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과 같은 명절에는 흩어져있던 가족들이 모여서 반갑기도 하지만 괜한 긴장과 갈등이 유발되기도 하지요. 추석으로 말미암은 것은 아니지만 추석 즈음에서 있었던 일이라 잠시 나누어 봅니다.


몇 일전 아내가 잠자리에서 저에게 '꿈'이야기를 해주더라구요. 이상한 꿈(악몽)을 꿨다고... 백화점 같은 곳에서 상점 옷을 입어보기 위해서 간이 탈의실에 들어갔는데.. 그 탈의실은 좁고 길더라는 것입니다. 옷을 갈아입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왠 남자가 우산으로 자기를 막 찌르더라는 것입니다. 듣고 있는데 기분이 이상하더군요. 그러면서 제게 묻는 말이 그 사람이 누군지 아냐고 하더군요. 저는 '그게 나야?'하고 답했죠. 직감적으로 저라는 것을 알았죠.


사실 그 몇 일전 사소한 일로 아내를 향해 소리를 높인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의자 위에 올라가있는 상태에서 문제가 발생해서 의자 위에서 아내를 향해 좀 큰 소리로 말했는데, 아내의 말로는 그 때 제 입에서 '화살'이 나와서 자신에게 박히는 것 같았다고 하더군요. 적지않게 큰 상처가 되었나 봅니다. 사실 저도 그 상황을 기억하고는 있지만, 아내가 먼저 그릇된 책임추궁을 해서 순간 억울한 마음에 큰 소리를 낸 것이라 아내의 잘못도 없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몇 일 좀 어색한 시간을 보내면서 제가 몇 차례 관계를 풀어보려고 시도하면, 그 때마다 차갑게 대했기 때문에 저도 오기가 나서 먼저 풀려고 하지 않은채로 몇 일을 지내온 것입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아내가 '꿈'을 꾼것입니다. 아내가 그 꿈이야기를 할 때, 저는 제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내가 무릎을 꿇어야 용서해 준다고 해서 바로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저는 제가 그 때, 큰 소리를 낸 것에 대해서는 잘한 것은 아니지만 아내가 먼저 원인 제공을 했기 때문에 지금도 잘못이 있다면 반반의 잘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가 무릎까지 꿇고 사과한 것은 아내로 하여금 심적 정서적 상처를 받게 만든 원인이 내게 있기 때문이고, 그것을 빨리 풀어주어야겠다는 생각에서 였습니다. 모든 것이 저의 잘못은 아닐지 모릅니다.(저는 지금도 그렇게 큰 소리는 내지는 않았다고 기억됩니다. 어쩌면 그 당시 아내의 마음 상태가 약했기 때문에 평소보도 더 크게 충격을 받은 것은 아닌가 생각도 들도, 제가 의자 위에 있었기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아내는 저로 인해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은 것은 사실이었기 그것을 풀어주어야 할 사람은 저였습니다. 제 생각보다 아내는 더 큰 충격을 받았고 마음에 상처를 입었던 것입니다.


가까운 사람 사이에서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할 거라 생각합니다. 상대방이 의도하지 않은 상처로 힘들어 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듯 합니다. 상대방이 문제인지 아니면 상처를 입은 우리 자신이 심약해서 인지는 여기에서 중요하지 않습니다. 상처를 받은 사람은 그가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알려주어야 합니다.(알려주지 않으면 상대방은 모릅니다. 저처럼 말이지요) 공교롭게도 의도하지 않게 상처를 준 사람은 자신으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에게 대해서 진지한 사과를 해야 합니다. 객관적인 잘못을 했다기보다는 '나의 부주의와 무심함'에 상처를 받았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을 가져야 합니다.


가족은 너무 익숙하고 친해서 모르고 지나가는게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체를 모를 뿐 없는 것은 아니어서 우리 안에 차곡차곡 쌓이고, 가족 구성원 중 약한 사람에게 가장 심적으로 불안정한 순간에 분노와 함께 드러나게 되곤 합니다. 그 아픔을 이해하는 누군가가, 그 상황을 옳고 그름의 장이 아니라 화해의 장으로 이끌어야 함을 깨달은 누군가가 '무릎'을 꿇어주는 마음이 없이는 '평화'란 없습니다. 가족 안에서 조차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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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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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죠이선교회 간사 세미나


정리: 김수억



1.  특별은총의 영역 뿐 아니라 일반은총의 영역에 대해서 이해가 있어야 한다. 


2. 인간은 구원과 관련하여서는 특별은총의 영역에 있지만, 인간이라는 존재라는 측면에서 일반은총의 영역이 적지 않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3. 구원(협의의 구원: 칭의)과 관련된 부분이 아닌 영역에서는 일반은총의 원리를 인정하고 충분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4. 한국교회는 성도들을 향해서 일반은총적인 영역에 대한 이해와 교육이 충분하지 못했다. 오히려 일반은총의 영역에 해당하는 것까지 모두 특별은총의 영역으로 환원시키는 우려를 범한다. 


5.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아브라함, 요셉, 다윗과 같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원리는 특별한 케이스이지 일반적인 원리로 봐서는 안된다. 있을수는 있지만 일반적인 원리로 보편적으로 적용하려고 하면 안된다. 


