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인정하지 않는, 세상의 도덕과 가장 날카로운 차이를 보이는 것에 대해서 나누려 한다.  이 악은 누구에게나 있으면서도 세상 사람들은 자기에게 그와 같은 악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 누구에게라도 그와 같은 악이 나타나면 한치의 용서를 베풀지 않는다. 


그 악이란 바로 교만(Pride)과 자만(Self-Conceit)이다. 이와 반대로 기독교적인 덕목은 <겸손>이다.


1. 겸손은 기독교가 말하는 도덕의 중심이다. 

  성적 부정, 분노, 탐욕, 술 취함 같은 것들은 교만이라는 악에 비하면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 악마는 바로 이 교만 때문에 악마가 된 것이다. 교만은 다른 악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하나님과 전적으로 맞서는 마음 상태다. 


  교만은 본성상 경쟁적이다. 교만은 단순히 무언가를 가지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옆사람보다 더 가져야만 만족한다. 우리를 교만하게 만드는 것은 남과의 비교다.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데서 오는 즐거움이 사람을 교만하게 만드는 것이다. 


2. 교만한 행동들

  1) 두 남자와 한 여자와의 관계: 교만이란 그 여자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단지 자신이 더 나은 사람임을 입증하기 위해서 남이 좋아하는 여자를 빼앗아 간다. 

  2) 어떤 물건이 충분하지 못할 때: 탐욕이 경쟁으로 몰아갈수도 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 이상을 얻었을 때에도 단지 자기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더 많은 것을 얻고자 한다. 

  3) 돈에 대한 탐욕과 교만은 차이가 난다. 탐욕은 더 좋은 집, 더 좋은 휴가, 더 좋은 먹을 거리를 위해 돈을 갖고 싶어하게 만든다. 그러나 어느 정도까지만 그렇다. 어느 정도 이상되면 더 많이 쓰기 위해서 더 벌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때부터는 다른 부자보다 더 부자가 되고 싶다는 바람 때문이다. 이것의 극대화가 권력욕이다. 권력은 교만한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꼭두각시처럼 좌지우지하는 것만큼 우월감을 가지게 하는 것은 없다. 

  4) 예쁜 여자가 가는곳마다 남자들의 마음을 빼앗아 불행하게 만드는 이유는 성적 충동 때문은 아니다. 교만이다. 

  5) 교만은 세상에 나보다 나은 사람이 단 한 명만 있어도 경쟁자로 여기고 적으로 여긴다. 이것이 교만의 특성이다. 


3. 교만은 본질적으로 관계를 깨뜨리고 상호 적대적일 수 밖에 없다. 


4. 교만하면서도 자신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아주 신앙적으로 행세하는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합니까? 

  1) 이들은 상상속의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2) 하나님이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더 인정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3) 우리도 그렇지 않은지 테스트 해 볼 수 있다.

    : 내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 선한 사람으로 느껴질 때(특히 다른 사람보다 낫게 느껴질 때)는 확실히 하나님이 아니라 악마를 따르고 있다고 보면 된다. 


5. 인간의 다른 죄는 동물적 본성에서 나온다. 그러나 교만은 동물적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옥에서 곧장 나온다. 교만은 순전히 영적인 악입니다. 그래서 다른 악들에 비해 훨씬 더 교묘하고 치명적이다. 그래서 종종 교만이 선한 일에 효과적인것 처럼 보여질 때가 있다. 자신의 체면과 수준 혹은 품격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지 말라고 요청할 때 효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동상을 치료하는 정도일 뿐, 실은 더 큰 병, 암을 유발하는 원재료가 되는 것이다. 


6. 이야기를 마치기 전 있을 법한 오해를 풀어주는게 좋을 듯 하다. 

  1) 칭찬받고 즐거워하는 것은 교만이 아니다. 

