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여호수아 12장] 여호수아를 설명하면서 언제나 모세가 함께 등장한다. 그것은 여호수아의 리더십을 평가할 때, 모세의 리더십을 빼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모세와 여호수아는 하나의 패키지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모세 + 여호수아 -> 이스라엘에 참된 지도자>라는 공식을 만드는데, 공부 잘하는 학생은 그 공식을 통해서 나온 지도자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정리1.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간략하게 정리함]


1. 모세가 정복한 왕들(요단 동편에서 정복한 왕들)

  1) 요단 동편에서 이긴 왕들의 명단을 나열함

   (1) 시혼: 헤스본에 거주하던 아모리 족속의 왕_ 요단 남단을 지배하던 왕으로 추측(?)

   (2) 옥: 르바의 남은 족속으로서 아스다롯과 에드레이에 거주하던 바산의 왕_북단을 지배(?)

  2) 모세가 그 땅을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 지파에게 기업을 주었다.


2. 여호수아가 정복한 왕들(요단 이편에서 정복한 왕들)

  1) 정복한 성: 여리고, 아이, 예루살렘, 헤브론, 야르뭇, 라기스, 에글론, 게셀, 드빌, 게델, 호르마, 아랏, 립나, 아둘람, 막게다, 벧엘, 답부아, 헤벨, 아벡, 랏사론, 마돈, 하솔, 시므론 시론, 악삽, 다아낙, 므깃도, 게데스, 갈멜의 욕느암 왕, 길갈 돌의 높은 곳의 돌 왕, 길갈의 고임 왕, 드르사 왕(모두 31명의 왕)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글을 다시 풀어서 쓰기]


대략적인 가나안 정복을 마치고 정복하여 승리한 성과 왕에 대한 정리를 한다. 가나안 정복의 승리는 모세를 통한 승리와 여호수아를 통한 승리로 나누어지는데, 모세는 요단 동편에서 시혼과 옥을 이겨 그 땅을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에게 기업으로 주었다. 

여호수아는 요단 이편으로 건너와서 여리고로부터 시작해서 31개의 성읍을 정복하고, 31명의 왕을 죽였다. 



[정리3.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메시지와 묵상들]


1. 가나안 정복은 모세와 여호수아와의 합작품


가나안 정복을 정리하면서, 요단 동편에서의 승리도 기록한다. 이는 여호수아 이전의 리더십인 모세도 가나안 정복을 함께 한 인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세는 요단을 건너기 전까지 상징적이고 결정적인 전쟁을 승리한다. 이것은 하나의 예표가 되어 가나안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효과가 있었다. 


여호수아는 요단을 건너, 모세를 통한 예비적 승리가 궁극적 승리의 예표였음을 확인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모든 전추에서의 승리를 가져왔고 가나안 31명의 왕을 죽이고 그 성을 차지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모세는 가나안 정복의 기초를 놓았고, 여호수아는 정복을 완성시켰던 것이다. 여호수아의 기자는 가나안 정복을 단순히 여호수아 만의 승리로만 기록하고 있지 않고, 모세와의 합작품임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2. 모세는 D-day, 여호수아는 V-day를 상징한다?


모세는 가나안 전쟁 승리의 기초를 마련한다. 여리고 성을 포함한 가나안 왕들은 모세를 통해서 이룬 역사, 즉 애굽의 바로를 대항해서 홍해를 건넌 것과 요단 동편에서 시혼과 옥을 상대로 승리한 것으로 인해 이미 두려워하고 있었다. 모세는 가나안 정복의 결정적인 승리를 예표하는 승리를 이미 거둔것이 아니겠는가! 여호수아는  전쟁의 완성 즉 지상군이 되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그곳에 있는 적들을 소탕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기에 완전한 승리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겠다.(큰 그림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여호수아의 정복이 완벽하고 깔끔한 승리는 아니기에. 그러나 큰 틀에서는 그런 그림으로 볼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모세와 여호수아를 합친 지도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될 것이다. 그분은 결정적 승리를 십자가로 이루시고, 최종적 승리를 위해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3. 모세만으로는 부족하다. 여호수아가 필요하다.

