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19-27 >

(정리하기) (질문하기) (묵상하기)

1. (권면1)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 말하기는 더디 하며 

 / 성내기도 더디하라(19절)

(이유)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20절)


(정리하기) 말하는 것, 특히 성내는 것을 더디하라. 성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 

(질문하기) 말하는 것, 성내는 것과 관련된 권면을 하는 것으로 볼 때, 당시 교회 안에서 말이 앞서고 논쟁하는 중에 감정적인 표현들이 오고 감으로 교회에 덕이 안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야고보는 말하는 것을 좀 더 신중하게 하고, 감정적인 부분을 잘 콘트롤하길 바랬던 것 같다. 야고보는 감정적인 폭발로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다고 말한다.(격한 감정으로는 선을 이룰 수 없다)

(묵상하기) 야고보의 권면은 꼭 기독교의 독특한 권면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일반적인 측면에서도 말을 많이 하기 보다 듣기를 권하고, 감정적인 흥분보다는 차분한 대화를 지혜롭게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야고보는 그 원리가 교회 안에서도 유효하고, 하나님의 의의 관점에서도 유효하다고 본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화를 많이 낸다든지 과도한 화를 표출한다면 그것은 성숙한 행동은 아니다. 교회 안에서 선을 행하면서도 '감정'을 다스려야 한다. 


2. (권면2)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21절)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정리하기)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는 말씀이다. 불경건한 것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꺼이 따르는 자가 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질문하기) '하나님의 말씀을 온유함을 따르라' 라고 권면해도 될텐데, 그 앞에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라는 권면을 넣은 것은 이 두가지 권면이 서로 대조되는 개념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즉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쫓는 것은 '말씀'을 온전히 따르지 못함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묵상하기) 신앙 생활은 크게 두가지 노력을 해야 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더러운 것과 악을 멀리하는 것이다. 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선을 행하는 것으로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말한다. 이 두 가지는 별개인듯 하지만 '말씀'을 온유함으로 따를 때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도 있다는 측면에서 우리는 이 권면을 '말씀'에 온유함으로 따르라는 것으로 단순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권면2-1)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22절)

(설명1)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신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23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음(24절)


(정리하기)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 듣기만 하는 자는 자신을 속이는 자다. 

(질문하기) 말씀을 행하지 않고 듣기만 하는 자는 왜 거울로 자신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다고 비유한 것일까? 

(묵상하기) 이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보는 비유의 핵심은 '곧 잊는다는 것'(24절)에 있다. 즉 말씀을 듣는 자는 들을 때에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고, 어디를 수정해야하며 어떻게 단장해야 하는지 안다.(깨닫는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 혹은 성장해야 할 방향을 깨닫고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뿐 아무 변화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변화가 없는 것으로 끝나는가? 그렇지 않다. 말씀을 듣기 전에는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춘적이 없기 때문에 깨닫지도 못했고, 무엇이 잘못인지 몰랐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나서는 다르다. 깨닫고 지적을 받았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다. 지적을 받았고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고치지 않으면서도 나도 나를 안다고 말함으로써 추가적인 권면이 효과가 없게 된다. 마치 항생제를 많이 써서 더이상 항생제를 먹어도 효과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문제가 장기화될때 염증을 치료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될 수 있다. 


(설명2)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25절)

(정리하기) 제대로된 성도는 율법을 보고 잊는 자가 아니라 실천하는 자다. 그리고 그 일을 행하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다. 

(질문하기) 왜 논의가 '말씀'에서 '율법'으로 전환되었는가? 전화되었다기 보다는 좀 더 구체화 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율법은 칭의와 관련된 설명에서 '부정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야고보는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고 설명했다. 율법을 긍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묵상하기) 이 구절에서 야고보는 '율법'의 오해를 푼다. 하나는 율법은 억압하고 성도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 아닌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는 것을 말하고, 그 율법을 실천하는 자는 하나님께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야고보를 만나 '율법'은 성도들로 하여금 받아왔던 오해(?)를 풀고 제 자리를 분명하게 잡게 된다.

(설명3-1)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26절)

(설명3-2)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27절)

(정리하기) 경건하다고 말하려면 '자기 혀'(말,성내는 것)를 다스려야 한다. 말을 함부로 하면서 경건을 논할 수 없다. 참된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보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다. 