    나로 인해 칭찬해 주는 그 사람이 즐거워하고 좋아 하니까 기쁜 것은 좋은 것이지만, 그것을 내가 그런 칭찬을 받고 상태를 즐겁게 해주다니 나는 대단해! 로 가면 문제가 된다. 자기 자신으로 빠지면 최악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2) 허영심이 문제이긴 하지만 그래도 교만에 비한 그래도 인간적이다. 왜냐하면 허영심이란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고 이것은 다른 사람을 인정한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만은 다른 사람을 얕본 나머지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지 전혀 신경쓰지 않게 된다. 


  3) 자랑스러워 한다는 것이 교만인가요? 루이스는 만약 그 의미가 '애정어린 마음으로 어떤 것에 경탄을 느낀다'는 의미라면 죄와는 거리가 멀다고 말한다. 그러나 만야 그것이 유명하기 때문에 자랑스러워 한다면 그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그럼에도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것보다는 좀 나은 편이다. 완전한 영적 파멸로부터는 좀 벗어나 있다고 볼 수 있다. 


  4) 하나님이 교만을 싫어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교만하셔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나님과 우리는 교만의 상대가 아니다. 다만 하나님은 우리가 뒤집어 쓴 가면을 벗겨주길 원하시는 것이다. 


  5) 정말로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겸손을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잊는 것에서 부터 겸손이 시작된다. 


[결론] 겸손의 첫 걸음은 자신이 교만하다는 사실을 먼저 깨닫는 것이다. 자신은 우쭐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사실 아주 우쭐대고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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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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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논의

1. 기독교가 말하는 선한 사람이란 과연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 논의하려고 한다. 

2. 인간이라는 기계에 대한 기독교의 설명서에 대해서 논의하려고 한다. 


본격적인 논의 전 잠깐 확인하고 가야할 내용

1. 기독교 도덕이 인간이라는 기계를 올바로 움직이는 기술이라는 것이라면, 정신분석학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이 아닌가? 


  (1) 정신분석학자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의학 이론 및 기술과 프로이드를 비롯한 몇 몇 사람들이 거기에 덧붙여 놓은 일반적인 철학적 세계관을 아주 분명하게 분리해야 한다. 프로이드와 같은 사람은 신경증 치료에는 전문가지만, 일반 철학에서는 아마추어입니다. 그러니 신경증 치료에 대한 그의 말에는 귀를 기울여도 그의 일반 철학에 관한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 분별있는 태도입니다. 


  (2) 프로이드와 다른 이들이 첨가한 철학적 요소들만 제외한다면, 정신분석학 그 자체는 적어도 기독교와 배치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독교 도덕과 중복되고 있으므로 배워서 나쁠 것은 없다고 봅니다. 



도덕적 선택에는 두가지 요소가 관련되어 있다. 

1. 하나는 선택하는 행위


2. 다른 하나는 선택하는 사람의 심리적 소양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선택의 원재료가 되는 다양한 감정과 충동 같은 것들. 원 재료에도 두가지가 있다고 볼 수 있는데

  (1) 이른바 정상적인 재료로서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감정들로 이루어진 것들

     예) 실재로 위험한 사물을 보고 두려워하는 것 / 남자가 여자에게 느끼는 감정


  (2) 다른 하나는 잠재의식에서 무언가 잘못되는 바람에 생긴, 아주 자연스럽지 못한 감정들로 이루어진 재료들. 

     예) 고양이나 개미를 터무니없이 무서워하는 감정 / 남자가 남자에게 느끼는 비뚤어진 감정.

   * 정신분석 학자들이 하는 일은 두번째 종류의 속하는 비정상적인 감정들을 제거해 주는 것, 즉 선택하는 행위에 좀더 좋은 재료들 제공해 주는 것이다. 


  [소결론] 도덕은 심리학자들이 도우수 있는 영역이 아닌, 선택하는 행위 그 자체와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어서 설명한다. 전쟁에 나가야 하는 세 명의 청년들이 있다. 


첫째: 위험 앞에서 누구나 느끼는 두려움이 있지만, 도덕적인 노력으로 그 두려움을 극복하고 용감하게 싸웠다. 

