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후서 1장을 보면 바울이 목회사명을 감당하다가 낙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격려해 주기 위해서 그리고 그 마음 속에 다시 한 번 처음받은 은사를 회복시켜 주기 위해서 펜을 들어 쓴것 같다.

디모데는 지금 울고 있다.(4절) 왜 울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목회자로서 무능하다고 느낀 것 같다. 특히, 목회 대상인 성도들과의 관계 속에서 힘들었던 같다. 그들 중에 일부는 강경하게 디모데에게 반대했을 수도 있고, 일부는 교회를 떠나겠다고 했을 수도 있다.(바울이 15절에 언급한 자신의 예를 비추어 본다면, 디모데도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런 경우 일반적인 목회자는 목회를 잘 못하는 자신을 책망하게 된다. 자신의 나이가 어린 것(딤전 4:12), 경험이 부족한 것, 능력이 없는 것(9절) 등등. 결국 자신이 하나님의 교회를 망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가지게 된다. 디모데도 기도하는 자리에 나가봤을 것이고, 나름대로 대안을 찾아보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뚜려한 돌파구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디모데의 심정이 눈물로 표현되었으리라 생각한다.

바울은 이런 상황에 있는 디모데를 격려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의 눈물을 생각할 때마다 바울의 마음도 무거웠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목회자를 위한 바울의 제안을 들어보자.

1. 네 안에 있는 기본적인 믿음과 신앙은 너 자신에게 시작된 것이 아니라 네 조상부터 이어진 것이다. 쉽게 흔들리거나 빼앗길 수 없는 것임을 명심해라.(5절)

2. 나는 이 편지를 통해서 네게 처음 안수받았을 때 하나님께 받은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해 이 편지를 쓴다.(6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마음은 두려운 마음이 아니다. 마음 약하게 먹지 마라. 울음, 뚝!!

3. 우리는 복음과 함께(복음을 위해서, 복음으로 인해서) 고난받아야 하는 사람이다. 복음을 위해 목회적 사명을 감당하다 당하는 고난을 있을 수 없는 일을 만난것처럼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 목회자에게는 숙명적인 것이다.(8절)

4.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에 우리의 행위대로(실력과 능력, 또는 나이) 부르신게 아니다. 오직 그 분의 뜻가운데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다.(9절) 네가 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은 착각이다. 그냥 하나님이 부르셔서 우리가 그 일을 하는 것이지 다른 이유는 없다. 무능하다는 것에 너무 놀라지 말아라.

5. 우리는 복음을 위해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움을 입은 것이다. 우리를 부르신 자가 끝까지 이루실 줄을 믿고 우리는 우리에게 부탁한 사명(아름다운 것)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11-14절) 어려움에 직면했다고 피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라!! 끝까지 가는거야!!

6. 바울, 나라고 왜 힘든 일이 없었겠니? 네가 당한 것보다 더 극심한 비참에 처한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내가 일일이 다니며 세운 아시아의 교회들이 나를 등진 것을 네가 모르지 않지 않느냐?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까지 있었다는 것을 네가 알고 있느냐?(15절)

7. 그러나 디모데야, 그런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네시보로의 가정과 같은 사람들도 있단다. 이들은 정말 내가 힘들과 어려울 때 나를 격려해주고, 부지런히 먼 곳까지 찾아와 주었던 사람이다. 하나님이 이와 같은 사람들을 복주실 것이다.(16-18절) 이와 같은 사람들의 위로로 인해 수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목회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는 것이란다. 힘내거라. 디모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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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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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크게 3가지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고 보입니다.

하나는 에베소 교회를 목회해야 하는 디모데에게 목회자로서 중요한 지침을 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 내에 있는 성도 중 성도들의 가정에서 종으로 있는 자들이 주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지침을 준다. 마지막은 교회 내에 있는 부자들에게 어떤 방식의 권면을 해야하는지에 대해서도 권면한다.

1. 목회자로서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가?

 바울은 두 가지를 말하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쓸데없는 지식과 논쟁, 변론을 일으키는 헛된 이야기에 몰두해서는 안된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해서 그 말씀을 가르치고, 행하도록 힘써야 한다.

