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맹자 곡속장의 '이양역지' 양과 소를 바꾼 이야기(106-107쪽)


맹자가 인자하기로 소문난 제나라 선왕의 찾아가서 소문을 확인한다. 소문은 이런 것이다. 선왕이 소를 끌고 가는 신하에게 '그 소를 어디로 끌고 가는가?' 묻자 '흔종'(종을 새로 주조하면 소를 죽여 목에서 나온 피를 바르는 의식)하러 갑니다.'라고 답했다. 선왕은 소가 벌벌 떨면서 눈물을 흘렸던 것이 불쌍해서 '소를 놓아주라'고 한다. 신하가 '그러면 흔종을 폐지할까요?'하자 그럴수는 없다고 하면서 '양으로 바꾸라고(이양역지)' 지시했다는 소문을 확인한 것이다.  

그러자 선왕은 그런 일이 있다고 했다. 맹자는 왜 바꾸라고 했는지 물었다. 선왕은 벌벌 떨면서 사지로 끌려가는 소가 불쌍해서 바꾸라고 했다고 했다. 


그러자 맹자가 물었다. 양은 불쌍하지 않습니까? 양도 불쌍하기는 만찬가지다.

그리고 백성들은 험담처럼 큰 것을 작은 것으로 바꾼 것은 인색함 때문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하다. 맹자는 선왕 자신도 모르고 있는 이유를 이야기 해 준다. 


소를 양으로 바꾼 이유는 양은 보지 못했고 소는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맹자의 해석이었다. 우리가 '맹자'의 이 대목에서 생각하는 것은 '본 것'과 '못 본 것'의 엄청난 차이에 관한 것이다. 생사가 갈리는 차이이다. 본다는 것은 만남이다. 보고 만나고 서로 아는 이를 테면 '관계'가 있는 것과 관계 없는 것의 엄청난 차이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 한다. 옛 선비들은 푸줏간을 멀리했는데, 그 비명 소리를 들으면 차마 그 고기를 먹지 못하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은 생선 횟집에 들어가면서 수조 속의 고기를 지적하여 주문하는 사람도 많다.


* 맹자가 강조하는 '인의예지'(관계성 속에 윤리가 형성된다.)


인은 측은지심(불쌍히 여기는 마음), 의는 수오지심(부끄럽게 여기는 마음)인데 이런 감정은 만남이 지속적일 때 생기는 것이다. 짧은 만남 속에서는 생길 수 없는 것이다. 


  예) 지하철에서 자신의 앞자리에 대한 '연고권'을 불법적으로 빼앗긴(?) 이야기


자본주의의 인간관계는 '상품교환 관계'이다. 얼굴없는 생산과 얼굴 없는 소비가 상품교환이라는 형식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이다. 그런 인간관계가 결집되어 나타나는 곳이 바로 '도시'이다. 이런 관계 속에서는 얼마든지 '유해' 식품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우리 시대의 삶은 서로 만나서 '선'이 되지 못하고 있는 외딴 '점'이다. 더구나 '장'을 이루지 못함은 물론이다. 


* 바다를 본 사람은 물을 말하기 어려워한다.(관어해자난위수)

큰 것을 깨달은 사람은 작은 것도 함부로 이야기하지 못한다는 뜻 / 맹자의 인간적 기품과 크기를 읽을 수 있음.



* 맹자는 사람이 처해있는 사회적 조건에 대해서 이해가 깊었다.(119쪽)


화살을 만드는 사람은 그 화살이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을까봐 걱정하고, 방패를 만드는 사람은 사람이 상할까봐 근심한다. 그러나 화살을 만드는 사람은 하는 일이 그래서 그렇지 사람 자체가 어찌 불인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무당(의사)와 관(장의사)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무당은 사람이 죽을까봐 걱정하고 관 만드는 사람은 사람이 죽지 않을까봐 걱정한다. 


맹자는 이것을 인간성 과는 관계없는 사회적 조건으로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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