둘째, 셋째: 그릇된 잠재의식 속에서 터무니없는 두려움이 너무 큰 나머지 도덕적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싸울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 정신분석학자가 그들을 치료했다. 첫번째 남자와 같은 상태로 돌려놓은 것이다. 정신분석학적인 문제는 여기서 끝나고, 이제부터는 도덕적인 문제가 시작된다. 둘째는 도덕적으로 두려움을 극복하고 전쟁터로 나가고, 세번째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먼저 챙긴다. 이때 이 두 사람의 태도는 순전히 도덕적인 문제로 정신분석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심리적 재료가 나쁜 것은 죄가 아니라 병이다. 따라서 회개가 아니라, 치료를 받아야 한다. 

사람은 원재료에서 나온 선택의 결과만을 본다.(왜곡된 재료들의 결과들로 말미암아 파괴적인 것들이 그 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원재료만 보고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원재료로 무엇을 했느냐를 보고 판단하신다.(그런 원재료를 가지고 어떻게 도덕적 선을 행하려고 했었는가로 판단하신다.) 마지막 날에는 과장된 자기 원재료가 제거되고, 왜곡되었던 자기 원재료도 모두 온전해 질 것이다. 그 때 어떤 사람에게는 거품이 사라지고, 어떤 사람에게는 큰 격려가 될 것이다.)


기독교 도덕을 선을 행하면 상을 주고, 악을 행하면 벌을 주는 것과 같은 거래라고 생각하는 것


1. 매번 선택을 내리는 행위는 그 결과보다 그 선택을 하게 되는 마음의 선택과 관련된 것이다. 

2. 인생이란 수없이 많은 선택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것들이다. 

3. 우리는 평생에 천국의 피조물로 자기 자신을 바꾸어 가든지, 아니면 지옥의 피조물로 바꾸어 가게 된다. 

4. 따라서 기독교 저자들의 이상한 고백, 생각으로 짓는 죄에 대해서는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끔찍한 행동에 대해서는 회개만 하면 다 용서받을 일처럼 간단하게 다루는 가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면 옳고 그름에 대한 지식이 더욱 선명해 진다. 


1. 깨어있는 사람은 자신이 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만, 자는 사람은 자신이 자고 있는 것조차 모른다. 

2. 선한 사람은 선도 악도 알지만, 악한 사람은 선도 악도 다 모른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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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도덕과 관련하여 기독교가 주고 있지 않은 것>

1. 이 영역에서 새로운 종류의 특별한 도덕을 설파하기 위해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 아니다. 있던 것을 다시 생각나게 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황금률에 대해서)

2. 어떤 도덕을 특정시대 특정 사회에 적용시키기 위한 세부적 정치 프로그램이 없고 그런 것을 노리지도 않았다. 


<교회가 세상을 이끌어야 한다는 말에 대해서>


1. 그것은 기독교가 사회 전반에 걸쳐서 도덕을 실천해야 한다는 측면에서만 그렇다. 


2. 교회에서 목회자들이 정치적 프로그램을 제시해 주길 바라는 차원에서 그렇게 말한다면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런 일은 사실 우리 같은 평신도들이 해야 할 일이다. 기독교가 사회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는 단편적인 내용들...


  (1) 성경은 사회에 놀고 먹는 사람이나 빌붙어 사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무언가 좋은 것을 만들어 내는 일에 종사해야 한다. 분별없는 사치품을 만들지 않고, 그런것을 부추기는 분별없는 광고는 더더욱 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기독교는 좌파적 성향을 가지는 것 같다. 