6. [개인적 의문1] 하나님은 인간 세상 안에서 나타난 '왜곡현상'(억압과 같은)까지도 '선'한 것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이 아닌가? '왜곡 현상'이 일반은총적인 측면에서는 '부정적인 측면'이 크지만, 신앙의 측면에서 본다면 '선'한 것으로 결과적으로 나타날 것으로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개인적 의문2] 불완전한 상태에서도 하나님은 그 불완전함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 아닌가? 이와 같은 가능성에 대해서까지 부정할 수 없지 않을까? (물론 그 논리를 일반화하여 불완전함을 정당화해서는 안되겠지만.)

  - 김 진 선생님의 강조점은 일반은총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못한 것에 대한 강조라고 볼수 있고, 특별한 것을 일반화하려는 것에 대해서는 우려하는 측면으로 개인적으로 이해하고 정리함. 



7.  우리 안에 있는(무의식의 세계: 닫힌 세계) 것에 대한 이해와 해결: 일반은총적 방법_인간의 정신세계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1) 억압과 분노: 그리스도인들은 분노 자체를 인정하지 못하고, 그것을 급히 해결해 버리려고 하는데.. 그렇게 되지 못하고 주로 억압하게 된다.(문제가 축적됨) -> 오히려 분노가 정당한가를 살피고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개인의 억압이 아닌, 관계안에서 분노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2) 분노를 건강하게 다루기 위해서는 억압했다가 나중에 터지게 되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 하나를 따로 따로 풀어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분노가 폭발할 때 가장 약자에게 드러나게 되어서 또 다른 상처를 만들어낸다. 





8. 탈억압: 술을 즐긴다는 것은 술을 통해 억업을 ON 상태에서 OFF 상태로 만들어주기 때문에 자유함을 느끼는 것이다. 

  1) 깊은 신뢰가을 주는 사람에게는 탈억압을 할 수 있는 자

  2) 인간 정신 세계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는 사람에게

   예) 포르노사이트에 빠진 사람: 본인도 타인도 깊은 죄의식에 빠져있는 사람에게 그 행위에 대한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분석해서 설명해 준다.(강력한 억압의 탈출구로서 포르노사이트를 삼은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것이라도 없었다면 그 사람은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자살할 수도 있었을 것으로 분석... 이런식으로 사람에 대한 이해가 깊다면 내담자에게 과도한 정죄의식에서부터 가벼워 짐. 가볍다고 여겨지면 오히려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3) 공감을 깊이 해주는 사람에게 탈억압함. 자신을 잘 아는 사람에게 공감능력이 뛰어나다. 


9. 억압에 있는 사람들에게 대한 치유적인 만남을 위해

  1) 그릇된 예상, 근거없는 예상에서부터 객관화하려고 해야 한다. 

  2) 억압의 강도를 약하게 표현해 봄으로서 상대를 확인해본다... 그래서 상대를 향한 정확한 예상을 한다.(긍정적으로 받아 줄만한 사람으로부터 실험을 시작해야 한다.) 

  ....


10. 전치

  본질적으로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데, 과거의 감정적 태도에 대해 유사성이 있는 상황에 대해서 자신의 감정을 그래도 옮겨 적용하는 것.

  : 인간 정신의 불합리함과 불완전함이 반영됨.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왜곡.


 이유가 없는데, 좋아하거나 미워하게 되는 경우 뭔가 전치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1) 과거의 경험으로 지금의 사람 혹은 대상을 왜곡하게 된다. 

  2) 현재를 살아야지, 과거의 매여서는 안된다. 



강의의 핵심은

과거의 경험이 현재에 왜곡되게 적용되도록 하는 것
부분의 경험을 전체라고 왜곡되게 적용되도록 하는 것

나 자신과 사람간의 관계에 있어서
이 부분을 경계하고 객관적으로 살펴서
공정한 영향을 받고 주는 것.



11. 투사: 사람에 대한 이해의 고급적 차원차원


어떤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 밖으로 던져진 것. 마치 다른 사람의 것인냥 돌리는 것을 투사라고 한다. 

  1) 과거 실재하지 않는 '용왕'이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을까? 우상숭배는 투사(?)



[질문] 억압, 전치, 투사와 같은 왜곡된 인식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은 결과인가? 아니면 인간 본연의 모습이라고 보는가? 


  2) 우리의 신앙=순수한 신앙 + 투사적 신앙(인간이 만들어낸 신앙)

      하나님의 상=순수한 하나님 + 투사적 하나님(인간이 만들어낸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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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이후의 여정에 대해>


1. 살인하지 말라라는 요청과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 중 어느것이 더 부담스러운 요청인가?


2.영역오류: 살인하지 말라는 것은 지킬 수 있는 요구이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지킬 수 없는 요구인데 이 두 영역에 대해서 혼돈이 있는 것을 봐야 하지 않을까?


  1) 5리를 가자고 했는데, 2리를 가는 사람은 죄를 짓는것일까요? 아닐까요?

  - 죄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럼 지킬 수 없는 요구를 하신 이유는 뭘까? 그 이유를 생각해 봐야 한다. 

    북극성은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아니라 가야할 방향성으로서의 목적을 가진다. 


  2) 살인하지 말라는 도덕률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당장 지켜야 할 도덕률이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북극성과 같은 것이다. 


3. 성경은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지향적 목적을 보여주고 있지, 그 과정적 단계를 설명해주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너무 일찍 지향적 목적에 노출됨으로 죄책감에 시달리거나 낮은 자존감을 가지게 된다. 


