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교회 한가족예배(2015.12.27)

제목: 배우는 이의 자세

본문: 딤후 3: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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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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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_학교라는 이름의 정글(엄기호)


[저자의 제안]

1. 폭력적이지 않는 교육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대안교육이니 열린교육이니.. 다 마찬가지다.)

2. 왜냐하면 교육은 이 사회가 요구하는  몸과 마음을 만들어내는 훈육인데, 훈육이라는 말 자체가 폭력적인 용어다.

3. 따라서 우리는 폭력적이지 않는 교육을 말할 것이 아니라, 불가피하고 감수할 수 있는 폭력과 그렇지 않은 폭력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논의해야 한다. 그래야 '교육' 자체를 폭력적으로 이해하는 젊은이들과 소통할 수 있다.


[질문]

1. 교실 안에서의 문제를 동등하지도 평등하지도 않다고 본 것에 대한 저자의 견해에 어떻게 생각하는가? 

  폭력: 형사 사건의 문제로 치부하면 되었다. 실제로 그랬다. (공부 잘하는 아이가 중재의 역할을 하면 정리가 되었다.)

       요즘: 도덕과 인륜의 문제_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는 것 / 저자는 구조적 문제로 봄(우정이 넘을 수 없는 벽)


2. 불가피하고 감수할 수 있는 폭력과 그렇지 않은 폭력은 어떤 것이 있을까? 제자훈련 과정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인격적인 제자훈련? 이란 말은 모순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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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육은 성장을 목적으로 한다. 성장은 상실과 자기 세계의 붕괴에서 시작된다. p짱 이야기는 그와 같은 교육이야기를 한다.

  :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2. 그러나 다른 다수의 학생들은 교실 내에서의 폭력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3. 왜냐하면, 한국에서의 교육은 대학만을 목표로 할뿐 성장에는 관심이 없다. 교육의 과정은 목적을 위해 폭력이 허용된다.


4. 수업시간에 영화를 보고 난 후 학생들의 견해

  1) 교사의 재량권을 확보해주는 교육환경이 한국과 달랐다. 학부모의 반발에 대해 교사의 편에 서준 교장선생님

  2) 학생들의 발표가 인상적. 자유롭게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모습이 한국 대학생들과 비교되었다. 


5. 학생들의 예상외의 반응

  1) 돼지를 키워 생명의 소중함을 알도록 하자는 교사의 제안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는 학생들.(모순적 독단적 행동)

  2) 한국 내 열린교육의 허상: 한 번도 열린적이 없는 교육, 의지와 상관없이 참여해야만 하는 교육

  3) 방식은 체험을 중심으로 바뀌었지만, 교사 중심의 교실, 교실에 민주주의는 없다.


6. 교실은 동등하지도 평등하지도 앖다. 

  1) 과거부터 교실은 폭력적 학생들이 있었다. 그들을 중심으로 질서가 형성됨

  2) 지금은 폭력의 문제를 형사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과 인륜의 문제로 가져간다. 

   - 어떻게 학생이 그럴수 있지? 어떻게 친구사이에서 그런 일이 벌어질 수가 있지? 와 같은 질문.

  - 그러나 학교는 우정의 공간이 아니라, 권력적인 공간이다. 공부는 하나의 권력이 되어 잘사는 아이와 힘쎈 아이와 결합하고 반에서 가장 덜 떨어진 아이를 괴롭힌다. 못살고 공부 못하고 못생기고 무엇보다 덜 떨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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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현실이다. 이 현실을 부정하지는 말자. 폭력이 없다고... 열린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교실에 민주주의가 왔다고 착각하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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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storyM에서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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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된다? 되는 것만 해라!]


1. 미래를 어떻게 볼 것인가? 낙관적인가 아니면 비관적인가? 나을 것이라고 보는가? 나빠지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보는가? 