   여호수아만으로도 부족하다. 모세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모세나 혹은 여호수아가 된다는 것도 어렵다. 보통 이상의 뛰어난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지도자라고 하더라도 모세가 여호수아의 역할까지 감당하기란 힘들다. 역으로 여호수아가 모세의 역할까지 감당하는 지도자가 나온다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의 한계를 인식하고, 서로가 모세가 되도록 여호수아가 되도록 어쩌면 모세와 여호수아의 중간 어딘가의 리더가 되도록 격려하고 지원해 주어야 한다. 그래야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감히 모세와 여호수아 모두를 겸비하려고 한다. 그리기를 원하는 욕심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것은 현실성이 떨어진다. 오히려 모세와 여호수아 사이의 여러 리더십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목표를 이룰 수 있도록 서로 세우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서로가 필요한 리더라는 사실을 인식하여 세우는 것으로부터 승리는 시작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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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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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여호수아 3장] 모세는 과거와의 단절을 여호수아는 미래와의 연결을 이루었던 지도자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과 부활을 통해 과거와의 단절을 미래와의 접촉을 그의 백성들에게 선물하셨던 분이다. 우리는 지금 과거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시대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 있다. 광야 이전(애굽의 노예)도, 광야 시대도 아닌 가나안 시대로 들어가야 할 시대다. 새 시대의 지도자와 함께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갑시다. 

 

 

[정리1.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1. 요단 강을 건너기 위한 과정들
  1)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모든 이스라엘과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 거기서 유숙하였다.
  2) 사흘 후에 관리들이 진중으로 돌아다니며 요단을 건너는 일에 대한 지시를 내렸다.
   (1)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것을 보거든 그를 뒤 따르라.
   (2) 그러나 언약궤와 너무 가까이 있지는 말고 2000규빗 정도의 거리를 두라.
   (3)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기이한 일을 행하시리라.
   (4)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나아가라.
   (5)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은 요단 물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도록 하라.
   (6) 이스라엘 지파 중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열 두 명을 택하라.
   (7)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이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물이 끊어져 쌓이리라.
  3) 요단강을 실재로 건너는 과정
   (1)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 나아가고 백성들은 장막을 떠났다.
   (2) 요단이 곡식을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쳤는데,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 물이 끊어짐.
   (3) 백성들은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너고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넜다.

 

2. 요단강을 건넘을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들
  1) 내가 오늘부터 여호수아를 이스라엘 목전에서 크게 하여서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백성에게 알게 하겠다.
  2)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계시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히위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너희 앞에서 좇아내실 것을 이것으로 알게 하리라.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내용을 다시 풀어서 쓰기]

 

여호수아는 정탐꾼의 보고를 통해서 여리고 사람들이 두려움 가운데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신속하게 행동하기로 결심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요단 가까이로 이동시켰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지시와 방법을 기다린다.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통해서 여리고 진격 방법을 제시하신다. 제사장이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을 밟고 건넌다는 것이다. 백성들은 제사장의 뒤를 따라 요단강을 걸어서 건넌다는 계획이었다. 물론 제사장이 요단강을 밟을 때 요단강의 흐름이 멈추게 될 것이고(마치 홍해가 갈라진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이 마른 땅을 건너가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백성들은 언약궤가 너무 가까이 있어서는 안되고, 약 2000규빗 정도의 거리를 떨어져서 좇고, 따르기 전에 자신을 성결하게 할 것을 준비시켰다.


