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교회 한가족예비(2016.1.24)


제목: 젖 뗀 아이같은 성도

본문: 시편 1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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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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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책을 읽으면서 느낀 간략한 서평



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

이제 1부를 읽었다. <가나안의 현상학>

읽으면서 드는 생각 <불매운동> 같다는 느낌. 악덕 기업주를 향한 소비자의 경고성 메시지. 그 제품을 소비함으로 악덕 기업주를 돕고 싶지 않다. 지지하지도 않는다. 불편하겠지만, 나는 그 제품을 구입하지 않음으로서 '당신을' 거부한다. 지금은 단기적인 불매운동을 하지만(악덕 기업주를 정신차리게 하기 위해서) 개선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그 제품을 사용하지 않겠다. 그 제품을 안쓰고도 내 생활에 전혀 문제가 없다. 오히려 좋다.

내가 이해한 가나안 현상학은 불매운동과 같은 것처럼 보여진다.

2부 <가나안의 사회학>은 어떨지 흥미있네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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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 정리2

이제 2부까지 읽었다. <가나안의 사회학>

1부에서 느껴졌던 <불매운동> 개념으로 설명해보자면 이렇다. 악덕 기업주의 만행에 반발해서 시작했던 불매운동이 처음에는 불편하기도 하고 긴장감도 있었지만, 그 제품을 사용하지 않고 나서야 비로소 '그 제품이 정말 필요했던 것인가?'하는 새로운 인식이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불매운동은 좀 더 근원적인 문제의식으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주변을 살펴보니 그 제품을 사용하지 않는 일부 무리들이 전통적인 방식이 아닌 전혀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고(벙커원 교회, 작은교회 운동) 그것이 본질적인 욕구에 더 부응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된 것이다. 더불어 그 제품의 대표적인 표준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 '제자훈련'은 뭔가 소비자들을 더 높은 수준으로 이끌지 못하고 유치한 수준에 머무르게 하는 '불량방식'(?)이 아니었는가 지적한다.

그래서 이제 '이건 아니지'하는 문제의식으로 시작된 반발이 '그럼 뭐지'라는 근원적인 질문으로 옮겨가게 했고, 그 근원적 질문에 대한 답을 단순히 기존 제품을 좀 고치고, 악덕 기업주를 쫓아내는 것으로만은 해결되지 않고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의 제품이 나와야 한다는데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좀 길어지긴 했지만, 이 정도로 정리하면 대략 괜찮은 정리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다음 장은 제 3장으로 <가나안 신학>이다. 아마 저자가 말하고 싶은 학문적 토대와 대안이 담겨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읽어보자.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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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 정리3
이제 막 마지막 3부까지 읽었다. <가나안의 신학>

<불매운동>이란 개념으로 3부까지 설명해 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이라는 주제의 책을 읽으면서 '무교회주의'와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는 생각을 계속 하면서 읽었는데 마지막 결론부에 저자도 '무교회주의'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 저자는 환원될 수는 없지만 친밀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1,2부가 잘 읽혀가는 것에 비해 3부는 좀 아쉬움이 남는다. 개인적인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약간은 끼워맞추는것 같은 느낌... 연관이 없지는 않지만 긴밀하게 연관되는 것 같지는 않은 아쉬움이 있다.

저자의 결론을 정리하자면, 가나안 신학은 갑작스럽게 나온 현상이 아니라 이미 역사 속에서 반복되어온 현상이라는 것 따라서 가나안 신학을 너무 이단적(?)으로 보지 말라는 것이고, 오히려 역사 속에서도 '가나안 신학적 인물'들이 역사의 큰 흐름을 바꾸었다는 것을 예증함으로서 가나안 신학이 한국교회에 줄수 있는 위험성(?)이 아니라 가능성(?)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불매운동> 개념으로 정리하자면, 기존 제품을 거절하고 전혀 새로운 형태의 제품을 제안했는데 알고보니 그것이 원래의 취지에 더 맞는 제품인것 같지 않은가? 그러니 현재의 제도교회 불매운동가들을 나쁘게만 보고 공권력을 투입해서 때려잡으려고만 하지 말고, 그들의 목소리를 무시하지도 말고 진지하게 들어보라. 그들 가운데서 대박이 날 수도 있다. 정도.

