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 25장] 나보다 선하고 괜찮은 사람이 혹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그 고난이 나에게 오지 않았다고 다행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 고난은 곧 나에게도 더 크게 임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런 장면을 목격한 그 순간(깨닫게 된 순간: 나도 괜찮은 사람에게 왜 저런 일이 있는가?) 그 때가, 우리 자신에게 닥칠 더 큰 재앙을 두려워하며 겸손해야 할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것은 재앙의 신호탄이니까요.



[정리1.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1. 유다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하심과 70년간 바벨론의 왕을 섬길 것이다. 

  1)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넷째 해 곧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원년에 주신 말씀.

  2) 요시야 13년부터 지금까지 여호와의 말씀을 예레미야가 꾸준히 일렀으나 순종하지 않음.

   (1) 너희는 각자의 악한 길과 악행을 버리고 돌아오면 해를 당하지 않으리라.

   (2) 그러나 너희들은 여호와의 말을 순종하지 않음으로 스스로를 해한 결과가 되었다.

  3) 여호와께서 북방 종족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불러 이 땅과 주변 모든 나라를 쳐서 진멸하여 그들을 놀램과 비웃음 거리가 되게 하며 땅으로 영원한 폐허가 되게 할 것이라. 

  4) 모든 즐거운 소리가 끊어지고, 70년간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5) 그러나 70년이 지나면 하나님께서 바벨론 왕과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벌하리라. 

  6) 하나님께서 그 땅을 향하여 예언하고, 예레미야가 이 책에 기록한 나의 모든 말을 그 땅에 임하게 하리라. 


2. 모든 나라에 내리는 진노의 술잔을 마시게 하라.

  1) 너는 내 손에서 이 진노의 술잔을 받아가지고 보내는 모든 나라로 마시게 하라.

  2) 그들이 마시고 비틀거리며 미친 듯이 행동하리니... 이는 내가 그들 중에 칼을 보냈음이라.

  3) 진노의 술잔을 마시게 할 민족과 나라

   (1)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과 그 왕들과 그 고관들로 마시게 하라. 

   (2) 애굽의 왕 바로와 그 신하들과 그의 고관들과 그의 백성들, 모든 섞여 사는 민족들

   (3) 우스 땅, 블레셋의 여러 도시의 백성들, 에돔, 모압, 암몬, 두로, 시도, 드단, 데마, 부스, 아라비아, 광야에서 섞여 사는 민족들의 모든 왕과, 시므리, 엘람, 메대, 북쪽 원근의 모든 왕과 지면에 있는 세상의 모든 나라로 마시게 하라. 세삭 왕은 그 후에 마시게 하라. 


  4) 너는 이 진노의 술잔을 이 민족과 나라들 앞에 마시게 하되, 혹 마시기를 거절하거든 반드시 마셔야 한다고 말하라.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성에서부터 재앙을 시작하셨은 즉 어찌 능히 형벌을 피할 수 있겠는가?

  5) 여호와께서 자기 민족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민족과 다투기로 작정하셨다. 악인을 칼에 내어 주신다. 

  6) 보라 재앙이 나서 나라에서 나라에 미칠 것이며, 큰 바람이 땅 끝에서 일어날 것이다. 죽임을 당하는 자가 많을 지라도 애곡하거나 시신을 거두어 주는 자가 없을 것이다. 

  7) 목자들은 도망할 수 없겠고, 양떼의 인도자들은 도주할 수 없으리라. 젊은 사자가 그 굴에서 나와 분노와 그의 극렬한 진노로 말미암아 땅이 황폐하게 될 것이라.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을 다시 내 방식으로 풀어쓰기]


하나님께서 유다의 죄에 대한 지적과 심판에 대한 말씀이다. 오늘 본문에서 좀 다른 것은 예언의 때를 정확하게 언급한다는 것이다. 여호야김 넷째 해라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요시야 왕 13년부터 그 때까지 부지런히 백성들의 죄를 하나님을 대신해서 언급했으나, 이 백성들은 순종하지 않아 결국 화를 자초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또 하나 다른 점은 그 심판의 시간이 70년이라는 것을 언급하신다. 바벨론 왕을 70년간 섬길 것이라는 제한을 두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여기에서 예레미야에게 유다 백성에 대한 심판 말고, 유다를 시작으로 해서 모든 주변 열방들에 대한 심판도 함께 하실 것을 말씀하신다. 그 진노의 술잔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 이름으로 된 성읍도 심판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볼 때, 그 외의 나라에 대한 심판은 피할 수 없는 것임을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심판하실 때 모든 백성과 싸우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젊은 사자가 굴에서 나와 모든 땅을 황폐화시키듯이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나라에 임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정리3. 정리하면서 자연스러게 받는 교훈과 묵상]


1.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심판하시되 70년이라는 제한을 두셨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라도 심판하신다. 그런 측면에서 이스라엘은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마치 심판 받지 않을 것처럼 자만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언약도 있고 성전도 있고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를 최종적으로까지는 심판하지 않으리라고 오해했던 것 같다. 예레미야는 그런 이스라엘의 기대를 박살내 버린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멘붕에 이를 때까지.


그러나 오늘 본문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영원히 멸하기를 원하시지는 않으신다. 70년이라는 제한을 두신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서 육체적 이스라엘 모두가 참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려주시고 그 중에는 가라지도 함께 있었다는 것도 보여주신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니은 알곡과 가라지, 참 백성과 그렇지 않은 백성을 구별해 내신다. 그리고 알곡을 밟아 완전히 으깨지도록까지 하시지는 않는다. 깨닫고 알게하여 돌아오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기계적으로 안심할 수 있게 하시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우리의 행동과 하나님의 감정에 따라 운명을 최종적으로 바꾸시지도 않는다. 안심할 수 없으면서도 영원한 돌봄의 관계가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에 긴장으로 존재한다. 


2. 유다의 심판은 모든 열방의 심판의 시작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 이방의 악한 나라를 통해서 자기 백성을 심판하실 때, 이스라엘은 억울하다고 말했을 것이고, 이방 나라들은 오히려 방자히 행동했을 것이다. 하나님을 무시하기까지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이유가 있으시다. 이방의 악한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책망할만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더 악했다. 그러나 덜 악한 이스라엘을 책망하심으로서(이방인에 의해서) 하나님은 그 이방인들을 명백하게 심판하실 근거를 마련하시게 된다. 상대적으로 덜 죄를 지은 자기 백성도 심판하셨다면, 상대적으로 많은 죄를 지은 이방 민족에 대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뒤 따르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시작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열방에 대한 심판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에 불과했다. 


우리는 누군가 심판을 받을 때, 잘 봐야 한다. 그가 상대적으로 덜 악한 자인데도 불구하고 심판을 받고 있다면, 오히려 더 악한 우리는 두려워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심판이 나에게 먼저 오지 않고 작은 자에게 먼저 왔다는 것은 그것을 보고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지막 사인인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겸손할 수 있어야 하며, 주변의 작은 일 속에서도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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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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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24장] 대선을 앞두고 심판론이 오고 갑니다. 한쪽에서는 이명박 정권 심판론, 다른 한쪽에서는 노무현 정권 심판론. 누가 이 심판의 대상이 되고 누가 이 심판으로부터 잠시 벗어날수 있을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혹 이번에 그 심판이 빗겨갔다고 해서 지은 죄(잘못)에 대한 대가까지 빗겨가리라고 생각하지는 마세요. 극히 나쁜 무화과 광주리는 먹지 못할 것이라 결국 버림을 받게 되니까요. 



[정리1.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1. 역사적으로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냐(여호야긴)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2.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보여준 환상: 

  1) 성전 앞에 놓인 무화과 두 광주리

  2) 한 광주리의 무화과는 극히 좋은 무화과이고, 다른 한 광주리는 극히 나쁜 무화과.

  3) 하나님의 말씀(메시지)


   (1)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금 이곳에서 갈대아인의 땅에 옮겨지는 유다 포로를 하나님은 좋은 무화과 같이 잘 돌볼 것이다. 그들을 잘 돌보고 다시 이 땅으로 인도하여 세울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주어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라. 그래서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2) 그러나 내가 유다 왕 시드기야와 그 고관들과 예루살렘 땅에 남은 자와 애굽 땅에 사는 자들을 나빠서 먹을 수 없는 이 나쁜 무화과 같이 버릴 것이다. 그들은 세상 모든 나라 가운데 흩어져서 환난을 당할 것이며,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며 조롱과 저주를 받게 하리라. 내가 칼과 기근과 전염병을 그들 가운데 보내 그들을 멸절하기까지 이르게 하리라.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을 다시 내 것으로 재구성하기]


본문은 역사적으로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냐(여호야긴)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에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주신 환상이다. 예레미야는 성전에서 두 무화과 광주리를 본다. 하나는 극히 좋은 무화과 광주리고, 다른 하나는 극히 나빠 먹을 수 없는 무화과 광주리다. 


