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부 설교_요한복음 8장_최종.pptx


* 유년부 전도사님 대신 해서 한 주 대타로 설교.


유년부 설교(본문 요 8:7 /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설교: 김수억 목사



I. 들어가는 말


 세상에는 법정이라는 곳이 있어요. 법정은 죄가 있다고 의심되는 사람이 정말 죄가 있는지 없는지 판결하는 곳이기도 하고, 죄가 있다고 판결난 사람들은 얼마만큼의 벌을 받아야 하는지도 결정해 주는 것이에요. 가벼운 죄는 가벼운 형벌을 주지만, 무거운 죄는 매우 무거운 형벌을 내려요. 가장 무거운 형벌은 ‘사형’이에요. 사람의 죄와 형벌을 판단하는 ‘판사’라는 분은 법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어요. 매우 멋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책임감이 큰 일이기도 해요. 


 성경에보면 이와 같이 근사한 법정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판결을 내려달라고 요청하는 이야기가 나와요. 갑자기 예수님이 판사로서의 역할을 맡게 된거에요. 과연 예수님이 어떤 판결을 했는지, 잘했는지 못했는지 오늘 여러분과 말씀을 나누려고 해요.


II. 본론


 1. 이야기

어느날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셨어요.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소란스러워지면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나타났어요. 그리고 그 가운데 왠 여자 한 명도 같이 왔는데, 그 여인의 행색은 뭔가 이상했어요. 단정하지도 않았고 머리를 헝크러져있었어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 그 여인을 데려오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이 여자는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입니다.(간음죄란 자세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 당시에 매우 큰 죄였어요. 그래서 현장에서 잡히면 바로 사형에 해당하는 죄일만큼 나쁜 행도이었어요.)

이런 여자는 죽이라고 모세의 법전에 쓰여져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정말 알고 싶어서 물으러 온 것이 아니에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싫어했어요. 그래서 이 여자를 미끼로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려서 곤란하게 만들고 싶었던 거에요. 만약에 예수님께서 모세의 법전대로 그 여인을 죽이세요 하면 예수님은 로마의 법을 어기는 사람이 되는거에요. 로마의 군인들이 절대로 좋아할리 없죠.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죽이지 마세요 하면 예수님은 모세의 법을 어기는 것이 되면서 유대인들의 미움을 받게 되는거에요.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모세의 법이 절대적이라 믿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향해서 죽여라! 해도 문제가 되고, 죽이지 마라! 해도 문제가 되는거에요. 그걸 노리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이 여인을 데리고 온 거에요. 


왜 우리가 어릴적에 어른들이 종종 물어보는 질문이 있잖아요.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그러면 여러분들은 뭐라고 답을 했어요? (엄마? 아빠? ....) 답을 하지 않는게 좋아요. 왜냐하면 엄마라고 하면 아빠가 서운해 하고, 아빠라고 하면 엄마가 서운해 하기 때문이에요. 지혜로운 친구들은 둘 다요~ 하거나 아니면 대답하지 않는거에요. 지혜로운 답변이지요. 


예수님도 지혜로우시기 때문에 대답하지 않으셨어요. 그저 땅에 앉으셔서 손가락으로 끄적끄적 글씨만 쓰고 계셨어요. 그랬더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에게 재촉했어요. 빨리 답을 주세요. 당신은 어떻게 판결을 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요? 계속 모른척 했을까요? 아니에요. 예수님은 일어나셔서 더 지혜로운 말을 하셨어요.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 여자를 죽이라는 말도 아니고 그 여자를 죽이지 말라고 한 말씀도 아니었어요. 너희 중에 정말 이 여인을 죽여도 좋을만큼 떳떳하게 의로운 사람이 있다면 먼저 이 여인을 돌로 쳐서 죽여도 좋다는 말씀이었어요. 어떻게 되었을까요? 돌로 치라고 했으니 돌을 던진 사람이 있었을까요? 아니요. 성경을 보니까 아무도 없었다고 그래요. 이 여인을 죽이고, 예수님도 올무에 빠뜨리려 했던 많은 사람들이 모두 돌을 그 자리에 놓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던 것이에요.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래요. 돌을 들고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죽이려했던 사람들도 사실은 모두 죄가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말하는 거에요. 


이제 그 자리에는 예수님과 그 여자만 남아있게 되었어요. 


여러분, 예수님은 이 여인을 향해서 돌을 던질 수 있었을까요? 아니면 예수님도 돌을 던질 수 없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죄가 있는냐 없으냐에 따라서 달라져요. 예수님은 죄가 있을까요 없을까요?(네 맞아요.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이에요)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이 여인을 향해서 돌을 던지고 비난하고 조롱할 자격이 없을지 몰라도 예수님은 충분히 할 수 있는 분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을 어떻게 했을까요? 비난하고 조롱하고 판단했을까요? 아니에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아라. 