개인적인 서평입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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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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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목사가 되기 위해 사역을 시작한 사람은 아니다. 사역을 시작하고 나서 필요를 느끼고 신학을 했고 그러다 보니 목사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목사이기 전에 사역자였고, 사역자 일때 한 때 '서리집사'였다. 어떻게 보면 일찌감치 목회로 소명을 받고 신학교에 입학하여 목사가 되신 분들과는 약간의 다른 과정을 거친 셈이다. 물론 뒤늦게 부름을 받아 직장 혹은 사업을 그만두고 신학을 하신 분들도 있긴 하지만 그 분들과도 약간은 다른 경로를 밟아 목사가 되었다. 


지금 내가 출석하는 교회는 부천 상동에 있는 '중동교회'다. 예장 합신 측 교회로 교단 안에서는 규모가 있는 교회다. 중동교회에 다니게 된 것은 목사직과 연관이 있다. 신대원을 졸업하고 친구가 개척하여 목회하는 곳에 출석했다. 조금이라도 개척하는 친구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서다. 그 친구의 아들과 우리 두아이를 데리고 주일학교를 시작했으니 약간의 도움은 되었으리라. 물론 그 친구 목사로부터 내가 받은 도움도 적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 도우며 지내다가, 목사 고시를 보고, 면접을 보는데 노회 어른신들이 조건부 안수를 주시겠다는 것이다. 이유는 지금 출석하는 교회가 합신 측 교회가 아니고, 현재 하고 있는 사역도 교회 사역인 아닌 선교단체 사역이기 때문이란다. 다음 봄 노회까지 우리 교단으로 옮기는 것을 조건으로 해서 목사 안수를 주시겠다는 것이다. 목사 안수를 받고 교회를 옮기지 않아도 그것까지 따져 묻지는 않으리라 생각은 했지만, 장로교 목사가 되려고 하는 이상 기분이 내키지 않더라도 장로정치의 원리를 따라야 겠다는 기특한 생각이 들었고, 결국 지금 중동교회로 옮기게 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내가 중동교회로 옮기기 위해 목사 안수를 받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중동교회의 일원이 되었다. 


처음 중동교회를 출석하게 된 것은 2006년 1월 1일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목사이면서 새가족이 되었다. 사역을 위해서 교회에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일에는 한가했다. 오전에 예배를 드리고 점심을 교회에서 먹고 좀 있다가 집으로 갔다. 오후 예배가 있었지만 집이 멀었기 때문에 가족들을 데리고 일찍 갔고, 아무도 협동목사인 나를 사역자로 알아보거나 눈치주는 사람도 없었다. 우리 가족은 정말 중동교회의 새가족이 되어 조금씩 적응해 가야하는 성도였다.그 한해 동안 식사 후 교회 1층 로비에서 어슬렁 거리고 있으면 찾아와 인사를 먼저 건네주신 분들이 있었다. '교회에 새로 오셨냐?'고 물으시면서. 그러면 우리는 그건 아니고 '협동목사'라고 하면 갑자기 당황스러워하며 무안해 하셨다. 교회에 협동목사로 내 이름이 올라가 있지만, 아무도 그 이름의 얼굴이 누구인지 몰랐고 관심도 없었을 것이기에. 내가 협동목사로 오기 전에 협동목사로 계시던 분은 이름만 있었지 실제로 교회에서 본적은 거의 없다. 다른 교회를 다니시거나 주일에 다른 사역을 하시는 분이었는데, 우리 교회에 적만 두셨던 것같다. 성도들에게도 협동목사는 이름만 있고, 얼굴은 없는 목사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나와 가족은 그렇게 새가족으로 1년의 교회 생활을 했다. 한 번은 금요철야를 가겠다고 인천 집에서 출발했다가, 인천대공원 앞 도로에서 길이 막혀 교회에는 정작 다 끝날때 도착해서 얼굴만 비치고 돌아왔던 경험도 있었다. 집이 멀었기에 교회의 공예배를 충실히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성도로서의 마음을 잃지 않으려고는 노력했다. 난, 목사이기 이전에 성도이니까 말이다. 


