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12-18>

(정리하기) (질문하기) (묵상하기)

1. (교훈)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12절)

   (이유)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정리] 구절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기 때문에 정리는 생략한다. 다만 이 주제는 약 1:2-4에 언급된 부분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시험을 받아들이고 참는 것의 유익함을 말한다. 

[질문] 본 구절을 이해하는데 특별한 어려움이 없기 때문에 질문이 있지는 않다. 다만 야보고 사도가 '시험'에 대한 문제를 1:2-4에 이어서 다시 언급하는 것으로 볼 때, 이 편지를 받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시험'의 문제가 당면한 신앙적 이슈라는 것은 알 수 있다. 

[묵상] 성도가 시험을 잘 견디어 내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된다. 따라서 시험은 어려운 것이지만, 성도의 삶에는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고 오히려 큰 유익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시험을 피하려고만 해서도 안되고, 시험을 두려워해서도 안된다. 겪어야 할 시험이라면 오히려 기쁘게 감당하고 그 과정을 통해서 자신을 성장시키는 것이 시험에 대한 성도의 바른 태도다. 


(사람들의 오해)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13절)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라.

(왜?)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정리] '시험'이라는 이슈와 관련되어 좀 더 구체적인 사안이 언급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지금 내가 받고 있는 시험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닌가?'하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즉 '시험'의 원인을 하나님께로 전가하고자 하는 사람들이었다. 야고보 사도는 우선 단정적으로 그렇지 않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받지도 않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않기 때문이다. 

[질문] 그렇다면 성도가 당하는 '시험'과 같은 상황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시험하지는 않을지라도 시험을 받도록 허용하시는 것은 아닌가? 욥의 경우가 그렇고, 아브라함의 경우도 이삭을 바치는 문제에 있어서 그렇지 않은가? 이와 같은 경우를 성도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원리로 자신이 당하는 시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시험'으로 일반화 해서 설명할수도 있을텐데 왜 야고보 사도는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일까?

[묵상] 야고보는 지금 성도가 직면하는 '시험'에 대해서 두 가지 측면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시험'의 유익함이다. 하나님은 성도들로 하여금 '시험'을 잘 견딤으로 '성숙'해 지는 것을 기대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직면한 시험을 오용해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도로 하여금 성숙해지는 도구로서 주시는 '시험'이 아닌 다른 차원의 시험까지도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야고보 사도는 지금 바로 그와 같은 사람들의 오용에 대해서 단호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바른 이해)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14절)

(원리)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15절)

[정리] 야고보는 지금 사람이 받는 시험에 대해서 '인간의 욕심'에 기인한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욕심'을 잉태해 죄를 낳았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온 존재이기 때문이다. 

[질문] 13절에 대해서 야고보는 나름대로 답을 제시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질문(아브라함과 요셉과 욥이 직면한 시험)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묵상] 야고보는 지금 우리를 향해 답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야고보는 그 당시 성도들을 대상으로 답하고 있고, 그 답은 그들의 상황과 맞닿아 있을수 밖에 없다. 야고보가 문제제기 하려고 했던 것은 지금 우리의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라, 그 당시의 문제에 대한 답이다. 당시 성도들은 '시험'을 경험하면서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시험을 주시는 것이지? 하는 신앙적 고민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야고보가 볼때는 진짜 알수 없는 시험을 당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에 의해서 초래한 시험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원인을 하나님께 돌리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야고보는 지금 그들을 향해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욥이나 아브라함, 요셉과 같은 '시험'은 일반적인 원칙이 아니다. 그것은 예외 사항이라고 봐야 한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사람을 시험하는 분이 아니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욕심에 이끌려 시험을 당한다'고 봐야 한다. 그 원칙으로 우리가 직면한 '시험'을 검토해야 하고, 그것으로도 풀리지 않는다면 예외 규정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2. (권면)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16절)

(이유)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17절)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원리) 그가 우리를 낳으셨느니라.(18절)

(목적)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려 하시려고

(방식)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정리] 표현에 있어서 현란한 말이 많지만, 핵심은 간단하다. '속지 말라'는 것이다. 무엇에 속지 말아야 하는가? '시험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말'에 속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온갖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은 하늘 아버지이신데, 그 분이 우리를 낳으셨는데 그 분이 당신의 자식을 시험하시겠느냐? 하는 것이다. 복잡한 표현들이 있지만 그런 표현들은 후차적으로 생각해보고 큰 틀만 보면 이와 같은 말이다. 