여고냐(여호야긴) 왕과 함께 잡혀간 여럿의 포로들로 인해 나라는 슬픔과 비통에 잠겼을 것이다. 그리고 그를 대신해 바벨론 왕에 의해 세워진 시드기야 왕이 유다를 통치하고 있던 상황이다. 지금 잡혀간 그들이 비참하고 불쌍해 보이지만, 하나님은 다른 말씀을 주신다. 지금 잡혀간 왕과 신하와 백성들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잘 돌보고 세워 극히 좋은 무화과처럼 만들겠다고 하신다. 오히려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시드기야와 그 신하들 그리고 그 땅의 백성들이 극히 나쁜 무화과처럼 버려지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 



[정리3. 정리하면서 드러나는 자연스러운 생각들, 묵상들]


1. 하나님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신다. 


여고냐가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을 때, 사람들은 슬퍼했을 것이고 이와 같은 큰 불행이 닥친 것에 대해 비참해 했을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남겨진 시드기야와 신하들, 백성들은 그나마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운명은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을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여고냐가 극히 나쁜 무화과라고 생각하고, 시드기야가 극히 좋은 무화과가 아니겠는가 하는 독자들의 기대를 여지없이 깨뜨리신다. 


하나님은 오히려 바베론의 포로로 잡혀간 여고냐와 그 백성들을 극히 좋은 무화과라 말씀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이 친히 돌보시고 돌아오게 하시고 다시 심어서 뽑히지 않겠다고 하신다. 하나님의 꿈꾸시던 일을 이들을 통해 이루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반면, 현재의 비참과 모멸을 피해 오히려 영광의 자리에 오른 시드기야와 그 신하들, 백성들에게 대해서는 극히 나쁜 무화과라고 평가하시면서 버려질 것을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신다. 영원히 놓지 않을 것처럼 말씀하시다가도 영원히 벌하실 것처럼 돌이키신다. 그리고 파멸 시키실 것처럼 그들을 적국의 포로로 잡아가게 하신다. 그런데 거기서 다시 돌아오게 하고 회복시켜 세운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변덕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격체인 우리를 만들어가시는 방법임을 깨닫게 됩니다. 



2. 현재의 성공과 현재의 살아남이 진정으로 극히 좋은 무화과이기 때문일까?


모든 재난과 심판을 피해 살아남은 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쉴 것이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행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극히 나쁜 무화과라 곧 버림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모든 비난과 판단과 죄에 대한 대가를 지금 당장 받지 않는 것 같다고 하더라도(약간의 성공과 성취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것이 옳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닐 수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시드기야와 그 정부도 살아남았다고 안도했으나 사실 그들은 완전히 버림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큰 재난을 피해서 약간의 성공을 이루고 큰 환난 속에서 살아남았다고 해서 자만해서는 안될 것이다. 내용이 그릇된 자들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시고 조롱과 수치가 되게 하시기 때문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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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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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23장] 거짓 선지자들은 서슴지 않고 말한다. 내가 하나님의 회의에 참석했다고, 내가 하나님과 무척 가깝다고 그리고 매우 신비로운 방식으로 나는 말씀을 들었다고... 그들은 너무나 확신하여 타인을 현혹한다. 너무 큰 확신을 가지고 있는 열정적인 종교인을 주의하라.



[정리1.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자]


1. 하나님의 양떼들을 멸하며 흩어지게 하는 목자에게 말씀하신다.(화가 있도다.)

  1) 너희가 내 양 떼를 흩으며 그것을 몰아내고 돌보지 않았다. 그 악행에 너희를 보응하리라.

  2) 내가 그 몰려갔던 양 떼들을 모아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 그들이 번성하리라.

  3) 내가 그들을 위하여 목자들을 세우리니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잃지 않으리라. 

  4)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그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할 것.

  5) 그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지 않고, 북쪽 땅 그 모든 쫓겨났던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 것이다. 그들이 자기 땅에 살 것이다. 


2.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에게 대해서 말씀하시다.

  1) 선지자와 제사장이 다 사악하다. 여호와의 집에서도 그들의 악함이 발견된다. 그래서 그들은 우둔하게 되었고 어두운 가운데 미끄러운 곳과 같이 되었다. 그들은 엎드러진다. 

  2) 사마리아 선지자들의 우둔함: 바알을 의지하여 예언하고 이스라엘로 그릇되게 한다. 

  3) 예루살렘 선지자들의 가증함:

   (1) 그들은 간음을 행하며 거짓을 말하며 사람으로 악에서 돌이킴이 없게 한즉, 그들은 내 앞에서 소돔과 다름이 없고 그 주민은 고모라와 다름이 없느니라. 

   (2)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쑥을 먹이고, 독한 물을 마시게 하리라. 

  4) 따라서 너희들은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믿지 말라. 

   (1) 그들은 헛된 것을 말하고, 완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길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2)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들었는가!

   (3) 여호와의 진노가 내 마음의 뜻하는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그치지 아니하리니 너희가 끝 날에 그것을 완전히 깨달으리라. 

   (4) 이 선지자는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 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다.(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선지자들)

  5) 하나님은 가까운데 계신 하나님이요 먼 데에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 

   (1) 누가 자신을 숨기려고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않느냐!

   (2) 그들이 내 이름으로 꿈을 꾸었다고 하나, 그것은 단지 그들의 꿈에 불과하다. 내 말을 받은 사람은 성실함으로 내 말을 전하라. 어찌 겨가 알곡과 같겠느냐?

   (3) 하나님은 거짓 꿈을 예언하고 거짓과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는 자들을 방망이로 치시리라고 말씀하신다. 


3. 여호와 하나님의 엄중한 메시지의 내용은 무엇인가?

  1) 이 백성이나 선지자, 제사장이 네게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 무엇이냐 묻거든,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를 버리리라고 말하라. 

  2) 그들이 엄중한 여호와의 말씀을 묻는 대로 그들에게 엄중하게 행하시겠다고 말씀하는 듯.

  3) 여호와께서 너희를 온전히 잊어버려 내가 너희 조상과 너희에게 준 이 성읍을 내 앞에서 내버려 영원한 수치를 당하게 하리라.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내용을 다시 내가 이해한 방식으로 풀어보자]


여호와 하나님은 목자들을 향해서 말씀하신다. 이들은 목동이 아니라 유다를 이끄는 지도자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잘 돌보지 않아 흩어지게 되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자기 백성들은 흩어진 곳에서 다시 돌아오게 할 것이고, 다시 목자들을 세워 번성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다윗에게서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키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이전 장에서는 다윗의 왕 위가 여호야긴 왕으로 마치게 하시겠다고 하셨는데.) 이제 여호와 하나님은 출애굽으로 유명한 하나님이 아니라, 출바벨론으로 더 유명한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향해서도 말씀하신다. 사마리아의 선지자들은 바알을 섬기며 이스라엘로 그릇되게 하였고, 예루살렘의 선지자들은 거짓으로 사람들을 악에서 돌이킴이 없게 하였다. 결국 그들의 타락을 방조한 것으로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되게 하였다. 하나님은 그들의 예언을 믿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꾸었다는 꿈도 믿지 말라고 하신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자들이다. 그들이 어찌 하나님의 회의에 참석했으며 마치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 것처럼 잘 안다고 말할수 있느냐? 하나님은 보내지 않는 선지자들의 거짓을 책망하고 그들을 심판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사람들은 예레미야에게 묻는다. 하나님의 엄중한 말씀이 무엇이냐고? 그래서 하나님은 답하신다. 그들이 엄중한 메시지를 물었으니, 내가 엄중하게 그들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조상들과 너희들에게 준 성읍을 하나님 앞에서 버려서 영원한 수치를 당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신다. 