4.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은 같지만, 각 사람의 성숙도가 다르기 때문에 현재적 목표점은 다르게 적용되어야 한다. 


5. 과정적 목표와 지향적 목표를 혼돈함으로 발생하는 문제


  1) 위선: 목표에 이르지 못한 자기 자신을 숨기며 산다. 위선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숨기도 한다.

 

  2) 과정속의 나를 존재화. 고착화시킨다: 나는 이런 존재구나라고 좌절하고 그 자리에 고착시켜 버리는 사람도 많다. 이런 수준 밖에 되지 못하는구나라고 생각하고 그 자리에 멈춰버림.

   - 우리는 조금의 변화를 이루어가는 자기 자신을 기다려 줄 수 있어야 한다. 


  3) 죄책감: 적절한 죄책감과 부적절한 죄책감.

   2-3리 가는 것은 죄는 아닌데, 죄책감을 가지는 것은 부적절한 죄책감이라고 본다. 


   예) 시효가 지난 죄책감: 분명히 죄인것을 알고 회개했으면 죄책감도 없어져야 한다. 그 이후에 그 죄에 대한 죄책감은 시효가 지난 죄책감이다. 



지금까지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현재의 자기에 대해서 정직하지 못하다. 지향적 목표, 당위적 자기에만 집중하기 쉬운데, 현재적 자기를 잘 파악하면 좋겠다.  


  [참고] 본인은 협의의 구원(칭의)에서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인간의 행위와 선함이 근거가 되지 못하는)라고 믿는다. 그러나 광의의 구원(영화의 단계)까지의 성화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더불어 인간의 책임과 의지가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인간의 책임과 의지가 필요하다고 말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인본주의적이라고 본인을 보는 사람들이 여전이 있지만, 요즘은 그래도 전보다 많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과잉의존: 본인이 해야 할 책임과 노력이 들어가야 할 부분임에도 너무 빠르고 쉽게 '은혜'를 구하는 것을 봉니은 과잉의존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매우 신앙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부족한 모습이다.  


6. 성경적인 근거를 봅시다.


  1) 히 5:12-6:2 시간이 지났음에도 성인이 되지 못하고 유아기적 상태에 있는 것을 지적하는 본문. 

   <성숙한 자는>

    - 자신의 지각을 사용함

    - 연단을 받아

    -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


   <그리스도의 초보>  

    - 죽은 행실을 회개함

    -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

    -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


   이런 것을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2) 빌 2:12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 여기서의 구원은 협의의 구원이 아니라, 광의의 구원을 말한다. 

    - 광의의 구원에는 우리가 해야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3) 벧전 2:2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함이라.



7. 과정성을 적용하는 방법

 1) 언어습관을 바꾸라: 언어에 '과정성'을 담는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나는 1리 가는 사람이다 -> 나는 '지금'(아직은, 현재는)은 1리 가는 사람이다. 


  2) 사랑: 가장 완전한 조건 속에서 하는 사랑만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완전한 조건의 사랑이 사랑만이 아니라 내 수준에서 하는 사랑도 사랑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3) 정상성: 저 사람이 저렇게 한 것은 '정상적'이지...라고 인정하면서 받아들인 경우가 얼마나 있나요? 

   당위적인 자기, 지향적 자기에만 관심이 몰려있지 현재적 자기에는 관심을 갖지 못하니... 늘 비정상이라고 생각한다. 판단한다. 

    예) 이기심 -> (정상적) 이기심 / 분노 -> (정상적) 분노


   모든 이기심이 죄가 아니다. 이기심 안에는 정상적인 이기심이 있고 그것은 '정상적인 것'이다. 


  4) 분수개념: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임. 한계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요구하는 것. 만용이 위험.


  5) 강적: 나의 모든 것을 다 해도 할 수 없는 사람을 강적이라고 한다. 적절한 대응은 피하는 것이다. 


   예) 강적에 대해서 적절한 NO는 다른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YES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질문] 개인에게 있어서는 분수에 맞는 기꺼움으로 해야 하도록 해야 하지만, 만약 공동체로서 안에서 맡겨진 책임이 있는 것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인가?

   (1) 나의 역할에 대한 우선순위 설정. 가장 중요한 역할부터 순위를 맺어야 한다. 

   (2) 모두에게 부담스러운 일이라도, 가장 적은 부담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그 일을 맡기도록 한다.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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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된다? 되는 것만 해라!]


1. 미래를 어떻게 볼 것인가? 낙관적인가 아니면 비관적인가? 나을 것이라고 보는가? 나빠지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보는가? 


2. 미래를 낙관적으로 볼 때, 실제로 낙관적일 때 '하면 된다'는 정신이 중요하고, 그런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다수가 나아졌다. 그러나 미래가 낙관이 아니라, 나빠지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조심스러울 때... '하면 된다', '더 하면 된다'와 같은 구호는 '성공하지 못한 것은 네가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자기 자책으로 이어지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된다. 정말 자신이 '개미'처럼 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사회가 낙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3. 그럼에도 낙관적인 시대 속에서 '하면 된다'는 말과 함께 성공했던 사람들은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패기와 열정 그리고 꿈이 없어서 그렇다고 비난한다. 과거의 시대와 달라졌다. 해도 안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기대한 대로 되지 않은 혼돈의 시대, 예상하지 못한 변수로 가득한 시대, 기대를 저버리는 배신의 시대다.) 