(질문하기) 26절의 '경건'은 말(혀)와 관련이 있다. 27절의 '경건'은 '약자의 돌아봄과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 둘은 서로 연관을 가지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인가 아니면 별개의 이야기로 봐야 할 것인가? 우선 별개의 것으로 보는 것이 심플하다. 그래서 '경건'은 '말'을 조심하고, '약자를 환난중에 돌보고', '자신을 세속에서 구별하는 것'으로 정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말'(혀)를 중심 논지로 본다면 26절은 고아와 과부(약자)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지 않고, 세상의 방식대로 말하지 않음으로 자신을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보조적으로)

(묵상하기) 우리가 생각할 때, 경건한 그리스도인은 기도를 많이하고 성품은 온화하고 교회의 여러가지 일로 봉사하는 사람을 생각하기 쉽지만, 야고보서는 경건의 첫 요소를 '말'(혀)에 두었다. 말은 '가치관'과 '생각'의 표현인데 그 사람 안에 무엇이 담겨져있느냐에 따라서 말이 달라진다.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약자에 대해서 어떤 말과 행위를 하는냐가 그 사람의 경건의 정도를 나타낸다. 그 의 말 속에 세상의 가치관이 얼마나 녹아있는지를 통해 우리는 그 사람의 경건을 파악할 수도 있다. 따라서 말은 '말'의 문제만이 아니다. 그 사람의 가치관과 세속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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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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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여호수아 23장] 성도란 안주란 없습니다. 천국에서조차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선물로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조차 멸절시키겠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성도가 어찌 안주할 수 있겠습니까? 안주를 조장할 수 있는 교리에 대해서 우리는 늘 경계하고 정확하게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정리1.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1. 여호수아가 나이 들어 온 이스라엘에게 주고 있는 권면

  1) 여호와께서 모든 원수들로부터 이스라엘을 쉬게 한 후에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었다. 

  2) 여호수아는 장로들과 수령들과 재판장들과 관리들을 불러다가 모아놓고 권면함


2. 여호수아의 권면(경고) 내용

  1) 너희가 다 봐서 알겠지만,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 것이다. 

  2) 너희들이 모두 기업을 얻게 된 것은 여호와께서 너희 목전에서 그들을 떠나게 하신다는 약속대로 이루신 것이다. 

  3) 그러므로 너희들은 이렇게 행하라

   (1)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떠나서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

   (2) 너희 중에 남아 있는 민족들 중에 들어가지 말라. 그들의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 말고, 그것을 가리켜 맹세하지 말라. 또 그것을 섬겨서 그것에게 절하지 말라. 

   (3) 오늘까지 그랬던 것처럼 여호와를 가까이 하라. 이는 강대한 나라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셨고 오늘까지 너희에게 맞선 자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너희 한 사람이 천명을 쫓을 것인데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기 때문이다. 

   (4) 너희 중에 남아 있는 민족들을 가까이 하여 더불어 혼인하며 서로 왕래하면

    - 여호와께서 이민족으로 너희 목전에서 쫓아내지 아니할 것이다. 

   - 그들이 너희의 올무가 되고, 덫이 되며 옆구리의 채찍이 되고 눈에 가시가 될 것이다. 

   - 그리고 마침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하리라. 


3. 여호수아의 권면의 마무리

  1) 나는 모든 사람이 죽는 것처럼 지금 죽음을 향해 가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너희 가운데 그대로 응하게 될 것이다. 

  2) 지금까지 너희에게 하신 선한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 진 것같이 모든 불길한 말씀도 너희에게 임하게 될 것이다. 아름다운 땅에서 멸절하기까지 할 것이다. 

  3) 만약 너희들이 너희들에게 명령한 언약을 범하고 다른 신을 섬겨 절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너희에게 미치게 될 것이다. 너희에게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가 속히 멸망하리라.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글을 다시 풀어서 쓰기]


가나안 정복이 모두 마치고 분배도 마쳤다. 요단 동편에 기업을 이미 차지했던 두 지파 반도 돌아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평온한 시절이 왔다. 이제 여호수아도 모세처럼 나이들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날이 가까웠다. 여호수아는 온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한 자리에 불러놓고 마지막 권면을 한다. 


먼저는 하나님이 너희를 위해서 싸우신 것과 그 약속대로 대적으로 쫓아 주신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런 승리는 저절로 지속되지는 않는다. 계속되는 이스라엘의 노력이 필요한데,  첫 번째는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떠나서는 안 되고 좌로나 우로 치우쳐도 안 된다. 편견 없이 그 말씀대로 온전히 행해야 한다. 둘째는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다. 남아 있는 민족들 가운데로 들어가 그들의 신을 부르고, 그 신들을 향해서 맹세하고 그것을 섬겨 절하는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특히, 그 민족들과 가까이 하여 혼인하고 서로 왕래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너희 가운데서 쫓아내지 아니하고, 그들이 너희의 올무가 되고 덫이 되며 채찍과 가시가 되게 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마침내 여호와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멸망당하게 되는 비참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이 사실이었던 것처럼, 너희를 향한 불길한 말씀도 임하게 될 것임을 경고하신다. 