  다른 하나는 목회자의 경건이다. 목회자는 경건한 삶을 위해서 힘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중요한 지침 중 하나는 자족하는 마음이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다는 것에 족한 줄로 알면 이것은 경건에 유익하다. 목회자는 재물과 화려함과 넉넉함과 풍요에 익숙해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조심해야 한다.(가끔을 괜찮을지 모른다) 그런 풍요에 익숙해 지면 그런 대우를 받지 못할 때, 불만족에 이르고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은 목회자의 경건에 상당한 지장을 가져온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것과 자족하는 경건이 목회자에게 핵심이다.

2. 믿는 가정의 종으로 일하는 자들에게 해야 할 권면

  바울은 종들에게 이렇게 권면하라고 지침을 준다. 그 당시 교회 안에 있던 종들의 문제는 교회 안에서 서로 형제와 자매라는 평등한 관계가 사회 생활 속에서도 그대로 연장되어 '종'으로서의 성실한 태도를 잃어버린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 같다. 바울은 그런 그릇된 태도로 사회생활을 하는 종들을 향해서 '상전을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라'고 권면하면서 믿는 상전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라고 말한다.

  바울이 노예제도를 인정하는 발언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노예제도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바울의 관점은 대게 이와 같다. 현재의 사회제도와 문화를 인정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심지어는 종의 제도에 있어서도 그렇다. 그런 제도적인 환경 속에서도 바울은 마음의 혁신, 태도의 혁신을 요구한다. 제도를 바꾸라고 요청하기 이전에 먼저 개인의 자세, 자신이 해야할 일에 대한 성실과 책임을 강조한다고 본다.

  그러나 이 요구를 종의 주인이나, 사회 제도를 만든 공권력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바울은 종을 형제처럼 대우하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바울은 주인에게는 종을 학대하거나 인권을 유린하지 말고, 형제처럼 따듯하게 대해주고... 종에게는 주인을 쉽게 생각하지 말고 이전보다 더 잘 섬기라고 권면하는 방식으로 사회제도 안에 화평을 이루려고 했던 것이다.

3. 부자들에게는 이렇게 권면하라고 지침을 준다.

  성공했다고 교만하지 않도록 하고, 재물에 소망을 두지 못하도록 하라고 말한다. 오히려 소망을 모든 것에 후히 주시는 하나님께 두라고 한다. 소망의 초점을 잃지 않도록 권면하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부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재물, 자신들이 가지고 싶어하는 재물에만 몰두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적극적으로 이렇게 권면하도록 요청한다. 그 재물로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이게 꼭 선교하는 것만은 아니다.)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수익에 대한 사회 환원을 아까워하지 말고 즐겨야 한다.) 너그러운 자가 되어야 한다. 부족하지 않으니 재정적인 부분에서 좀 손해를 보더라도 좀 느긋할 수 있어야 한다. 없는 사람처럼 작은 것 하나 가지고 싸우고 하면 안된다. 져 줄도 알고 손해 볼 줄도 알아야 한다.

  이런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부자인 것이다. 재물에 대한 손해를 감수하고 나누는 것을 통해 나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않는다는 것을 나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증거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런 선한 행위는 장래를 위해 좋은 터를 쌓는 것이란다.

  없는 사람은 사회를 바꾸어서라도 부자의 돈을 뺏으려고 하고 싶고, 있는 부자는 어떻게든지 자신에게 유리한 사회 제도를 고수함으로서 그 있는 것을 확보하고 확대하려고만 한다. 세상의 법칙이고 정글의 법칙이다. 그러나 교회는 목회자는 부자들을 향해서 이와 같은 가르침과 권면을 많이 해야 한다. 그래야 부자들이 재물에 소망두는 것을 잠시 멈추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을 테니까...

 

교회는 진보도 아니고 보수도 아니다. 아니 다른 말로 하면 교회는 어떤 면에서는 매우 진보적이며 어떤 면에서는 매우 보수적이다. 교회가 그렇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과 사회에 대해서 어떤 면에서는 매우 진보적인 요구를 하고, 어떤 면에서는 매우 보수적인 요구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성향에 교회를 흔들어서는 안된다. 오직 교회는 성경이라는 키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배이기 때문이다.