예수님은 누가 봐도 죄인인 이 여인을 향해 돌을 던지지 않았어요. 불쌍히 여겨주셨던 거에요. 모든 사람들이 다 이 여인을 향해서 불결한 여인, 나쁜 여인, 살 가치가 없는 여인이라고 업신여길 때, 오직 예수님만이 이 여인을 불쌍히 여겨주셨고 이 여인의 편에 서 주셨던 것입니다. 



III. 결론


요즘 어른들을 보면 편을 나누고 편을 가르는데 빠른거 같아요. 너는 누구편이니? 내편이니 제편이니? 내편이 아니면 나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고 나의 적이라고 생각해서 함부로 말하고 심한 편견을 가지고 말하기도 해요. 그러면 될까요? 안될까요? 


우리 친구들은 어때요? 사실 우리 안에는 ‘판사’가 한 명씩 다 들어있어요. 그래서 마음 속으로는 우리는 늘 ‘재판’해요. 만약 우리 안에 판사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과 같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향해서 너무 엄격하게 판단할거에요. 자기는 잘 하지도 못하는 것을 요구할지도 몰라요. 우리 안에서 예수님이 판단하시도록 해야 해요. 용서하고 사랑해서 관대한 마음으로 판단해야 해요. 예수님의 우리 안에 판사가 되도록 여러분의 마음을 드리실 수 있길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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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해석의 원리  (0) 2013.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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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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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정리]


[성도 간의 세상 법정에서의 송사 문제]

1. 성도 간에 문제를 세상 법정으로 가져가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훗날) 세상이 교회로부터 심판 받을 텐데, 너희들이 지극히 작은 일을 판단하지 못하고 세상 법정의 판단을 의존해야 한다니 부끄럽다.


2. 교회 지도자를 어떻게 세운 것이냐? 너희 형제간의 문제를 판단할 만한 지혜로운 사람이 교회에 아무도 없단 말이냐? 어떻게 교회 성도 간에 서로 고발하게 만들며, 그 일을 믿지 않는 사람들 앞으로 가져가게 만드는가? 


3. 이미 피차 고발했다는 것이 너희 가운데 뚜렷한 허물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그들은 너희의 형제가 아니냐?

  : 너희 자신들도 불의하고, 음행하였으며 우상숭배와 간음을 행하고 도적이나 탐심을 가졌던 자가 아니냐? 너희가 그와 같은 처지에 있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로움을 받은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너희 형제가 그와 같은 문제로 인해서 교회 안에서 일이 발생했을 때, 세상 법정까지 가도록 하는 것은 삼가야 하지 않겠느냐? 그냥 불의를 당하고, 속임을 당하는 편이 나은 것이 아니냐?) 


4. 모든 것이 가하지만,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다. 가능하다고 무엇이든 하려고 해서는 안된다.(절제) 왜?

  1)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2)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3) 너희 몸을 창녀와 합할 것인가? 아니면 주와 합할 것인가?

   (1) 사람의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는 것이다. 

   (2) 너희 몸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너희 몸을 하나님께서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생각 정리]


1. 바울은 교회 공동체가 올바른 판단을 못내리고, 세상 공동체(가치관)에게 판단을 맡기는 자리로 나아간 것에 대해서 마음 아파했다. 


이 말은 교회 성도들간의 문제는 세상 법정으로 가져가면 안된다는 것이라기 보다는, 마땅히 교회 안에서 다루고, 다룰 수 있는 문제조차 세상 법정을 의존해야 하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표현한 말일 것이다. 이것은 고린도교회 공동체가 그만한 것도 제대로 판단할 수 없는 수준의 상태라는 것에 대한 바울의 안타까운 마음의 표현이다. 이런 분명한 문제조차 교회가 판단하지 못한다면, 훗날 종말의 중요한 판단을 내려야 할 교회가 어떻게 그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란 말인가!


교회는 세상의 수준보다 높은 혹은 더욱 고상한 판단을 내리는 공동체여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교회에 대해서 놀라게 되는 것이다. 무조건 용서하고 관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그러면 세상은 교회를 우습게 알것이다.) 갈라디아서의 말씀처럼, '온유한 심정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더불어 자신을 돌아보아 더욱 거록한 공동체로 성숙해져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받는 평가는, 교회가 세상만 못하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현실인가! 그것이 교회가 세상에서 조롱받게 된 이유이다. 


2. 복음은 '자유'를 말하지만, 그릇된 사람들은 '방종'을 따른다.


