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야고보서 2장의 말씀이다. 2장은 1장보다는 주제가 간단하다. 빈부의 격차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는 말씀과 참된 신앙은 말과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행함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1.사람을 차별하지 말라, 특히 빈부의 문제로

사람들은 빈부에 따라 대접을 달리한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던 것같다. 그런데 두 가지 이유에서 야고보는 충고한다.

1. 하나님은 가난한 자에게 믿음의 풍요와 약속한 나라의 상속을 받게 하셨다. 그런 그들을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업신여긴 꼴이 된 것이다.

2. 우리가 호의를 가지고 대우했던 부자는 오히려 우리를 법정으로 데리고 갈 것이다.(그들은 우리의 기대가 아니라, 자기들의 이익을 따라서만 행동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일 수 있으니까...)

3. 그런행동은 율법의 정신(이웃을 사랑하라)에도 전혀 맞지 않는다.

적어도 교회에서 만큼은 인격과 성품의 문제가 아닌, 빈부의 문제로 차별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 사람의 경제적 여건에 따라 어떤 자리가 주어지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는 일은 제도적으로 있어서 안되면, 관행이라는 이름으로도 지속되어서도 안된다.

교회에서는 그 사람의 재물이 아닌, 그 사람의 인품과 인격 그리고 진정성이 있는 희생을 통해서 인정받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교회가 특정 대학에 들어간 학생들을 유독 광고해주고, 좋은 회사에 들어간 것을 자랑하고 더 나아가 국회의원이 우리 교회 있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일은 수치스러운 것이 된다. 이런 모든 일이 부한 자를 대접하는 것처럼 보여지기 때문이다.

 

2. 행함이 없는 믿음(말과 지식)은 구원을 이룰 수 없다.

우선 야고보가 말하는 본문에서 행함없는 믿음이란 말과 지식으로만 존재하는 신앙을 말하는 것이다. 행함이 구체적으로 선행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보다는 말과 지식만 있지 실제적인 행위가 결여된 신앙(신앙외의 일반적인 것에 있어서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하겠다.)은 생명력이 없는 신앙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본문은 두 가지를 말하려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1. 말과 지식이 있다고 신앙의 충분조건이 되지 않는다. 마귀도 그 정도는 있기에.

2. 핵심은 우리 신앙에 행함(deed, action)이 함께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앙인이 선행을 해야 한다, 그래야 구원을 받는다는 식의 각론을 강조한다기 보다는 행함이 따라와야 참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총론을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문맥에 자연스럽다 본다.

 

지금까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야고보서의 말씀 속에서 <선행이나 경건의 삶>을 잘 이루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향해서 내 신앙이 구원받을 수 있는 신앙인가? 하는 의문을 던져왔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바울이 말하는 구원받는 신앙과 야고보가 말하는 구원받는 신앙에 어떤 대립되는 각이 있다는 측면에서 본문을 살펴본것 같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야고보서 2장의 흐름을 통해 본다면 야고보는 성도가 어떻게 의롭게 될 수 있는가의 칭의론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것은 아니라 보여진다. 다만, 말과 지식(본문에서 믿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본다면 바울이 말하는 믿음과는 좀 다르다. 야고보가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말과 지식으로서의 믿음이다. 헐벗고 가난한 형제를 향해서 말로만 배부르게 하라고 말하는 것, 귀신들도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것을 알고 두려워하는 것과 같은 말과 지식으로서의 믿음을 야고보는 말한다.)으로는 참된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행위가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도 행위가 따랐고, 기생 라합도 행위가 따랐다. 말과 지식만 있는 신앙이라는 것은 죽은 것이다. 마치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말이다.(26절)