2006년 말 교회에서 '유치부'사역을 제안을 받고 2006년 12월부터 유치부 사역을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공식적인 사역하는 목사였다. 교회 주보에는 여전이 협동목사로 표시되었지만, 유치부를 하면서 유치부 교사들과 대면하고, 종종 주일 오후 혹은 저녁 예배 때 설교도 하면서 성도들은 내가 교역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몇 년 지나고, 교회 청년부 설교자가 없을 때에는 청년부 설교도 하곤 했으니 좀 더 많은 분들에게 인식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올 해까지 만 8년동안 중동교회의 부교역자로 사역했다. 물론 선교단체 사역을 하면서 해야 했기에 주말에만 사역했지만, 오랜 기간 사역했고, 4년 전에는 교회 주변으로 이사해서 동네 주민이 되었고 3년전부터는 주일 저녁 설교를 자주했으니 중동교회와는 긴밀하게 되었다. 게다가 1년에 한 번 정도 담임 목사님께서 선교지 사역을 다녀오실 때는 주일 낮설교까지하곤 했으니 교회 안에서 목사로서의 위치는 더욱 굳건해졌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목사지만, 한 사람의 성도라는 인식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성도됨을 잃어버린 목사는 권위와 특권 밖에는 남는 것이 없다고 여겨졌기에.


2014년 11월 말, 나는 만 8년동안 섬기던 유치부를 사임했다. 사역지를 옮겨야 했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20년 가까지 사역하던 단체에서 중책을 맡게 되었고, 교회 부서 사역과 겸해서 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교회의 허락을 받아 사임하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서사역은 사임했지만, 교회를 옮겨야 할 이유는 없었다. 다른 교회 사역지를 찾아봐야 하는 것도 아니기에. 그래서 나는 다시 목사라는 타이틀을 가진 성도로 교회를 다닐 생각이었다. 교회를 옮겨야 할 이유도 없거니와 적어도 나와 우리 가족에게 '중동교회'만큼 좋은 교회는 없기 때문이다.(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를 교회를 소개할 때, 적어도 '나에게는 우리 나라에서 제일 좋은 교회' 라고 소개한다.그만큼 우리는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우리의 진로를 묻는 성도님들에게 여러차례 이야기 했다. 유치부만 사임하고 중동교회는 계속 다닐 거라고. 우리는 할 만큼 많이 이야기 했지만, 성도님들은 잘 이해가 되지 않으셨나 보다. 계속해서 재차 물으셨고, 교회를 떠나는 것으로 알고 있는 분들이 많다는 이야기도 해주셨다. 그렇지 않다고 웃으면서 말씀드렸지만, 11월 말까지 성도님들은 미더워하지 않으셨던것 같다. 


생각해보니, 성도님들의 경험 속에서 이런 교역자는 없었던 것임을 알게 되었다. 개인적인 일로 교회를 사임하든, 교회에서 더 이상 일할수 없어서 다른 교회로 옮기든(사역지가 결정되든 그렇지 않든) 사임과 동시에 교회를 출석하지 않았을 것이 당연하다. 지금까지 성도님들이 경험했던 교역자들은 모두가 그랬던 것이다. 부교역자로 있다가 협동목사로 바뀌면 당연히 교회에 매이지 않고 사역이든 다른 교회든 다니셨기 때문에 그랬다. 성도님들의 경험하셨던 교역자들은 대부분 그랬을 것이다. 목사가 교회 안에서 아무 사역도 없이 성도의 한 사람으로 교회에 출석만 한다는 것은 경험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묻고 또 묻고 다시 묻고 하셨던 것이리라 생각한다. 


물론 그 이후 감사하게도 담임목사님께서 주일 저녁 설교를 제안해 주심으로 작은 역할이 생기기는 했다. 그러나 마음은 동일하다. 목사이기 전에 성도임을 말이다. 이 마음을 잘 간직해야겠다. 이 마음을 잊게 되면서부터 목사는 변질되고 왜곡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 측면에서 내가 목사가 되는 과정이 귀하다. 중학교 2학년 때 교회를 출석하기 시작해서, 중고등부 청년부를 거치고 결혼하고 서리집사를 한 후에 목사가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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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시편 24편]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성과 보좌가 산위에 있는 이미지로 묘사된다. 그리고 그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자들은 몸과 마음이 깨끗하며 정결한 자들이며 충성된 자들임을 보여준다.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복과 의를 얻게 될, 축복받을 사람들이다. 이제 그 영광의 왕이시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위해서 그 성으로 향하여 들어가고 모든 문들은 열린다. 곧 몸과 마음이 깨끗하게 살았던 충성된 자들이 복을 얻게 될 시상식 전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정리1]


1. 만물의 창조주가 바다 위에 그의 터를 세우고 건설하셨도다.


  1절.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 사는 자들은.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셨다.

강들 위에 건설하셨다.(2절)

: 하나님의 나라는 바다 혹은 강 위에 땅을 펼치시고 그 위에 흙과 돌을 쌓아(비유적으로) 산을 세우시고 그곳에 하나님의 성(보좌)을 세우셨다는 것을 의미지로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의 성과 보좌가 모든 만물 위에 권위로서 존재하고 있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2. 누가 그 하나님의 거룩한 곳에 설 수 있겠는가? 