실제로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강을 밟았고, 요단 강은 멈췄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 앞을 걸어서 건너는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기적의 역사는 두 가지 확신을 주었는데, 하나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하셨던 것처럼 여호수아에게도 함께 하신다는 확신과 또 다른 하나는 가나안의 7족속을 좇아내고 그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정리3. 정리하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메시지와 묵상들]

 

1. 모세에게는 홍해 사건, 여호수아에게는 요단강 사건

 

모세는 홍해를 건너는 과정을 통해서 애굽과의 단절을 완성한다. 이전 세대의 출애굽 1세대가 홍해를 건너는 큰 경험을 했던 것처럼 2세대는 여호수아와 함께 요단강을 건넘으로서 가나안 정복의 시작을 알리게 된다. 모세의 홍해는 과거와의 단절이며, 여호수아의 요단강은 미래와의 접촉인 셈이다. 과거와의 단절이 중요한 것만큼 새로운 시대와의 접촉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분기점이 된다. 그 사이에 모세가 있고, 여호수아가 있다.

 

우리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지도자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두 가지 시점을 연결한다. 죽음은 과거와의 단절을, 부활을 미래와의 접촉을. 그렇게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모세와 여호수아를 합친 이상적 지도자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모세와 여호수아가 완전한 단절과 완전한 접촉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 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온전히 이루셨다는 차이는 있지만 말이다.

 

새로운 시대란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지경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마무리 되어야 한다. 대선을 앞둔 우리는 지금 새로운 시대로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옛 시대에 남아 있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과 같은 형국이다. 국민들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가 우리의 지도자를 결정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새 시대의 문턱에 와있다. 요단을 건너는 이번 대선이 되면 좋겠다. 40년 전 다시 광야가 아니라 약속의 땅, 희망의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서는 새로운 시대로의 대선이 되면 좋겠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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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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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에스라 9장입니다. 천신막고 끝에 도착한 예루살렘에 와서 들은 첫번째 보고는 참으로 참담한 것입니다. 에스라의 비통함과 더불어 하나님의 백성일지라도 죄라는 것은 그 뿌리가 매우 깊어서 쉽게 뽑히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1차. 본문의 내용을 사실 그대로 재배열 하도록 힘씁니다.]

1. 에스라의 귀환 후에 본 예루살렘의 형편(1-2)

1) 방백들이 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방사람들과 통혼함 고백.

: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자손을 그 지방 사람들과 섞이게 함.

2) 그 중에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함.

2. 이 소식을 들은 에스라의 반응(3-5절)

1)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자리에서 떠나지 못함.

2)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두려워 떠는 사람들이 에스라 주변으로 몰려들게 됨.

3) 에스라는 저녁 제사드릴 때까지 기가 막혀 앉아 있다가, 제사 때에 근심 중에 일어나 무릎을 꿇고 기도함

3. 에스라의 회개 기도의 내용(6-15절)

1) 하나님 내가 하나님 뵐 면목이 없습니다. 부끄럽습니다.

2) 우리가 조상 때부터 이런 죄악을 행해서 하나님께서 여러 왕들의 손에 우리를 넘겼습니다.

3) 그런데 하나님께 우리에게 잠시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를 돌아오게 하시고 소생케 하셨는데(이제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울타리가 있게 해주셨는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행하신 후에도 우리가 주의 계명을 또 저버렸사오니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10절)

4) 또 다시 이방인과 통혼함으로 말미암아, 더럽게 하였으니 우리 중에 주 앞에 한 사람도 감히 서지 못하겠나이다.

 

[2차. 정리한 내용을 이제 자신의 것으로 다시 정리합니다.] 본문에서 강조하는 메시지의 크기와 집중도에 따라 재배열한다고 보면 좋겠습니다.

1. 아닥사스다 왕의 호의로 2차 귀환한 에스라. 어려움을 극복하며 예루살렘으로 왔지만, 예루살렘에서 들은 그곳의 형편은 참담한 것이다. 성전만 회복되어 있지, 이들의 삶이라는 것은 전에 조상들의 모습과 전혀 다를바가 없는 것이다. 우상 숭배와 통혼으로 인해 하나님의 땅과 백성을 더럽혔던 선조들의 죄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우상 숭배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이들은 이방 여인을 아내와 며느리로 맞아들인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 일을 방백들과 고관들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앞서서 행하고 있는 것이다.

2. 이런 현실 앞에서 에스라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옷을 찢고, 자기의 머리털과 수염을 뜯는 것 말고, 자리에 맥없이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저녁 제사를 드릴 때 즈음에 에스라는 자리에서 간신히 일어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기도한다.