2. 미래를 낙관적으로 볼 때, 실제로 낙관적일 때 '하면 된다'는 정신이 중요하고, 그런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다수가 나아졌다. 그러나 미래가 낙관이 아니라, 나빠지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조심스러울 때... '하면 된다', '더 하면 된다'와 같은 구호는 '성공하지 못한 것은 네가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자기 자책으로 이어지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된다. 정말 자신이 '개미'처럼 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사회가 낙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3. 그럼에도 낙관적인 시대 속에서 '하면 된다'는 말과 함께 성공했던 사람들은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패기와 열정 그리고 꿈이 없어서 그렇다고 비난한다. 과거의 시대와 달라졌다. 해도 안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기대한 대로 되지 않은 혼돈의 시대, 예상하지 못한 변수로 가득한 시대, 기대를 저버리는 배신의 시대다.) 


4. 이런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면 된다'는 의식만을 강조하는 것은 그 구호에 맞춰 열심히 열심히 일해온 사람들에게 분노를 일으키게 된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요, 사회에 대한 분노요 주변 환경에 대한 분노다.


5. 그래도 분노는 통제가 가능한 감정이고 잘만 다스려지면 오히려 선한 결과를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격노'다. 격노는 감정의 통제를 받지 않으며, 공격적이어서 원인 제공자가 아닌 자기 자신과 가장 가까운(가족이든 격노가 일어나는 당시 지나가던 행인이든...) 그 감정을 표출하여 주변을 불행하게 만들어 버린다. 


6. 이 시대는 열번 찍어 안넘어가는 나무 없다를 강조하는 시대가 아니다. 오히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 보지도 말라고 가르쳐야 하는 시대다. 큰 꿈을 이루기 위해서 열심해 하라가 아니라, 지금 할 수 있는 것부터 해라 라고 말해 주어야 하는 시대다. 


 - 우리가 잘못 산게 아니었어.(엄기호/웅진 지식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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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우리는 아직도 비전과 꿈에 대한 메시지를 요셉과 다니엘을 근거로 여호수아를 근거로 얼마나 강조하고 있는가? 꿈이 없는 비전이 없는 하고 싶은 것이 없는 청소년들을, 청년들로 하여금 자신이 비정상적인 상태임을 각인시켜 주면서 말이다. 교회 뿐 아니라 교육 현장에서 이것으로 학생들을 얼마나 닥달하는가! 왜 이 시기를 개미처럼 살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열심히 해서 목적한 바를 성취하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저자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무엇을 가르치며 무엇을 도전해야 할 것인가? 오늘의 가치와 오늘의 중요함을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싶다. 큰 그림보다 작은 내 삶의 현장을, 먼 미래보다 지금 내가 있는 공간을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것의 중요함을 전해야 하지 않을까?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현재의 삶을 유보할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 충실함으로 미래를 맡겨드리는 신앙을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교회이든 학교이든 교육의 초점이 바뀌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육은 학생들을 주눅들게 하고, 패배를 자기 자신에게만 돌이게 만들어 버려 결국 낙오자가 되게 하거나 아니면 냉소주의자를 만들 뿐이다. 성공한 일부의 사람은 영웅주의에 빠질 것이 뻔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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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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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제를 정리해 보면]

1. 동물은 어느 공간에 구분되어 있는가에 따라서 그 존재를 다루는 방식이나 태도가 달라진다. 동물원에 있는 돼지와 자연보호구역에 있는 돼지, 식용으로 키우는 우리에 있는 돼지... 같은 돼지지만 다루거나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2. 사람도 어떻게 규정된 공간에 있느냐에 따라서 방식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즉, 학교를 어떤 공간으로 보느냐에 따라 교육에 대한 입장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3. 폭력적인 교실, 폭력적인 교육을 바꾸겠다고 폭력에 대해서 엄격하게 대응하고 수업 방식으로 열리 교육으로(더 나아가 대안학교 교육) 바꾼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아직 공간에 대한 규정이 정립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 지금의 대학생들은 열린교육 세대라고 하지만, 이들은 열린교육은 한번도 열린적이 없다고 말한다. 이전의 교육은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했다면, 열린 교육은 침묵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했다고 말한다. 