[정리3.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메시지와 묵상들]


1. 여호수아는 자신의 생애 마지막을 후손들을 위한 권면으로 마치고 있다.


나이가 많아 모든 사람들이 가는 곳으로 갈 때, 여호수아는 마지막 자신이 해야할 또는 할 수 있는 유익한 일을 온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위한 권면으로 보았다. 여호수아는 모든 지도자들을 불러모았고, 우리가 얻은 성취와 승리가 어디에서 부터 온 것인지를 명확히 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해주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저절로 유지되는 승리와 평화는 아니다. 지속되기 위해서는 모세의 율법을 충실히 지켜야 함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좌우로 치우친다든지, 다른 민족들과 섞여 혼인관계를 맺는 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란 깨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이스라엘이 누리고 있는 평화의 근거는 하나님의 승리하게 하심이기 때문이다. 여호수아는 이 중요한 핵심을 잊지 않도록 권면(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자신의 인생을 마감하면서, 자신의 치적을 은근히 자랑하면서 마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좋은 이야기로 덕담을 주면서 좋은 분으로 인상지워지게 하면서 마무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그런 이미지와 평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듯 하다. 사건의 현재의 평화에 근간을 파악하고, 그 평화가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확대되기 위해서 지도자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 그리고 특히 경계해야 할 것에 대해서 정확하게 지적한다. 그리고 경계해야 할 것을 간과할 때 어떤 결과가 오게 될지에 대해서도 가감없이 지적하고 있다. 


마지막 선물은 좋은 선물, 이쁜 선물을 준비하려고 하지 말자. 당장은 거칠지만 두고두고 유익할 선물을 준비하자. 그것이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핵심적인 덕목중에 하나다. 


2. 축복의 말씀도 신실하지만, 불길한 말씀도 신실하다는 것이다.(15절)


하나님 앞에는 언제나 축복과 저주가 함께 있다. 성도인 우리의 삶 앞에도 마찬가지다. 축복이 신실한 것처럼, 저주 또한 신실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주의 말씀에 순종하면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알고 순종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반드시 저주가 임할 것이다. 


저주의 신실함에 대해서도 잊지 말아야 한다. 


3.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아름다운 땅에서조차 멸절할 수 있다.(15절) 


이스라엘은 어렵고 힘들께 가나안, 아름다운 땅을 소유로 얻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큰 희생을 치르고 배움의 과정을 거쳤다. 그래서 약속으로 받은 아름다운 땅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기계적으로 영원히 누리게 되는 땅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이 받은 아름다운 땅에서 멸절되는 비참을 경험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도 하신다. 따라서 성도에게 있어서 안주란 없다. 기계적인 보장도 없다. 


성도는 늘 긴장하며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존재다. 아름다운 땅에서 조차 멸절될 수 있다면 우리가 어찌 안주할 수 있겠는가!!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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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8장에 와서 지도자에서 백성으로 중심 축이 움직이는 것을 느낍니다. 지도자 느헤미야를 통해서 진행되던 예루살렘의 회복은 마지막 백성들의 움직임으로 마무리가 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는 본문입니다.

 

[정리 1. 내용 정리]

1.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모세의 율법을 가져오기를 청했다.

  1) 일곱째 달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스라를 불러 모세의 율법 가져오기를 청했다.

  2) 일곱째 달 초하루에 에스라는 율법책을 가지고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 서다.

  3) 에스라는 나무로 만든 강단에 섰고, 백성 앞에서 말씀을 펴니 모든 백성이 일어났다.

  4) 에스라가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고 모든 백성은 아멘으로 화답하고 굽혀 경배했다.

  5) 에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고, 레위인들은 그 말씀을 알아 들을 수 있도록 백성들에게 해석해 주었다.

  6) 그 말씀을 깨달은 백성들은 모두 한결같이 울었다.

  7) 느헤미야는 오늘은 하나님의 성일이니 울지 말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라고 요청한다.

  8) 레위 사람들도 백성을 정숙하게 하고는 오늘은 성일이니 조용하고 근심하지 말라고 함.

2. 이튿날 또 다시 백성의 지도자들은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 학사 에스라에게 모임.

  1) 에스라는 말씀 속에서 초막절 절기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그 말씀대로 행할 것을 요청.