[정리3. 정리하면서 깨닫게 되는 자연스러운 메시지와 묵상]


1. 출애굽의 하나님에서 출바벨론의 하나님


이전까지 이스라엘에 있어서 구원의 하나님의 출애굽의 하나님이었다. 그러나 이제 더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그것은 흩어져 있던 자들을 북방에서 불러모으는 구원이 임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으로 그 백성을 인도하신다는 측면에서는 출애굽과 유사하다 하겠으나, 이번에는 전역으로 흩어져있는 백성들을 다시 한 곳으로 불러 모은다는 측면에서는 전과 다른 구원이라 하겠다.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를 보면 두 번의 구원이 있다. 하나는 출애굽, 다른 하나는 출바벨론... 이것은 구원 사건이지만, 그러나 구원의 완성은 아니다. 구원의 한 모형인 것이다. 참된 구원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통해서 일어나게 된다. 그가 왕이 되어 정의와 공의를 실현하는 지혜로 다스릴 것이다. 그것이 참된 구원의 모습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으로 의를 이루셨으며, 정의와 공의를 성취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믿는다. 모든 기적같은 구원의 종착역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2. 선지자라는 사람의 말에 속지 말아야 한다.  


이단은 오늘날에만 번성했던 것은 아니다. 과거 유다의 역사 속에서도 이단과 같은 미혹하는 종교 지도자들은 계속해서 있어 왔다. 이 당시의 선지자들은 자기들이 마치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자처럼, 그리고 하나님의 회의에도 참석한 것처럼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말했다. 때로 이들은 꿈이라는 신비로운 방식을 빌어 하나님의 뜻을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에게 정색하신다. 이들을 보낸 적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들의 꿈이라는 것은 단지 꿈일 뿐이라는 것이다. 누가 하나님의 회의에 들어왔으며, 하나님과 가깝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근거도 없이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신비한 방식으로 현혹하여 그릇된 평화를 전하는 자들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선지자라는 말에 속으면 안된다. 신비한 체험을 많이 했다는 말에도 속으면 안된다. 신학을 했다는 말에도 전도사나 목사라는 말에도 속으면 안된다. 그들의 직함이 아니라, 그들이 하고 있는 말을 분별해야 한다. 그 분별력을 상실하면 결국 우리는 브랜드나 직함에 속게 된다. 


참, 아이러니 하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가절히 필요한 대목이 아닌가 싶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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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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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22장] 하나님은 고니야(여호야긴)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다윗의 왕위를 이어갈자가 없음을 말씀하신다. 다윗과 맺은 영원한 왕권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이 폐기되는 것 같다. 500년 이상 그 언약은 폐기된 채로 유다의 역사는 끝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왕, 다윗의 혈통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신다.

 

 

[정리1.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1. 여호와께서 유다 왕과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말씀하신다. 
  1)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2)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3) 이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4) 너희가 이 말을 들으면 그 영광이 유지되지만, 이 말을 듣지 않으면 이 집은 반드시 황폐되리라.
  5) 여호와 하나님이 너를 파멸할 자를 준비하리니 그들의 손에 들린 무기를 가지고 네 아름다운 백향목을 찍어 불에 던지리라.
  6) 여러 민족은 지나가면서 여호와가 이 큰 성읍을 이같이 행함은 어찌됨인가? 놀랄 것이다.
  7) 그 이유는 그들이 자기 하나님을 버리고, 여호와의 언약을 떠나 다른 신에게 가서 그에게 절한 까닭이라 하셨다 하라.

 

2. 여호와께서 유다 왕 살룸(여호아하스)에 대해서 말하다.
  1) 너희들은 죽은 자를 위해서 애통하지 말고, 사로 잡혀간 자를 위해 애통하라.
  2)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죽게 될 것이다.
  3)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살룸이 결국은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죽게 될 것이다.

 

3. 여호와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에 대해서 말하다.
  1) 화있을 진저:
   (1)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부정하게 그 다락방을 지으며 자기의 이웃을 고용하고 그 품삯을 주지 아니하는 자.
   (2) 큰 집과 넓은 다락방을 짓고 창문을 만들고 그것에 백향목으로 입히고 붉은 빛으로 칠하도다.
   (3) 네가 백향목을 많이 사용하여 왕이 될 수 있겠느냐?
  2) 네 아버지는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않았는가? 그 때 형통하지 않았는가?
   (1)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고 형통하였다.
   (2)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3) 그런데 네 두 눈과 마음은 탐욕과 무죄한 피를 흘림과 압박과 포악을 행하려 할 뿐이다.
  3) 여호와께서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에게 말씀하신다.
   (1) 그가 끌려 예루살렘 문 밖에 던져지고 나귀같이 매장함을 당하리라.

 

4. 예루살렘에 대한 탄식
  1)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너는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
  2) 네 모든 악 때문에 수치와 욕을 당하리라.
  3) 레바논에 살면서 백향목에 깃들이는 자여, 여인이 해산하는 고통 같은 고통이 네게 임할 때에 너의 가련함이 얼마나 심하겠는가!

 

5. 여호와께서 유다 왕 여호야긴(고니야)에 대해서 말하다. 
  1) 유다 와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여호야긴)가 나의 인장 반지라도 내가 빼어서 네가 두려워하는 자의 손 곧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손과 갈대아인의 손에 줄 것이라.
  2) 너와 너를 낳은 어머니를 너희가 나지 아니한 다른 지방으로 쫓아내리니 너희가 거기서 죽으리라. 돌아오기를 사모하는 땅으로 돌아오지 못하리라.
  3) 고니야(여호야긴) 이후로 다윗의 왕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글을 다시 풀어서 쓰기]

 

본문은 유다의 왕과 신하들, 그리고 백성들의 죄를 구체적으로 지적한다. 더불어 유다 왕 중에 살룸(여호아하스)과 여호야김, 여호야긴(고니야)의 죄과 그에 대한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유다의 사회적인 죄악은 그들이 마땅히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탈취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져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았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 즉 사회적인 약자를 오히려 학대한 것이며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린 것이다. 이와 같은 잘못에 대한 시정요구를 듣지 않은 것이 이들의 죄다. 결국 하나님은 이로 인해 이들을 적의 손에 넘겨주게 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요시야 왕 이후로 살룸(여호아하스)과 여호야김 그 뒤를 이은 여호야긴(고니야) 왕의 악행과 그 행위에 따른 결과가 어떠할지를 말씀한다. 살룸 왕은 죽은 자보다 더 비참한 살로잡혀간 자의 운명을 살게 될 것이다. 잡혀간 땅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죽을 것을 말씀하신다.

 

여호야김은 화려한 건축을 위해 그 백성들에게 그 품삯도 주지 않고 일을 시킴으로서 악을 행했다. 여호야김은 탐욕과 허영 그리고 무죄한 피를 많이 흘렸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 왕을 예루살렘 문 밖에 끌려가서 나귀처럼 매장당하는 비참한 운명이 될 것을 말씀하신다.

 

고나야(여호야긴) 왕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인장 반지 같은 자라 할찌라도 빼서 바벨론의 손에 넘겨주겠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이 왕은 여호와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 다윗의 왕 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이다.

유다는 왕으로부터 시작해서 신하와 그 백성 모두가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멀어졌다. 특히 왕들은 허영에 가득차 정의와 공의를 잊고 무죄한 자의 피를 많이 흘리게 한다. 이것이 결국 왕과 그 나라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원인이 되고 만다.

 

예루살렘은 평안할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고질적인 병처럼 이들의 습관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이들은 결국 가련한 운명이 될 것이다.

 

[정리3.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교훈과 묵상들]

 

1. 요시야 이후로 왕들은 허영으로 가득하고 공의와 정의를 잊었다.

 

권력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왕은 자기 자신들의 권력을 자신의 허영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였다. 품삯도 주지 않은 채 아름 다운 집을 짓는데 혈안이되었으며 그로 인해 백성의 고통은 말이 아니게되었다. 왕과 권력자들은 정의과 공의를 실현하는 것에는 무관심했다. 정의를 왜곡하여 무고한 자의 피를 흘리게 했다.

 

요시야 왕 이후로 국가적으로 하향 곡선을 그리며 추락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은 여전히 자신의 허영을 채우기 위해 급급했다. 앞을 보지 못했다. 그와 같은 유다의 운명은 여호야긴(고니야)을 마지막으로 그 후손 중에 다윗의 혈통이 왕이 되는 것은 끊어지고 만다. 다윗의 위가 영원할 것이라는 그들의 믿음과 기대가 무너지는 순간이다.