[질문] 오히려 여기쯤 오니 질문이 어느 정도 해결된다. 

[묵상] 야고보 사도가 말하고자하는 말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시험하지 않으신다. 그 큰 틀에서는 변화가 없다. 따라서 우리가 시험을 당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욕심으로 말미암은 시험이다. 따라서 자신의 욕심으로 인해 어려움 당하면서, 하나님이 나를 시험하고 있다는 식의 말에 속으면 안된다. 당신의 욕심 때문에 스스로 고통을 받고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지 하나님께 원인을 돌려서는 안된다고 야고보 사도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본 구절은 욥의 경우와 아브라함의 경우, 요셉의 경우에 대한 답까지 제공하지 않는다. 그 문제에 대한 답은 다른 성경본문을 통해서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본문 핵심 정리] 

1.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다. 

2. 그러나 시험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시험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욕심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자초한 시험까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니다. 그 말에 현혹되어서는 안된다. 

3. 성도의 성숙을 위해 가는 과정 속에서 겪는 '시험'과 자신의 욕심으로 인해 자초한 '시험'과는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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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1> (정리하기)

1. (편지정보)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1절)

  - 야고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질문하고 묵상하기)

1.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흩어진 열두 지파(유대인)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써야할 필요를 느꼈다. 앞으로 야고보가 다룰 내용을 아직 알 수 없으나, 야고보 안에는 뭔가 이유가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궁금함을 가지고 야고보서를 읽어가야 한다. 


<약 1:2-4> (정리하기)

1. (권면) 내 형제들아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2절)

  -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1) (근거)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3절)

        - (권면)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 (근거)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4절)


(질문하고 묵상하기)

1. 야고보는 형식적으로 안부의 인사와 같은 내용을 다루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야고보서의 성급함일 수도 있고, 사안의 시급함일 수도 있다. 어쩌면 편지를 받는 대상과 야고보와의 관계가 그와 같은 절차를 생략해도 되는 관계일 수도 있다. 야고보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2. 야고보의 첫번째 주제는 '시험 당함'에 대한 것이고 그 상황에 대해서 측은한 위로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험 당함'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파악해 그 유익함을 말한다. 

  1) 시험(various trial)을 당하거든, 당황해하거나 놀라거나 위축되지 말고 오히려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2) 믿음의 시험(the testing of your faith)이 인내를 만들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내를 충분히 발휘하도록 하라.

  3) 온전한 인내를 기름으로 온전해지고(perfect) 구비하여(complete) 조금도 부족하지 않은 자(not lacking anything)가 될 수 있다.

  [묵상] 다양한 시험을 만나게 되면 사람들은 당황하고 힘들어한다. 성도들도 마찬가지다. 특히 예수를 통해서 만사가 잘되기를 바랐던 사람들은 더욱 당황한다. 초대교회에 성도들에게 닥쳐온 다양한 시험이 있었고 이로 인해 성도들 중 상당수는 이 시험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시험을 힘겹게 참아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야고보고 생각할 때 성도들이 시험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에 대한 문제를 신속히 해결해 주어야 할만큼 문제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야고보는 시험을 믿음의 시험으로 보았고, 그 믿음의 시험은 성도들에게 인내를 만들어내는데 그 인내는 성도로 하여금 온전해지고, 완전해지며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는 완전 식품과 같은 것이었다. 신앙의 핵심은 인내인데 그 인내를 성장시키는 것이 바로 '시험'이다. 다양한 시험을 통해서 성도는 인내가 자라게 되고, 인내는 성도로서 모든 일을 완전하게 할 수 있는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개인 트래이너를 통해서 훈련하는 이유는 스스로는 잘 관리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어려움과 불편함을 스스로 선택해서 근육을 키우기 어렵기 때문에 누군가의 관리를 받게 된다. 트래이너의 역할은 운동이 필요한 사람에게 어떻게 해서든지 운동을 시키는 역할이다. 기본적으로 하기 싫은 것을 시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돈을 들여가며 스스로 트래이너를 고용해서 그의 말을 듣는 것은 몸의 유익을 위해서다. 불필요한 살이 빠지고, 부족하던 근육이 생겨 몸을 더 균형잡히게 하고 더 건강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힘들과 짜증내지만, 후에는 그 트래이너에게 고마워하고 즐겁게 순종하게 된다. (마치 현빈이가 학원에서 조용히 시키는 역할을 하는 선생들에게 짜증을 내고 화를 내지만, 훗날 그 선생으로 인해 학습태도가 좋아지고 성적이 올라간다면 고마워하듯이)