바울은 믿음(자기 의를 쌓아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방식이 아닌)을 통해서 의롭게 되면,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붙잡는 것을 통해 의롭다 인정하셨다는 논리로서 칭의론을 말한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이 말과 지식으로 자신의 신앙을 보여 줄 수는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참된 신앙이 있다면 말과 지식뿐 아니라 행함이 함께 따라와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서로 맞는 말이고, 어떤 충돌도 없어 보인다. 차이가 있다면 바울의 칭의론은 매우 기독교적 독특성을 가지는 반면, 야고보는 보편적으로 누구나 인정할 만한 논리를 가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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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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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레몬서는 바울이 빌레몬과 그의 가정의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다. 보통 교회의 문제 때문에 바울이 편지를 쓰지만, 빌레몬서는 개인의 문제 때문에 쓴 편지다. 빌레몬의 옛 종이었던, 오네시모의 잘못을 용서하고 따듯하게 다시 맞아 줄 것에 대한 권면을 주고 있는 서신이다.

바울을 통해 감옥에서 변화된 오네시모의 놀라운 변화와 더불어, 그 변화된 오네시모를 형제처럼 따듯하게 맞아주라고 인격적으로 권면하는 바울의 모습이 돋보이는 서신이다.

바울은 사실 빌레몬에게 인격적인 부탁을 하기 위해서 많은 말을 쓰지 않아도 될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어떻게 보면 빌레몬도 복음에 있어서 바울의 도움을 입었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19절.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을 내가 말하지 않겠다.) 그렇다면 바울은 빌레몬의 영적 스승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바울은 편지를 쓰면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8절)라고 말한다. 충분히 바울 자신은 빌레몬에게 명령(권면)을 하여 자신의 뜻을 관철시킬 수 있는 관계다. 그런데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 네게 간구하노라"(9,10절)

바울이 이와 같은 입장을 취하는 것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1. 오네시모를 위해서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옥중에서 낳고(영적으로) 양육하여 변화된 존재가 되는데 힘을 썼다. 그러나 오네시모를 계속 바울의 곁에 두어서는 안되고, 오네시모가 지은 죄에 대한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 반드시 주인이 빌레몬에게 보내야 했다. 그리고 빌레몬에게 용서를 받고 관계를 정리하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도록 하길 원했다. 바울은 이와 같은 목적을 위해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권위보다는 정중한 부탁을 택한 것이다. 작은 것 하나에서라도 틀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힘쓰는 바울의 모습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18,19절 등)

2. 빌레몬을 위해서다.

바울은 빌레몬이 바울이 부탁했거나, 명령했기때문에 거절할 수 없어서 수용하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와 같은 선한 일이 빌레몬에게 억지같이 되기를 원치 않았고, 자의로 되게 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빌레몬에게 생각할 시간과 여유를 준 것이다. 심리적으로도 불필요한 압력을 주지 않기 위해 바울은 애를 쓴다. 관계적인 용서라는 것이 억지로 될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은 빌레몬을 제자가 아닌 동력자, 동등한 입장의 대상으로 생각하여 인격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요청을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스승이다.

빌레몬의 스승이면서, 동시에 오네시모의 스승이다. 바울은 이 둘의 스승이지만 스승처럼 권위적으로 행동하거나 표현하지 않았다. 오히려 두 제자(빌레몬과 오네시모) 얽혀진 갈등을 풀고 회복시키기 위해 진지한 고민과 섬세한 표현을 하는 것을 본다.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수없다. 그러나 바울은 그가 이 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오늘은 스승의 날이다.

목사와 시니어 간사로서 어떤 대접을 받아야 할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스승이 되어야 할 것인가를 더욱 고민해야 할 날인듯 하다. 

1. 나는 제자들과 성도들에게 유익한 영향력을 주고 있는 스승인가?

2. 나는 어려움에 처한 제자의 문제를 풀기위해 고심하며 노력하는 스승인가?

3. 나는 나보다 어린 제자들을 동력자로 인정하고 사역에 있어서 인격적 동력을 하고 있는가?