복음은 확실하게 '자유'를 강조한다. 갈라디아서는 그것을 선명하게 한다. 그러나 바울이 복음 안에서 말하는 '자유'는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라는 방식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즉,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라를 법으로 말미암아 <구속된 삶>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의롭게 되기 위해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법에서 자유롭게 된 것이다. 사람이 의롭게 되기 위해서 <율법>에만 묶여있었지만, 이제 그리스도 예수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서 <율법>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의를 얻게 되었다는 측면에서의 '자유'인 것이다. 


율법과 무관하게 살아도 된다는 '방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이 그릇된 이해를 풀기위해 늘 복음을 설명하면서 추가적인 설명을 해야 했다. 자유지만 방종이 아니다. 


탐식에 사로잡힌 자들... 아무거나 자신이 먹고 싶고 먹을 수 있는 것은 다 먹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자유라는 이름으로 과거 전통이 부여했던 '가치관'을 무시했다. 심지어 윤리적인 가치관에서도 그와 같은 일들이 벌어졌다. 자신의 몸을 함부로 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복음 안에서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그것을 자신의 욕구(육체적 소욕)의 근거로 생각한 사람들이 고린도교회에도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성경이 가르쳐준 복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를 지지하는 근거를 '복음으로부터 뽑아, 복음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에 불과한 것이다. 


[적용 생각]


1. 교회가 성장한다는 것은 교회의 가치적 판단이 성장한다는 것이다.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교회가 그 일을 어떻게 판단하고 진행하는가가 그 교회의 성숙도를 드러내 준다고 할 수 있다. 예루살렘 교회에 '헬라파 과부와 히브리파 과부'간의 갈등이 생겼을 때, 사도들은 그 문제를 통해서 자신의 한계를 발견하고 오히려 자신의 본연의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고 그 일에 집중하게 되었다. 


또한 교회에 사도들이 아닌 '일꾼'일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도적인 장치가 따라와야 했던 것이다. 교회는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뭔가를 결정해야 하는 과정 속에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 결정과 과정을 중요시하면, 성장을 위한 계기로 삼아야 한다. 늘 최상의 선택만 할 수는 없다. 그런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전체적인 성숙이 함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2. 복음은 언제나 오해스럽기에 늘 보완되어 설명되어져야 한다.


갈라디아서도 그렇지만, 고린도전서도 마찬가지다. 바울의 전한 복음은 늘 어떤 대상들로 인해 오해를 받는다.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이 완전할 수 없다. 바울의 입장에서도 그렇고 받아들이는 고린도 교회의 사람들의 입장에서도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자는 듣는 자가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그와 같은 행동하는지 살펴야 한다. 그릇되게 이해하는 부분이 반드시 나타나게 될 것이고 그것을 수정하고 교정하는 것이 또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몫이어야 한다. 


복음은 완전하지만, 복음에 대한 설명은 늘 보완되어져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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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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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15호, 태풍 14호가 지나간 오늘은 화창하고 덥네요. 중부지방에는 큰 피해가 없다지만, 제주와 남부, 충청권에는 피해가 적지 않네요. 몇 일간 참 마음 조리며 시간을 보냈는데...자연의 힘이란... 또 자연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힘이란 도대체 어떻게 가늠할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자연과 절대자 앞에 겸비하는 것이 인간의 지혜가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은 솔로몬의 지혜에 대해서 다루는 본문이네요.

 

[정리1. 본문 내용을 이해하기 좋게 정리하기]

1. 솔로몬이 애굽의 왕 바로와 더불어 혼인 관계를 맺어 그의 딸을 맞이한다.(1절)
  1) 바로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다윗 성에 데려다가 두고 자기 왕궁이 완성되기를 기다림.
   : 솔로몬은 아도니야와 요압과 아비아달과 같은 정적들을 제거하고, 나라를 내부적으로 견고하게 했다. 그 뒤를 이어 주변 국 중 강대국과 정략결혼을 통해 외부적 안정을 꾀한 것 같다.

2.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리는 솔로몬의 기도제목과 응답
  1) 성전을 건축하기 전이라 백성들이 산당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처럼 솔로몬도 산당에서 제사를 지냈다.
  2) 한 번은 왕이 기브온 산당(좀 큰 산당인데)에서 일천 번제를 드리던 중 꿈을 꾸게 됨
  3)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소원을 묻자, 솔로몬은 장수도, 부도, 원수의 제거도 구하지 않고 오직 지혜로 백성을 판결할 수 있게 해달라고 구하자 하나님께서 이것을 좋게 보시고 지혜를 주실 것을 약속함. 더불어 다윗처럼 하나님의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날이 길 것을 약속하는 꿈.
  4) 솔로몬은 꿈에서 깨어 기도의 응답으로 보고, 예루살렘으로 와서 번제를 드리고는 잔치함.

