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후서를 지나 이제 요한일서로 들어와봅니다. 요한일서를 하지 말고 다른 본문으로 넘어가 볼까 하는 유혹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일서가 좀 정리하기가 난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였습니다. 그러나 해보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흠없이 잘하려고 시작한 것이 아니라, 흠이 많고 거칠겠지만 그래도 이런 방식으로 해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면서 시작한 일이니... 좀 부족하더라도 용기내어 해보기로 했습니다. 분명히 큰 흐름 속에서 건지는 것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ㅋ

[정리1. 본문의 내용을 문단을 나누어 잘 정돈하며 정리해 봅니다. ]

1. 태초부터 있던 생명의 말씀인 예수에 대해서, 그리고 너희에게 전하는 이유(1-4절)
  1)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난바 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다.
  3) 우리가 이렇게 전하는 것은 너희와 우리 사이에 사귐이 있게 함이다.(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리는 사귐이다.)

2.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다.(5-10절)
  1) 하나님은 곧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
    :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는 행하지 않은 것이다.
    : 그런데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면,
    (1)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다.
  2)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이것은 어둠에 행하는 것이다)
   (1) 그것은 스스로 속이고, 진리가 우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빛이 없는 것을 말한다.)
  3)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1)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4)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1)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정리2. 본문의 내용을 정리한 것을 토대로 하나의 매끄러운 흐름으로 연결해 가는 작업이면서 동시에 내용을 개인화하는 작업입니다.]

요한은 지금 자신이 받은 것과 전하는 것이 매우 확실한 것임을 확신하며 말하고 있다. 그것은 생명의 말씀인 예수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것을 전하는 것을 통해서 받는 자와의 사귐(연합)을 확대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생명의 말씀인 예수를 전한다고 한다.


그 첫 번째 내용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빛이고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어둠에 행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요, 진리를 행하지 않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말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 없다고 말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드는 행위이니 자신의 죄를 자백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하게 됨을 받으라고 제안한다.


[정리3. 묵상과 적용]

1. 오랫동안 묵었던 하나의 오해를 풀며.

 

위의 논리라면 우리가 요한일서에서 가지는 오해 중 하나가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어둠에 행한다면> 이 내용은 성도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자연스럽게 <구원을 받았는데 여전히 죄를 짓는다면>으로 해석했고 그것은 진리를 행하지 아니하는 것(5절)으로 <여전히 구원받지 못한 상태임>을 반증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믿음의 고백을 하고도 삶에 있어서 여전히 죄된 행실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대부분의 성도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불안케 하는 구절이 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 구절부터 성도들은 오히려 자신의 죄에 대한 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죄를 고백하면 오히려 죄사함을 받는다는 명백한 복음적 메시지가 나오고), 오히려 죄가 없다고 말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라는 말씀이 이어지니(10절) 이로 볼 때,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어둠에 행한다면>이라는 구절은 <예수를 믿고도 죄를 범한다면>이라는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어둠에 행한다면>을 <죄를 범한다면>이 아니라, <죄를 범하고도 깨닫지 못하는 어두움에 있다면>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적합하다는 것이다.

생명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이 있는 사람은 <죄가 없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죄가 없다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렇게 자신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하나님은 예수의 피로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그런 상호관계(이것인 하나님과의 사귐의 근거이면서 핵심이다)가 형성된 것을 의미한다.

가장 위험한 것은 <자신의 죄가 없다>(8절)고 말하는 <어둠에 행하는 행위_죄를 발견하지 못하는 어둠>(6절)인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진정한 하나님과의 사귐은 없는 것이다.

이 땅에서 성도와 하나님과의 긴밀한 사귐이란, 성도가 죄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고백할 때, 하나님의 죄사함의 은혜(예수의 피로 말미암은)가 지속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 죄사함을 믿고, 성도는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은 그 죄인을 예수의 피로 세운 언약을 통해 다시 품으시는 긴밀한 사귐이 존재하는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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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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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3장을 읽다 보면 여러가지 권면들이 계속해서 등장합니다. 물론 권면 하나하나를 단독적으로 문자적으로 적용해도 무관하겠지만, 그렇게 읽다보면 전체적인 맥락을 잃고 권면이 파편처럼 흩어지게 된다. 임팩트가 약해 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맥락에서 굵직하게 어떤 권면인가를 생각하면서 읽는 것이 이와같이 권면이 많이 나오는 본문을 읽고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정리1. 본문의 내용을 중심으로 문단을 나누면서 정리함]

1. 아내들에게 하는 권면

  1)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다.

   (1)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행하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2) 단장은 외모에 치장되는 것으로 하지 말고, 마음에 숨은 사람을 아름답게 드러내는 것으로 하라.

     : 전에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했다.

     : 사라도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으로 단장했다.

2. 남편들에게 하는 권면

  1)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라.

  2) 아내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3)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3. 성도들을 향한 권면

  1) 너희가 마음을 같이 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다.

  2)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라. 악을 떠나고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라.

    :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악행하는 자들을 대적하신다.

  3) 너희가 열심히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4)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이 있으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라. 다만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준비하게 하라.

  5)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선행을 비방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기 위함이다.

  6) 그리스도도 십자가의 선행을 통해서 영으로 옥에 내려가셔서도 정죄되지 않고 오히려 인정받고 올라가심.

*벧전 3:18~22 내용이해(정리 3, 묵상 및 적용 참고)

 

[정리2. 본문의 내용을 내가 이해하기 용이하게 재정리함]

어제에 이어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우리의 본문의 일을 다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3가지 대상을 향해서 말씀하신다.

