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splash-logoMing Jun Tan

Photo by Ming Jun Tan on Unsplash

[성경본문 정리하기]

12절.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13절.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14절.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절.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16절.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절.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19절.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절.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배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성경 내용 정리하기]

1. 성령님은 예수를 급히 광야로 몰아가셨고,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을 계시면서 시험을 받았다. 들짐승이 함께 계셨다는 것을 통해서 인간의 문화 공간이 아닌 자연 세계에 있었음을 말하는듯 하다. 그 시험의 결과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천사들의 수종'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 시험을 잘 통과하셨음을 보여주는듯 하다.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음으로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셨던 것처럼 이 시험도 필요한 과정이지만(성령이 인도하셨다는 측면에서도) 예수님은 잘 통과하셨음을 당연하다는 듯이 서술해가고 있다. (12-13절)

2. 복음의 시작을 준비하고 있는 요한이 잡혔다는 것은  복음의 시작을 방해하고 저지하려고 하는 세력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순간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본격적인 복음의 시작을 알린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으로 시작했고 그 내용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오심을 통해서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알렸고, 우리가 해야 할 일'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촉구를 하는 것으로 공생애 첫 사역을 시작하셨다. (14-15절)

3. 그리고 예수님은 해변에서 어부들을 제자로 삼으셨다. '사람을 낚는 어부'로 고기잡는 어부를 선택하셨고 그들은 그물과 아버지와 배를 버려두고 예수를 곧 좇았다. 첫 대상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였고, 그 다음은 세배대의 아들인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었다. 이들은 곧 예수를 따라갔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은(자신의 삶에서 돌이켜서 예수를 따라간)' 첫 제자들이었다.(16-20절)


[질문하기]

1. 마가는 왜 예수님의 광야 시험에 대해서 자세한 기술을 하지 않았을까? 드라마틱한 스토리인데.

  1) 마가는 복음의 시작으로서의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빠른 속도로 해나가고 있는듯 하다. '곧'이란 표현이 오늘 본문에서만 3번 언급되고 있다. 신속하게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굳이 알만한 내용을 쓰지 않았을 수 있다.

  2) 이미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서 물 세례를 받았다. 세례 요한보다 큰 사람인 것과 능력 많으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스스로 나아와 세례를 받았고 그것을 하나님은 충분히 인정해 주고 있음이 분명함이 이미 언급되었다. 굳이 추가해서 광야 시험의 자세한 내용까지 언급할 필요가 없었을 수 있다.

2.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온 것인가 아직 안온 것인가? 

문자적으로만 보면 '가까이 왔다'는 것은 '아직 오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하실 분이 과업을 완성할 것이 분명하다는 측면에서는 이미 시작했다고 봐도 무관한 일이다. 수업 시작 시간이 아직 되지는 않았지만, 다음 수업을 진행할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셨고 곧 시작 종이 울릴 것이므로 '떠드는 학생들은 조용히 하고 자리에 앉아 수업 준비를 하자'라는 선생님의 말은 헛된 말이 아니다.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자기 자리를 찾아가 선생님의 수업을 준비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직 수업 시간이 안되었다고 선생님은 안중에도 없이 계속 떠들거나 화장실을 가거나 그 때 매점을 가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수업시간은 임박했고 선생님은 이미 교실에 들어와 계신 것이다. 


[묵상하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알려주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과 무관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혹은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던 사람들)에게 그 나라의 백성으로 전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그대로 이 땅의 나라에 속해서 살아간다면 멸망에 이를 수 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먼 미래에 하나님의 나라가 온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 나라를 준비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제는 준비해야 할 때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다. 그래서 멸망당하지 않고, 새로운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에게 놓여진 과제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이다. 회개한다는 것은 기존의 삶이 방식과 태도에서 돌아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의 방법과 태도에서 돌아서서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른다는 것이다. 세상이 우상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왕 되심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회개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아직 세상의 나라가 다르다는 것 같은 현실이지만 곧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와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것을 믿는 것을 말한다.  그래야 구원을 위한 회개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 회개: 현재의 삶에 대한 돌이킴

* 복음을 믿으라: 곧 완성될 미래에 대한 확신

현 세대에 대한 환멸만 있는 사람은 회개가 아닌 혁명(인간이 사회를 바꾸는 것)으로 간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루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그러나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그림은 현 세대에 대한 회개가 없이는 자기 욕구의 발현이거나 관념적인 유토피아에 불과하다. 현 세계와 하나님 나라의 대조를 통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선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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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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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1]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2]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6]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7]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9]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해설] 


1절. 14년 후에


여기서 말하는 14년 후라는 시점이 언제인가가 갈라디아서의 저작 시기와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내용상으로 보면 갈라디아서 2장에 언급된 내용이 사도행전 15장에서 다루어지는 문제(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해야 하는가?)와 같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서 사도들과 <이방인의 할례> 문제에 대한 이슈를 다루었다는 것은 같은 사건이라 볼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갈라디아서의 기록연대는 사도행전 15장 이후(주후 49년 이후)로 넘어가게 될 것이다.