  (2) 그러나 성경에는 우파적 경향의 요구도 한다. 정당하게 임명된 관리에게 순종할 것, 남편에게 순종하고 부모에게 순종할 것에 대해서 말한다.(인기없는 말이지만)


  (3) 만약, 경제생활이 아주 사회주의적이며 그런 의미에서 <진보적>이지만, 가정생활과 예의 범절은 오히려 구식이라고 느낄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회를 방문한다면 매우 기이한 인상을 받고 돌아올 것이다.(낯선 곳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부는 취하고, 일부는 버리고 싶은 충동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고대 그리스인과 구약시대의 유대인 그리고 중세의 위대한 기독교 스승들이 우리에게 준 충고에 대해서 우리가 명백하게 거슬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자를 받는 것>인데, 이것은 현대 <투자 제도>라는 것으로 들어와 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주식회사와 같은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말할수도 있겠지만, 위대한 세 문명은 <이자를 받는 것>에 대해서 한결같이 비난했다는 점이다. 


  (4) 자선(charity)과 같은 제도도 성경에서 분명이 말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선이 필요없는 복지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지금 가난한 자에게 주지 않아도 좋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기독교 도덕과 결별하는 것과 같다. 얼마나 많이 주어야 하느냐에 대해서 정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여유있게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난, 헌금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선을 넘어 주변의 친척과 가족들까지 생각한다면, 우리는 더 많은 필요들이 있다고 봐야 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더 큰 위험에 빠지는 일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자선의 가장 큰 장애물은 사치스러운 생활이나 돈 욕심보다는 두려움_생활의 안정이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_입니다. 


<정리하면서>


자시의 말이 진보적인 사람들에게는 덜 진보적이라고 평가받을 것이고, 보수적인 사람들에게는 너무 진보적이라고 말을 들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독교 사회의 청사진 그리기를 방해하는 진짜 암초에 정면으로 부딪힌 셈이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이 이 주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기독교가 말하는 바를 정말 알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신이 속한 진영의 입장을 지지해 줄 내용을 기독교에서 끌어다 쓰려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주님_또는 심판자_을 만나야 할 곳에서 '내 편'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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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도올 김용옥 교수의 '혁세격문(革世檄文)'


[일부 발췌]


정치는 민생을 해결하지 못한다. 민생은 어디까지나 민중 스스로의 결단에 의한 것이다. 민중의 간절한 염원이란 그 민생결단의 번영을 훼방하는 행위를 정치가 제발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선거공약으로 "민생"을 우선시 한다 하는 자는 거짓말쟁이요 위선자일 뿐이다. 민중이 원하는 것은 민생이라기보다는 도덕의 구현이며 정의의 확립이요 인정仁政의 구체적 실천이다.



그렇다면 도덕을 어떻게 바로잡는가? 그 너무도 쉬운 해결방안이 그대 손에 쥐어져 있다. 부패와 사악의 정권을 바꾸면 된다. 어떻게 바꾸는가? 투표장으로 가라! 그대의 신성한 혁명의 권리를 행하라! 나와 같이 수십만 권의 장서를 수십 년에 걸쳐 뇌리에 입력한 자나, 만 20세의 청순한 홍안의 유권자나, 동일한 한 표의 권리가 평등하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이 인간 오성의 보편적 권리에 대한 신념은 반만년 인문정신의 기나긴 투쟁의 결과로서 획득된 것이다. 어찌 이 고귀한 권리를 나태와 냉소와 방임으로 포기할 셈인가?



[전문]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121217133308&section=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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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여기서부터는 3부로서 기독교와 도덕에 대해서 논의를 시작한다. 도덕은 인생을 훼방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잘 사용하기 위한 메뉴얼과 같은 것이다. 도덕을 말하기 위해서는 3가지 관련성을 고려해야 한다. 첫째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대부분이 공감할 것임) 둘째는 각 인간의 내부에 있는 것들, 셋째는 인간과 인간을 만든 힘과의 관계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루이스는 둘째와 셋째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조망하고자 한다. 첫째는 대게 공감하니까.



3. 그리스도인의 행동

3-1. 도덕의 세 요소


1. 도덕이란 말에 대한 일반인들의 생각

  하나님은 '누가 재미있게 지내나 맨날 감시하다가 결국은 훼방을 놓는 분'이라고 말함(초등학생)

  도덕이란 무엇인가 감섭하는 것, 우리들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 못하도록 막는 훼방꾼이라는 생각


2. 도덕 규칙이란 인간이라는 기계를 잘 움직이게 만드는 지침이라고 볼 수 있다. 