  2) 백성들은 초막절 규례에 따라 무성한 가지를 가져다가 초막을 짓고 이레를 지냄

   : 지붕 위, 뜰 안, 하나님의 전 뜰, 수문 광장, 에브라임 문 광장에 초막을 지음.(16절)

  3) 이와 같은 열심히 초막절을 지킨 것은 여호수아 때부터 그 때까지 없었던 일이다.(17절)

  4) 에스라는 첫날부터 끝 날까지 날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무리가 이레동안 절기를 지키고 여덟째 날에 규례를 따라 성회를 열었다.(18절)

 

[정리2. 내용을 내 방식으로 재 정리]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하고, 성을 잘 지킬 수 있도록 후속 작업을 모두 했다. 지도자를 세우고, 명부를 다시 한 번 확인하여 훗날의 혼돈을 막도록 조치를 취해 놨다. 여기까지는 지도자의 몫이고 느헤미야는 본인이 해야 할 일을 다 했다.

그러나 아직 예루살렘의 완전한 회복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늘 느헤미야 8장은 그 완성을 향해 움직인다. 백성들이 스스로 수문 앞 광장에 모여서 에스라를 청하고 모세의 율법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다. 에스라는 그들의 요청에 사람들을 모으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 레위인들은 그것이 잘 깨달아지도록 열심히 중간에서 힘쓴다. 백성들은 말씀을 깨닫고 (자신과 이스라엘의 문제가 무엇이었는지도 깨달은 것 같다.) 온 백성이 운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성일임을 강조하고 먹고 마시고 축제의 날이 되도록 요청한다. 슬픔을 기쁨으로 바꾼 것이다.

다음날 백성의 지도자들은 다시 에스라를 찾아 온다. 율법의 말씀을 더 알고 싶어서이다. 에스라는 내친김에 초막절을 가르치고, 지금이 초막절을 지켜야 할 때임을 말한다. 백성들은 그 말씀대로 마음을 다해 초막절 절기를 지킨다. 그 열심과 진지함이 얼마나 컸는지, 여호수아 이래로 이처럼 초막절을 지킨 일이 없다고 기록할 정도다.

 

[정리3. 묵상과 적용]

1. 예루살렘 성벽 공사의 최종적인 마무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회복이다.

성벽이 재건되고, 그것을 유지 발전할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되고 나서 마지막으로 완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것을 오늘 본문은 보여준다. 모든 것이 중요하다. 성벽도 계보도 제사도 .... 모두 중요한 요소들이다. 그러나 마지막 방점은 말씀으로 찍어야 한다. 모든 회복을 마무리하는 과정 속에서 반드시 최종 점검을 해야 할 내용이 있다면 그 교회 공동체 안에 말씀으로 채워짐이 있는가다.

내용없는 껍데기에 속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껍데기에 도취되어 알맹이를 간과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교회 성장을 교회의 건물과 사람 수와 재정으로 평가하는 것에는 익숙하지만, 그 교회와 그 성도의 영혼을 채워줄 말씀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성벽이 있고, 성도도 있고, 재정도 있고 좋은 프로그램과 영상 장비도 갖추었는데, 말씀은 비어있는 교회. 껍데기에 성도도 목사도 모두 속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 시대의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역사도 있고, 치유도 있고, 기적도 있고, 선교와 지역사회 봉사도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에 있는가? 목사는 성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가? 그래서 오늘날의 교회는 먹을 것 없는 잔치집처럼, 요란하기만 하고 성도는 모두 굶주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나는 말씀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말씀을 먹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말씀을 먹고 내가 말씀을 익혀야 한다.

잊으면 안된다. 잊으면 안된다.  절대로 잊으면 안된다.

 

2. 말씀을 채우는 일은 느헤미야로부터 시작된 일이 아니라, 백성들의 요청에 의해서 시작된 일이다.

말씀을 잘 가르치고 먹이는 책임은 목회자에게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말씀을 달라고, 우리는 말씀에 갈증이 있다고 요청하고 구해야 하는 사람은 백성들인것처럼 우리 성도여야 한다.

참된 성도는 교회의 시설과 크기와 프로그램에 만족해서는 안된다. 말씀에 대한 갈망과 배고픔이 있어야 한다. 목사가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렸을 때에라도 우리에게 말씀을 달라고 요청해야 하는 것이 성도다. 말씀에 대한 갈망과 요청이 성도인 우리들에게서 부터 나올 때, 이것은 제대로 된 회복이다.

성도들은 말씀을 달라고 삐약거리고, 목사는 그 간절한 요청에 부응하고자 하나님의 말씀을 수시로 그들의 입에 넣어주는 교회. 그래서 성도도 말씀을 강건해지고 목사도 끊임없이 말씀과 기도에만 전무할 수 있는 교회.

