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by Torsten Dederichs on Unsplash

[성경본문 정리]

35절.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절.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절.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 지더라

40절.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절.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성경내용 정리]

1. 예수님께서 무리를 떠나 제자들과 저편으로 건너가고자 하셨다. 제자들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갔다.(막 4:1) 다른 배들도 함께 따라왔다.

2. 그러는 중에 큰 광풍이 불었고 물결이 배에 부딪혀 배가 위태롭게 되었다. 그 때까지도 예수님은 배의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있었다. 이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며 '우리가 죽게 되었다'고 예수님께서 어떤 행동을 취해주시길 바랐다. 

3. 예수님께서는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에게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그러자 바람이 그치고 바다가 잔잔해 졌다. 그리고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4. 제자들은 이런 상황을 보면서 다시 한번 예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도대체 이분은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질문하기]

1. 이 사건을 통해서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경외함을 가지게 되는가? 

  1) 큰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

  2) 바람과 바다도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순종하는것

 -> 예수님은 자연현상(사람이 임의로 할 수 없는)에 대해서까지 당신의 의지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다. 동시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 자연 세계 조차도 그 말씀 앞에서 순종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다. 이로 인해 제자들은 그 분을 경외하게 된다. 

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라고 하실 때 여기서의 '믿음'은 구체적으로 어떤 믿음일까? 

  1) 상황 상 해석하자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내가(예수) 너희와 함께 있는데 왜 풍랑과 바다 앞에서 목숨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느냐?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2) 이 해석을 확대하자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내가 너와 함께 하시겠다고 제자들에게 약속하신것처럼 이 땅의 교회와 함께 하실텐데 세상의 풍랑과 바다(고난, 환난 등)에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을 가지라는 말씀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묵상하기]

어부들인 제자들조차 감당할 수 없는 큰 풍랑이 일어났고, 배에는 물이 넘치고 흔들렸을텐데 예수님은 어떻게 이런 환경 속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실 수 있었을까? 예수님께서 너무 피곤하셨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이런 상황 속에서 제자들의 반응과 대처하는 과정을 보기 위해서 자는 척 누워계셨을지도 모르겠다. 큰 풍랑으로 불안과 공포의 상황이겠지만 내가 제자들과 함께 있으니, 그래도 날 믿고 의지하지 않을까 기대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아직 제자들의 믿음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더 알게 되었을 것이고, 믿음은 더 커지는 계기를 마련했을 것이다. 

종종 하나님은 우리의 곁에 계시면서도 마치 없으신 것처럼, 우리의 상황에 무관심하신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옆에 계신 것은 분명한데, 주무시고만 계시니.. 더 답답하다) 그러나 주님의 의도는 우리에게 '믿음'이 있는가를 기대하시고 참고 기다리고 계시는지 모른다.(자는척 하시지만, 실눈 뜨고 지켜 보시는 것처럼) 우리는 제자들처럼 보통 두려움으로 주님을 흔들어 깨우고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모르느야고 다급하게 소리친다. 그러나 한 번은 마치 아무일 없는것처럼 태평하게 기다려 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급하게 일어나서 우리에게 닥치 위험을 먼저 막으시도록. 그러면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 이 놈의 '믿음'은 위험한데? 주님을 움직이게 할 것인가? 주님이 움직이시도록 믿음을 발휘할 것인가? 우리의 믿음은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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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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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3:1-5>

(정리하기) (질문하기) (묵상하기)

1. (권면) 너희는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1절)

-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이유)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원리)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2절)

(예시1)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3절)

(예시2) 배를 보라. 사공은 지극히 작은 키로써 큰 배를 광풍 속에서도 그 뜻대로 운행한다.(4절)

(소결론)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5절)


(정리) 선생되는 것을 신중히 하라. 선생에게는 더 큰 책임이 따른다. 왜냐하면 선생은 말을 많이 하게 되는데 말의 실수가 없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말(혀)은 작은 것 같지만 그것을 다스릴 수 있는 자는 몸 전체를 다스릴 수 있는 자다. 따라서 혀는 크기는 작아도 매우 큰 역할을 하는 것이다. 