 

권력과 힘이 올바른 룰 안에서 통제됨이 없이 사용되어질 때 권력은 언제나 권력을 가진 자를 중심으로 타락하게 되어 있다. 부정한 방식으로 재물을 축적하든지, 그 권력을 자신의 허영을 위해 낭비하게 된다. 그로 인해 고통 받는 것은 무고한 자들이며, 힘없는 자들이다. 백성의 원성이 높아가게 마련이다. 유다는 하나님과의 신앙 문제에 있어서도 깊은 골이 형성되었을 뿐 아니라, 일반 사회적인 상황에 있어서도 긴장과 갈등으로 인한 위험이 커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인장 반지와 같은 유다 왕을 빼어 버리기로 결정하신다. 그리고 원수의 손네 넘겨주시기로 결정하신다. 공의와 정의를 잊은 권력이 마지막은 원수에게 넘겨짐이 되고 만다.

 

2. 고니야(여호야긴) 이후로는 다윗의 왕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자가 없을 것이다.

 

다윗에게 주신 영원한 왕권에 대한 언약이 깨지는 순간이다. 유다가 철저하게 믿었던 믿음, 다윗의 왕권은 결코 빼앗길 수 없을 것이다라는 그들의 믿음은 산산조각이 나고 만 것이다. 하나님은 언약에 있어서 신실하신 분이지만, 결코 언약에 매여 하나님의 이루어가질 정의와 공의를 포기하시는 분은 아님을 알 수 있게 된다.

 

이제 유다와 그 백성들은 그들의 언약에 대해서 믿음에 대해서 하나님 신앙에 대해서 전면적인 새로운 인식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언약에 대한 재해석을 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 된 것이다.

 

3. 너는 어려서부터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유다의 죄가 얼마나 오래되고 뿌리깊은 문제인지를 보여주는 표현이라 하겠다. 하나님은 이전까지 관심이 없다가 갑자기 사춘기 자녀에게 관심을 보이셨던 것이 아니다. 그들이 평안했을 때(어렸을 적부터)부터 관심을 가지고 말씀하셨으나, 이들은 그 때부터 듣지 않았다. 이들은 어려서부터 완악했음을 말한다.

 

갑작스러운 반항이나 임시적인 탈선이 아니었다. 이들의 반항과 탈선은 뿌리가 깊은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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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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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21장] 우리가 마지막 날 어떤 얼굴의 하나님의 만나게 될지, 우리는 잘 준비되어야 할 것이다. 겸비하여야 한다. 겸비한다면 기회는 있다.

 

 

[정리1.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1. 시드기야 왕이 예레미야에게 사람을 보내어 하나님의 뜻을 묻다.
  1) 시드기야 왕이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과 제사장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를 예레미야에게 보내 바벨론의 위협으로부터 구원받도록 간구하도록 부탁함.  하나님의 기적을 바람.


  2) 예레미야가 그들을 통해서 시드기야 왕에게 전하는 내용
   (1) 여호와께서 바벨론과 싸울 때 사용하는 너희들의 무기를 다 모아들이겠다.
   (2)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진노와 분노와 대노로 너희를 칠 것이다.
   (3) 이 성에 있는 사람이나 짐승을 치리니 큰 전염병에 죽으리라.
   (4) 전염병과 칼과 기근에서 살아남은 자는 원수들의 손에 넘겨 죽게하고 불쌍히 여기지 않겠다.


  3) 너희들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다.
   (1) 이 성읍에 사는 자는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을 것이다.
   (2) 그러나 너희를 에워싼 갈대아인에게 나가서 항복하는 자는 살 것이다.(그러나 전리품처럼 여겨질 것이다.)


  4) 여호와께서 이곳을 향하여 얼굴을 두심은 복을 내리기 위함이 아니요 화를 내리기 위함.

 

2. 유다를 향한 권면
  1) 다윗의 집이여, 너는 아침마다 정의롭게 판결하여 탈취당한 자를 압박자의 손에서 건지라.
  2)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 때문에 내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서 너희를 사르리라.
  3) 골짜기와 평원바위의 주민들아, 너희들은 누가 우리를 치고 우리 거처에 들어오겠는가 말하지만, 내가 너의 대적이다.
  4) 내가 너희 행위대로 너희를 벌할 것이요 또 수풀에 불을 놓아 그 모든 주위를 사르리라.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내용을 다시 풀어서 작성하기]

 

시드기야는 바벨론의 침공 앞에서 두려운 마음으로 예레미야를 찾게 된다. 그리고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나님의 기적같은 도움을 구하려 한다. 그래서 시드기야는 바스훌과 제사장 스바냐를 예레미야에게 보낸다.


예레미야의 답변은 충분히 예상되는 답변이다. 하나님께서 유다를 돕는 것이 아니라, 유다가 사용할 무기들을 성 중앙으로 모으고, 하나님께서 유다에게 진노와 분노와 대노로 유다를 칠 것을 오히려 말씀하신다. 유다는 바벨론 때문에 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망하게 되는 것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전염병과 칼과 기근으로 죽게 할 것을 말씀하신다. 비참한 죽음을 말씀하신다.


그러면서도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이 있다고 말씀하여 뭔가 희망이 있는 것처럼 운을 떼신다. 그러나 생명의 길이라는 것도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의 생명의 길은 아니다. 포로가 되어 목숨을 연명하는 정도의 생명의 길이다. 바벨론에게 항복하면 목숨을 건질 것이라는 말씀이다. 여호와께서 지금 유다를 향해서 얼굴을 향한 것은 복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심판하시기 위함임을 명백하게 말씀하신다.


다윗의 집을 향해서 정의를 행하고, 탈취당한 자를 압제자의 손에서 건지라고 요청하신다.  

 

[정리3.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교훈과 묵상]

 

1. 시드기야는 은혜를 바랐지만, 하나님은 심판만 말씀하셨다.

 

시드기야는 절박한 마음으로 기적을 바라고 예레미야에게 사람을 보냈지만, 하나님은 냉정하게 심판만을 답하셨다. 하나님은 분노와 진노, 그리고 대노하셨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금 유다가 처한 위기는 바벨론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믿던 하나님때문에 일어나게 된 것을 강조하신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분이시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은혜를 받았고, 은혜를 누렸고 안타깝게도 은혜를 남용했다. 하나님은 은혜로울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유다는 결정적인 순간에 은혜를 요청했지만, 하나님은 은혜로 답하지 않으셨다. 전에는 은혜를 주셨던 그 분이, 이제 진노를 작정하시고 몰아붙이신다.

 

이렇게 된 이유는, 이 백성이 방자히 행하여 하나님을 진노와 분노, 대노하게 했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얼굴 방향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향해 얼굴을 향하신다. 마치 자식을 낳은 어미의 심정으로 늘 그 자녀에게로 고개를 향하신다. 그러다가 자녀에게 등을 돌리실 때가 있다. 자녀의 잘못이 반복되어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할 때, 하나님께서 등을 돌리신다. 회개하기를 기다리신다. 잘못을 구할 때까지 돌아보지 않으신다. 용서하시고 싶지만, 버릇을 고치기 위해서 마음을 독하게 먹고 견디시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다시 고개를 향하는 것이다.

 

진심과 전심으로 회개하고 돌아오면 은혜와 자비, 용서의 마음으로 고개를 향하시고 그 간의 모든 상처와 아픔을 씻어주시고 위로와 격려로 인도하신다.

그러나 여전히 돌이키지 않고, 더 악한 길로 가며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남용하는 악한 태도를 견지할 때, 하나님은 다시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그들을 진멸하시도록 심판하신다. 분노의 얼굴이며 심판의 얼굴이다.

 

우리가 마지막 날 어떤 얼굴의 하나님의 만나게 될지, 우리는 잘 준비되어야 할 것이다. 겸비하여야 한다. 겸비한다면 기회는 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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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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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20장] 여호와의 성전 총감독 제사장 바스훌이 될 것인가? 아니면 친구에게조차 조롱당하는 예레미야가 될 것인가? 그것은 내가 여호와의 입을 막는 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여호와의 입의 통로가 될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으로 결정된다. 하나님의 입을 막고, 자기 이야기를 즐겨하는 자 바스훌의 운명과 같이 될지어다.



[정리1. 본문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1. 여호와의 총감독 제사장 바스훌과의 갈등

  1) 임멜의 아들 바스훌이 예레미야의 예언을 듣고,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으로 채워 두었다. 