  3절. 누가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며

누가 그의 거룩한 곳에 설자인가?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4절)


: 따라서 그 여호와의 산에 함부로 오를 수 없다. 또한 아무나 오를 수도 없다. 정결하며 깨끗한 자만이 오르며, 충성된 자만이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셀라)


: 여호와의 전에 오를 수 있는 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고 의를 얻는다. 이미 그 보좌 앞으로 나아 왔다는 것이 자격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자격을 갖추지 않는자는 그의 산에 오를 수 없고, 그 앞에 설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복을 얻고 의를 얻는 자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이스라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3. 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영광의 왕이 들어가신다.

   7절. 문들아, 머리를 들지어다.영광의 왕, 전쟁에 능한 여호와가 들어가신다. 

   8절. 영광의 왕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다.


: 이 장면은 왕이신 여호와께서 그의 성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따라서 닫혔던 모든 문들이 열리며 왕을 환영하고 왕의 오심을 준비한다. 왕의 영광스러운 입성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봐야 한다.


[정리2]


1. 여호와의 보좌(성)은 모든 만물 위에 높고 만물은 그 아래에 있다.


2. 아무나 그 보좌 앞에 이를 수는 없고, 몸과 마음이 깨끗하며 충성된 자만이 그 앞에 이를 수 있게 된다. 


3. 주 앞에 오는 자는 복을 얻으며 의를 얻게 된다. 


4. 그와 같은 만군의 왕이신 여호와께서 이제 그 성으로 들어가시니, 문을 열고 맞이하라. 


5. 그 영광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몸과 마음이 깨끗한 자들과 충성된 자들을 복주고 의롭다라고 인정해 주시기 위해서 등장하시는 것을 묘사하는 것 같다.(결국 정결하며 충성된 자들은 영광의 하나님이 주실 상을 받을 것임을 말하는 내용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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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교회에서 청년들을 대상으로 설교했던 것입니다. 2011년.

(설교는 14분 이후부터 진행되고, 앞부분은 찬양입니다.)


본문: 마 22:1-14 

제목: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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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서의 마지막 장입니다. 짧네요. 역시 수련회 중에 작성한 글입니다.

 

[정리1. 본문 내용]

1. 아하수에로 왕은 제국을 다스리는 왕이 되어 많은 지역과 섬으로 조공을 바치게 했다.

2. 왕이 모르드개를 높여 존귀하게 한 것이 메대와 바사 왕들의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3. 유다인 모르드개는 왕의 다음이 되었고 유다인 중에 큰 존경을 받았고 형제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그의 백성의 이익을 도모하여 그의 모든 종족을 안위하였다.

[정리2. 본문 재정리]

모르드개는 왕의 신임을 얻어 왕의 다음가는 사람이 되었으며, 그 사실은 왕들의 일기에 기록될 정도였다. 모르드개는 유다인들의 이익을 도모하고 그의 모든 종족을 안위하였기에 많은 유다인들에게 큰 존경을 받았고, 형제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정리3. 묵상과 적용]

1. 모르드개가 어떻게 유대인들 사이에 위인이 되었으며, 역사적으로 큰 인물일 될 수 있었는가를 말해주는 준다. 그것은 모르드개가 유다인들의 이익을 도모했고, 그 모든 종족의 안위에 힘썼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본문이다.

에스더는 유다 민족을 위한 책이다. 어떻게 위기 가운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날 수 있었는가... 그것은 이방 땅에서도 역사하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보여주는 책이면서도 동시에 자기 민족의 이익과 종족의 안위를 위해서 위기 속에서 결단했던 에스더와 모르드개처럼 모든 정통 유다인들은 자기 민족의 이익을 도모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늘 높여 주실 것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에스더는 유다인들을 위한 위인전이며, 그들이 지키는 부림절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알려주는 책이다. 동시에 오늘 교회를 사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키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주는 책이며, 하나님의 교회의 이익을 도모하고 교회의 안위를 힘쓸때 어떤 복으로 갚아 주실 것인가 보여준다고 볼 수도 있겠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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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구원받았음과 구원받을 것이다.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조

6장. 세례_연합의 비유

      종의 비유(죄의 종, 의의 종)

7장. 법의 비유

      성도의 실존적 갈등

 

음질이 좋지는 않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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