 

목사로서 교회를 목회한다는 것은 참 많은 대상과 싸움을 해야 한다. 사람이 될 수 있고, 세상의 가치관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전서 6:12에서 이와 같이 말했나 보자.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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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5장에서는 여러 대상에 대한 여러 권면이 나온다. 늙은이(노인)를 대할 때, 젊은이를 대할 때, 늙은 여자를 대할 때, 젊은 여자를 대할 때, 과부를 대할 때(참과부, 젊은 과부), 장로(목사)를 대할 때... 악인들과 선인들에 대해서...

5장 1절부터 마지막 25절까지 하나 하나 귀담아 들어야 할 권면이다. 디모데전서 5장에 언급된 권면 중에서 함께 생각해 볼만한 것만 몇 가지 언급하면서 정리하고자 한다.

1. 약자에 대한 배려를 해야 한다고 한다.

   늙은 남자, 늙은 여자 모두 약자에 해당한다. 우리는 유용한 사람에 대해서는 좋은 대우를 하다가도 유용성이 떨어지고, 오히려 짐이 되는 것처럼 여겨지는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무심해지고, 무시하기 쉽다. 노인들은 처음부터 노인이 아니었다. 이들은 젊어서 어린 자녀를 키우 자며, 교회를 섬겨온 자들이다. 이들은 그냥 약자가 아니다. 지금은 약한 모습으로 존재하지만 우리의 부모와 같은 자들이다. 교회의 부모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를 대하듯, 어머니를 대하듯 해야 한다.

2. 미숙한 자에 대해서도 인격적 태도를 잃지 말아야 한다.

   젊은이는 미숙한 자다. 일을 하는게 아니라 일을 만든다. 그러다 보면 무시하게 되고, 권위로 제압하려고 한다. 복종만을 요구하고 복종하지 않는 젊은이에 대해서는 성장할 수 있는 기회조차 제공하지 않으려 하기 쉽다. 그러나 바울은 형제 대하듯 하라고 한다. 인격적 대우를 말한다. 인격적 대우라고 해서 무조건 잘해주라는 것은 아니다. 형제처럼, 성장할 수 있기 때로는 미흡해도 기회를 주고, 잘못할 때는 놔두지 말고 권면을 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3. 젊은 여자에게는 온전히 깨끗함으로 대해야 한다.

   젊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매력이다. 젊은 여자는 더더욱 아름답다. 그래서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한다. 더욱 조심해야 하고, 더욱 신중해야 한다. 사심이 없다고 해서 과도한 접촉을 해서는 안된다. 적절한 선을 유지 해야 한다. 남성이면서 동시에 지도자로 있는 자들은 특별히 젊고 어린 여자를 대할 때, 자매를 대하듯 해야 한다. 격없는 친근함으로 얼마나 많은 지도자들이 위태롭게 되는지 알기에 나를 포함한 사역자들은 조심과 경계를 잃지 말아야 한다.

4. 개인이 질 수 있는 것은 개인이 지도록 하고 교회의 짐은 최소화해야 한다.

  바울은 과부에 대해서도 자식이나 손자가 있다면, 믿는 친척이 있다면 그들이 그 과부를 책임져 주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효를 위한 것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교회로 하여금 정말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이 가도록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복지로 모든 문제를 풀어가서는 안될 것이라 본다. 복지를 핑계삼아 자신의 해야 할 인간적인 도리를 면제해주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복지는 최대를 보장하기 보다는 최소를 보장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복지를 악용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생기지 않도록 행정적으로도 잘 챙겨봐야 할 것이다. 그래야 혜택이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돌아갈 것이고, 복지를 위해 세금을 더 내는 사람들에게도 보람이 되기 때문이다.

5. 목사를 대할 때는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하고 생계를 책임져주라.(17-18절)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장로, 즉 목사에 대해서 존경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에게 존경할만한 인품이 있어야 할 것도 당연하지만, 혹 부족함이 있더라도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면 그 말씀으로 인해서 존경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센스도 없고, 고지식하고, 인격의 혹 모난 부분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실함과 사욕이 없는 교회를 향한 사랑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존경할만하게 보라. 그리고 풍족하게는 아니더라도 생계에 어려움이 되지 않도록 성도들은 책임져주라. 목자가 자기와 자기 식솔들의 생계를 책임지지 못하는 것도 덕이 되지 못하며, 또 그와 같은 일로 생각이 나뉘다보면 어찌 하나님의 말씀에 전념할 것을 기대하겠는가?