   [참고] 갈라디아서의 저작 시기를 주후 49년으로 보고 14년 전이면 주후 35년이 된다. 여기서 다시 3년(아라비아에서의 3년) 전으로가면 주후 32년이 된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주후 29년으로 보니, 바울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 사역 이후 3년 뒤에 회심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반면 사도행전 15장의 내용과 다른 것도 있다. 일단 '디도'를 데리고 올라갔다는 것에서는 다르다. 그리고 논의 결과에 대해서도 차이가 난다. 이방인에게 할례를 요구하지는 말자고 결정하는 것은 동일하지만, 그 외의 요청에서는 차이가 난다.


 (갈 2: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행 15:19-21) 『[19]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20]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21]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

 

또한 사도행전은 예루살렘에서 행해진 공적인 회의인데 비해, 갈 2장에서 14년 후에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은 <사사로이 한 것>이다. 


이와같이 갈라디아서의 기록연대를 이른 시기로 혹은 좀 늦은 시기로 잡을만한 증거들이 둘다 있을 경우에는 좀 열린 태도를 가지고 본문의 내용을 살펴봐도 좋을 듯 하다.  



3절. 디도에게 억지로 할례를 시키지 않았다.


디도가 헬라인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은(거짓 형제들) 디도와 함께 예루살렘에 오고 혹 성전에라도 들어갈거라면 <할례>를 하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았다. 바울은 그들과 타협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울이 원칙주의자는 아니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울이 <디모데>를 제자로 불러 함께 사역하고자 할 때 그의 아버지가 헬라인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할례를 행했다고 나온다. 


 (행 16:1-3) 『[1]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2]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3]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이것은 매우 의미하는 바가 큰데, 그 앞에 사도행전 15장에서는 바울이 예루살렘 유대 그리스도인 지도자들과 <이방인의 할례>문제로 심각하게 논쟁해서 이방인에게 할례의 짐을 지우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해놓고, 16장에서 와서는 유대인들의 강력한 요구가 있지도 않았음에도 바울은 먼저 사역을 위해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도록 했다. 


그런데 갈 2장에서는 유대인들의 강력한 요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디도'에게 할례를 의도적으로 시키지 않았다. 이것은 바울이 자기 멋대로 기준을 바꾸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그는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었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할례>는 본질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 때 그 때 상황에 따라 고려하면서 결정하면 될 문제인 것이다. 



 디모데는 앞으로의 사역을 위해서 <할례>를 받게 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지만, 디도의 경우는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신학적이고 전체적인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떤 요구에도 <할례를 받지 않도록>한 것이다. 



8절. 베드로는 유대인의 사도로,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바울이 예루살렘의 유력한 사도(게바, 야고보, 요한)들에게도 동등한 인정을 받았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과 친교의 악수를 했고, 서로 사역의 대상(유대인, 이방인)이 차이가 있을 뿐이지 어떤 복음의 내용에 있어서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다만 가난한 자를 돌봐 달라고 요청한 예루살렘의 교회 요청에 대해서는 완전히 수긍하지만, 그것조차도 전혀 새로운 요구라기 보다는 이미 바울이 신경써서 하고 있던 사역임을 밝힌다. 즉, 복음 이외의 것에 있어서도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빚진 것이 전혀 없음을 말한다.



[묵상/정리]


1. 갈라디아서는 앞부분에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들을 향해서 책망한 것 이후로 하나의 일관된 내용은 바울 복음이 사람에게서 전수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받았던 오해가 그와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의 사도성에도 열등하다고 보았고(상대적으로 예루살렘의 유력한 사도들에 비해), 그렇기 때문에 그가 전한 복음의 내용에 있어서 추가적인 손질이 필요했다고 봤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논리는 상당히 사람들의 마음에 합리적으로 들렸을 것이다.


사실 바울은 그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에 비하면 <듣보잡>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바울의 말씀을 듣고 교회가 세워졌을 때는 몰랐지만,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들어와 다른 이야기를 하지 쉽게 넘어간듯 하다.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하기 위해서인지 바울은 꽤 많은 분량을 이야기를 하는데 집중한다. 아직까지 다 끝난게 아니다. 갈 2:11-14까지 이어진다.