4. 이런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면 된다'는 의식만을 강조하는 것은 그 구호에 맞춰 열심히 열심히 일해온 사람들에게 분노를 일으키게 된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요, 사회에 대한 분노요 주변 환경에 대한 분노다.


5. 그래도 분노는 통제가 가능한 감정이고 잘만 다스려지면 오히려 선한 결과를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격노'다. 격노는 감정의 통제를 받지 않으며, 공격적이어서 원인 제공자가 아닌 자기 자신과 가장 가까운(가족이든 격노가 일어나는 당시 지나가던 행인이든...) 그 감정을 표출하여 주변을 불행하게 만들어 버린다. 


6. 이 시대는 열번 찍어 안넘어가는 나무 없다를 강조하는 시대가 아니다. 오히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 보지도 말라고 가르쳐야 하는 시대다. 큰 꿈을 이루기 위해서 열심해 하라가 아니라, 지금 할 수 있는 것부터 해라 라고 말해 주어야 하는 시대다. 


 - 우리가 잘못 산게 아니었어.(엄기호/웅진 지식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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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우리는 아직도 비전과 꿈에 대한 메시지를 요셉과 다니엘을 근거로 여호수아를 근거로 얼마나 강조하고 있는가? 꿈이 없는 비전이 없는 하고 싶은 것이 없는 청소년들을, 청년들로 하여금 자신이 비정상적인 상태임을 각인시켜 주면서 말이다. 교회 뿐 아니라 교육 현장에서 이것으로 학생들을 얼마나 닥달하는가! 왜 이 시기를 개미처럼 살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열심히 해서 목적한 바를 성취하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저자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무엇을 가르치며 무엇을 도전해야 할 것인가? 오늘의 가치와 오늘의 중요함을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싶다. 큰 그림보다 작은 내 삶의 현장을, 먼 미래보다 지금 내가 있는 공간을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것의 중요함을 전해야 하지 않을까?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현재의 삶을 유보할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 충실함으로 미래를 맡겨드리는 신앙을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교회이든 학교이든 교육의 초점이 바뀌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육은 학생들을 주눅들게 하고, 패배를 자기 자신에게만 돌이게 만들어 버려 결국 낙오자가 되게 하거나 아니면 냉소주의자를 만들 뿐이다. 성공한 일부의 사람은 영웅주의에 빠질 것이 뻔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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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시편 7편] 하나님은 매일 분노하신다.(11절) 하나님은 회개하지 않는 자를 위해 칼을 가시고,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해 놓으신다.(12절) 성경에 이런 두려운 하나님에 대한 묘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의 본모습을 감추고 숨기는지... 하나님은 끓어 오르는 분노를 매일 간신히 참고 계시는 것일 뿐이다. 그것을 모른채 우리는 얼마나 방종한지... 칼을 갈고 계시고, 활을 당기어 예비해 놓으시는 하나님을 묵상합시다.  



[정리1. 본문의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자]


1. 여호와여 나를 구원하소서 나는 원수들에게 위태롭습니다.(1,2절)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아오는 모든 자들에게서 나를 구원하소서

                                    건져낼 자가 없으면, 그들이 사자 같이 나를 찢고 뜯을까 하나이다.

     : 시편 기자는 자신을 대적하는 자를 피할 유일한 곳이 여호와 하나님 밖에는 없음을 고백하고 여호와께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2. 자신은 이런 일을 당할만한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3-5절)

  내가 이런 일을 행하였거나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내 대적에게서 까닭 없이 빼앗았거든

  원수가 나의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게 하고 

  내 영광을 먼지 속에 살게 하소서.

: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한다. 자신은 누군가로부터 이런 일을 당할만한 악행을 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 자신이 잘못한 것이 있다면 그 일에 합당한 심판을 받을 각오가 되어 있음을 고백한다. 


3. 여호와여 진노로 일어나시고 나를 위해 깨소서.(6-10절)


  여호와여 진노로 일어나사 내 대적들의 노를 막으시며 나를 위하여 깨소서 주께서 심판을 명하셨나이다. 

  민족들의 모임이 주를 두르게 하시고 그 위 높은 자리에 돌아오소서.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나의 성실함을 따라 나를 심판하소서.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나이다.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제 나의 대적들에게 진노로 일어나 달라고 요청한다.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분이니, 심판을 행하셔서 악을 끊고 의인을 세워달라고 요청한다.(자신의 떳떳함을 확신하고 있기에) 시편 기자는 자신의 유일한 방패는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한다. 우리의 삶의 태도도 이와 같아야 할 것이다. 무조건 은혜와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께만이 아니라,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도 되어야 하는 것이다. 


4. 의로우신 하나님의 분노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죽일 도구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가 만든 화살은 불화살들이로다.

 

  악인이 죄악을 낳음이여

  재앙을 배어 거짓을 낳았도다.

  

  그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그의 재앙은 자기 머리로 돌아가고 그의 포악은 자기 정수리에 내리리로다. 