   목사는 목사로서의 희생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도된 입장에서 목사의 희생을 요구하는 자세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성도가 해야 할 바도 아닌 것이다. 서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며, 상대를 배려할 때 교회가 균형을 가지는 것이지 상대에게 대한 요구만 해서는 소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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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가 섬기고 있던 에베소 교회의 문제 중에 하나는 금욕주의였던 것 같다.

금욕주의가 문제가 되는 것은 성경적인 가치관은 아니면서도, 금욕적 가치관과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큰 목소리를 내게 된다는 것이며, 그 분들의 금욕에 미치지 못하는 자는 바른 성경적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머리만 크고 행함이 없는 자처럼 여겨지기에 미숙한 자로 취급된다.

바울은 이와 같은 금욕주의를 배격한다.

어떤 사람이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는 금욕적 요구를 했고, 그것은 에베소 교회 안에서 어떤 영향력을 미쳤다. 그런 요구를 하는 자들이 실제로 자신들은 결혼도 하지 않고, 어떤 음식물에 대해서는 입도 대지 않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설득력도 있었을 것이다. 어떤 종교도 그 종교만의 금욕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더 어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오히려 우리 신앙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한 것이기에 감사함으로 취하면 버릴 것이 없다고 말한다. 결혼도 음식도 모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안에서 거룩하여진다고까지 말한다.(4-5절)

기독교는 금욕적인 세상 종교적 가치관에 있어서 파격적이었을 것이다. 금욕을 부정하고 오히려 모든 것을 누리도록 허락함을 넘어, 거룩하여진다고까지 가르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바울의 가르침은 여기가 끝이 아니다. 바울은 바로 이어서 <경건>을 가르친다. <영성>이란 이름이 유행하는 우리 시대에 그 의미를 좀 더 성경적인 용어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경건>이 될 것이다.

바울은 금욕주의대신 경건의 훈련을 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한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것이며(9절) 금생과 내생에 보장된 훈련(8절)이다.

금욕주의와 경건주의의 차이가 무엇일까?   간단하게 설명해 보면, 금욕주의는 소극적 훈련이고, 경건주의는 적극적 훈련이다. 소극적 훈련은 두려움에 기초하며 율법주의적 성향을 가진다. 그리고 행하는 것이 쉽지 않은 만큼 자기 의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 반면 경건주의는 거룩에 이르고자 하는 거룩한 열망에서 나온 훈련이다. 자발적 욕구에서 나오는 훈련이고, 이르지 못한다고 해서 정죄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를 향해 판단의 근거가 되지도 못한다.

경건의 훈련의 목표는 무엇이어야 할까? 경건의 훈련의 목표는 큐티의 횟수와 기도의 시간, 봉사와 선행의 난이도를 높이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경건 훈련의 목표는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훈련>(10절)이다. 우리의 소망을 세상에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두기 위한 끝임없는 훈련이 경건의 훈련인 것이다. 큐티를 하는 것도, 기도를 하는 것도, 봉사와 선행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소망을 이 땅에 둔다면 그와 같은 시간을 쓰는 것은 낭비에 불과하다. 소망을 이 땅에 두는 것이 아니기게 그렇다. 소망을 하나님께 두기에 이 땅에 집착하지 않기 위해 그와 같은 훈련들을 감당하는 것이다.

 

바울이 또 하나 디모데를 향해 하는 권면은, 경건의 훈련을 통해서 너의 성장을 끝임없이 하라는 요청이다.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15절)

지금의 연약함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시간이 지나고 사역을 감당하면서도 경건의 훈련을 통해서 성장하고 성숙해지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사역자는 괄목상대해져야 하는 것이다. 믿는 자의 본이 되어야 하는 것이고, 지속적인 성장을 통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사역자의 나이 연소함>이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정체되어 있는 사역자만큼 심각한 병도 없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어려움을 환경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환경적인 문제가 없지 않겠지만, 사역자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환경적 토대를 바꾸는 일에 앞장서기 보다는 나 자신의 고루한 토대를 바꾸는 일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 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16절)

