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사사기 3장] 우리 가운데 죄가 살고 있는 것인지, 죄 가운데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지... 어느 것이든 상관없습니다. 죄를 허용하는 즉시, 죄는 우리의 주인 노릇을 하려고 할 테니까요.(5,6절) 옷니엘, 에훗, 삼갈을 사사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이 쓰는 사람의 조건이 있는지 혹은 없는지 생각해 봅니다. 





[정리1. 본문의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1. 그 땅에 남겨둔 가나안 백성들과 함께 거주하며 치르게 되는 전쟁

  1) 여호와께서 전쟁을 모르는 이스라엘에게 전쟁을 알려주고, 그들을 시험하기 위하여 이방민족을 남겨두셧다.

  2) 남겨둔 이방민족: 블레셋의 다섯 군주, 모든 가나안 족속, 시돈 족속, 히위 족속,

  3) 이 민족들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모세를 통해 조상들에게 이른 명령을 순종하는지 알고자 했다. 

  4)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 가운데 거주하면서 그들의 딸을 아내로 맞고, 자기 딸들을 그들에게 주고 그들의 신을 섬겼다. 


2.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서 구원하기 위해 사사 옷니엘을 세우심

  1) 범죄: 여호와의 목전에서 여호와를 잊고 바알과 아세라들을 섬겼다. 

  2) 진노: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다. 8년간 그 밑에서 그를 섬겼다. 

  3) 요청: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4) 구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 한 구원자를 세워 그를 구원하게 하시니, 갈렙의 동생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5) 승리: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해서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구산 리사다임을 이김.

  6) 평화: 평온한 40년을 보내고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다. 


3. 모압 왕 에글론에서 구원하기 위해 사사 에훗을 세우심.

  1) 범죄: 여호와의 목전에서 여호와께 악을 행했다.  

  2) 진노: 여호와께서 모압 왕 에글론을 강성하게 하사 이스라엘을 대적하게 함. 18년간 섬김

  3) 요청: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4) 구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 한 구원자를 세웠는데,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 

  5) 승리: 에훗이 모압에게 공물을 바치고 따로 할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해서 모압 왕을 죽이고, 에브라임 산지에서 이스라엘을 불러 모아 모압을 공격하여 승리를 가져옴. 완벽한 승리.

  6) 평화: 80년 동안 모압 이후로 평온한 시절을 보냈다.


4. 에후 이후 아낫의 아들 삼갈이 있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600명을 죽이고 이스라엘을 구원함.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글을 다시 풀어서 내 글로 쓰기]


여호수아를 통한 정복 이후에도 가나안의 이방민족들을 완전히 좇아내지 못했다. 그들은 계속해서 남아 있었다. 하나님은 오히려 이들을 남겨두셨다고 표현한다. 이들이 남겨둔 목적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전쟁을 모르는 세대로 하여금 전쟁을 통해서 시험하고 이들이 정말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율법을 지키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확인하려 하신다고 한다. 그러나 사사기에서 보면 이스라엘 사이에 가나안 족속들이 사는 것이라기 보다는 여전히 가나안 족속들이 사는 곳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가고 있는 듯이 묘사하고 있다.(5절) 그만큼 가나안 족속의 영향력이 컸고, 이스라엘의 영향력은 작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겠다. 왜냐하면 이들은 그들과 통혼하면서 그들의 신을 섬기면서 그들처럼 되어갔기 때문이다.(6절)


3장에서는 세 명의 사사를 언급한다. 첫 번째는 여호수아서에서도 언급된 적이 있는 옷니엘(수정:갈렙의 동생 그나스의 아들)이다. 옷니엘은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한다. 두 번째는 에훗이다. 에훗은 베냐민 사람으로 왼손잡이(오른손을 못쓰는)다. 그는 지혜를 발휘하여 모압 왕 에글론을 죽이고, 에브라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동원하여 모압의 용사들을 만 명이나 요단에서 죽이는 공로를 세웠다. 세 번째 사사는 아낫의 아들 삼갈인데, 그는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600명을 죽여 이스라엘을 구원한 공로를 가지고 있었다. 


옷니엘을 제외한 에훗이나 삼갈과 같은 사람은 뭔가 하자가 있고, 부족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 



[정리3.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메시지와 묵상들]


1. 이스라엘이 가나안 이방인들과 하는 전쟁을 물리적 전쟁이면서 영적 전쟁이다. 