: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시다. 매일 분노하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회개하지 않는 자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위태로운 일이다. 그는 회개하지 않는 자를 심판하기 위해 칼을 가시며, 활을 당기어 조준하고 있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심판관이시다. 죄를 두려워함이 없다면,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5. 이와 같은 하나님으로 인해 감사하고 찬양함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정리2. 메시지와 묵상]


1. 하나님은 공의로운 하나님이시며, 악에 대해서 매일 분노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을 얼마나 오해하는가? 하나님은 은혜롭고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신 분으로만 생각하고 그것이 복음이라고 생각하니 말이다. 그러나 시편 7편의 기자는 여호와 하나님은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참으신다. 그러나 여유롭게 참으시는 것이 아니다. 끓어 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참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시면 간신히 참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모르고 그냥 하나님께서 맘 편히 계신다고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도덕적 영적 타락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2. 따라서 죄인은 회개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칼과 활로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 악인들은 자신들이 행한 것에 대한 재앙을 자신이 받고, 자신이 해 놓은 올무에 스스로 묶이게 되는 것이다. 




3. 하나님은 억울한 의인의 기도를 들으셔서 공의로 판결하심으로 의인들은 여호와를 찬양하게 될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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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시편 6편] 우리는 기도하면, 어떻게 응답받을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이 응답받는 사람이 될 것인가? 에 초점이 맞춰지기 쉽다. 그러나 시편 6편은 기도는 기도할 수 밖에 없는 마음과 기도하는 과정을 보여줄 뿐이다. 응답에 대한 약속 같은 것은 없다. 혼자 기도하고 혼자 울다가 혼자 다시 한번 확신을 가지고 돌아올 뿐이다. 근데, 그게 기도다.


[정리1. 본문의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자]


1. (1절)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소서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소서.

  : 시편 기자는 지금 자신이 당하는 고통과 아픔이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의 결과라고 여긴다. 이제 그 분노와 진노를 거두어 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2. 나의 간구와 설득(절박함) 2-7절.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 자신이 지금 당하는 일로 말미암아 수척해지고 심지어 뼈가 힘없이 떨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표현하고 있다. 절실한 회복이 필요한 순간임을 강조하고 있다. 죄에 대한 뉘우침이나 회개에 대한 내용은 없다. 그저 자신이 절박하니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나의 영혼도 떨리나이다.

    : 자신의 절박함과 위태로움이 <영혼도 떨립니다>라는 표현에 함축되어 있다. 꺼져가는 초와 같은 자신의 상태를 보여준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 시편 기자는 간청을 넘어 하나님께 억양을 높이고 있다. 언제까지 자신을 이 상태로 놔 두실 것인지 따진다. 돌아와서 나의 영혼을 건져 주시라고 사랑으로 나를 구원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기다림의 한계, 간구가 속히 이루어지지 않음에 대한 답답함이 인간적인 표현으로 묘사되었다.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 내가 이러다가 죽고 스올에 이르게 되면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겠는가? 죽을 때까지 돕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누가 찬양하고 감사할 수 있겠는가? 너무 늦지 않게 구해 달라고 요청하는 표현이다.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

   : 오늘도 역시 눈물로 고통의 밤을 보내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묘사하고 있다. 아직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이 없다. 그저 그렇게 기자는 답답함의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린 것으로 오늘의 기도는 마친다. 


3. 기자의 확신(8-10)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 여호와께서 내 울음 소리를 들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이다. 

  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 기도의 마지막 고백은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고, 그래서 자신의 원수들은 결국 부끄러움을 당하고 두려워 할 것이고,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게 될 것이라는 확신의 고백으로 마친다. 



[정리, 메시지]


1. 기도하는 시편 기자의 상황은 처절하리만큼 비참하지만, 하나님은 기도의 마지막까지 보여지는 응답을 주지 않으셨다. 


2. 오히려 기도하는 기도자의 믿음과 신뢰에 대한 고백만이 있을 따름이다. 


3. 시편의 기도란, 혼자 괴로워하다 혼자 기도하고 혼자 울다가 혼자 확식하고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것을 성경에 넣으심으로 기도는 그런 것이며, 이 기도는 실패하지 않은 기도였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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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노에 대해서1]


고대 그리스 철할자 플라톤은 용기 있는 자만이 분노할 수 있다고 말하며 분노를 현자가 마땅히 지녀야 할 덕으로 간주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화를 낼 만한 일이나 대상에 대해 적절한 때에 화를 내는 일은 칭찬받을 만하며, 이것은 악이 아니라 도리어 미덕이라고 주장했다.
-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신원하), 87쪽.

분노가 악의 도구가 되기도 하지만,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도 함께 생각해 봐야 하는데, 우리는 너무 분노를 용서와 사랑이라는 덕목으로 <억압>만 한 것은 아닌가 반성해 보아야 할듯 합니다.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분노가, 뒷담화로 나타나기 쉬운데 분노에 대해서는 격하게 정죄하면서도, 뒷담화에 대해서는 서로 관대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분노에 대해서2]

인간이 화를 낼 때 그것이 치명적인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 화가 의로운 것이든 아니든 좀처럼 통제하기 쉽지 않다는 데 있다. 바로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발생하는데, 분노해야 마땅한 대상에게 마땅한 몫으로 갚아 주는 정의의 수준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89쪽)

흔히 분노가 극에 달하면 이성을 잃는다고 표현하는데, 이 말은 복수에 대한 욕망으로 정신이 한 곳으로 몰린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하다. 이성은 실종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수할 계획과 전략을 짜는 쪽으로 몰린다.(91쪽)

-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 신원하.

분노에서 태동하는 복수는 그래서 강력하고 집요하며 사악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낼 수 있는 최대치의 악이 집중되는 것은 분노로부터 올라온 것이다. 따라서 분노를 다스리지 않고 방치하거나 방임한다면 우리는 지옥으로 가는 문을 열어놓고 사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래서 분노는 위험하다.