  예) 학교 시험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시험을 싫어하지만 일반적으로 시험을 통해 학생은 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 

  시험은 누구나 피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시험을 피해서는 인내를 배울수 없고, 인내가 없이는 성숙함으로 나아갈 수 없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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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이선교회 캠퍼스 리더훈련 중 저녁집회


본문: 시편 131:1-3

제목: 젖 뗀 아이 같은 성도


 * 영적으로 건강한 상태: 젖 뗀 아이의 상태(배움,성장)

 * 영적 긴장이 필요한 영역: 복음에 대한 이해, 세상에 대한 이해, 사람과 공동체에 대한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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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해주는 삶, 용서 받는 삶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한다. 성숙한 사람일수록 겸손해 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말이 <겸손>하게 행동해서 <성숙>함을 보이라는 권면으로 들려질 수도 있고, <겸손>한 사람을 보면서 저 사람이 정말 <성숙>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할 때도 사용되기도 한다.

 

전자의 경우, 겸손은 하나의 덕목이 된다. 성숙한 사람이라면 마땅히 겸손해야 하고, 겸손한 태도로 자신의 성숙함을 입증해 보여야 한다. 그러다 보니 실제로 겸손하지 않은 사람이 겸손한 척 행동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우리는 그것을 겸손과 착각하게 되기도 한다. 심지어 겸손한 척하는 자기 자신조차도 말이다.

 

겸손이라는 덕목을 <용서>라는 덕목으로 대체해도 마찬가지다. 얼마나 많은 횟수를 용서하느냐에 따라, 얼마나 큰 잘 못을 용서할 수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성숙함을 평가할 수 있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작은 잘못에 대해서 화내지 않음으로서, 오히려 쿨하게 웃어 줌으로서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가를 과시하기도 한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그런 의도로 질문을 한 듯하다. 자기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을 몇 번이나 용서해 주면 되냐고? 일곱 번이면 되냐고 말이다. 그 말은 자신이 일곱 번 비슷하게 용서해 줄 수 있을 만큼 성숙해진 것 같은데, 이 정도면 상당히 괜찮은 사람 아니냐고 예수님께 확인 받고 싶어서 인 듯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그렇게 쉽게 칭찬해 주시지 않는다. 아니 칭찬해주시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베드로의 생각이 전면적으로 틀렸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어떻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사람에 대한 비유를 통해서 말이다.

 