내 자신이 경건의 훈련으로 정체되지 않고 꾸준히 꾸준히 행하면, 내 자신도 그리고 나를 통해서 듣는 자들도 구원하게 되리라. 나에게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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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3장은 감독의 자격과 집사의 자격에 대해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가르치고 있는 본문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를 어떻게 이끌고 운영해가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을 주는 과정에서(15절)  감독과 집사로 합당한 성도를 교회 안에서 세워야 함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로 보건데, 감독이나 집사와 같은 직책을 맡는 사람을 세워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목회해 나가는 것은 중요하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3:15)

감독과 집사의 자격에 대해서는 본문에 잘 나와 있으니, 그 중에서 몇 가지 특징적인 것만 집고 마치려고 한다. (감독과 집사를 구지 구분하지 않고 큰 테두리 안에서 정리해 본다.)

1.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

   :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을 성적으로 따지면 100점은 아니더라도 80점 이상의 점수는 나오는 사람이어야 한다. 누가보더라도 함량미달인 사람은 세우면 안된다. 명예와 돈과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그것을 근거로 교회 지도자를 세우면 안된다. 그 사람이 살아온 점수를 검토해서 평균 80점 이상은 되어야 한다.

2. 가르치기를 잘해야 한다.

   : 가르치는 것을 잘하는 것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생각을 하고, 그런 방식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학벌에 대한 것이 아니다. 박사들 중에도 자기 세계에 갇혀 대화가 안되는 사람이 있고, 초등학교만 나왔지만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분도 얼마든지 있다.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통해서 사람과 교통이 가능한 사람을 세워야 한다는 말이다. 의외로 이런 것이 안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 학벌이나 간판에 속지 말아야 한다.

3. 외부인에게도 선한 증거를 받아야 한다.

    : 이 항목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인품을 인정받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감독(장로)을 세울 때는 교회 안에서의 투표만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일하고 있는 일터 사람들, 주변 사람들, 믿지 않는 친척들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는 통로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교회에서 잘하는 것 같은데, 밖에서는 욕먹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좋다고 뽑았는데,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전혀 형편없는 사람을 교회의 지도자로 세워놓았으니 교회 성도들의 수준을 어떻게 볼 것이며, 교회를 어떤 곳으로 이해하겠는가? 이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행위가 되고 마는 것이다.

    : 쉽지는 않겠지만, 감독(장로)가 되려는 사람들은 주변에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서 명단을 받아 그 사람들로부터 평가를 들어보는 절차가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불신자 친척 중에 1명, 직장 후배 중 1명, 동네 주민 중 1명 등) 청문회까지는 아니지만, 세상에서도 존경받을 만한 사람을 교회의 지도자로 세울 때, 교회의 위상도 품격도 회복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4. 자격 조건에 없는 것들

자격 요건에 헌금과 주일성수와 같은 조건이 없다는 것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그것은 기본이기에 언급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위에 언급한 사람은 누가 보더라도 존경할 만한 사람이다. 절제하고, 신중하면서도 약자를 섬길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가정 안에서 자녀를 바르게 키운 사람을 교회의 감독으로 집사로 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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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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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데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 내용을 말하고 가르치려고 하면 문제가 쉽지 않다. 내가 남자라서 그럴 수도 있고, 내가 좀 보수적 성향을 가져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암튼, 이 주제를 다루지 않고 지나갈 수 있겠으나, 언젠가는 부딪혀야 할 문제고 정리해야 할 문제이니 예방주사 맞는 셈치고 부족한대로 다루어야 겠다.

디모데 전서 2장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논지를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겠다.

1. 교회 성도와 지도자는 세상 권세자를 위해 중보하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1,2)

   : 이 말은 교회는 현재 세상의 권세자들의 편에 서야 한다는 것처럼 들린다. 진보적인 정치 색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떠무니 없이 보수꼴통적인 발언이다. 어찌 이해해야 할까?

2. 세상이 고요하고 평온해야 우리 성도들이 경건하게 신앙생활 할 수 있기 때문이다.(2)

   : 따라서 현재 세상을 근본적으로 흔드는 세력에 대해서 부정적일 수 밖에 없는 성경적 근거가 될 수 있다. 이 논리라면 교회가 세상의 평온을 깨는 무리의 편에서 서서도, 견해를 주장해서도 안된다. 이대로는 안된다고 연일 외치는 진보진영의 사람들에게, 이건 자신의 안정만을 취하려는 이기적 종교심으로 밖에 비춰지지 않는다.