  2) 다음날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풀어주매, 예레미야가 바스훌에게 예언을 한다. 

  3) 여호와께서 네 이름을 바스훌이라 아니하고, 마골밋사빕(사방으로 두려움)이라 하신다. 

  4) 너와 네 친구들이 두려움에 떨게 되고, 원수들의 칼에 엎드러질 것이다. 

  5) 유다가 바벨론 왕의 손에 넘겨지고, 이 성읍의 모든 부와 왕궁의 보물도 탈취되리라.

  6) 바스훌, 네 집에 사는 모든 사람이 포로로 잡혀가며 너도 거기서 죽게 되리라. 너와 너의 거짓 예언을 들은 네 모든 친구도 그와 같으리라.


2. 예레미야가 선지자로서 감당해야 할 고통에 대한 호소

  1) 여호와께서 권유하심으로 권유를 받고, 당신께서 강하사 나를 이기셨다. 

  2)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 

  3)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했지만,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답답하여 견딜 수 없어 다시 하게 됩니다. 

  4) 내 친한 벗들도 다 내가 실족하기를 기다립니다. 잠깐이라도 유혹을 받게 되면, 금새 일어나 나를 치려고 합니다. 주여, 이들이 큰 치욕을 당하게 하소서.

  5) 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하나님, 나의 사정이 여호와께 아뢰어졌으니 주께서 그들에게 보복하심을 나아게 보게 하옵소서.


3. 자기 자신이 태어난 것에 대한 원망

  1)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라면

  2) 나의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에 복이 없었더라면

  3) 나의 어머니를 내 무덤이 되지 않게 하셨으며

  4) 내가 어찌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부끄러움으로 보내는고...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내용을 다시 나가 이해한 방식으로 풀어쓰기]


예루살렘과 유다의 멸망을 예언하던 예레미야가 결국 성전의 총감독인 제사장 바스훌에 의해서 잡혀가게 된다. 그에 의해서 매를 맞고 목에 씌우는 나무고랑으로 채워지게 된다. 예레미야를 겁주어 말하지 못하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다음날 바스훌은 예레미야의 목에서 나무고랑을 풀어준다. 그 때 예레미야는 바스훌을 향해서 멸망의 예언을 한다. 

유다와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이며, 또한 바스훌가 그 가족이 모두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그곳에서 죽을 것을 예언한다. 또한 그를 따르던 모든 친구들의 운명도 그와 같이 될 것을 말한다. 예레미야의 입은 바스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막을 수 없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실상 예레미야는 이와 같은 사역을 감당해야 하는 선지자직으로 인해 큰 고통을 받고 있었다. 예레미야는 입을 열때마다 파멸과 멸망을 말하는 것으로 인해 많은 고통이 있었다. 우선 주변 사람들이 그를 싫어했고, 심지어는 친구들조차도 그를 꺼렸으며, 혹 작은 실수 하나에도 벌떼처럼 몰려들어 예레미야를 넘어뜨리려고했다. 그러나 예레미야도 어쩔 수 없었다. 그 안에 하나님의 주신 말씀과 열정 때문에 말하지 않고는 답답하여 그것도 견딜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오히러 자신의 태어남을 한탄한다. 태어나지 않았다면 이런 고통을 겪지 않았을 것인데, 태어남으로 인해 져야할 어쩔수 없는 고통을 지게 된 것이 예레미야의 운명이다. 



[정리3. 정리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발견되는 메시지와 진전시켜야 할 생각들]


1. 하나님의 메시지를 막을 수 없다.


성전의 총감독이었던 바스훌은 예레미야의 입을 막으려고 했다. 겁주면 그렇게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럴수가 없었다. 예레미야를 풀어주는 순간, 예레미야는 또 다시 유다의 파멸과 멸망을 말하고 더 나아가 바스훌과 그 가족의 멸망에 대해서 직설적으로 말한다.


사람들은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싫어했다.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이 싫었던 것이고, 그것은 진리가 싫었던 것이다. 그래서 막으려고 했고, 말하지 못하도록 겁을 주려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럴수가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매일 수는 없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것은 우리의 선택이다. 그에게 순종하느냐 아니면 불순종하느냐?는 우리의 선택의 문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을 막을 수 없다.


2. 참된 선지자란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다. 


바스훌과 그의 친구들은 종교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거짓 예언을 들었고, 거짓 예언을 전한 사람들이다.(6절) 이들이 잘 못된 정보를 들었던 것이 문제가 될 수 있으나, 이들은 옳은 정보에 대해서는 귀를 닫았기에 그릇된 정보, 듣기 좋은 메시지에만 귀를 기울였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것을 또한 다른 이들에게 전했던 것이다. 


반면, 예레미야는 참된 메시지로 인하여 고통 당하는 선지자였다. 그 스스로 그 메시지를 피하고 싶었다. 친한 벗들에게조차 조롱을 받아야 하는 예레미야의 심정이 어떠하리라는 것은 우리가 충분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태어남에 대해서도 후회가 막심했을 정도로 이 일이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또 하나의 고통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을 때, 감추고 있을 때, 입을 닫고 있을 때의 고통이 더욱 컸던 것이다. 참을수 없는 답답함으로 자기도 모르게, 참을수 없어서 터져 나온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메시지였던 것이다. 


거짓 선지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막는 사람들이다. 목사 중에도 얼마든지 거짓 선지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세상과 야합하는 사람들, 성도들에게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 아닌 할 수 조차 없을만큼 도덕적으로 타락한 목사들... 이들은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하나님의 말씀을 막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결국은 그릇된 메시지를 전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나는 바스훌인가? 예레미야야인가? 자신있게 예레미야라고 말할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바스훌은 아닌가 돌아보고 그로부터 멀리 떨어져야 할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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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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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19장] 토기장이에게 가서 옹기를 하나 사가지고 갔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옹기를 깨뜨리는 방식을 통해 하나님은 당시의 메시지를 전하시려 합니다. 시청각적 효과를 통한 소통의 노력이지요. 그러나 듣지 않으려는 백성들 앞에서는 아무런 효과를 얻지 못하고 마는군요. 하나님은 탁월한 교사이나, 백성들은 불량학생입니다. 




[정리1. 본문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1. 토기장이에게 옹기를 사서 그것을 깨뜨림으로서 전하시는 메시지


  1) 예레미야에게 토기장이에게 가서 옹기를 사서 백성의 어른들과 제사장의 어른 몇 사람과 하시드 문어귀 곁에 있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가서 내 말을 이르라.

     * 하시드 문: 정확한 위치는 알수 없으나, 그 일대에 토기장이의 작업장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 그 문 근처에 깨어진 토기들을 버렸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예루살렘 성 남쪽에 있는 문으로 본다.

 

   (1) 내가 이곳에 재앙을 내릴 것이라. 듣는 모든 자가 떨게 될 것이라.

   (2) 이는 그들이 나를 버리고 이곳을 불결하게 하였다. 우상에게 분향하고 무죄한 자의 피를 이 곳에 채웠다. (아들들을 바알에게 바치고, 바알을 위해 산당을 건축했다.)

   (3) 이곳을 다시는 도벳이나 힌놈의 골짜기라고 부르지 않고 오직 죽음의 골짜기라 부르리라. 이곳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을 넘어뜨리며 그 시체를 짐승과 새의 밥이 되게 하리라. 

   (4) 이 성읍을 놀람과 조롱거리가 되게 하고, 모든 재앙으로 말미암아 지나는 자가 조롱함.


  2) 이 말을 하고 함께 있는 자들 앞에서 그 옹기를 깨뜨리고 말하라. 

   (1) 사람이 토기장이의 그릇을 깨뜨리면 다시 완전하게 할 수 없는 것처럼, 이 백성을 무너뜨리리라. 도벳에 매장할 자리가 없는 것만큼 이 성읍에 재앙을 내리리라.

   (2) 예레미야는 이 말씀을 도벳에서 돌아와 여호와의 집 뜰에 서서 모든 백성에게 말한다. 이 성읍에 예언된 재앙이 모든 성읍과 모든 촌락에 내리리라. 

