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

 지금의 대학생들은 '사랑의 순수성'이 사라졌다기 보다, 이미 그 나이에 '사랑을 계산해야 하는 상황'을 맞은 것이다. 가장 큰 요인은 사랑을 유지하는데 많은 비용이 들게 된다는 것이고, 사랑을 유지할 수 있는 안정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대의 사랑의 가장 큰 미덕은 서로를 '구속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의 사랑을 즐길 뿐 서로에게 어떤 구속도 요구하지 않는다. 요구해서도 안된다. 그것은 사랑의 룰을 깨는 것이다.
이런 대학생들에게 '순수한 사랑'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한 사회적 기반이 마련되어야 한다.(사랑을 할 수 있도록 이들이 가지고 있는 현실적인 경제적 부담을 줄여주도록 하는 것 등)

 질문0: 관계를 구질구질하게 하는 것은 최악이다. 사실인가?
 질문1: 학생들의 경제적인 부담이 '연애문제'에까지 깊숙히 들어와있다고 느끼고 있는가? 
 질문2: 학생들이 연애를 할 수 있도록 국가가 인프라를 구축해 주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저자의 제안에 대한 생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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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제제기

요즘 대학생들은 사랑의 순수성(열정)조차 퇴색되었다. 진정한 사랑이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헤어지는 것에 있어서 너무 쿨하다.(감정적으로 빨리 정리함)

  : 이들의 가치 중 하나는, 구질구질한 것은 죄악시. 쿨하거나 쿨한 척이라도 해야지.. 들러붙는 것은 가장 혐오스러운 행동.

2. 사랑은 성장 드라마

사랑은 통해서 사람은 감정노동을 하게되고 그것을 통해 사람은 성장한다고 생각한다. 대학생들은 연애를 위해 산다고 해도 받아들여주는 대상이다. 이런 그들에게 계산기를 두드리는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3. 사랑에 서사가 가능한 시대가 아니다.

사랑을 기대하지만, 현실적이 되라고 한다. 현실적이란 미래를 예측하고 준비하는 모습을 보여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예측불가능한 사회에서 가능한 것이란 말인가? 그래서 가장 어리석은 자는 오지 않을지도 모를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거나 감수하는 것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사랑을 즐기라고 말한다.

예전에 사랑은 자기를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으로서 증명된다고 여겼다. 사랑은 그래야만 했다. 그래야 사랑이다.
그러나 이제 사랑을 위한 비용은 서로에게 부담스러운 것이 되었고 그래서 사랑은 불안해졌다.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 너무 많은 희생이 들어감으로 연애에 목매는 자를 어리석게 본다. 비경제적이라는 것이다.

사랑을 유지하는데 많은 비용이 들자 사랑의 표현방식이 바뀌었다. 희생적인 사랑이 아니라, 서로를 배려해 부담을 지우지 않도록 하는 것이 사랑이 되었다.(그래서 매달리는 것은 사랑이 아닌게 된 것이다) 등가교환을 통해 서로의 곤궁함을 배려한다. 이것이 이들의 사랑이다.

  "사랑은 서로를 피곤하게 하지 않는 것"


4. 그래서 사랑에 인프라가 필요하다.

이들의 사랑의 순수성이 없다고 지적하는 대상들을 향해 오히려 사랑에 필요한 인프라를 구축해 달라고 요청해야 한다. 대학생들은 공부만 하는 대상이 아니다. 공부도 하고 사랑도 하는 대상이다. 이들의 사랑이 섹스로 전락한 것은 이들의 현실이다.
이들은 불안하다. 자신의 미래가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불안한 인생은 서사를 쓸수가 없다.
삶이 임시적이 되었는데, 사랑이 어떻게 임시적이지 않을 수 있는가?


TistoryM에서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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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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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시편 26편] 성도가 자신의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평안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서있는 자리가 평지(평탄한 곳)이기 때문이다. 나의 삶이 악인의 길과 의인의 길을 오가는 혼재속에 있다면, 우리는 울퉁불퉁한 도로위에 있는 것이며, 비탈진 곳에 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내가 평형을 이루고 있지 못하다는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인가 보다. 평소의 삶 속에 의의 자리에 서려 했던 자만이, 지금 자신의 토대가 평평한 곳임을 발견하고 안정감을 가진다. 


[정리1]


1. 나를 살피고 나를 판단하소서. 나는 주의 목전에 있습니다. 


  1절.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2절.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3절.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시험하시고 판단해 보시라고 시편 기자는 자신있게 말한다. 자신은 완전함으로 지금까지 행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와 같은 자기 자신의 삶을 살피시고 판단하시라고 말한다.


2. 나는 진리 중에 행하고 악과 거리가 먼 자입니다. 


  3절.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아니하리이다.(4절)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5절)

: 악인들과 함께 하지 않은 자신의 삶에 대한 고백이다. 시편 기자는 자신이

죄인들과 가까이 하지 않으려고 애썼음을 강조하여 말하고 있다.


  6절.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제단에 두루 다니며

감사의 소리를 들려 주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말하리이다.(7절)


3. 나는 주님과 주님의 계신 곳을 사랑하니, 악인들과 같이 취급하지 마소서.