2. 바울을 <이방인의 할례> 이슈로 초대 교회의 본고장인 예루살렘 유대인 교회들과 치열하게 논쟁을 하긴 하지만, 그 문제가 복음의 핵심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할례나 무할례나 복음의 본질은 아닌 것이다. 바울이 싸웠던 논지는 이것이다. <할례를 해야만 한다>는 것에 대해서 <할례를 필수는 아니다>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의 글 속에서는 마치 <할례를 하지 말아야 할 것>처럼 들려질 수 있겠다.(마치 율법으로 말미암은 구원이 아니다라고 말할 때, 율법은 불필요한 것이다라고 오해하는 것처럼)


바울은 상당히 균형잡혀 있는 성도다. 그러나 그 균형이 늘 중간을 택하는 것은 아니다. 치우친 자들에게 균형을 잡아주기 위해서 상당히 강한 어조로 반대 방향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의 진심을 알기 위해서는 바울의 입장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한 다각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바울은 지금 논쟁 중이기 때문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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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해설] 


11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다.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제부터 바울은 본격적인 자신의 논지를 펴려고 한다. 우선 <바울이 전한 복음의 신적 계시성>에 대한 강조다.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이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배운 것도 아님을 강조한다. 이와 같은 강조는 갈라디아서를 시작하는 첫 구절부터 드러났던 방식이다. 


 바울의 사도됨이 사람에게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갈 1:1)임을 강조한다. 


방식은 비슷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좀 다르다. 갈 1:1은 <바울의 사도성>에 대한 강조이지만, 갈 1:11,12은 <바울이 전한 복음이 직접적인 계시>로 말미암은 것에 대함이다. 바울의 서신서 여러곳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성>을 변호하는 경우가 종종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에서의 주 내용은 바울의 사도성에 대한 변호가 아니라,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직접적 계시성>에 대한 것이다.


13절.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하기 전의 자신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사도행전 9장에 잘 드러나 있다. 유대인 중 다른 누구보다 유대교에 열심이었고,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려고 했던 자였다. 


 (행 9:1-2)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16절.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을 부르셔서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실 때, 사울은 이미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된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을 만나러가지 않았다.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세멕으로 돌아왔다. 이 부분에 대한 역사적인 배경은 사도행전은 9장에 언급되는데, 바울이 아라비아로 갔다는 것에 대해서는 사도행전에 언급이 없다. 따라서 사도행전의 기록과 갈라디아서의 기록은 조합해 보면, 사울은 다메섹에서 아나니아를 통해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전도를 하다가 유대인에게 미움을 받고 생명이 위험해지자 그것에서 피신해서 <아라비아>로 간 것 갔다. 


거기서 사울은 3년 정도의 시간을 보낸 것 같다. 이 때 바울은 하나님을 통해서 직접적인 복음의 내용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 기간 중 셋째 하늘에도 올라갔다 온 신비한 경험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후 12:2, 개역)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여기서의 핵심 논지는 사울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이방인의 사도로 세워졌을 때, <복음의 내용>에 대해서 사람에게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순수하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직접적인 계시를 통해 받은 것임을 강조한다. 


 이는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사울에 대해서 어떤 모함을 했는지 짐작케 하는 근거가 된다. 갈라디아 교회들을 교란하기 위해서 들어온 자들은(1:7) 바울은 다른 사도들보다 늦게 부름을 받았고, 예수님을 직접 따라다니면서 배운 사도가 아니기 때문에 사도로서의 권위도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사도들에 비해서 떨어지고, 그가 가르치는 복음은 아직 미숙하기 때문에 예루살렘 사도들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을 것이다. 즉 복음의 내용에 있어서도 예루살렘의 유대 사도들보다 바울의 복음은 불완전하여 보완이 필요하다고 넌즈시 말하자, 갈라디아 교회들은 쉽게 그들의 논리에 넘어갔던 것 같다. 



[묵상]


1.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의 권위는 어디에 있는가?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의 권위를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했다. 즉, 신의 직접적 기원에 둔 것이다. 바울 뿐 아니라 유대 사도들의 복음도 실은 다 마찬가지다. 다만 이들은 복음을 전해야 하는 대상이 다른 것이었다. 그래서 본질은 다르지 않았지만, 구체적인 요구사항은 약간의 차이가 있었을 수 있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가? 지금도 바울과 같이 <신의 직접적 계시>를 받아야만 하는가? 그건 아니다. 이미 바울을 통해서 그리고 유대 사도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도들의 복음은 정리가 된 것이다. 우리의 과제는 그것과 다른 <복음>을 직접적으로 받는 것에 있지 않다. 이미 신적 기원을 통해서 기록되고 정리된 복음을 명확하게 파악하여 아는 것에 있다. 


우리는 누군의 복음이 어떤 방식으로 주어졌는가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는 없다. 그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 성경적인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아무리 신비한 역사와 권세가 나타난다고 해도,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을 떠난 내용을 권위를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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