   (3) 이는 그들의 목을 곧게 하여 내 말을 듣지 아니함이라 하시니라.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을 토대로 다시 풀어서 작성하기]


하나님께서 옹기를 깨뜨리는 것을 통해서 메시지를 전하신다. 예레미야는 옹기를 사서, 백성들의 어른들과 제사장의 어른 몇 사람과 함께 힌놈의 골짜기(예루살렘 성 남쪽에 있는 골짜기)에 가서 이 곳에 임할 재앙을 선포한다. 이곳이 우상숭배의 장소가 되고, 많은 피를 흘린 장소이기 때문에 이곳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지도자들이 볼 때도 이곳은 그와 같은 악한 곳이었다고 보여진다.) 


그 다음 갑자가 그 지도자들 앞에서 가지고 온 옹기를 깨뜨린다. 옹기는 한번 깨지면 다시 온전히 회복할 수 없는 것처럼, 이 백성도 무너지게 하리라고 말씀하신다. 도벳이 진노의 재앙을 받는 것처럼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성읍과 촌락이 재앙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니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도벳의 심판을 예언하는 것처럼 해서, 예루살렘과 유다에 임할 동일한 심판을 경고하신 것이다.  



[정리3. 정리과정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메시지와 교훈들]


1. 하나님은 강의(메시지)를 위해 시청각적 효과를 최대한 이용하신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옹기를 강의(메시지)에 이용하시려고 했다. 예레미야에게 먼저 토기장이의 집에 가서 옹기를 사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야 함께 있던 지도자들은 약간 의아해 했을 것이다. 예레미야가 왜 옹기를 하나 들고 나와서 옹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예레미야가 든 옹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적절한 때에 예레미야는 느닷없이 옹기를 깨버린다. 그는 소중하게 들고 있던 옹기를 갑자기 깨뜨리심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이다. 그들은 처음에 소리에 의해서 놀랐을 것이다. 흐릿해지던 사람들의 느슨한 태도가 갑자기 주의를 집중하게 되는 효과를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의문을 낳았을 것이다. 왜 소중히 들고 있던 옹기를 떨어뜨린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깨뜨린단 말인가!! 사람들은 다소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예레미야는 이제 깨진 옹기를 통해서 말한다. 깨진 옹기는 다시 완전히 회복 될 수 없는 것처럼 예루살렘과 유다는 다시 완전히는 회복될 수 없는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갑자기 사람들은 깨진 옹기와 예루살렘의 운명을 연결할 것이고, 이것은 잠시의 고난이 아니라 원상복귀가 불가능한 상처가 될 것이라는 것을 실감나게 듣게 될 것이다. 


메시지 전달을 위한 하나의 준비된 퍼포먼스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매우 다양한 장치들을 모두 활용하신다. 문학적인 표현이 그렇고, 이와 같은 퍼포먼스도 마찬가지다. 결국을 메시지를 전하려고 하시는 그분의 노력인 것이다. 하나님도 <불통>인 백성들을 향해서 최대한 <소통>하려는 노력을 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안다면, 우리의 소통을 위한 노력은 좀 더 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할만큼 했다고 말하기 전에 좀 더 해봐야 하지 않을까 말이다. 


2. 공감할 수 있는 힌놈의 아들 골짜기(도벳) 이야기로 시작해서 유다와 예루살렘으로 이어진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와 당시 백성들의 지도자를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보낸 것은 아마, 그곳은 타락한 유다 백성들이 볼 때도 정도가 아주 심할 정도로 타락한 곳이 아니었나 싶다. 그곳에서 바알을 위한 산당이 건축될 뿐 아니라 바알을 위해서 아들들을 번제로 드리는 일까지 있었던 것을 볼 때(5절) 또한 무죄한 자의 피가 이곳에서 많이 흘려졌다는 것은 공공연하게 불의와 죄악이 컸던 곳임을 짐작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힌놈의 아들 골짜기로 백성의 지도자들을 데리고 가서, 재앙과 심판을 예언할 때 이 지도자들은 별말이 없었던 것이라 보인다. 자기들이 보기에도 이곳은 매우 심각한 곳이었기 때문에, 어쩌면 올 것이 왔구나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끝나지 않는다.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일어나는 재앙과 심판이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동일하게 일어날 것이라는 예언이 뒤이어 나오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유다와 예루살렘의 죄도 결국은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죄의 질과 비교해 볼 때 다르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강건너 불구경하던 심정으로 듣던 유다 백성들의 지도자들은 갑자기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결국 예레미야는 그곳에서 돌아와 여호와의 집 뜰에서 모든 백성들에게 이 메시지를 전한다.(14절)


예레미야서에서는 하나님 그분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한 노력이 가득차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럼에도 이 백성들은 듣지를 않는다. 효과적인 메시지 전달을 통해서도 귀를 막고 눈을 가린 사람에게는 방법이 없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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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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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18장]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분이기에 우리가 믿을 수 있지만, 수없이 많이 변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하나님을 사랑하며 믿습니다. 하나님은 원칙주의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대응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가르침을 줍니다.  

 

 

[정리1. 본문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1. 토기장이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메시지
  1) 토기장이의 집으로 예레미야를 보내시는 하나님
  2) 토기장이가 녹로로 일하는 것을 보는데, 진흙으로 그릇을 만들다가 터지니, 자기 생각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다.
  3) 메시지: 토기장이가 하듯이 내가 못하겠느냐?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듯 너희는 내손에 있느니라. 
   (1)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어 멸하려 하더라도,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그 민족에게 내리려고 하던 재앙에 대해서 뜻을 돌이킨다.
   (2)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려고 할 때에, 그들이 나 보기에 악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그들을 복주리라는 뜻을 돌이킨다.
   (3)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에게 재앙을 내리려 하여, 악한 길에서 돌이키라고 경고하였더니 이 백성은 말하기를 헛소리 마세요. 우리는 우리의 계획대로 악한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리라고 말한다.

 

2. 예루살렘과 유다 백성들의 태도에 대한 하나님의 한탄과 심판
  1) 너희는 이런 일이 있는지 여러 나라에 물어보라.(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2) 무릇 내 백성은 나를 잊고 허무한 것에게 분향한다. (옛길에서 넘어져 곁길로 가는 것)
  3) 그들의 땅으로 말미암아(큰 멸망을 당하므로) 두려움과 영원한 웃음거리가 되게 하겠다.
  4) 하나님이 그들의 원수 앞에서 흩어 버리길 동풍으로 함같이 하리라. 내가 재난의 날에 그들에게 등을 보이리라. 얼굴을 보이지 아니하리라.

 

3. 백성들은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한다. 
  1) 백성들은 꾀를 내어 예레미야를 치고자 한다. 그 하나 없더라도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책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기에. 혀로 그를 치고 그의 어떤 말에도 주의하지 말자.
  2) 예레미야의 탄식: 그들이 나를 죽이려고 구덩이를 팠고, 그들은 선을 악을 갚습니다. 
   (1) 주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이키게 하려고 주의 앞에서 그를 위해 유익한 말을 한 저를 기억하여주시옵소서.
   (2) 그들의 자녀를 기근에 내어 주며, 그들을 칼의 세력에 넘기며, 그들의 아내는 자녀를 잃고 과부가 되게 하시며, 장정은 죽임을 당하며 청년은 전장에서 칼에 맞아 죽게 하소서.
   (3) 군대로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게 하사 그들을 멸하소서.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올무를 놓았음이니라. 그들의 악을 사하지 마시고, 그들의 죄를 주의 목전에서 지우지 마소서.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내용을 다시 나의 표현으로 풀어쓰기]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시청각교육을 통해서 메시지를 전하도록 하신다. 예레미야를 토기장이의 집으로 보낸다. 그리고 토기장이가 어떻게 작업을 하는가 보게 하신다. 토기장이는 그릇 하나를 만들다가, 그릇이 터지자 그 진흙을 다시 뭉개더니 임의로 다른 그릇을 만든다.

 

하나님도 토기장이와 같이 하실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백성은 하나님의 손에 들린 진흙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이시다. 처음에는 멸하시려고 했다가도 그들이 악에서 돌이켜 회개하면, 용서하신다. 그러나 어떤 민족은 세우려고 하셨다가도 그들이 악을 행하고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신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수 있다.