주님의 논지는 간단하다. 일곱 번의 용서로는 턱도 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백 구십 번을 용서해야 만족스럽다는 말도 아니다. 핵심은 내가 얼마나 용서해 줄 수 있는가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큰 용서를 받았는가에 대한 깨달음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사람이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고 기다려주지 않음으로서 그 사람 스스로가 자신이 얼마나 큰 용서를 받았는지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는 것을 그 비유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몇 번이나 용서해 줄 수 있는가를 확인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의 성숙함을 드러내 주는 성적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성숙함에 대한 진짜 성적표는 내가 얼마나 큰 용서를 얼마나 많은 횟수에 걸쳐서 받았는가!를 깨닫는 것으로 확인된다. ‘주는 것으로가 아니라 받은 것으로 확인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 일게다. 다른 종교에서의 성숙함이란, 몇 번을 참되게 용서해 줄 수 있고 얼마나 겸손한가를 통해서 확인될 수 있다. 그래서 도덕적인 종교이고 더 근본적으로는 <자기 의>를 이루는 종교다. 반면 기독교는 내가 얼마나 큰 은혜와 용서를 받은 사람인가를 확인하고 깨달음으로서 자기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증거하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사람들을 향해, 겸손과 용서를 그렇게 강조하면서도 그것을 행하는 것이 전혀 자기 자랑이 되지 못함을 강조한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사람이 백 데나리온을 탕감해 주었다고 칭찬을 기대하는 것은 오히려 우스운 일이기 때문이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4:32)

 

바울의 이와 같은 권면은 모두 위에서 설명한 것들에 기초한 가르침에 의한 것이다.

 

 

어려서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사람은 참, 건강하다. 자신을 사랑하면서도 타인에 대한 배려도 부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타인에 대한 배려가 남다른데, 불편한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사랑받음에 대한 경험없이, 사랑해야 한다는 가르침에 훈련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타인을 사랑하지만,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세상으로 보내고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충분한 사랑과 용서 그리고 따듯함으로 수용된 경험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향해서 사랑과 용서의 의무를 지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용서하기도 하고 겸손한 듯한데, 그것이 사람들의 눈에는 건강해 보이지 않고 오히려 안타까워 보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싶다.

 

 

벼는 익었기 때문에 고개가 숙여지는 것이다. 내적 충실함이 겸손으로 나타는 것이다. 충분한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 좀 더디더라도 건강한 사랑을 한다. 충분한 용서를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 용납하기 쉬운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성급한 행동을 요청하기 보다는 사랑과 용서가 우러나오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서로 좀 기다려 줄 필요가 있다. 더디더라도 좀 기다려 줄 필요가 있다. 나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다. 주는 것보다는 받는 것을 건강하게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생각해보면 우리는 평생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훨씬 많은 인생이다. 부모로부터 주변 사람들로부터 자연으로서부터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말이다. 이걸 좀 알아야 복음적인 삶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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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13년 2월 24일(주일 낮예배)

장소: 중동교회(부천 상동)

본문: 여호수아 5:1-10

제목: 하나님의 얼굴에 미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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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딤전 4:6-16 경건: 성도 성숙의 과정

본문관찰(첫 독자의 입장으로 읽고 이해하기)

[6]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8]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9]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

[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11] 너는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12]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13]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14]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15]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16]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1. 본문을 천천히 3번 정독 합니다.

: 집중해서 읽어야 하고, 내용의 흐름을 이해하며 읽으라.

필기구(색연필 등)를 사용해 내용이해를 도우라.

2. 본문의 내용을 자신의 말로 정리해 봅니다.(작성하라)

1) 6-7절.

2) 8-11절.

3) 12-13절.

4) 14-16절.

3. 다음 질문에 대한 답을 본문에서 찾아보라.

1) 경건의 유익을 육체의 연단과 비교하여 설명하라.

2) 본문에서 구체적으로 경건의 훈련이 필요한 분야는 어디인가?(12절)

3) 경건의 훈련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목표는 무엇인가?

내용 이해를 돕는 해설

해석/적용(오늘 우리시대의 의미로 이해하기)

[본문이해]

바울이 목회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쓴 편지인데, 디모데는 적은 나이로 목회 사역을 감당한다는 것이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12절) 바울은 목회자로서의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지속하고 경건을 위해 훈련함으로 잘 감당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단어/문장 이해]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

:godless myths and old wives' tales

▯육체의 연단: physical training

▯금생과 내생: both the present life and the life to come.

▯미쁘다: This is a trustworthy saying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when the body of elders laid their hands on you.

나의 신앙의 목표는 무엇인가? 나는 성숙한 자가 되기 위해서 무엇을 훈련하고 있는가?

내 자신이 평가할 때, 경건의 훈련에서 가장 개선해야 하는 부분은 어디라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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