3. 여성은 창조질서상 남성보다 좀 낮은 위치에 있는데 교회 안에서 높은 자리(가르치는 자리)에 있어서는 안된다.(12,13)

    : 이런 이야기는 밖에서 공개적으로 했다간 매장되는 사회다.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좀 통하는 이야기 일지 모르지만, 요즘은 교회에서도 이런 이야기하며 생각이 늙은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다. 또한 현대 사회 속에서, 성별보다 능력 위주의 사회에서 이런 논리를 근거로 이야기 했다가는 뼈도 못 추릴 것이다. 그럼 어떻게 정리해야 할 것인가?

4. 여자는 쉽게 죄에 빠질 수 있으니, 교회 안에서 자중하고 조용히 순종해라.(11,12,14)

   : 여성 비하발언으로 바울은 고소를 당할 것이고, 바울의 목회와 선교현장에서 매장될 것이다. 현재의 시대라면. 여성들을 향해 교회 안에서 잠잠하라고 하면, 너나 조용히 하라고 할 것이다. 여성의 유전자가 죄에 더 취약하다는 과학적 논증을 할 수도 없으려니와 한다고 해도 그런식의 논리는 죽음만 자초할 뿐이다.

5. 여자들은 외적으로 자신을 꾸미는데 주력하는 것은 경건치 못하다.(9절)

   : 요즘같이 외모 지상주의의 시대에 말이나 될 법한가? 화장안하고 출근하면 기본이 안되어있다고 지적당하는 직장 여성에게 말이나 될법한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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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주제에 대한 여러분의 견해는 어떠신가요?

이렇게 함으로서 저는 공을 여러분에게 던지고 갑니다. 여러분의 답변을 기다립니다. 저도 정리가 되지 않으니 여러분의 의견을 물어야 하겠습니다. ㅋ

모르면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이 학문하는 자의 자세입니다.ㅋ 억지로 끼워맞추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내 생각인냥 표절하는 것도 요즘은 위험하고.ㅋ

다만 제가 실마리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바울이 이 말을 하던 당시, 그리고 그 에베소 교회는 이 권면에 대해서 우리와 같은 식의 반응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든지 아니면 우리와는 다른 식의 견해를 이야기 했을 것이라 보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이 문제의 답변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도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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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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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마게도냐로 가면서, 디모데를 에베소에 머물게 했다. 왜냐하면 에베소 교회에 한 문제가 있는데 바울이 다른 용무로 갈 수 없게 되자, 우선 급하게 디모데를 보낸 것이다. 그것이 디모데전서의 배경이 된다.

에베소 교회의 문제가 무엇인가? 문자적으로 보면 전통적인 교훈과는 차이가 있는 <다른 교훈>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로 인해 교회는 혼란에 빠진 것 같다.(3,4절) 그 다른 교훈이 이단사상까지는 아닐지라도 그것이 교회에 좋은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 같다. 왜냐하면 그런 <다른 교훈>이 계기가 되어 어떤 사람은 양심을 버리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심지어 믿음에서 파선했기 때문이다.(19절) 이단사상까지는 아니더라도 가만히 두면 그 혼란은 더욱 가중될 것이고 그로 인해 교회는 매우 약해질 것이기에 바울은 급히 디모데를 보내고, 또한 편지를 보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확하게 오늘 본문에서 <다른교훈>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었는지 직접적인 언급이 없으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한 가지를 힌트를 찾아 본다면, 바울이 다른 복음으로 말미암은 악영향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갑자기 <율법>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는 것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율법에 대한 이야기는 간단하게 두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1. 율법은 적법하게만 쓰면 선한 것임을 우리가 안다.(적법하지 않게 쓰면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의미도 된다.)

2. 율법을 옳은 사람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제약하고 통제하기 위해서(교정의 목적으로도) 주신 것임을 확인한다.