 

그런데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은 재앙을 내리시려고 하시고 그 악한 길에서 돌아오라고 하셨음에도 그것을 헛소리인줄 알고 계속해서 악을 행한다. 너무나 어처구지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지 않은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를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을 멸하고, 원수들 앞에서 부끄럽게 하시기로 작정하신다. 그들이 고난 당하는 날에도 등을 돌리며, 얼굴을 향하지 않을 것을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예레미야는 호소한다. 이 백성들을 향해서 열심히 변호하고 이들을 돌아오게 하려고 했던 예레미야를 사람들은 오히려 죽이려고 웅덩이를 파는 모습을 볼 때, 예레미야도 한계를 느낀다. 그는 두려움가운데 하나님께 신원한다. 이들에게서 자신을 구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리고 이들을 철저하게 심판해 달라고 오히려 신원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더 이상의 중보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

 

[정리3.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발견된 것에 대한 생각들]

 

1. 신실하신 하나님?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일향 믿을 만한 분이라고 고백한다. 이런 믿음을 갖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노골적으로 하나님은 자기 뜻을 마음대로 바꾸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신다.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들다가 잘 안되면, 임의로 그 진흙으로 다른 그릇을 만들 수 있듯이 하나님은 얼마든지 바꾸시는 분이라는 것을 오늘 본문은 강조한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마음대로 그 뜻을 바꾼다고 할 때, 우리는 불안하다. 부모가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는 못한 가정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늘 불안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측할 수 없는, 불안정이 아니시다. 예측할 수 있는 변화요 은혜로운 변화요 공의로운 변화인 것이다. 경직된 획일, 기계적인 예정이 아닌 것이다.

 

심판을 하시려고 하다가도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면 마음을 돌이키시는 변화다. 잘 세우려고 하시다가도 교만하고 악을 지속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그 마음을 접으시는 변화다. 하나님은 문자에 매이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기초적인 상호 신뢰를 위해 언약을 통해서 룰을 정하지만, 문자에만 매이지는 않으시고 얼마든지 그 안에서 은혜로운 융통을 허락하시는 분이시다.

 

원칙주의자들에게는 하나님이 변절자로 보일지 모이지만, 죄인들에게 하나님은 자비와 은혜가 풍성하신 분이다. 그러나 사실 알고보면 진정한 원칙주의자들은 없다. 그 스스로도 그 원칙을 다 지켜낼 수 없는 자들이기 때문에.

 

2. 중보자들까지도 포기한 예루살렘과 유다

 

오늘 본문 속에서 예레미야의 미흡함을 보는 것 같다.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웅덩이를 파고, 올무를 놓으려 하자 그동안 이 백성을 위해서 중보하고 기도하며 눈물 흘리던 예레미야가 갑자기 돌연 변해서, 자기 백성들을 저주하는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의 저주는 매우 잔인할 정도로 하나님께 자신을 해하려는 자들을 심판해 달라고 요청한다.

 

여기서 우리는 예레미야의 미흡합을 볼 것인가? 아니다. 어쩌면 예루살렘과 유다 백성들의 완악함을 봐야 할지 모른다. 이들은 예레미야의 말은 우습게 여긴 자들이다. 그들이 이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하는 것은 선을 악으로 갚는 행위이다. 예레미야는 이들을 어떻게 하든 중보하려고 했지만, 이들은 오히려 예레미야를 죽이려 했다. 나는 여기서 예레미야의 미흡함을 보는 것이 아닌,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의 악함을 더 깊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죽하면 마지막 자기 편이었던 예레미야까지(중보자까지) 등을 돌리게 만들었는가!! 이 백성은 더 이상 중보가 불가능하고 무의미한 백성임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우리의 최후의 중보자까지 우리를 등진다면 우리는 무슨 소망이 있겠는가? 우리의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 우리가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행위만큼은 하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본다.(히 6:4-6) 나를 위한 마지막 편까지 등돌리게 하는 어리석음은 삼가해야 한다.

 

이 땅에서 부모는 나의 마지막 편이 아닌가 싶다. 부모의 마음에 못을 박는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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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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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17장] 우리가 익숙하게 들었던 표현들이 오늘 본문에 많군요. 상상력을 자극하는 예레미야의 표현은 매우 자극적이며, 스토리를 연상케 합니다. 유다의 죄가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었다는 표현, 여호와는 인간의 심장을 살피고 폐부를 시험하신다는 묘사, 불의한 자의 성공은 자고새가 품은 알처럼, 중년에 그를 떠날 것이라는 비유..성경을 읽다가 보면, 문학을 배우게 됩니다. 



[정리1.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게 정리하는 작업]


1. 유다의 죄가 깊이 새겨져 있다.

  1)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제단 뿔에 새겨졌다.

   (1) 너희의 자녀들은 항상 높은 언덕 위 푸른 나무 곁에 있는 제단들과 아세라를 생각한다.

  2) 그래서 너희들은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잃고, 알지 못하는 땅으로 가서 원수를 섬긴다. 

  3) 무릇 사람을 믿고 의지하며 육신으로 그 힘을 삼고, 여호와에게서 떠난 사람은 저주받음.

  4)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다. 이들은 물가에 심은 나무 같을 것이다.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결론]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그것을 알겠는가마는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고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신다.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않은 알을 품은 것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날 것이다. 


2. 여호와께 자신은 구원해 달라고 요청하는 예레미야

  1) 재앙의 날에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요청하는 예레미야

   (1)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2) 나는 목자의 직분을 물러가지 아니하고, 주를 따랐습니다. 

   (3) 주는 내게 두려움이 되지 마옵소서. 재앙의 날에 주는 나의 피난처시니이다. 

   (4) 나를 박해하는 자로 치욕을 당하게 하시고, 나로 치욕을 당하지 않게 하소서.


3.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명하시는 하나님

  1)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유다 왕들이 출입하는 문과 모든 예루살렘의 문에 가서 안식일에는 스스로 삼가서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지 말라. 너희 집에서 짐을 내지 말라. 

  2) 어떤 일이라도 하지 말고,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함 같이 안식일을 거룩히 할지어다. 

  3) 그러나 이들은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했다. 

  4) 그러나 만일 너희가 삼가 나를 순종하여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면, 다윗왕의 옛 영광을 회복시켜 주리라. 하지만 너희가 나를 순종하지 않고 안식일을 거룩되게 하지 않고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면 내가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겠다.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하는 과정을 통해서 파악한 내용을 다시 내 글로 풀어놓는 작업]


 오늘 본문에서는 유다의 죄가 얼마나 깊고, 지울 수 없는 죄인지(돌이킬 수 없는 죄인지)를 표현해 주고 있다. 예레미야는 금강석 끝 철필로 마음 판에 새겨져 있다고 표현되어 그것은 지워질 수 없으며, 감출수도 없음을 묘사한다. 따라서 이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기업을 잃고 알지 못하는 땅으로 끌려가며 원수는 섬기는 비참함을 경험하게 된다. 이들은 하나님을 의존해야 할 백성들임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사람을 믿고 육신을 의지함으로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것은 마음인데, 그것을 사람들은 모르지만 하나님을 아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중심을 살피고, 폐부를 시험해 보시기 때문이다. 지금 이들(불의한 자)이 누리를 향락은 자고새가 품은 알처럼 중년이 되면 날아가 버리는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예레미야는 유다를 중보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 가운데서 자신에게는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요청한다. 자신은 목자로서의 성실을 다했다고 고백하며, 재앙의 날에 자신의 피난처가 되어 달라고 요청한다. 


유다 백성들이 대표적인 죄악 중에 하나가 안식일이었던 것이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엄중한 안식일 명령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안식일에 왕부터 평민까지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안식일에도 짐을 옮겨 장사를 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이를 금하도록 지시했으나, 역시 이들은 듣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면 다윗의 옛 영광을 회복시켜 주시겠다고 약속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결국 이들은 안식일도 지키지 않으므로 멸망은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정리3. 정리1과 정리2를 하면서 도드라지거나 새롭게 정리되는 내용들을 내 사고의 개념으로 풀어냄]


1. 예레미야도 유다 백성의 중보에도 한계가 있음을 알았다. 


늘 자기 백성을 생각하고 중보하던 예레미야가 오늘은 다른 모습을 보인다. 진노와 재앙 중에서라도 자기 자신만은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요청을 하는 것이다. 원수들과 같은 취급을 하지는 말아달라는 것이다. 이들은 수치를 당할지라도 자신은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예레미야의 자기만 살겠다고 기도하는 것같은 요청이 믿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죽했으면.... 하는 심정이다. 천로역정에서 크리스찬이 가족들도 그 진노에서 건지겠다고 같이 나가지고 요청했음에도 오히려 비웃음만 당하자 홀로 나올 수 밖에 없었던 것처럼, 예레미야는 완악함으로, 죄를 금강석 끝 철필로 마음에 새긴 백성들을 돌이키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했다. 이제 남은 것은 다가올 재앙에서 자신 만이라도 살아남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에도 한계가 있다는 말인가?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사역에 한계가 있을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의 무지와 완고함은 그런 한계를 느끼게 한다. 심지어 하나님이 그런 한계를 느끼시는것처럼 보여진다. 더이상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들려진다. 하나님의 백성이 누구인가? 하나님의 한계를 보여주는 자들아닌가? 우리의 죄는 어디까지 인가? 하나님의 한계를 보여주는데 까지 가지 않는가? 