  - 전에는 물리적인 강자가 약자를 괴롭혔다. 그래서 주변 친구들로부터 동정을 일으키기도 했고, 약자를 향한 의협심이 유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물리적 강자가 아닌 사회적/경제적/문화적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기 때문에, 괴롭힘을 당한 자는 단순히 물리적으로 약한 자가 아니라.. 찌질한 자로 규정되고 이들은 주변 친구들의 동정을 일으키지 못한다. 친구들도 이 찌질한 자로 규정된 약자를 도외시하기 때문에 더 폭력적이 되었다. 

4. 이전까지 교육은 열린 교육과 같이 교육 방식을 바꾸고, 교사들의 폭력적 태도로 부터 학생들을 보호하면 비폭력적 교육이 진행되리라고 생각하지만, 학생들은 교육이라는 것 자체가 폭력적 요소가 있음을 지적한다. 즉, 교육 혹은 훈육 이라는 것 자체가 폭력을 배제을 배제할 수 없음을 지적한다.(폭력이란 물리적 폭력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정해진 답을 향해 가도록 하는 것조차 폭력적이라고 보기에)

5. 따라서 저자는 공교육은 열린교육 등과 같은 방식을 취한 것으로 교육은 폭력적이지 않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가피하고 감수할수 있는 폭력과 그렇지 않은 폭력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논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단순히 열린 교육 혹은 대안 교육은 폭력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 학생들은 냉소하고 지겨워하기 때문이다. 


----- 책 읽으면서 인정적인 문구들.

이들은 이른바 열린교육이라는 것을 받고 자란 세대다. 그런데 학생들은 열린교육이 한번도 제대로 열린 적이 없다고 한다.한쪽에서는 폭압적인 교육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열린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혼돈이 가득한 교육이 아이들의 삶을 괴롭혔다.

폭압적인 교육이 학생들에게 입닫고 가만히 있을 의무를 강요했다면 열린 교육은 무조건 말해야 하는 의무를 강요하는 셈이다.

학교폭력에 대한 의식 변화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가 약자가 아니라 덜떨어진 존재로 인식된다. 맞는 것에도 다 이유가 있는 법이라는 식으로 퍽력은 정당화 된다. 무엇보다 학교 안 권력자의 삼위일체가 말하는 것은 학교폭력이 우정에 대한 도덕적 폭력이 아니라 경제/문화/육체 자본의 삼단 합체 속에서 벌어지는 계급적 폭력이라는 사실이다. 다만 이것이 '덜떨어진 존재'에 대한 폭력이라는 문화적 양상만이 전면에 부각될 뿐이다.

문화란 일종의 분류 체계이며 분류표이다. 같은 동물이라 하더라도 어느 공간에위치하는가에 따라 그에 대한 대접은 완전히 달라진다. 동물원에 있는 돼지와 농장에 있는 돼지, 자연보호구역에 있는 돼지는 같은 돼지이지만 완전히 다른 존재이다. 내가 어느 공간에 배치되었는가에 따라 나는 식용동물일 수도 있고, 애완동물일 수도 있다.
- 학생들이 모인 교실이 어떤 공간이느냐에 따라 다루는 방식도 가치와 목적도 달라진다.

우리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생명을 다루는 방식은 두려움이 아니라 잔인함이다.
-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생명을 너무 잔인하게 다룬다. 호랑이를 보여주기 위해 유리안에 가두어 두는 방식을 취하는 것처럼.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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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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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보도


http://media.daum.net/society/nation/metro/newsview?newsid=20130227033104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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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19장] 토기장이에게 가서 옹기를 하나 사가지고 갔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옹기를 깨뜨리는 방식을 통해 하나님은 당시의 메시지를 전하시려 합니다. 시청각적 효과를 통한 소통의 노력이지요. 그러나 듣지 않으려는 백성들 앞에서는 아무런 효과를 얻지 못하고 마는군요. 하나님은 탁월한 교사이나, 백성들은 불량학생입니다. 