그렇다면, 디모데전서 1장의 내용만으로 추정해 본다면 <다른 교훈>은 율법과 관련된 교훈으로서, 그들의 가르침은 율법을 너무 무리하게 적용함으로서 성도들로 하여금 구원과 신앙에 있어서 <믿음>의 중요성을 간과하게 만들거나(그래서 믿음에 있어서 파선한 사람이 나왔는지 모른다.) 혹은 그 역으로 율법은 더 이상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필요없다는 식의 율법 폐기론을 주장함으로 그로 인해 양심을 버리게 된(19절) 사람들이 나타난 것은 아닌가 추론해 볼 수 있다.

아직 <다른 교훈>의 내용에 대한 실체가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는 모른다. 1장 밖에는 읽지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 계속 읽다보면 다른 결론에 도달하게 될지 모르지만... 이와 같은 논리와 생각을 가지고 디모데 전서를 읽다 보면, 두 가지 유익이 있다.

하나는 만약, 이 추론이 맞다면 본문속에서 더 많은 증거들을 찾아 낼 것이고 그 자료들이 눈에 잘 띄게 될 것이다.

다른 하나는 만약, 이 추론이 틀리다면 추가적인 증거를 찾지 못할 것이고, 대신에 다른 추론의 근거들을 찾아냄으로 본문의 의미가 더욱 선명해 질 것이다.

기대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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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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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살후 3:14)

바울 선생이 좀 심한 말을 한 것 같습니다. 거칠게 표현하면, 내 말을 듣지 않는 성도가 있다면, 그 사람을 공개적으로 지목해서 교회 전체가 사귀지 말아서 그로 수치를 느끼도록 해야 한다는 것으로 읽혀 집니다.

그러나 이런 바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런 말을 하게 된 정황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의 이 표현은 교회 안에 게으른 자에 대한 경계와 훈계 과정 속에서 한 말입니다.(6-15) 게으른 자란 교회 안에서 책임감 있게 자신의 일을 하지 않으므로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사람을 말합니다. 구체적으로 먹고 사는 기본적인 생활을 위해서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건강하고 멀쩡하면서도 일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노력하여 얻은 것을 수고없이 거져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이런 태도는 열심히 일한 사람들에게 과도한 짐을 지워 폐를 끼치는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 안에 이와 같은 사람들을 향해서 단호하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10절)

왜냐하면 이와 같은 사람들은 도무지 일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일을 만들어 내어 교회로 짐을 지우게 하기 때문입니다.(11절)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와 같은 자들의 태도에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게으른 자는 당당히 교회 앞에 은혜와 사랑을 요구하고, 이런 자들까지 섬겨야 하는 성실한 교인의 입장은 실로 적지 않은 부담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중에 바울은 명확한 선을 거주는 것입니다. 신속한 결단과 명확한 지침으로 교회의 혼란을 잠재우고 게으른 자는 정신을 차리게 하면서, 성실히 자신의 일과 더불어 게으른 자들까지 섬겨야 했던 성도들의 짐은 가볍게 해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과정 속에서 바울의 권면이 나왔던 것입니다.

게으른 자는 자신이 잘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섬겨야 하는 성도들의 사랑과 인내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게으른과 불성실한 태도로 사는 성도가 잘 못되었음을 본인도, 교회도 알게 함으로 다시는 그와 같은 태도가 양산되지 않도록 해주려면 이런 방법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임으로서 성실하고 책임감있는 성도들 또한 과격하거나 자기 의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조심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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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 후서 2장은 주님의 재림에 대한 성도들의 오해를 풀어보고자 쓴 글이다. 아마 이전에 바울이 보냈던 데살로니가 전서 혹은 어찌 어찌 들었던 주님의 재림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 대해서 바로 잡고 정리하고 하는 차원에서 데살로니가 후서를 쓴 것으로 보인다.(2절)

한 마디로 정리하면, 주님의 재림이 날이 임박했다고 해서 너무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은 아직 아니라는 것이며, 주님의 재림이 있기 전에 명백한 현상이 미리 나타남으로 주님의 재림을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명백한 현상이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자신을 하나님처럼 높일 것이고, 그로 인하여 배교자들이 속출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3-4절)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순서를 배치하시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다.