  1) 도덕 규칙이란 인간 기계에 무리가 생기지 않게 하면서, 적절하게 잘 사용하기 위한 매뉴얼이다. 

  2) 아직 익숙하지 않는 사람이게 '그렇게 하면 안돼요'라고 말하는 것은 간섭처럼 들리겠지만, 잘 사용하려면 반드시 들어야 하고 그 규칙에 익숙해 져야 한다. 


3. 그렇다고 여기서 도덕 규칙이라는 것이 도덕적 이상(완벽성)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1) 도덕적 이상을 포함한 모든 완변함의 요구를 이루어낼 수는 없기 때문에

   (1) 완벽한 테니스 선수도 없고, 완벽한 직선을 그릴수도 없다. 완벽한 운전사가 될 수도 없다. 


  2) 도덕적 이상주의는 단순히 이상적인 취향처럼 주관적인 것이 아니다. 절대적인 것이다.


  3) 도덕적으로 좀 더 '이상'에 가깝게 되었다고 해서 '이상'이 높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 거짓말을 좀 덜 하고, 음란한 짓을 좀 덜하려고 노력하고, 횡포를 좀 덜 부린다고 해서 스스로 이상이 높아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그렇게 생각하다보면 점점 교만해지게 되는데) 이런 것은 계산을 좀 더 잘하게 되었다는 것 정도로 이해해야 한다. 계산을 완벽하게 하길 원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칭찬받아야 할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계산을 완벽하게 하지 못할 때, 자기가 불편해 지는 어려움을 겪을 뿐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도덕적으로 실수를 저지르게 되면 나중에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불편을 끼칠 수 있게 된다. 


4. 인간이라는 기계는 두가지 방식으로 고장이 날 수 있다. 

  1) 개인들이 각기 따로 놀거나 충동함으로써 서로에게 해를 끼치는 경우로, 속임수를 쓰거나 횡포를 부릴 때 일어남

  2) 각 개인의 내부에 무언가 문제가 생기는 경우, 즉 한 개인을 이루고 있는 서로 다른 부분들(각기 다른 기능과 욕구 등)이 각기 따로 놀거나 충돌하는 경우.


   예) 편대를 지어 항해하는 배들에 비유: 서로의 항로에 방해를 받지 말아야 하고, 양호한 엔진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어떤 곡을 연주하는 악단에 비유: 연주가 좋은 결과를 얻으려면, 연주자들의 악기가 잘 조율되어야 하고, 다른 악기들과 잘 융화될 수 있도록 정확한 순간에 소리를 내야 한다.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배들의 경우 목적지가 틀리면 실패한 것처럼, 도덕 규칙이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어디인가가 중요하다. 


5. 도덕 규칙의 목적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세 가지 관련사항

  1) 도덕은 각 개인이 서로 공평하게 처신하며 조화를 이루는 일과 관련있다. 

  2) 각 개인의 내면에 있는 것들을 정돈, 또는 조화시키는 일과 관련이 있다.

  3) 인류의 삶 전체가 지향하는 보편적인 목적, 즉 인간은 무엇을 위해 창조되었는가와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보통 1) 항에 대해서만 고려를 하는 경향이 있다. 1)항에 대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아니니까 괜찮아'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기준이다. 2)항과 3항에 대한 것도 고려해야 한다. 배가 서로 부딪히는 경우는 서로에게 해를 끼치는 경우에서 나타나기도 하지만, 내부적으로 엔진과 같은 것이 고장나서 발생하는 것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1)항부터 도덕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거기에서 머물러서는 안된다. 


  2)항이 더 근원적일 수 있다. 아무리 배를 잘 조정하는 실력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배가 조종이 불가능할 정도로 낡고 결함 투성이라면 충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제도의 개선이 필요없다는 말이 아니라, 각 개인의 용기와 이타심 없이는 어떤 제도도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인간은 새로운 제도 속에서도 예전에 하던 짓을 계속할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법으로는 인간을 선하게 만들 수 없다. 