초반에 보면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들이 남겨 있는 것이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기 위해서 남겨 둔 것이라고 말씀하면서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 가운데 거하면서 그들의 자녀들과 이스라엘 자녀들이 서로 통혼하고 그들의 신을 따라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이스라엘과 가나안 족속들과의 관계가 늘 전쟁상태는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후에 보면 가나안의 여러 족종과 전쟁을 통해서 고통을 당하기도 하지만,(실재의 전쟁) 그와 같은 전쟁이전에는 매일 매일의 일상적인 영적 전쟁이 있었음을 의미하고 그 영적 전쟁에서는 매번 실패하는 이스라엘의 영적인 실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세상적인 가치관들과 전쟁을 치른다. 최근 한국교회는 반기독교집단과 이단집단과 전쟁을 치르고 있다. 최근에는 계속 지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 있는 영적 전쟁을 우리는 모를 수 있다. 세속화되어져 가고 있는 한국 교회의 실상을 우리는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과 통혼하면서 세상과 섞여 버리고 있는 한국 교회의 모습은 바로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외부적인 전쟁도 있다 그러나 내부적 영적 전쟁이 있음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그 전쟁이 더 위험하다는 사실도 말이다. 


2. 사사로 세워진 에훗과 삼갈의 특징


에훗은 베냐민 지파요 왼손잡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베냐민은 야곱의 12아들 중 막내에 해당된다. 가장 작은 지파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에훗은 왼손잡이다. 오른 손에 장애가 있어서 오른 손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란 뜻이기도 한다고 한다. 굳이 왼손잡이라고 쓴 것을 보면 뭔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맞을 것이다. 암튼, 에훗의 외부적 조건을 봤을 때, 남들보다 앞서는 조건은 없는 셈이다. 삼갈도 마찬가지다. 그에 대한 정보는 별로 없지만,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600명을 죽인 것을 보면 소모는 목동 출신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평범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이 이스라엘을 고통 속에서 구원해 낸다.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셨고, 그들을 사사로 세우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만 들어 쓰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른 의미로 하나님은 이런 연약한 자라도 사용하신다라는 측면으로 보는 것도 썩 좋은 해석은 아닌듯 하다. 오히려 하나님은 누구든 들어 쓰신다고 보는 것이 더 맞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조건과 상관없이 아무나 필요한 사람들을 들어 쓰신다. 하나님 스스로가 강력하시기 때문에 누구를 들어 쓰셔도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다는 측면으로 봐야 한다. 하나님이 하셨다는 측면 말이다. 그러는 중에 에훗이 있고, 삼갈도 있는 것이다. 만약, 약한자만 들어 쓴다고 보면 <옷니엘>은 설자리가 없다. 그는 여호수아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3. 우리 가운데 죄가 도사리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죄 가운데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인가?(5절)


여호수아서를 볼 때는 이스라엘 가운데 다 멸하지 못한 가나안 족속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그들의 존재가 무력해 보였다.) 그러나 사사기를 보면 그들의 존재는 상당히 커진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그들 가운데 살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고(5절) 그들의 침략과 그들의 유혹에 무너지고 있는 연약한 이스라엘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6절)


처음에 죄는 우리 가운데 약한 존재로 자리를 잡는다. 다리 한 쪽만 들어와 있는 셈이다. 그런데 그 죄는 다른 쪽 다리도, 엉덩이도 몸통도 머리도 다 그 안으로 집어 넣고, 결국은 우리를 위협하는 존재로 있게 되는 것이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격이 되고 만다. 죄란 그렇다. 죄의 크기가 중요하지 않다. 죄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철저하게 죄를 막아내지 않고 허용하는 순간, 우리는 죄의 밥이 되고 마는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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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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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합에 대한 본격적인 잘못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7장부터 아합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만 아합의 본격적인 죄의 대목은 구체적으로 잘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20장부터 본격적으로 나오는데 아마 대표적인 죄만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리1. 내용 정리...]

1. 아랍의 벤하닷이 이스라엘을 침략하려고 한다.
  1) 벤하닷이 32명의 왕과 함께 사마리아를 에워싸고 아합 왕의 은금과 아내와 자녀들이 자신의 것이라고 하자, 아합은 내 것은 다 벤하닷의 것이라고 했다.
  2) 벤하닷이 다시 사신을 보내 내일 당장 내가 왕과 신하들의 집을 수색해서 마음에 드는대로 가져가겠노라고 말함.
  3) 아합은 이 문제를 장로와 백성들에게 알리자, 모두 반대함으로 벤하닷의 사자들에게 그렇게 할 수는 없다고 함.
  4) 벤하닷은 이스라엘을 향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하자, 이스라엘의 왕은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대응함. 이 말에 벤하닷이 전쟁을 준비함.