  8절. 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그들의 손에 사악함이 있고

그들의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

나는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속량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 자신이 죄인들과 함께 행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과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를 사랑했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자신을 악인들과 함께 취급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한다. 자신은 완전함에 행하였으니 자신을 속량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것이다. 


내 발이 평탄한 데서 섰사오니

무리 가운데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 (12절)

: 안전한 곳에 서있는 자신을 확신하며 무리 가운데서 여호와를 송축한다. 


[정리2]


1. 시편 기자는 자신이 완전함에 행했다고 말할 정도록 악인의 길은 멀리하고, 의로운 자의 자리에 있으려고 온 힘을 다 기울인 사람이다. 


2. 그래서 자신의 삶을 면밀히 살피고 판단해 달라고, 더불어서 부족함이 있으면 단련시켜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2절) 더 나아가 그런 부족함가운데서 자신의 속량해 달라고 기도한다.(11절)


3. 즉, 시편 기자가 자신을 완전히 행했다는 것은 흠이 없는 완전에 이르렀다는 자기 인식이 아니다. 자기가 의식적으로 최선을 다해 악을 멀리하고, 의를 가까이 하려고 했다는 것에 대한 고백이다. 


4. 그는 평탄한 곳에 서 있는 자처럼, 안전하며 마음에 평안과 담대함을 가진다. 


5. 오늘날 성도들이 흔들리지 않는 안정감을 가지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의 삶속에 죄와 의가 혼재되어 있어서 비탈진 곳에 서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비탈진 곳에 있으니 늘 균형을 잘 잡고 있는 것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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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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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자신의 <종교를 선전>하기 위해서 여기까지 우리를 데리고 왔다고 생각해 심기가 불편한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고 우려했다. 어떤 사람은 종교문제는 이미 과거에 끝난 문제로 시계를 거꾸로 돌릴 생각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반감을 가지고 있는 분들을 위해 3가지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1.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1) 시계가 잘못 가고 있을 때에는 오히려 거꾸로 돌리는 것이 더 현명한 일 아닌가!

  2) 잘못된 길로 접어들엇다는 것을 알았을 때, 진보를 위해서는 다시 올바른 길로 되돌아가는 것이 선재해야 한다. 

  3) 수학의 예로도 설명할 수 있다. 잘못된 공식으로 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실수를 인정하고 바른 해법으로 풀어야 한다. 


  [소결론] 지금 세상의 상태를 보면 인정하시겠지만, 인류는 명백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 그렇다면 되돌아 가야 한다. 그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2. 본격적인 <종교 선전>은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 


  1) 지금까지 도덕률 배후에 누군가 또는 무엇인가 존재한다고 까지만 이야기했지, 특정 종교의 신에 대해서는 아직 언급도 하지 못했다. 성경이 없이도 알아올 수 있는데까지 온 것뿐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충격적인 두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1) 누군가 우주를 만들었다는 것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2) 그가 우리 안에 둔 도덕률이다. 이것은 내부 정보이기 때문에 더 좋은 증거가 된다. 

     이것을 볼 때, 우주 배후에 있는 존재가 옳은 행동(공정한 처신, 이기적이지 않은 마음, 용기, 신뢰, 정식, 신용 등)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하나님이 '선하시다'라는 말에 동의할 수 있다. 


   (3)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이 선하시는 말의 의미가, 무슨 짓을 해도 다 받아주는 상냥하고 동정많은 분이라는 뜻에서 말한 것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도덕률에는 어떤 짓을 해도 다 받아 준다는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도덕률은 올바른 일을 하라고 명령할 뿐, 그렇게 하기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4) 만약 절대 선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우리의 행동 대부분을 미워하리라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절대 선이 우주를 지배하지 않는다면, 어떤 노력을 해도 우리는 소망을 가질 수 없고, 반면에 절대 선이 우주를 다스린다면 우리는 매일 그 선의 원수가 되는 셈이다. 다음날이라고 사정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 선 없이 살 수도 없고, 그 선과 더불어 살 수도 없다." 

   "하나님은 유일한 위안인 동시에 최고의 공포이다."

3.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용서를 약속한다. 

   따라서 자신이 회개할 일을 저질렀다는 생각을 모르는 사람, 자신에게 용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기독교가 아무 의미도 가질 수 없다. 이 모든 것을 깨닫기 전에는 정말이지 기독교는 여러분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좀더 유쾌한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기독교는 결국 지금 말하는 것과 같은 낭패감에서 출발하는 종교다. 따라서 그 낭패감을 먼저 겪지 않는 한 아무리 위안을 얻으려고 노력한들 소용이 없다. 


[결론] 여러분이 진리를 구한다면 결국 위안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위안 그 자체를 구하다면 위안도 진리도 얻지 못한 채, 오로지 감언이설과 몽상에서 출발해서 절망으로 마치고 말 것이다. 지금 우리의 현실처럼 전쟁 전 국제 정치에 품었던 몽상에서 이제 막 깨어난것처럼 우리는 종교에 대해서도 몽상에서 깨어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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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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