첫째는 불법한 자가 세상에서 그의 권세와 힘을 휘두르고 있을 때,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면 강림하신다는 것(8절)이다. 즉 재림의 주님은 악을 이기시고 승리자로서 등장하시는데, 마치 역전승과 같은 통쾌함을 보여주신다는 것이다.

둘째는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어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을 더욱 규합하게 만드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애매한 진영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소속을 명확하게 만든 다음에 심판하시려고 한 다는 것이다.(12절)

결국 주님의 재림이 있기 전 하나님은 미혹의 역사를 통해 세상을 양분화하시는 작업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악한 자는 더욱 득세할 것이고, 세상은 마치 그들의 세상처럼 흘러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세상의 왕노릇하는 불의와 부정의 편에 서서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그런 세상 가운데에서도 의인의 편에 서야 할지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결국 세상의 권세를 따라 이동할 것이다. 그리고 의인들을 박해할 것이다. 그것이 최고조가 될 때, 주님의 강림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심판할 것이다.

[우리의 교훈]

1. 세상에 악한 자의 득세와 잘됨에 현혹되어서는 안된다. 그들의 결국은 심판과 멸망인데, 지금 잘 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주님이 진정한 선인과 악인을 구별하기 위해서 살펴보고 계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우리는 흔들리지 말고 지금 내가 해야할 일, 내가 선택해야 할 의로운 일을 택하면서 살아가면 될 일이다. 바울을 통해서, 건강한 가르침을 통해서 배운대로 (전통을 지키어) 순종하며 살아가면 될 일이다. 그렇다면 주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의 마음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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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 후서 1장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선 서두에는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칭찬으로 시작합니다. 계속적인 믿음의 성장과 서로간의 사랑의 풍성함, 그리고 환난과 박해 중에서 인내와 믿음에 있어서 모든 교회의 본이 되고 있는 것에 대한 칭찬입니다.

   -> 바울이 데살로니가 지역에서 오래 머무르지 못했기 때문에 우려가 많았는데, 생각 외로 기대 수준 이상으로 환난의 때를 잘 감당하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해 바울은 매우 흡족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주고 있는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데살로니가 교회가 당하고 있는 환난과 박해에 두가지 측면이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5절)

    -> 이 말은 환난과 박해를 통해서 어중간하게 있는 사람들(불순물)을 걸러내는 역할을 하게 함으로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면서, 고난을 견디는 자들에게는 오히려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는 표가 되는 것이란 의미일 것이다.

2. 데살로니가 교회로 하여금 환난을 가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환난으로 갚으실 것이고, 주를 위해 환난을 당한 자들에게는 위로하심으로 갚으실 것이라는 말씀으로 위로해 주신다.(6,7절)

    -> 하나님은 믿는 자를 박해하는 자와 그리스도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신다고 말씀하신다. 믿지 않는 자를 향해, 그리스도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라고 표현한다.

3. 마지막 날에 하나님은 기대하신다. 주 예수의 이름이 성도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길 기대하신다.(마침내 우리가 옳은 편에 있었다는 것을 확증해 보여주심으로서) 또한 우리도 그 안에서 영광을 얻게 하시길 원하신다.(우리의 믿음과 신앙과 하나님께 인정이 되는 것이다. 천국 백성다운 모습을 갖춘 것이다.)(12절)

 

[박해와 환난의 역할]

성도들에게 임하는 환난과 박해는 우선 불물을 제거하는 효과를 가진다. 정금을 얻기 위해 불의 단련이 필요하듯 우리 교회 안에 있는 불순물(참된 신앙을 가진 자가 아닌 자)을 제거하는 효과를 가진다. 가라지는 결코 곡간에 들어갈 수 없다. 또 하나는 신자들에게는 자신이 참된 신자임을 확인시켜 주는 과정이 된다. 많은 부족함에 확신할 수 없었던 신자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편에 서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기회를 준다.(시험으로 본다면 합격선 안에 있는 자신의 점수를 확인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자격없는 자를 부르시지만, 자격을 갖추어 들여보내십니다. 그래야 하나님도, 우리 자신도 부끄럽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그 과정으로 하나님은 시험, 곧 환난을 두십니다.

시험 기간입니다.  포기하지 마시고 합당한 자로 여김이 되도록 힘쓰십시오. 주님이 도우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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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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