  3) 항은 종교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배에게 피해룰 주지 않는다(1항)는 한계 내에서 내가 타고 있는 이 배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나 그 배의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내가 주인이라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주인이 아니라면, 주인의 뜻을 따라야 할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모든 인간은 영원히 산다고 하는데, 그렇게 믿을 때와 대략 70세 정도를 살다가 죽을 존재로 믿는 것과는 전혀 다른 판단을 하게 된다. 70년 정도 살다 죽을 인생은 못된 성질과 시기심이 있다 손  치더라도 70년 정도 지난다고 한들 크게 심화되지는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일이 100만년 동안 강화된다면 그야말로 완벽한 지옥이 되고만다.  또한 이 차이는 전체주의와 민주주의 간이 차이와 관련이 있다. 만약 각 개인이 70년만 살다가 죽는다면 천년동안 계속될 국가나 민족 혹은 문명이 개인보다 중요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영원히 산다면 개인은 국가나 문명보다 단순히 더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 아예 비교 자체가 불가한 존재로 격상하게 된다. 


6. 결론

  도덕에 관해 생각할 때, 세 가지 분야를 모두 생각해야 한다. 첫번째 분야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협력할 수 있는 것이다. 불일치는 두번째에서 심각해 지면, 세번쩨 분야에서 더욱 커집니다. 이번 장부터 다루게 될 3부에서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 조망할 생각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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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11장] 예레미야를 읽다보면 신약의 이야기들이 여기에서부터 나왔구나 싶은 부분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그런부분들에 대한 이야기와 종교적 제의로 윤리적 도덕적 책임을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신앙에 대한 지적도 다루어 봅니다.

 

 

 

[정리1.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하는 포인트]

 

1.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한 이스라엘의 죄
  1)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너희 조상들을 쇠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서 던 날에 명령한 것.
  2)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듣고, 나의 모든 명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리라 한 언약을 이룸.
  3) 이 언약의 말씀을 듣고 지키라고 애굽에서 나온 날부터 지금까지 경계하며 경계했다.
  4) 그러나 그들이 순종하지 않았고,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그 마음이 완악하게 행동했다. 그래서 언약의 규정대로 그들이게 행하였다.

 

2. 계속되어지는 예루살렘과 유다의 반역
  1) 선조뿐 아니라 지금도 유다인들과 예루살렘 주민 중에 반역이 있다. 이들은 자기 선조들의 죄악을 돌아가서 다른 신들을 따라 섬겼은즉 그들과 맺은 언약을 깨뜨렸다. 
  2) 그래서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시는데, 그들이 피할 수 없을 것이라. 부르짖어도 듣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심.
  3)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주민이 그 분향하는 신들에게 가서 부르짖을지라도 그 신들이 그 고난 가운데서 절대로 그들을 구원하지 못하리라.

 

3.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은 심판을 받아야 한다. 
  1) 러므로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거나 구하지 말라.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2)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 집에서 많은 악한 음모를 꾸미더니 내 집에서 무엇을 피하겠느냐? 거룩한 제물 고기로 네 재난을 피할 수 있겠느냐? 
  3)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 좋은 열매 맺는 푸른 감람나무라 부른 유다를 그 위에 불을 피우고 가지는 꺾어 재앙을 선언하였다.

 

4. 아나돗 사람들이 예레미야의 메시지로 인하여 그를 죽이려 함.
  1) 예레미야의 고향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해하려고 하고, 그의 결실을 박멸하고 자 했다. 
  2) 이로 인해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그들에게 대한 보복을 요청했다.
  3) 여호와께서 아나돗 사람들에게 대해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1) 아나돗 사람들은 예레미야에게 예언하지 말라고 예언하면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2) 하나님께서 아나돗을 벌하시리니, 청년들은 칼에 죽고, 자녀들은 기근에 죽고 남는 자가 없게 될 것이다. 아나돗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곧 그들을 벌할 해에 하리라.