‎[분노에 대해서3]

분노를 이기는 길(98-106쪽)

1. 원수 갚는 일은 나에게 속해 있지 않다.
: 하나님께 심판을 맡기고 내가 심판하지 않기

2. 용서하기
: 분노의 씨앗이 자라지 못하도록 용서해 버리기

3. 분석하고 소통하기
: 객관화하여 분노의 대상을 분산시키기라고 보면 될 듯

4. 입 안에 침이 고이기까지
: 일단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고 참기

5. 생산적 에너지로 전화하라.
: 루터는 화가 나면 화를 솟구치게 하는 그 에너지를 이용하여 글쓰기와 연구에 몰두했다는...

-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 신원하.

올 해는 우선 실천하기 쉬운 것부터 해 봅시다. 입 안에 침이 고일때까지 말하지 않는 것으로 분노를 다스려 보는 것부터 해 봅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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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 교만, 시기,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정욕


단테는 이 7가지 대죄를 사랑과 관계되어 3가지로 구분합니다. 

왜곡된 사랑, 불충분한 사랑, 과도한 사랑.

사랑이란 이름만 붙인다고 다 아름다운 건 아닙니다. 

어쩌면 모든 죄는 사랑의 돌연변이 입니다. 





4세기 사막 수도사로 부터 규정된 죄의 규정은 조금 변화되고 정리되어 로마 가톨릭 안에서 7대죄(죽음에 이르게 하는)로 자리를 잡았다. 


교만, 시기,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정욕


이 일곱가지 죄는 모든 죄의 머리가 되는 죄로 다루어졌다.




단테는 대죄를 그릇된 세 유형의 사랑으로 분류했다.


첫째,  교만, 시기, 분노와 같은 죄를 <왜곡된 사랑>이라고 구분했다.

둘째, 나태와 같은 죄를 <불충분한 사랑>이라고 구분했다.

셋째, 탐욕과 탐식과 정욕은 <과도한 사랑>이라고 했다. 



20세기 소설가이자 단테 연구가인 도로시 세이어즈(Dorothy Sayers)는 

크게 두가지로 7대죄를 구분했는데


첫째, 정욕, 분노, 탐식을 <뜨거운 마음의 죄>

둘째, 탐욕, 시기, 나태, 교만을 <차가운 마음의 죄>


구분했다. 


추가적인 설명으로 뜨거운 마음의 죄는 최소한 공동체 생활을 무너뜨리지는 않지만, 

차가운 마음의 죄는 인간관계와 공동체를 균열시키는 더욱 파괴적인 죄로 여겼다. 


 -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 / 신원하 / IVP / p.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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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21장] 우리가 마지막 날 어떤 얼굴의 하나님의 만나게 될지, 우리는 잘 준비되어야 할 것이다. 겸비하여야 한다. 겸비한다면 기회는 있다.

 

 

[정리1.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1. 시드기야 왕이 예레미야에게 사람을 보내어 하나님의 뜻을 묻다.
  1) 시드기야 왕이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과 제사장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를 예레미야에게 보내 바벨론의 위협으로부터 구원받도록 간구하도록 부탁함.  하나님의 기적을 바람.


  2) 예레미야가 그들을 통해서 시드기야 왕에게 전하는 내용
   (1) 여호와께서 바벨론과 싸울 때 사용하는 너희들의 무기를 다 모아들이겠다.
   (2)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진노와 분노와 대노로 너희를 칠 것이다.
   (3) 이 성에 있는 사람이나 짐승을 치리니 큰 전염병에 죽으리라.
   (4) 전염병과 칼과 기근에서 살아남은 자는 원수들의 손에 넘겨 죽게하고 불쌍히 여기지 않겠다.


  3) 너희들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다.
   (1) 이 성읍에 사는 자는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을 것이다.
   (2) 그러나 너희를 에워싼 갈대아인에게 나가서 항복하는 자는 살 것이다.(그러나 전리품처럼 여겨질 것이다.)


  4) 여호와께서 이곳을 향하여 얼굴을 두심은 복을 내리기 위함이 아니요 화를 내리기 위함.

 

2. 유다를 향한 권면
  1) 다윗의 집이여, 너는 아침마다 정의롭게 판결하여 탈취당한 자를 압박자의 손에서 건지라.
  2)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 때문에 내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서 너희를 사르리라.
  3) 골짜기와 평원바위의 주민들아, 너희들은 누가 우리를 치고 우리 거처에 들어오겠는가 말하지만, 내가 너의 대적이다.
  4) 내가 너희 행위대로 너희를 벌할 것이요 또 수풀에 불을 놓아 그 모든 주위를 사르리라.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내용을 다시 풀어서 작성하기]

 

시드기야는 바벨론의 침공 앞에서 두려운 마음으로 예레미야를 찾게 된다. 그리고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나님의 기적같은 도움을 구하려 한다. 그래서 시드기야는 바스훌과 제사장 스바냐를 예레미야에게 보낸다.


예레미야의 답변은 충분히 예상되는 답변이다. 하나님께서 유다를 돕는 것이 아니라, 유다가 사용할 무기들을 성 중앙으로 모으고, 하나님께서 유다에게 진노와 분노와 대노로 유다를 칠 것을 오히려 말씀하신다. 유다는 바벨론 때문에 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망하게 되는 것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전염병과 칼과 기근으로 죽게 할 것을 말씀하신다. 비참한 죽음을 말씀하신다.