(질문)

1. 본문의 논지를 통해 볼 때, 교사(가르치려는 자)가 되려는 자가 많았고 그들이 하는 말들로 인해서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문제가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2. 말의 영향력이 크고, 혀가 가진 힘이 크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의 만의 문제는 아니고 일반적인 상식으로도 통용될 수 있다. 모든 영역에서의 교훈이 될 수 있겠다. 어찌보면 야고보서는 구약의 잠언 같은 느낌을 준다. 

3. 야고보는 말에 실수가 없을 수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교사는 실수하면 안된다는 교훈을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함부로 교사가 되어서는 안된다. 교사로 사람을 세울 때는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묵상) 말은 얼마나 무서운가? 말 하나로 상대 전체를 파악하기도 하고 또는 오해 하기도 해서 그 사람이 그동안 쌓아온 것이 허물어지기도 한다. 오직 나 자신만이 제어할 수 있고 타인에 의해서 작동할 수 없는 것이 혀지만, 혀를 통해 만들어지는 말은 나를 세우기도 하고 허물기도 한다. 게다가 말은 내 안에 있는 것이 나오고, 내 수준만큼만 나오는 것이기에 그 결과물을 단순히 말실수라고만은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책임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말에 신중해야 한다. 충분히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잘 준비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선생이 가지는 영향력을 고려할 때 신중하는 것이 현명하다. 

교회는 말이 많은 곳이다. 말이 많은 것도 문제가 될 수 있으나 그 말이 공식적인 소통의 장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물밑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정확한 말의 출처를 알 수 없고, 그 말이 가지는 무게를 알 수 없다. 심지어 무슨 말이 오고가는지 알 수 없기에 답을 해야 하는지도, 무슨 답을 해야하는지.. 누구를 향해서 해야하는지도 알 수 없게 된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말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말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말에 큰 영향력을 가지는 교사는 더욱 큰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말의 힘이 크니 소통의 장을 제한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말을 하는 사람들은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은 어떤 말을 하셨는가? 진리를 말하셨고, 본질을 말하셨다. 그릇된 것에 대해서는 두려움없이 말씀하셨지만 약한 자들에게는 따듯하게 말씀하셨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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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여기서부터는 3부로서 기독교와 도덕에 대해서 논의를 시작한다. 도덕은 인생을 훼방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잘 사용하기 위한 메뉴얼과 같은 것이다. 도덕을 말하기 위해서는 3가지 관련성을 고려해야 한다. 첫째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대부분이 공감할 것임) 둘째는 각 인간의 내부에 있는 것들, 셋째는 인간과 인간을 만든 힘과의 관계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루이스는 둘째와 셋째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조망하고자 한다. 첫째는 대게 공감하니까.



3. 그리스도인의 행동

3-1. 도덕의 세 요소


1. 도덕이란 말에 대한 일반인들의 생각

  하나님은 '누가 재미있게 지내나 맨날 감시하다가 결국은 훼방을 놓는 분'이라고 말함(초등학생)

  도덕이란 무엇인가 감섭하는 것, 우리들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 못하도록 막는 훼방꾼이라는 생각


2. 도덕 규칙이란 인간이라는 기계를 잘 움직이게 만드는 지침이라고 볼 수 있다. 

  1) 도덕 규칙이란 인간 기계에 무리가 생기지 않게 하면서, 적절하게 잘 사용하기 위한 매뉴얼이다. 

  2) 아직 익숙하지 않는 사람이게 '그렇게 하면 안돼요'라고 말하는 것은 간섭처럼 들리겠지만, 잘 사용하려면 반드시 들어야 하고 그 규칙에 익숙해 져야 한다. 


3. 그렇다고 여기서 도덕 규칙이라는 것이 도덕적 이상(완벽성)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1) 도덕적 이상을 포함한 모든 완변함의 요구를 이루어낼 수는 없기 때문에

   (1) 완벽한 테니스 선수도 없고, 완벽한 직선을 그릴수도 없다. 완벽한 운전사가 될 수도 없다. 


  2) 도덕적 이상주의는 단순히 이상적인 취향처럼 주관적인 것이 아니다. 절대적인 것이다.