2.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1차 전쟁에서 승리함.
  1) 한 선지자가 이스라엘 왕 아합에게 나타나 이 아람의 큰 무리를 이기게 하시겠다고 함.
    그래서 하나님이 여호와인 줄을 알게 하겠다고 하심.
  2) 아합은 누구를 통해서 그리 하겠는가의 질문에 선지자는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로 하겠다고 하시고는, 왕이 직접 싸움을 시작하라고 한다.
  3) 청년의 숫자는 230명이고, 그 외에 백성들의 수는 7000명 이었다.
  4) 이 청년들이 아람에게 나아가자, 아람은 이들을 우습게 알고 있다가 아람이 전쟁에서 패함. 아람은 이스라엘에게 쫓겼고 벤하닷은 말을 타고 간신히 도망침.

3. 이스라엘과 아람의 2차 전쟁
  1) 그 선지자가 아합 왕에게 나아가 아람이 내년에 다시 전쟁을 일으킬텐니 전쟁을 준비하라고 함.
  2) 아람의 신하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산의 신이지 평지의 신은 아니므로 평지에서 싸우면 자신들이 이길 것이라고 말하면서 다시 전쟁할 것을 제안함. 왕은 그 제안대로 준비함.
  3) 해가 바뀌어 전쟁을 하려고 마주 대하고 있는데 이스라엘의 자손과 아람의 병력은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차이가 났다.
  4) 선지자는 이 평지 전쟁에서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심으로 그 하나님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겠다고 한다.
  5) 또 다시 이스라엘이 아람을 격파하고 벤하닷은 다시 도망하여 신하들과 골방에 숨는다.

4. 아합 왕의 결정적인 잘못들
  1) 벤하닷이 아합 왕에게 생명을 구걸하자, 아합은 벤하닷을 자신의 형제처럼 대함
  2) 벤하닷은 자신의 부친이 빼앗은 모든 성읍을 돌려주고, 다메섹에 이스라엘 왕을 위한 거리를 만들겠다는 약속을 받고는 벤하닷을 살려주었다.
  3) 한 선지자가 다른 친구로 하여금 자신을 치라고 한 것을 거절하자 사자에 의해 죽게 됨.
  4) 다른 친구가 침으로 상하게 된 그 선지자가 왕에게 변장하고 나아가서 상황을 말함.
     전쟁 중에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한 사람을 맡기며 그를 잃으면 그 생명으로 대신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은 한 달란트로 대신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자기가 어찌 하다가 맡은 사람을 잃어 버렸다고 하자, 아합 왕은 네가 약속한 것이니 네가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판결한다.
  5) 선지자는 변장한 것을 벗어 버리자, 왕은 그가 선지자 중 한사람인 것을 알게 된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네게 맡긴 벤하닷을 네가 임으로 놓아주었으니 그의 목숨을 대신하고, 네 백성들은 그의 백성들을 대신할 것이라고 말함.
  6) 아합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그의 왕궁으로 돌아가려고 사마리아에 이른다. 

[정리2. 내용의 재정리]

아합 왕 시대에 아람 왕 벤하닷의 침공이 있게 된다. 당시 이스라엘에 비해 아람은 강력한 국가였다. 벤하닷은 사람을 보내 이스라엘을 떠 보는데, 이스라엘이 순순히 나오니까 당장 가서 눈에 보이는대로 가져가겠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약국이라고 하지만, 무례할 정도의 방식에 이스라엘의 백성과 장로들은 반발하고 결국은 전쟁을 할 것을 결정한다.


승산이 없는 전쟁일듯 했지만, 한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해 주면서 승리할 것을 약속해 준다. 그리고 젊은 청년들을 중심으로 왕이 직접 지휘하면서 나갈 것을 지시한다. 선지자의 방식대로 아람을 선제 공격하자 아람은 의뢰로 쉽게 무너지고 만다. 첫 전쟁에서의 승리를 얻게 된 것이다.

선지자는 흥분한 아합 왕에게 나타나서 내년에 다시 전쟁이 있을 것이고 그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서 힘을 길러야 한다는 제안을 한다. 다음 해 이스라엘에게 진 아람은 군사를 정비하고 전략을 다시 세운다. 평지에서 전쟁하면 이길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번 전쟁에서도 승리할 것을 대언한다. 역시 상대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아람을 격파하고, 아람의 왕 벤하닷은 신하들과 함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골방에 숨게 된다. 두 번째 완전한 승리가 눈 앞에 온 것이다.