3. 기도의 내용이란 무엇인가? 기도하기에도 부끄럽습니다. 감히 부끄러워서, 죄송해서 할 말이 없습니다. 이전의 선조들의 죄로 진노하셨다가, 자비를 베푸셔서 그 중에 남은 자만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은혜를 주신 것인데 그 은혜를 받은 우리가 또 다시 그와 같은 일을 백주대낮에 하고 있으니.. 하나님 할 말이 없습니다. 이것이 에스라의 기도 내용이다.

4. 아, 어쩌란 말이냐? 도대체 이 민족은 어쩌란 말이냐? 한두 번도 아니고, 다시 한 번 살려달라고 기도조차 할 수 없다.(왜? 살려주면 뭐하냐 또 그렇게 안 된다는 법이 없으니...)

 

[3차. 묵상 및 적용]

1.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함에 있어서도, 일반 백성들이 지는 죄와 방백과 고관들이(제사장과 레위인까지) 주도적으로 죄를 짓는 것은 상당히 차원이 다르다.(2절)

  백성들이 죄를 짓는 경우라도, 그것을 통제하거나 제어할 수 있는 고관과 종교 지도자들이 바르다면, 백성들의 죄는 시정되거나 충분히 견제 될 수 있다. 따라서 쉽게 확산되지 않는다. 그러나 고관과 종교 지도자들이 그 죄에 있어서 으뜸이 된다는 것은 그 죄를 막을 제어장치가 전혀 없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런 사회는 자생적인 회복이 불가능하다. 이런 사회는 결국 민초들의 폭동으로 전복되는 결과 말고는 다른 변혁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 에스라는 귀환한 공동체에서 이런 모습을 본 것이다. 권세는 하늘로부터 온 것이다. 그리고 그 권세를 맡기신 하나님의 뜻은 선을 장려하고 악을 제어하라는 것이다. 그런 기본적인 틀 아래에서 우리는 권세에 순복해야 한다. 그러나 권세가 악을 조장하고, 불의를 일삼으며 오히려 정의를 왜곡하는 자의 편에 서서 의를 버리고, 거짓을 조장한다면... 도대체 그 권세을 따라야 할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그 권세의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인가? 그와 같은 권세도 하나님이 이 세상을 위해서 주셨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롬 12장에서 말하는 정당한 국가 권세에 대한 말씀이 과연 여기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인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지도층의 타락, 특히 불의를 조장하고 거짓으로 약한 자의 작은 것까지 빼앗아 자신의 배를 불리거나, 그것을 돕는 권세는 브레이크 없는 덤프 트럭과 같다. 

 

2. 귀환한 백성들도 역시, 우리 안에 있는 뿌리깊은 죄

 귀환한 백성들의 이야기를 다룬 에스라나 느헤미야나 처음 장면과 달린 마지막 장면은 우울하다.  구별되고 선별된 백성이었지만, 결국은 선조와 똑같은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회복시키셨는데도 그리고 그 중에서 엄선된 사람들, 엄선된 백성들인데도 결국은 또 원래의 모습(죄의 지배를 받는 모습)으로 돌아와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에스라가 다시 노력하고, 느헤미야가 다시 노력하지만 그 이후가 어떻게 될지는 장담할 수 없다. 이제 혈연적으로 남겨진 백성만으로는 진정한 회복을 기대할 수 없다. 이들도 답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이스라엘을 회보시킬 것인가? 하나님의 언약은 어떻게 성취될 수 있는 것인가? 돌아온 유다 백성도 아니라면, 에스라도 느헤미야도 아니라면 누가 모세의 뒤를 이은 선지자가 되어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것인가? 

이런 궁금증과 두려움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시는 것은 아닌가 본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의 언약백성들이 가지는 질문들에 대한 답으로 세로은 세계를 열고 등장하시는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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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8장은 완전한 대제사장에서 새언약 중보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한다. 이와 같은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불완전한 (대)제사장의 한계가 무엇이었는지, 새언약과 대치되는 옛 언약은 어떤 것이며 어떤 차이와 공통점이 있는지 살펴봐야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 진다.