[정리1. 본문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1. 토기장이에게 옹기를 사서 그것을 깨뜨림으로서 전하시는 메시지


  1) 예레미야에게 토기장이에게 가서 옹기를 사서 백성의 어른들과 제사장의 어른 몇 사람과 하시드 문어귀 곁에 있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가서 내 말을 이르라.

     * 하시드 문: 정확한 위치는 알수 없으나, 그 일대에 토기장이의 작업장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 그 문 근처에 깨어진 토기들을 버렸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예루살렘 성 남쪽에 있는 문으로 본다.

 

   (1) 내가 이곳에 재앙을 내릴 것이라. 듣는 모든 자가 떨게 될 것이라.

   (2) 이는 그들이 나를 버리고 이곳을 불결하게 하였다. 우상에게 분향하고 무죄한 자의 피를 이 곳에 채웠다. (아들들을 바알에게 바치고, 바알을 위해 산당을 건축했다.)

   (3) 이곳을 다시는 도벳이나 힌놈의 골짜기라고 부르지 않고 오직 죽음의 골짜기라 부르리라. 이곳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을 넘어뜨리며 그 시체를 짐승과 새의 밥이 되게 하리라. 

   (4) 이 성읍을 놀람과 조롱거리가 되게 하고, 모든 재앙으로 말미암아 지나는 자가 조롱함.


  2) 이 말을 하고 함께 있는 자들 앞에서 그 옹기를 깨뜨리고 말하라. 

   (1) 사람이 토기장이의 그릇을 깨뜨리면 다시 완전하게 할 수 없는 것처럼, 이 백성을 무너뜨리리라. 도벳에 매장할 자리가 없는 것만큼 이 성읍에 재앙을 내리리라.

   (2) 예레미야는 이 말씀을 도벳에서 돌아와 여호와의 집 뜰에 서서 모든 백성에게 말한다. 이 성읍에 예언된 재앙이 모든 성읍과 모든 촌락에 내리리라. 

   (3) 이는 그들의 목을 곧게 하여 내 말을 듣지 아니함이라 하시니라.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을 토대로 다시 풀어서 작성하기]


하나님께서 옹기를 깨뜨리는 것을 통해서 메시지를 전하신다. 예레미야는 옹기를 사서, 백성들의 어른들과 제사장의 어른 몇 사람과 함께 힌놈의 골짜기(예루살렘 성 남쪽에 있는 골짜기)에 가서 이 곳에 임할 재앙을 선포한다. 이곳이 우상숭배의 장소가 되고, 많은 피를 흘린 장소이기 때문에 이곳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지도자들이 볼 때도 이곳은 그와 같은 악한 곳이었다고 보여진다.) 


그 다음 갑자가 그 지도자들 앞에서 가지고 온 옹기를 깨뜨린다. 옹기는 한번 깨지면 다시 온전히 회복할 수 없는 것처럼, 이 백성도 무너지게 하리라고 말씀하신다. 도벳이 진노의 재앙을 받는 것처럼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성읍과 촌락이 재앙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니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도벳의 심판을 예언하는 것처럼 해서, 예루살렘과 유다에 임할 동일한 심판을 경고하신 것이다.  



[정리3. 정리과정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메시지와 교훈들]


1. 하나님은 강의(메시지)를 위해 시청각적 효과를 최대한 이용하신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옹기를 강의(메시지)에 이용하시려고 했다. 예레미야에게 먼저 토기장이의 집에 가서 옹기를 사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야 함께 있던 지도자들은 약간 의아해 했을 것이다. 예레미야가 왜 옹기를 하나 들고 나와서 옹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예레미야가 든 옹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적절한 때에 예레미야는 느닷없이 옹기를 깨버린다. 그는 소중하게 들고 있던 옹기를 갑자기 깨뜨리심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이다. 그들은 처음에 소리에 의해서 놀랐을 것이다. 흐릿해지던 사람들의 느슨한 태도가 갑자기 주의를 집중하게 되는 효과를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의문을 낳았을 것이다. 왜 소중히 들고 있던 옹기를 떨어뜨린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깨뜨린단 말인가!! 사람들은 다소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예레미야는 이제 깨진 옹기를 통해서 말한다. 깨진 옹기는 다시 완전히 회복 될 수 없는 것처럼 예루살렘과 유다는 다시 완전히는 회복될 수 없는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갑자기 사람들은 깨진 옹기와 예루살렘의 운명을 연결할 것이고, 이것은 잠시의 고난이 아니라 원상복귀가 불가능한 상처가 될 것이라는 것을 실감나게 듣게 될 것이다. 