바울 선생님을 통해 다시 한 번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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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4장을 읽고 정리하면서 디모데후서 전체를 정리해도 좋을듯 하다. 전체적인 강조점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디모데후서는 목회자인 디모데를 위해서 쓴 책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상황에서의 목회서신은 아니다. 목회 사역으로 낙심한 디모데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쓴 목회서신이다. 따라서 그런 상황에 있는 목회자들 혹은 말씀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분들에게 더 직접적인 내용인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후서에서 몇 가지 핵심 메시지만 집중해서 다룬다.

1.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에 집중해야 함을 강조한다.

  : 다른 헛된 이야기와 변론에 주력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정치든, 경제든, 이념이든, 철학이든, 교육이든, 사회선교든, 문학과 예술이든... 그런 분야들이 강단의 전면에 나서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특수 목회(교회)라는 것도 잘 생각해 볼필요가 있다. 요즘처럼 교회가 많은 곳에서 어떤 특성(차별화)을 가지지 못하는 교회는 메리트가 없기 때문에 색깔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특성을 강조하는 교회들이 많아진다. 그와 같은 것은 '선교회'(파라처치)라고 봐야 더 맞을지 모르겠다. 그런 특성을 가졌다고 해서 설교를 안하는 것도, 성경공부를 안하는 것도 아니겠지만 결국 그 차별화된 특성이 교회의 본질을 희석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역으로 '성경 중심'인 교회라는 차별화를 가지는 교회가 있다는 것은 지금의 교회가 얼마나 성경과 멀리 떨어지게 했는가를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교회는 성경을 중심으로 하나님이 우리 인간과 세상을 향해 주시는 말씀을 깨닫고 그 뜻가운데 순종하도록 하기 위한 곳이다.  기능을 강조하다가 본질을 훼손시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라 본다.

2. 목회자는 하나님이 맡기신 일(사명)에 흔들리지 말고 충성할 것을 강조한다.

  : 자신의 부족을 발견했다손 치더라도 나약한 모습으로 자기 연민에 빠져있거나 해서는 안된다. 우리를 행위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뜻가운데 부르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맡겨진 것은 충성이고, 성실함이다.

    부족함을 고수한 채 일만 열심히 하라는 것이 아니다. 부족함을 발견할 때, 그 부족함 때문에 그만두어야 한다는 근거로 삼지 말고, 그 부족함을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노력하고 수고하라는 의미다. 그래서 자신의 성장을 온 교회로 보이도록 하라는 것이다. 이런 변화에 교회는 소망이 있고, 기대가 있는 것이다.

   부족해 보이는 목회자를 향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이라 믿고) 기다려주고, 인내할 때 목회자는 또한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부단히 연마하며 노력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이 부끄러움이 되지 않도록 자신의 성장을 교회 앞에 드러내도록 노력해야 교회는 성숙해 지는 것이다.

3. 목회자는 복음(목회)을 위해서 고난을 감당해야 한다.

  : 많은 인간적인 갈등과 실망 더 나아가 배신이 존재하지만 그 모든 어려움을 참고 사랑으로 목회의 사명을 감당하려고 했던 사람들에게는 하늘의 상급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주는 상급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이라는 것을 잊지는 말자.

   그러나 사람이 모두 어려움만 주는 것은 아니다. 바울에게 디모데와 같은 사람도 있었고, 누가처럼 어려움중에 함게 해준 사람도 있다.(9,11절) 또 바울이 볼 때 믿고 사역의 현장으로 보낼만한 두기고와 같은 사람도 있었다.(12절) 많은 사람들은 바울은 다 버리는 것같았고(16절) 알렉산더와 같은 사람은 아무리 주님의 사랑으로 품으려고 해도 품을 수 없었던 사람도 있었다.(14,15절)

   그러나 이 모든 어려운 일에서 바울은 건져주시고, 끝까지 힘이 되어주셨던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셨다.(17,18절) 목회자의 마지막 보루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위로와 힘인 것이다.

떠날 사람은 떠나고, 보내야 할 사람은 보내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불러야 할 사람은 부르고 곁에 두어야 할 사람은 두어야 한다.

목회 현장에서 어려움 중에도 모든 악에서 건져주시고 힘을 주시는 분은 역시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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