그러면서도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이 있다고 말씀하여 뭔가 희망이 있는 것처럼 운을 떼신다. 그러나 생명의 길이라는 것도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의 생명의 길은 아니다. 포로가 되어 목숨을 연명하는 정도의 생명의 길이다. 바벨론에게 항복하면 목숨을 건질 것이라는 말씀이다. 여호와께서 지금 유다를 향해서 얼굴을 향한 것은 복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심판하시기 위함임을 명백하게 말씀하신다.


다윗의 집을 향해서 정의를 행하고, 탈취당한 자를 압제자의 손에서 건지라고 요청하신다.  

 

[정리3.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교훈과 묵상]

 

1. 시드기야는 은혜를 바랐지만, 하나님은 심판만 말씀하셨다.

 

시드기야는 절박한 마음으로 기적을 바라고 예레미야에게 사람을 보냈지만, 하나님은 냉정하게 심판만을 답하셨다. 하나님은 분노와 진노, 그리고 대노하셨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금 유다가 처한 위기는 바벨론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믿던 하나님때문에 일어나게 된 것을 강조하신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분이시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은혜를 받았고, 은혜를 누렸고 안타깝게도 은혜를 남용했다. 하나님은 은혜로울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유다는 결정적인 순간에 은혜를 요청했지만, 하나님은 은혜로 답하지 않으셨다. 전에는 은혜를 주셨던 그 분이, 이제 진노를 작정하시고 몰아붙이신다.

 

이렇게 된 이유는, 이 백성이 방자히 행하여 하나님을 진노와 분노, 대노하게 했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얼굴 방향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향해 얼굴을 향하신다. 마치 자식을 낳은 어미의 심정으로 늘 그 자녀에게로 고개를 향하신다. 그러다가 자녀에게 등을 돌리실 때가 있다. 자녀의 잘못이 반복되어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할 때, 하나님께서 등을 돌리신다. 회개하기를 기다리신다. 잘못을 구할 때까지 돌아보지 않으신다. 용서하시고 싶지만, 버릇을 고치기 위해서 마음을 독하게 먹고 견디시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다시 고개를 향하는 것이다.

 

진심과 전심으로 회개하고 돌아오면 은혜와 자비, 용서의 마음으로 고개를 향하시고 그 간의 모든 상처와 아픔을 씻어주시고 위로와 격려로 인도하신다.

그러나 여전히 돌이키지 않고, 더 악한 길로 가며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남용하는 악한 태도를 견지할 때, 하나님은 다시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그들을 진멸하시도록 심판하신다. 분노의 얼굴이며 심판의 얼굴이다.

 

우리가 마지막 날 어떤 얼굴의 하나님의 만나게 될지, 우리는 잘 준비되어야 할 것이다. 겸비하여야 한다. 겸비한다면 기회는 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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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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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15장] 하나님도 지쳤다. 아무도 하나님을 말릴 수 없다. 하나님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하나님을 지치제 만든 우리들의 고집과 악의, 참 대단합니다.(묵상만 읽으세요)



[정리1. 본문의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요약할 수있으면 요약하면서]


1. 여호와 앞에 모세와 사무엘이 있더라도, 이 백성은 용서받을 수 없다. 

  1)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다. 쫓아 보내라.

  2) 유다 백성들이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란 말입니까?

  3) 죽을 자는 주음으로, 칼을 받을 자는 칼로, 기근을 당할 자는 기근으로, 포로 될 자는 포로 됨으로 나아가라.

  4) 여호와께서 이 백성을 네 가지로 벌하신다.(죽이는 칼, 찢는 개, 삼켜 멸하는 공주의 새, 땅의 짐승)

  5) 유다 왕 므낫세가 예루살렘에서 행한 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들을 여러 민족에게 흩음.


2. 예루살렘을 불쌍히 여길 자가 없다.

  1) 너를 위해 울 자 누구며, 돌이켜 네 평안을 물을 자 누구냐?

  2) 네가 날 버리고 가지 내가 내 손을 펴서 너를 멸하리라. 내가 뜻을 돌이키는 것도 지쳤다.

  3) 너희 자식이 끊어지고, 과부는 모래보다 많아졌고, 갑작스러운 멸망에 놀라고 두려울 것.

  4) 그 남은 자들은 그들의 대적의 칼에 붙이리라. 


3. 예레미야의 고통(사역자로서의 고통)과 하나님의 약속

  1) 내가 잘 못한 것도 없는데, 모든 사람들이 나를 저주하는 구나.

  2)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를 강하게 할 것을 약속하신다. 원수로 간구하게 할 것이라 약속함.

  3) 그러나 유다는 북방의 공격으로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포로로 잡혀가게 될 것이다. 

  4) 예레미야는 여호와께 자신을 기억하고 돌봐주시도록 그래서 멸망당하지 않도록 간구한다. 