메시지 전달을 위한 하나의 준비된 퍼포먼스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매우 다양한 장치들을 모두 활용하신다. 문학적인 표현이 그렇고, 이와 같은 퍼포먼스도 마찬가지다. 결국을 메시지를 전하려고 하시는 그분의 노력인 것이다. 하나님도 <불통>인 백성들을 향해서 최대한 <소통>하려는 노력을 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안다면, 우리의 소통을 위한 노력은 좀 더 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할만큼 했다고 말하기 전에 좀 더 해봐야 하지 않을까 말이다. 


2. 공감할 수 있는 힌놈의 아들 골짜기(도벳) 이야기로 시작해서 유다와 예루살렘으로 이어진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와 당시 백성들의 지도자를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보낸 것은 아마, 그곳은 타락한 유다 백성들이 볼 때도 정도가 아주 심할 정도로 타락한 곳이 아니었나 싶다. 그곳에서 바알을 위한 산당이 건축될 뿐 아니라 바알을 위해서 아들들을 번제로 드리는 일까지 있었던 것을 볼 때(5절) 또한 무죄한 자의 피가 이곳에서 많이 흘려졌다는 것은 공공연하게 불의와 죄악이 컸던 곳임을 짐작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힌놈의 아들 골짜기로 백성의 지도자들을 데리고 가서, 재앙과 심판을 예언할 때 이 지도자들은 별말이 없었던 것이라 보인다. 자기들이 보기에도 이곳은 매우 심각한 곳이었기 때문에, 어쩌면 올 것이 왔구나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끝나지 않는다.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일어나는 재앙과 심판이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동일하게 일어날 것이라는 예언이 뒤이어 나오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유다와 예루살렘의 죄도 결국은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죄의 질과 비교해 볼 때 다르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강건너 불구경하던 심정으로 듣던 유다 백성들의 지도자들은 갑자기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결국 예레미야는 그곳에서 돌아와 여호와의 집 뜰에서 모든 백성들에게 이 메시지를 전한다.(14절)


예레미야서에서는 하나님 그분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한 노력이 가득차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럼에도 이 백성들은 듣지를 않는다. 효과적인 메시지 전달을 통해서도 귀를 막고 눈을 가린 사람에게는 방법이 없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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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팝케스트 듣다가 얻은 정보로 인터넷 검색해서 관련글을 읽었습니다. 좀 지난 이야기지만 그래도 못보신 분들이 있을지 몰라서 소개합니다. 


메가스터디 손주은 대표의 인터뷰(2009년 4월 22일. 중앙일보)


1. 손주의 대표의 히스토리

2. 사교육에 대한 그의 원죄의식과 나름대로의 극복과정

3. 교육의 본질은 "시험을 잘 치르게 하는 것"이라는 말의 의미

   : 개인적으로 중고등학교 교육에 있어서 기본지식을 잘 습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에 공감함.

     열린 교육과 창의적 학습 방법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제기함.(여기에도 공감하는 부분이 있음)

4. 대학의 중요성은 점점 약화될 것이라는 전망.(학교라는 테두리가 아니라, 강의 중심으로 변모)

5. 학습 능력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는 주변환경(조건) 보다는 본인의 학습 의지에 달려있다고 봄.

   : 강남의 학생들은 주변환경을 고려한다면 사교육을 통해 보는 유익이 언론에서 말하는 것만큼 크지 않다고 봄.오히려 환경에 비해 성취도가 낮다고 판단함. 교육의 핵심은 학생의 학습의지라고 봄. 


사교육 현장을 이끌었던 분의 입장에서 본 교육문제 또한 신선하네요.

참고하세요.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3579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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