  3) 도덕적으로 좀 더 '이상'에 가깝게 되었다고 해서 '이상'이 높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 거짓말을 좀 덜 하고, 음란한 짓을 좀 덜하려고 노력하고, 횡포를 좀 덜 부린다고 해서 스스로 이상이 높아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그렇게 생각하다보면 점점 교만해지게 되는데) 이런 것은 계산을 좀 더 잘하게 되었다는 것 정도로 이해해야 한다. 계산을 완벽하게 하길 원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칭찬받아야 할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계산을 완벽하게 하지 못할 때, 자기가 불편해 지는 어려움을 겪을 뿐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도덕적으로 실수를 저지르게 되면 나중에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불편을 끼칠 수 있게 된다. 


4. 인간이라는 기계는 두가지 방식으로 고장이 날 수 있다. 

  1) 개인들이 각기 따로 놀거나 충동함으로써 서로에게 해를 끼치는 경우로, 속임수를 쓰거나 횡포를 부릴 때 일어남

  2) 각 개인의 내부에 무언가 문제가 생기는 경우, 즉 한 개인을 이루고 있는 서로 다른 부분들(각기 다른 기능과 욕구 등)이 각기 따로 놀거나 충돌하는 경우.


   예) 편대를 지어 항해하는 배들에 비유: 서로의 항로에 방해를 받지 말아야 하고, 양호한 엔진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어떤 곡을 연주하는 악단에 비유: 연주가 좋은 결과를 얻으려면, 연주자들의 악기가 잘 조율되어야 하고, 다른 악기들과 잘 융화될 수 있도록 정확한 순간에 소리를 내야 한다.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배들의 경우 목적지가 틀리면 실패한 것처럼, 도덕 규칙이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어디인가가 중요하다. 


5. 도덕 규칙의 목적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세 가지 관련사항

  1) 도덕은 각 개인이 서로 공평하게 처신하며 조화를 이루는 일과 관련있다. 

  2) 각 개인의 내면에 있는 것들을 정돈, 또는 조화시키는 일과 관련이 있다.

  3) 인류의 삶 전체가 지향하는 보편적인 목적, 즉 인간은 무엇을 위해 창조되었는가와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보통 1) 항에 대해서만 고려를 하는 경향이 있다. 1)항에 대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아니니까 괜찮아'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기준이다. 2)항과 3항에 대한 것도 고려해야 한다. 배가 서로 부딪히는 경우는 서로에게 해를 끼치는 경우에서 나타나기도 하지만, 내부적으로 엔진과 같은 것이 고장나서 발생하는 것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1)항부터 도덕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거기에서 머물러서는 안된다. 


  2)항이 더 근원적일 수 있다. 아무리 배를 잘 조정하는 실력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배가 조종이 불가능할 정도로 낡고 결함 투성이라면 충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제도의 개선이 필요없다는 말이 아니라, 각 개인의 용기와 이타심 없이는 어떤 제도도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인간은 새로운 제도 속에서도 예전에 하던 짓을 계속할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법으로는 인간을 선하게 만들 수 없다. 


  3) 항은 종교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배에게 피해룰 주지 않는다(1항)는 한계 내에서 내가 타고 있는 이 배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나 그 배의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내가 주인이라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주인이 아니라면, 주인의 뜻을 따라야 할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모든 인간은 영원히 산다고 하는데, 그렇게 믿을 때와 대략 70세 정도를 살다가 죽을 존재로 믿는 것과는 전혀 다른 판단을 하게 된다. 70년 정도 살다 죽을 인생은 못된 성질과 시기심이 있다 손  치더라도 70년 정도 지난다고 한들 크게 심화되지는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일이 100만년 동안 강화된다면 그야말로 완벽한 지옥이 되고만다.  또한 이 차이는 전체주의와 민주주의 간이 차이와 관련이 있다. 만약 각 개인이 70년만 살다가 죽는다면 천년동안 계속될 국가나 민족 혹은 문명이 개인보다 중요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영원히 산다면 개인은 국가나 문명보다 단순히 더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 아예 비교 자체가 불가한 존재로 격상하게 된다. 


6. 결론

  도덕에 관해 생각할 때, 세 가지 분야를 모두 생각해야 한다. 첫번째 분야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협력할 수 있는 것이다. 불일치는 두번째에서 심각해 지면, 세번쩨 분야에서 더욱 커집니다. 이번 장부터 다루게 될 3부에서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 조망할 생각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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