  5) 예레미야는 자신을 기뻐하는 자의 자리에 앉지 않고, 하나님이 보내신 일을 위해 홀로 앉아있다.(고독한 자신의 사역을 말함) 이는 주의 분노를 내게 채우신 것이다. 나의 고통은 점점 중하여 낫지 않고,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습니다.(낙심)

  6) 여호와는 예레미야에게 다시 돌아오면 내 앞에 세울 것이고, 헛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말한다면 다시 여호와의 입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에게 돌아가지 말라고 하신다. 예레미야를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여 그들이 너를 칠지라도 이기지는 못하게 하신다.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글을 다시 내가 이해한 방식으로 펼치기]


여호와께서 유다를 판단하고 심판하시는데 어떤 중보자도 이를 막을 수 없다. 모세와 사무엘이라 할찌라도 하나님의 분노를 막을 수 없다.(광야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진노를 막았으나) 그만큼 유다의 죄가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네 가지로 백성을 벌하신다는 것은 결국 완전한 심판을 말하고 작은 것 하나 남김없이 심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준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몰인정하셨던 분은 아니다. 하나님은 한없이 좋은 분이시고 인자와 자비로 자기 백성을 대하셨던 분이다. 그런데 유다는 교만했고, 하나님의 은혜를 악용했다. 하나님도 이제는 지쳤다. 내가 뜻을 돌이키는 것도 지쳤다고 말씀하신다. 오래 참으신 만큼 하나님의 진노 또한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식을 끊고, 수많은 과부가 일어나게 하며 갑작스러운 멸망에 놀라고 두렵게 할 것이다. 남은 자들은 대적의 칼에 모두 죽게 할 것이다. 


이런 완악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진실된 경고의 메시지를 전해야만 하는 예레미야의 심정이 편하지 않았다. 그는 즐거워할 수 없었고, 늘 고통과 소외와 영적 부담에 눌려 고통가운데 지냈다. 어쩌면 이와 같은 영적 고난의 자리에서 피하려고 했었던 것 같기도 하다.(여호와께서 그에게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분노가 예레미야에게 쌓였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암튼, 신음하던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놋 성벽이 되게 하여 대적들이 너를 칠지라도 이기지는 못하게 하리라는 약속을 남기신다.


[정리3. 묵상 및 적용_인상깊었던 문구, 자연스럽게 올라오는 메시지 등]


1. 하나님의 진노, 중재자가 없은 유다 백성.


누가 좀 하나님을 말려보세요. 이러다가 큰일 나겠어요.... 아니요, 아무도 하나님을 말릴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중재자가 없는 유다의 상태를 말한다. 모세와 사무엘이 온다고 해도 하나님의 진노를 막을 수 없다. 모세와 사무엘의 중재 능력이 부족하다는 말도 아니고, 하나님이 막무가내라는 말도 아니다. 그만큼 유다의 죄가 넘친다는 것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중재자를 잃어버린 관계. 풍랑 속에 표류하는 땟목같은 운명이 아니겠는가? 죄를 짓더라도 중재자가 언제나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죄를 지어야 한다. 엄마가 내 편이 되든지, 아니면 아빠라도 내 편이 되어 줄 수 있을 때 그것도 아니라 형제나 주변 사람들이 나를 위해서 중재할 수 있을 정도의 관계(최소한의 정의와 사랑)는 실현하면서 살아야지 그렇지 못하면 마지막 날 중재해 줄 사람이 없거나, 효력이 없어 그대로 망하게 되고 말 것이다. 


2. 이제 하나님도 지쳤다. 


성경에 있는 표현 중에 가장 충격적인 표현은 하나님도 이제는 지쳤다는 것이라 본다. 하나님도 더 이상 자기 백성인 유다를 위해서 뜻을 돌이키시는데 지쳤다고 말씀하신다.(6절) 하나님의 한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격자이신 하나님께서 관계속에서 이 백성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는 상황, 용서와 끊임없는 자비가 더이상 이들을 선한 길로 인도하지 못한다는 이 백성의 한계가 분명하게 드러났다는 것을 묘사하는 것이다. 


유다 백성은 참 대단하다. 이 백성 앞에 하나님도 무릎을 꿇었다. 하나님이 지친것이다. 여호와의 천사가 야곱과의 씨름에서도 지쳤다.(창 32:25) 야곱의 포기하지 않는 자기 고집 때문이었다. 그래서 여호와의 천사는 그의 허벅지 관절을 침으로 그 싸움에서 벗어나 그를 버리고 가려고 했다.(26절) 


하나님을 지치게 하는 사람들, 이들은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다. 하나님으로하여금 한계(?)에 이르도록 했으니 이는 하나님이 감당치 못할 사람이다. 하나님을 지치게 만드는 인간.... 하나님께 죄송하다는 생각이 든다. 


3. 사역자가 짊어져야 할 고통


사역자가 짊어지는 진짜 고통은 가난과 핍박과 같은 외부적 고통이 아니다. 내면적 영적 고통이다. 하나님의 고통이 자기 자신에게 전해지고 채워지는 고통이다. 그것이 사역자가 본질상 느껴야 할 고통인 것이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표면적 고통 속에서, 이는 하나님의 고통을 자신에게 채우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17절) 그래서 고통이 큰 것이다. 그래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지만, 그럼에도 벗어 버릴 수 없는 것은 그 고통이 하나님의 고통이기 때문인 것이다. 


예레미야가 짊어진 고통,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짊어지신 고통... 예수님은 그 고통을 벗어 버리고 싶었지만, 벗어버리기를 원치 않았다. 짊어 지셨다. 그리고 죽음까지 간직하셨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 죄에 대한 것을 정하셨다. 예레미야에게서 예수의 모습을 본다는 말이 진실로 그렇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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