3. 솔로몬의 지혜로운 재판 사례
  1) 창기인 두 여인이 비슷한 시기에 낳은 아들 중 살아 있는 아들이 서로 자기의 아들이라고 우기는 재판을 하게 됨
  2) 솔로몬은 그 살아있는 아이를 칼로 쪼개어 나누어 주라고 하자 친모는 그 아이를 가질 것을 포기했지만, 거짓모는 둘로 쪼개자고 함
  3) 두 여인의 반응을 통해서 친모를 찾아준 솔로몬의 지혜로운 판결의 예를 보여 줌.

[정리2. 본문 내용의 재구성]

솔로몬은 왕위를 위협할 수 있는 정적들을 제거하고 내부적으로 나라를 견고히 했다.(2장) 더불어 솔로몬은 대외적으로는 당시의 강대국 애굽의 딸과 정략적으로 결혼함으로 대외적인 안정을 꾀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 다음 솔로몬이 하려고 했던 것은 왕으로 많은 백성을 다스릴만한 능력을 겸비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그는 기브온 산당에 가서 일천번제를 드렸다. 그리고 그 와중에 꿈을 통해서 하나님께 그의 간절한 소원을 아뢰었고, 하나님은 그것을 기쁘게 받으셔서 그의 소원대로 백성들을 다스릴 지혜를 주신다고 약속한다. 꿈에서 깨어난 솔로몬은 기도의 응답으로 알고 예루살렘으로 와서 번제를 드리고, 모든 신하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푼다. 왕으로서 중요한 통치 능력을 하나님으로부터 허락받게 된다.

그 이후 솔로몬의 지혜를 입증할만한 결정적인 재판이 열린다. 갓난아이의 생모를 판별하는 재판이다. 솔로몬은 이 재판을 지혜롭게 행하므로 그의 지혜가 탁월함을 확인하게 된다.  

 

[정리3. 묵상과 적용] 

1. 왕의 능력은 백성의 일을 지혜롭게 판단해 줄 수 있는 능력이다.

  솔로몬은 정적을 제거할 수 있는 결단력이 있었다.(2장) 또한 국제 정세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알 고 있었다.(3:1) 솔로몬은 이 두가지 부분에 대해서 하나님께 구하지 않았다. 솔로몬인 일천번제를 드리면서까지 간절히 얻기를 원했던 것은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을 정리해주고 판별해 주는 일을 현명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인 것이다.

   오늘날의 통치라는 것이 경제와 외교, 정치적 안정 모두 중요한 것이지만, 백성을 억울하게 만들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정치의 기본이 아닌가 싶다. 힘과 권력을 가졌다고 보호받고(불의한 것까지도) 힘없고 가난하다고 보호받지 못하는(오히려 자신을 보호하려는 의사표현까지도 법으로 처벌하는 방식) 불의한 사회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불의한 것을 바로 잡고(부패 척결), 복잡하게 얽혀있는 문제를 풀어주어(양극화를 조장하지 말고) 정직하게 성실하게 살면 생활이 보장되는 상식적인 사회를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이것을 이루기 위해 복잡한 변수들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겠으나...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의 기본능력을 바로 이 것을 실현하는 능력이 아닐까 싶다.

 

2. 참과 거짓은 무엇으로 구분하는가? 살리는 자인가 죽이는 자인가?

참이란 무엇인가? 옳은 것이 아니라, 살리는 것이다. 옳은 것이 참이 아니라 살리는 것이 참인 것이다. 거짓이란 무엇인가? 틀린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이다. 틀린 것은 거짓이 아니라 죽이는 것이다.

참이란 도그마가 아닐게다. 그것은 자신의 갓난아이를 살리고자 포기하기로 결단한 어머니의 마음이다. 어머니의 마음이 참이고, 그것이 진리인 것이 아니겠는가? 예수가 진리인 까닥은 도그마에 있지 않고, 예수를 통해 우리를 살리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어머니 마음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예수를 통해 누군가를 죽이는것이란 참이 아니요 거짓이 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살리는 사람인가 죽이는 사람인가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살리기 위해서 포기할 수 없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 사람이다. 내가 가짐으로 살아 나다면 우리는 가져야 한다. 그러나 내가 가짐으로 죽는다면 우리는 포기해야 한다. 내가 포기함으로 살릴 수 있다면, 우리는 포기해야 한다. 내가 중심이 아니다. 생명이 우선이다.

(성경 본문의 의도와 달리 너무 멀리 왔다는 생각을 합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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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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