고집불통 인간의 완악함.


2.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인간의 마음, 하나님은 아신다. 


누가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인간의 마음을 알겠는가? 그렇게까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 이야기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마음을 감찰하신다는 것이다. 여호와는 심장(중심)을 살피시고, 폐부를 시험하여 마침내 그 행실과 행위를 명확하게 밝혀 내신다. 그리고 그것에 합당한 보응을 하신다. 


유다는 우리 인간의 거짓되고 부패한 마음을 보여주는 백성이다. 이들만의 모습이 아니고, 우리 인류 전체의 모습이고  실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우리의 거짓됨과 부패를 잘 모른다. 나 자신의 이야기 이지만, 가장 잘 모르는 것이 바로 인간이 아닌가 싶다. 나의 거짓과 나의 부패를 인식한다면, 우리는 교만할 수 없다. 늘 조심하고 신중할 수 밖에 없으며 누군가 외부적인 존재의 객관적인 비평을 받아 들일 준비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귀를 막고 만다.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넘어, 거짓과 부패를 보지 못하니 무슨 개선이 가능하며 무슨 대화가 이루어지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신의 한계를 직면하는 것이고, 그것은 자신의 거짓됨과 부패를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은 보고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한다. 이것이 우리의 문제다. 


3. 불의한 자의 성공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고새가 품은 알과 같은 것이니, 부러워하지 말라.


자고새는 다른 알을 품고 결국 그 알은 자고새를 떠나 날아가 버린다. 불의한 자가 품고 있는 부와 성공은 자신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결국은 주인을 찾아 날아갈 수 밖에 없음을 우리는 잊으면 안된다. 곧 날아갈 부와 성공이라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어야 한다. 


자고새를 부러워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게라도 부와 성공을 품어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성도들이 있을런지 모르겠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만큼 어리석은 것이 없음을 말한다. 자기 것도 아닌 것을 자기 것처럼 품고 있을 자가 당하게 될 허망과 부끄러움을 우리는 더 크게 보아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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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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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16장] 하나님의 양면성. 구원자로서의 강렬한 하나님을 만날 것인가? 아니면 심판자로서의 강렬한 하나님을 만날 것인가? 우리는 어떤 측면으로든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강렬한 구원자가 되든, 아니면 심판자가 될 것이다.

 

 

[정리1. 본문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1.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결혼하지 말 것과 아이를 낳지 말 것을 말씀하신다.
  1) 이곳에서 낳은 자녀와 해산한 어머니와 그들을 낳은 아버지는 이런 고통을 받을 것이다.
  2) 독한 병으로 죽어도 아무도 슬퍼하거나 묻어주지 않아 시체는 공중의 새와 짐승의 밥.
  3) 초상집에 들어가서도 슬퍼하거나 통곡하지 말라. 이 백성에게서 여호와의 평강을 빼앗고, 인자와 사랑을 제함이다.
  4) 큰 자나 작은 자가 이 땅에서 죽는데 이를 슬퍼하는 자도 없고 매장해 주는 자도 없다.
  5) 이 땅에서 기뻐하는 소리를 네 시대에 이곳에서 끊어지게 하리라.

 

2. 이 땅 백성들의 항변
  1) 우리의 죄악은 무엇이며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한 것이 무엇이냐? 왜 재앙을 선포하느냐?
  2) 너희 조상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며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
  3) 너희들은 너희 조상들보다 더욱 악하다. 각기 악한 마음의 완악함을 따라 행하고 순종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너희들을 이 땅에서 쫓아내어 거기서 주야로 다른 신을 섬기게 하겠다.

 

3.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들을 위해 하실 일(장차 하실 일, 그러나 지금 하실 일)
  1) 보라 날이 이를 것이다. 더 이상 이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신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고, 이스라엘 자손을 북방 땅과 그 쫓겨났던 모든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백성이라는 말로 알려지게 할 것이다. 
  2) 그러나 지금은 우선 이들의 악에 대해서 반드시 사냥하신다. 마치 많은 어부를 불러다가 고기를 낚듯, 많은 포수를 불러다가 사냥하듯 지금은 이 백성을 사냥할 것이다. 이는 이들이 그 미운 물건의 시체로 하나님의 땅을 더럽혔고 가증한 것으로 하나님의 기업에 가득하게 했다.

 

4. 예레미야의 기도
  1) 예레미야: 우리 조상들의 계승한 바는 허망하고 거짓되고 무익한 것뿐이라.
  2) 여호와: 보라 이번에 그들에게 내 손과 내 능력을 알려서 그들로 내 이름이 여호와 인줄을 알게 하리라.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것을 다시 나의 말로 풀어서 쓰기]

 

본 장은 예루살렘이 당하게 될 멸망의 비참함을 보여준다. 이 땅에서는 자녀를 낳은 어미나 아비 그리고 그 자식들까지 모두 비참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들이 죽게 될 상황도 비참하지만, 그 주검을 거두거나 매장해 줄 상황도 되지 못하는 비참함을 말한다. 서로가 슬퍼해주고 통곡해 주는 자도 없는 슬픔이 이 땅의 상황이 될 것을 말씀해 주고 있다.

 

그런 예레미야의 예언에 이 백성들은 항변한다. 도대체 우리가 무슨 잘못을 그리 했기에 하나님께서 이러시느냐는 것이다. 이 백성들은 하나님의 분노를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이 징계하시 명백한 이유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이들은 조상 때부터 다른 신을 섬기고 하나님의 율법을 어겨왔는데, 지금은 더욱 악하여 마음이 완악함을 따라 순종하지 않음에도 말이다.

 

훗날 하나님께서 이들을 북방 백성들로부터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으로 더 알려질 정도로(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이라는 인식보다) 이들을 구원하시겠지만, 지금은 이들을 사냥꾼이 사냥하듯 이들을 사냥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이 하나님이 미워하는 물건으로 하나님의 땅을 더럽혔기 때문이다.

 

[정리3. 묵상하고 적용하기]

 

1. 앞으로는 자기 민족을 출애굽시키신 하나님으로서 보다, 쫓겨났던 모든 나라에서 인도하신 하나님으로 인식되리라.

 

유다의 멸망 이전까지 여호와 하나님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사건은 출애굽이다. 애굽 땅 종되었던 곳에서 구원해 내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가장 강렬한 인식이었다. 그러나 북방 민족에 의해 이 땅에서 쫓겨난 이후로는 흩어진 백성들을 다시 이 땅으로 불러모으시는 하나님의 사건이 더욱 큰 사건이 될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한 곳에 노예로 있던 백성들을 훌륭한 지도자 한 사람을 통해서 이끌어 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어디에 흩어져 있는지 알수도 없는 그의 백성들을 다시 불러서 한 자리로 불러 모은다는 것은 더 크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은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흩어지게 되지만, 때가 되면 다시 불러 모으실 하나님의 놀라운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바울의 로마서에서 말하고 있는 바, 다시 부르기 위해서 지금은 버리는(롬 11장) 이스라엘의 역사 의식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겠는가 싶다. 아니 그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가 바울로 하여금 그런 역사의식을 가지게 한 것이 아닌가 싶다.

 

2. 하나님이 자기를 인식시키는 새로운 방식

 

이전의 하나님의 방식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심으로(기적과 승리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시고 나타내셨다. 그러나 유다의 범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막을 수 없게 되자,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는 방식은 자기 백성을 철저하게 징계하시고 혼내시는 것으로 자신의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시는 것이다.(21절)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으로 통해 여호와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일상적이 하나님의 방식은 아니지만, 패역하고 악한 백성들에게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임을 알게 된다.

 

우리는 인자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도 있고, 무섭고 두려운 하나님을 만날 수도 있다. 하나님의 양면적 측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명확하게 드러내신다. 어떤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가? 우리의 태도에 달려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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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m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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