첫째는, 아내들에게 하는 권면이다. 아내들은 남편에게 순종하고, 자신을 정결함으로 단장하라고 말한다. 이 땅에 나그네된 아내의 덕목은 남편에 대한 순종과 정결이다.

둘째는, 남편들에게 하는 권면이다. 남편들에게 요구되는 권면은 아내를 사랑하고 귀히 여기라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약자인 아내를 향해서 사랑하여 동거하고, 연약함을 알아 귀히 여기라고 요청한다.

셋째는, 일반 성도들을 대상으로 하는 권면으로, 형제를 사랑하고, 선을 행하라는 것이다. 형제에게 복수하려고 하지 말고 사랑하며, 고난 중에도 선을 행하면 아무도 해할자(적)가 없음을 말씀하신다.

베드로전서는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자기 본연의 일을 하고, 복수하지 말고 사랑하며, 선한 양심으로 고난 중에도 선을 행하면 결국은 사람들에게도 인정함을 받게 될 것을 말한다.

 

[정리3. 묵상과 적용]

1. 남편이 믿지 아니함으로 가정에서 나그네된 아내에게 주어진 권면

당시 믿지 않는 남편으로 인해 당하는 어려움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러나 베드로는 그런 아내들을 향해서 꾹 참고 견디라고, 아니면 주를 위해 가저을 버리라고 권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요구한다. 진심으로 순종할 것을 요청한다. 그리고 오히려 남편을 두려워하여 자신을 정결하게 단장하라고 한다.

신앙의 유무를 떠나서 아내된 도리를 다 하라고 요청한다. 아니 다른 아내들이 하는 것 이상으로 하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의 말씀으로는 변하지 않았던 남편이 이런 행동(복음적 행동)을 통해서 남편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저지론이다.

2. 남편은 아내를 힘으로 다스리지 말고 사랑과 배려로 가정을 이끌어라.

오늘날 같은 사회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겠지만, 당시의 사회에서는 파격적인 남편의 모습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사랑과 배려가 뭍어나는 인격적인 가장이 될 것을 권면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남편의 모습이다. 힘으로 돈으로 권력으로가 아니라, 사랑으로 배려로 대하는 관계가 진정한 남편의 모습이다.

3. 난해 구절(3:19)에 대한 해설(본문의 흐름을 중심으로 이해한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옥에 내려가셔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셨다고 했는데, 그 의미인즉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벧전 3:17)으로 보면서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을 수는 있지만, 그것으로 인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3:16)의 논리를 이해시키려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동원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으신 사건’이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는가?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셨지만,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았다.(즉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의 영이 옥에 있는 영들에게 내려갔다. 이 영들은 누구인가? 노아의 홍수때 복종하지 않던 자들이다. 이들은 노아의 가족 8명 만 빼고 모두 심판에 이른 것처럼 이들은 악인들이었다. 주님은 그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셨고, 그곳에서 부활 승천하심으로서 그곳에 있는 악인들에게 결국 선을 행하는 자가 승리하게 되었다는 것을 선포한 효과를 얻고 온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는 듯 하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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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6장에는 좀 민감한 구절이 들어있다.

'한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4-6절)

이 구절은 성도인 우리에게 두가지 고민을 줍니다.  

1. 신앙과 구원을 경험한 사람이 그 구원에서 제외될 수 있는가?(배교할 경우)

2. 신앙과 구원을 경험한 사람이 배교했다가 다시 돌아올 수는 없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전에 먼저 히브리서 저자가 무슨 이야기를 해오고 있는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히브리서 3,4장을 보면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할 것을 경계하고 있다. 피차 권면헤서 서로 죄의 유혹으로 완고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한다. 이는 그 당시 성도들 중 많은 사람이 기독교를 떠나 가는 것을 염두해서 한 말일 것이다.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하나의 원인일 것이며, 또하나 기독교가 유대교와 뭐가 다른지에 대한 이해가 없어서 다시 옛날의 유대교로 돌아가는 것이다. 히브리서에서는 후자에 대한 상황이 더 크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히브리서 기자는 두 가지 측면에서 히브리서를 쓰고 있는 것 같다.

하나는 구약의 천사, 모세등과 같은 월등한 존재들보다 현격하게 월등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려고 한다.

다른 하나는, 중간 중간 이스라엘 중에서도 참된 안식에 들어갈 수 없었던, 중간에 믿음을 버리고 권고와 충고를 듣지 않았던 완곡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쓰러진 것을 상기하며 너희들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흐름 속에서 오늘 본문을 본다면, 히브리서 6:4-6의 의도는 우리가 염려하는 그 두가지 질문에 대해서, 지금껏 알고 배워왔던 것과 전혀 다른 결과를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 본다.

우리에게는 돌이킬 수 있는 마지막까지 회개의 기회가 있으며, 한번 얻은 구원을 잃을 수 있는가의 문제는 지금 현재의 모습이 어떠냐에 따라서 역으로 확인을 해나가야 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7-8절에서 땅에서 쓸만한 채소를 내면 복을 받고,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받는 것처럼 결국 무엇이 최종적으로 나오느냐에 따라, 그 신앙의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게 된다는 것)

본서는 기독교에서 유대교로 옮겨 가려는 사람들을 향해서, 마지막까지 예수 안에서 소망을 가진 자만이 참된 구원받은 백성임을 다시 확인해 주려고 하고, 떠나려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경계하려고 주신 말씀이다. 이 말씀을 듣고 완고한 마음을 버리고 돌아오기를 바람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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