 힘든 대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복하며 땅을 얻었다. 요셉의 두 아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기업의 부족함을 말하고 더 많은 기업을 요구했다. 산지와 계곡을 정복할 수 있는 권한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7지파는 어느 곳 하나를 정하지 못했고, 선뜻 정복하려는 열정도 보이지 못했다. 그러자 여호수아는 지지부진한 7지파에서 3명씩 선정해 이들로 하여금 나머지 지역을 7개 지역으로 나누고 그것을 여호수아가 제비뽑는 형식으로 분배하게 함으로 정복 사업을 추진력 있게 진행하였다. 제일먼저 베냐민이 뽑힌 땅은 유다와 요셉 지파 사이의 땅이었다. 



[정리3.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메시지와 묵상들]


1. 적극적으로 기업을 취하려고 했던 지파, 유다 지파와 요셉의 두 아들 지파


오늘 본문의 내용을 통해서 볼 때, 이전에 다루었던 유다 지파 특히 갈렙의 경우와 요셉의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 지파가 매우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기업을 요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지역을 선점했다. 혹은 다른 지파에서는 엄두를 내지 못하는 곳(아낙 자손이 산다든지, 철병거를 갖고 있다는지 등의 이유로)을 오히려 자신이 책임지고 정복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요구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적극적이고 도전적이며 간절한 바램을 가지고 있는 자가 기업을 성취하고 원하는 것을 선점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적극적인 사고, 도전하는 사고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 필수적인 덕목이 된다.


2. 기업을 적극적으로 취하지 못한 채, 머뭇거리던 지파


오늘 언급되고 있는 베냐민 지파의 분배부터는 여호수아의 촉구로부터 시작되어 땅을 분배받는 것이다. 이들은 얻어야 할 땅이 있어야 했지만, 선뜻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어디를 원해야 하는지, 원한 곳을 얻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닐까? 정말 마음 속으로 원하는 곳은 정복하기가 힘들기 때문에(그곳은 이미 강한 자가 정복하고 있는 중이니) 용기가 없고, 쉬운 땅은 별 쓸모가 없어 보이기 때문에 선뜻 내키지가 않았던 것이다. 


7개 지파는 모두 눈치를 보고 자신의 형편을 계산하느라 한 걸음도 진전을 얻지 못했다. 괜히 섣불리 이야기 했다가 잘못된 선택을 하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괜히 다른 지파에 지탄을 받는 것은 아닐까? 등등 복잡한 생각들이 이들을 지배함으로 이들은 단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고 시간만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길어지면 사태는 점점 어려워 지고 말게 될 것이다. 


3. 일이 더디게 진척되고, 적극적으로 취하지 않을 때 지도자의 행동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호수아는 다른 지파들도 유다처럼, 요셉 지파들처럼 자신들의 기업을 적극적으로 취하고 요구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아무 말도 아무 요청도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이들의 자발성을 기다려 본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숨죽이고 가만히 있는 것이었다. 이 때 여호수아가 해결사로 등장한다. 여호수아는 각 지파별로 세 사람을 뽑고, 그들로 땅을 돌아다니면 책에다 그려 7지역으로 나누도록 했다. 그리고는 무작위로 제비뽑기 형식으로 분배하도록 했다. 마치, 하나님의 운명처럼 이들에게 땅을 분배하도록 한 것이다 


이들은 운명처럼 받아들이게 되었고, 오늘 본문에서 베냐민이 뽑힌 그 땅에 대한 영토를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리더는 자발적이 되도록 기다려야 한다. 자발성이 가장 좋기 때문에.. 그러나 오랫동안 기다려도 어떤 행동이나 일들이 벌어지지 아니하면 리더가 판단하고 결정해 주어야 한다. 신속하고 현명하게 그리고 주도적으로 밀고가야 한다. 그리고 역할과 영역을 나누어 주어 자신들이 책임감을 가지도록 해 주어야 한다. 그 일이 자기의 일이 되도록 해야 한다. 실제로 그 땅을 정복하여 얻는 과정은 본인들이 해야 하겠지만, 그 일을 시작할 수는 셋팅은 지도자가 해주어야 한다. 내부적으로 자발적인 진행이 되지 못한다면 말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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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댜서를 읽고 묵상하고 쓴 글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죄로 인해 심판을 받고 멸망을 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일지라도 회개하지 않은 채 죄를 반복할 때 심판하신다는 것을 성경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명확하게 하나님으로부터 그 죄에 대한 형벌을 받는 사람일지라도, 우리가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돔을 책망하시고 심판하시는 근거가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자기 자신은 이스라엘의 죄와 같은 죄가 없는 것처럼, 자신은 영원히 그 죄로부터 자유로운 자처럼 생각하고 고통가운데 있는 형제를 정죄하고 판단하며 그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킨다면 그것은 형제로서 해야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오바댜서는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가 고통당하고 있다면, 그 원인을 따지기 전에 먼저 긍휼과 자비의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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