전도든, 선교든, 지역 봉사든, 제자훈련이든.... 모든 것은 그 후에 생각해 볼 일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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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31일에 경인지부 연합모임때 했던 설교입니다.(결혼기념일인줄도 모르고 덜컥 하겠다고 생각없이 말했던 저의 불찰을 회개합니다.^^;;)

온 세계(제국)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보고, 암울하고 소망없어 보이는 시대 속에서  <이제도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며 살자는 말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생각하며 말씀읽기, 생각하며 기도하기를 해야 한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설교의 재주는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이시대를 사는 청년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내용이라 여겨져 진심을 담아 설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기만을 바라며...

 

 

음질은 좀 떨어질 것입니다. 감안하고 들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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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3장은 말세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면서, 고통의 때라고 표현한다.(1절) 갑자기 껑충뛰어 종말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가는 것 같지만, 현실에 대한 이야기라고 본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지금 우리는 어떤 역사적 이해와 현실 감각을 가져야 할지를 알려준다.

말세의 특징을 한 마다로 표현하면, 불경건이라고 볼 수 있다.(2-5절) 좀 더 구체적으로 바울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한다'(5절)는 것이다. 종말에 가서는 불경건함이 더욱 거세질 것이고, 그것은 주류가 되고 상식이 될 것이다. 오히려 경건하게 사는 자들은 낯선 사람이 될 것이고, 비주류가 될 것이다. 외계인 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직장 생활을 하는 청년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들과 능력과 실력의 문제로 고민하는 친구는 보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의 문화와 가치관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을 말한다. 직접적인 갈등도 있지만, 그들(의 불경건)과 어울릴수 없는 것으로 인한 고립감인 경우가 많다. 이것은 하나의 고통이며 박해이다.)

또 하나의 말세적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미혹'이다. 거짓 가치관, 거짓 진리로의 미혹이다. 이들은 열심히 배우고 가르치나 마침내 진리에는 이를 수 없는 자들이다.(7절)

이 두가지 현상들이 말세의 현상이라면, 적어도 말세는 모세 때부터 존재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 시대에도 사람들을 미혹하던 얀네와 얌브레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이 말하는 말세라는 것은 먼 미래의 종말의 때를 말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지금 말세의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으며, 최종적인 종말에는 그와 같은 현상의 농도가 더우 진해질 것이며, 강해질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어쩌면 아담의 타락이후 아담이 죽음을 경험하고, 죽음의 현상들을 인류가 직면하면서 말세는 존재해왔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게도 된다.

암튼, 바울이 디모데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이와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5절)이다.

말세의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지침 중에 하나는 이와 같은 불경건의 가치관과 현상 속에서 날마다 돌아서는 것이다. 세상은 그들에 의해 흘러가고 그와 같은 가치관이 주류가 되어 다른 말을 하거나 가치관을 피력할 때, 왕따가 되는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나는 그와 같은 가치관에 동조할 수 없다고, 그와 같은 불경건에 동참할 수 없다고 '거부'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매일 매일의 결단과 순종이 일상의 제자도인 것이다.

세상은 모든 것을 잠식할 것같이 덤벼들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역사적 의식을 우리는 가져야 한다. 모세 시대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영향력 그 이상은 나아갈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의 어리석음은 드러났고 그들의 공격도 힘을 잃었다.(8,9절)

하나님은 불경건과 거짓 진리의 미혹에 대해서는 한계를 정해 놓으셨다. 어느 정도는 활동하여 영향력을 키울수는 있지만, 항상 그 한계가 정해져 있다. 그리고 그들의 운명도 정해져있다.(항상 배우나 진리의 지식에는 이를 수 없다. 그들의 어리석음이 드러난다.)

말세의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또하나의 중요한 지침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배운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그 가운데 거하는 삶이다.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감동(따라서 진리다.)으로 된 것으로 읽고 순종하는 자들로 하여금 유익하여 온전함에 이르게 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14-17절) 바울은 디모데를 향해서 이 일에 착념할 것을 계속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정리하면, 불경건과 미혹의 시대에 살아남는 길은

1. 불경건함과 미혹의 가치관으로부터 매일 매일 돌아서는 것이다.

   : 집에 돌아오면 손을 깨끗이 씻는 것만으로도 많은 병을 예방할 수 있듯이... 더러운 것이 뭍어 들어오지 않도록 (정신)위생을 철저히 해야 한다.

2.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건강한(온전한) 성도가 되는 것이다.

   : 건강한 사람이 되기 위해 영양을 골고루 섭취하고, 몸에 좋은 음식으로 식생활을 하며, 적절한 운동으로 자신을 훈련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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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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