그와 같은 개략적인 내용은 히브리서 8장을 읽어봐도 대략 알 수 있다. ^^

 

히브리서 8장 내용의 골자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으리라 생각한다.

전에도 언약이 있었지만, 그 언약을 이루어 낼 능력이 사람 안에는 없었다. 이것이 모세의 율법이 가지는 한계였다. 율법 그 자체, 옛 언약 그 자체는 옳고 맞는 것이나, 그 언약을 지키겠다고 받은 그 백성의 연약함과 죄(성)가 그 언약에 신실하게 응답하지 못하게 함으로 언약을 깨뜨려 버리는 것이 되고 말았다. 따라서 언약의 신실성을 통해 회복을 원하셨던 하나님의 뜻은 요원해지는 것 같았다.(구약의 역사)

그러나 하나님은 새 언약을 준비하셨다. 새 언약은 내용의 새로움이 아니다. 그 언약을 체결한 자와 그 언약을 성취해 가는 방식이 새로운 새 언약이다. 율법과 언약을 문서(돌판)에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에 두고, 마음에 새기는 방식으로 언약 성취의 방식을 바꾸신 것이다. 전에는 내 힘과 능력에 의존해서만 언약의 성취여부가 결정되었지만, 새 언약은 그 방식이 달랐다. 언약을 내 생각 내 마음에 새기심으로 내 안에서부터 일어나는 능력(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한 도우심, 성자 하나님의 중보하심으로 성취가 보장되는)으로 언약을 성취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와 같은 새 언약(성취되도록 하는)을 전해주신 분이요, 이 분이 바로 우리의 대제사장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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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5:11-14에서 저자가 멜기세덱에 대해서 설명하고 싶은데 히브리서를 읽는 독자들의 수준이 충분치 못해(너무 연약해서) 말하고 있지 못하다가 히브리서 7장에 가서야 조금씩 저자가 하려고 하는 내용들을 말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히브리서 6장은 하나의 중간 삽입적 내용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히브리서 7장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처음에는 멜기세덱의 독특성을 말한다.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드린 것을 통해서 볼 때, 아브라함보다 높은 존재라는 것을 말한다(1,7절). 이런 행위는 또한 당시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었던 레위 지파까지도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린 격이기 때문에 멜기세덱은 레위지파(제사장) 보다도 높은 수준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9,10절)

더불어 제사장의 혈통과 활동에 대한 규정을 주고 있는 율법을 통해서 볼 때, 멜기세덱의 제사장적 역할은 율법과 어긋나는 것 뿐 아니라, 율법의 바뀜을 말하는 것이다.(11,12절) 사실 율법은 약하고 무익하다는 것이 드러났으므로, 하나님은 율법을 폐하시고 다른 방식으로 제사장을 세우신 것이다.(15,16절)

그런데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세워진 제사장은 더 완전하고 온전한 제사장이다. 오히려 율법으로 세워진 제사장는 자신의 죄를 위해 제사드려야 하는 존재였으나, 새로운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그럴 필요가 없을 만큼 악이 없이 거룩하다. 따라서 자신을 위해 제사드릴 필요도 없고, 단번에 자기를 드려 제사를 드리심으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할 수 있으셨다.(22-28절)

예수님은 레위 지파를 따라온 제사장은 아니지만,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제사장이요 이는 오히려 레위 지파를 따른 제사장 보다 더 월등한 것이다. 물론 율법에서 벗어나는 문제가 발생하겠지만, 오히려 율법은 연약하고 무익하여 폐한 것이고(18절) 하나님이 더 완전한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운 것인데, 이는 오히려 더 뛰어나고 월등하여 구원의 더 큰 소망이 된 것이다.

그러니, 예수가 제사장 지파가 아니라는 혈통적 문제와 율법과 다르다는 문제에 대해서 오히려 벗어나 더 큰 소망을 가진 교회 안에 머물러 있으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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