그러나 아합은 여기서 잘못을 행한다. 목숨을 구걸하는 벤하닷을 살려주고, 그의 타협안에 결재를 한다. 뺏긴 성읍을 돌려주고, 다메섹에 아합을 위한 도로를 만들겠다는 제안에 넘어간 것이다. 그렇게 아람 왕을 살려줌으로 결국은 훗날 아람이 가시처럼 이스라엘을 괴롭히게 되고 만다.


이런 아합의 교만과 방만함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것이다. 한 선지자는 자신을 전쟁 중에서 온 사람처럼 변장하고는 자신이 맡아야 할 사람을 제대로 맡지 못했다는 것으로 판단을 받으러 온 것처럼 아합 왕 앞에 섰다. 그의 이야기는 바로 아합 왕 자신의 이야기 임에도 불구하고 아합은 자기 자신의 죄를 자신이 정죄하고 만다.


하나님은 벤하닷의 목숨을 아합에게서 찾고, 아람 사람의 목숨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찾겠다고 하신다. 이로 인해 아합은 근심하며 사마리아로 돌아갔다.

[정리3. 묵상 및 적용]

1. 아합의 대표적인 죄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으로 그가 교만해 진 것이다.

아합은 아람과의 어려운 싸움을 싸워야 했다. 그런데 그 싸움에서 하나님은 아합과 이스라엘의 승리를 예견하셨고, 또 이길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지시해 주셨다. 그대로 따랐을 때, 이스라엘은 승리할 수 있었다.

아람이 여호와 하나님을 산의 신으로만 보고, 평야에서의 전쟁은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할 때에도 하나님은 아람의 교만을 깨뜨리고 이기게 하신다. 하나님의 도우심이며 승리하게 하심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발생하고, 아합의 참 모습은 이 때 나타난다. 그는 하나님의 완전한 승리의 상황(벤하닷을 죽여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상황)에서 거드름을 피운 것이다. 마음이 높아진 것이며, 마치 자신이 아람보다 훨씬 강한 힘을 가졌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는데도 말이다... 아합은 벤하닷을 형제라고 하고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그를 살려서 내보낸다. 

승리와 영광이 자신의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이 있을까? 부모의 풍요로 말미암은 풍요가 마치 자신에게 능력이 있어서 온 풍요처럼 생각하는 자식만큼 어리석은 사람이 또 있을까? 어리석은 자는 절구에 머리를 넣고 빻아도 그 미련함이 벗겨지지 않는다고 했는데... 아합이 딱 그 꼴이다.

우리는 잘 분별해야 한다. 내 실력인지 주변 누군가의 도움인지..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인지. 하나님의 도움을 인식하고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인식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사람이 모인다. 그러나 자기 혼자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 곁에는 사람이 떠난다. 심지어 하나님도 떠나시는 법이다.

2. 자기가 자신을 정죄하는 사람, 아합.

아합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했지만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도 인식하지 못했다. 그래서 한 선지자가 동원된다. 그는 하나의 쇼를 한다. 마치 전쟁중에 부상당한 병사처럼 자신을 변장하고는 자신의 일에 대한 판단을 받으려고 아합 앞에 나타난다.

전쟁 중에 누가 나에게 사람을 맡겼는데, 그 사람을 잃게 되면 내 목숨으로 갚든지 아니면 은 한 달란트로 갚든지 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이 사람이 전쟁 중에 경황이 없어서 그만 그 사람을 잃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해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에 대한 판단을 묻는 것인데, 아합은 그것은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이 맡겨놓은 벤하닷을 풀어준 사건이라는 것을 인식하지도 못한채, 맡긴 사람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잘못이 있다고 판단했다. 당연한 판단이다.

그런데 결국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행위를 판단한 것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은 아합의 판결대로 아합에게 판결하셨다. 벤하닷의 생명을 대신해 아합의 생명을, 아람 사람의 생명을 대신해 이스라엘의 생명을... 얼마나 가슴아픈 판결인가?

나는 종종 내 아들의 그릇된 행동을 판결하면서, 그 아들과 같은 일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을 판결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는 깜짝 깜짝 놀란다. 그리고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때는 나를 생각해서라도 아들의 형량을 감해주곤 한다. 나도 그런데... 누군가를 판단하고 정죄하려고 할 때, 혹 그것이 나를 향한 판단과 정죄가 되지 않는가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형량을 너무 과다하게 잡지는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혹시 내가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이것이 인내와 사랑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생각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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