 

 

[정리1.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을 다시 풀어서 쓰는 것이 포인트]

 

유다가 그들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그들의 조상 때부터 언약 순종하지 않은 것으로 인해 책망하시고 더 이상 용서할 수만은 없음으로 지적하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출애굽할때부터 언약을 맺으셨다. 그러나 그들이 순종하지 않았고, 마음을 기울여 듣지 않았다. 그들 뿐 아니라, 그의 후손들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다른 신을 섬겨 언약을 깨뜨렸다. 그래서 기도하며 부르짖어도 듣지 않았고, 그들이 따르는 우상 신들에게 가서 부르짖어도 구원을 받지 못하게 하셨다.

이제 예레미야의 중보의 기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이 백성은 하나님의 집에서 많은 악을 꾸미는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수는 없을 것이다. 이들을 향해 좋은 열매를 맺는 푸른 감람나무라는 이름을 처음에는 주었으나, 이제 그 나무를 불 태우며 가지를 꺽을 것이다.

 

예레미야의 고향인 아나돗 사람들의 완악함에 대해서도 지적하신다. 이들은 예레미야를 향해서 예언을 그만하라고 협박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나돗 사람들에게 큰 재앙을 선포하셨다. 자녀들과 청년들, 그리고 예루살렘 거민들을 벌하실 것을 말씀하셨다.

 

 

[정리3. 묵상과 적용]

 

1. 예레미야와 신약과의 연관성

 

예레미야를 읽다보면 신약의 여러 장면들이 떠오른다. 우선 이스라엘과 유다가 지은 죄의 내용들은 로마서 1-3장에 언급되어 있는 하나님을 진노를 일으키는 죄의 내용들과 유사하다. 또한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 유다를 감람나무라고 비유하시고, 그들에 대한 심판을 그의 가지를 꺾었다고 표현했는데 이또한 로마서 11장에 언급된 비유와 유사한 방식이다. 그리고 예레미야가 자신의 고향인 아나돗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박해를 받았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자기 고향애서 박해를 받은 것을 생각나게 한다.

 

누군가는 예레미야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의 모습이 겹쳐진다고 했는데 그것은 사실이겠다는 생각을 한다. 신약의 많은 부분이 예례미야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유다의 멸망을 지켜보는 선지자의 모습과 그의 메시지 속에서 그 시대의 심판, 절대적 심판 속에서도 샘솟는 소망, 그리고 그 일을 증거하는 선지자의 외롭고 고통스러운 사역... 예수님의 시대에도 그대로 반영되는 그림이라 보인다.

 

그리고 우리 시대에도 반영되고 있는 그림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우리는 이 시대 속에서 어두을 보고 빛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 안에서 우리의 사역을 발견하는 것이고, 그 사역을 이루어 감에 있어서는 외롭고 고통스러운 담금질을 거쳐야 한다. 이것인 우리의 운명이다.

 

2. 거룩한 제물 고기로 네 재난을 피할 수 있겠느냐?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그 언약을 깨뜨리고 반역하는 네가, 하나님 앞에 거룩한 제물이랍시고 드리는 고기를 가지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느냐고 반문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에 대한 태도는 잊어버리고 종교적인 제의(그것을 위해서 어떤 희생을 드렸든지 상관없이)만으로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샤머니즘적인 신앙은 대체할 수 있다. 윤리와 도덕보다는 신에 대한 열정과 헌신을 중시한다. 그래서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르다. 종교적인 의식보다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법에 대한, 하나님과의 언약에 대한 신실성과 충성이다.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윤리적이며 도덕적이다.

 

그런데 최근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거룩한 제물이며, 과도한 헌금과 헌신이면 주님을 향한 열정이면 도덕과 윤리와 법도 제맘대로 벗어 던지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주를 위한다는 말과 교회를 위한 다는 말이면 도덕과 윤리는 뒤로 던져지는 물건이 되고 말지 않았는가? 어찌 우리가 이 재난을 피할 수 있겠는가? 어찌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이 질책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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