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전국시대>


고전과 역사의 독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時제制 라는 사실입니다. 공자의 사상이 서주 시대 지배 계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오늘의 시점에서 계측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오늘의 시점에서 규정하여 비민주적인 것으로 폄하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과거의 담론을 현대의 가치 의식으로 재단하는 것만큼 폭력적인 것도 없지요. 


<옛것과 새로운 것>


.. 해가 뜨고 지는 것마저도 변화가 아니라 반복이다.

아프리카의 오지에 1년을 365개의 숫자로 나눈 캘린더는 없다. 시간은 실재의 변화가 걸치는 옷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바탕이 아름다움입니다.>


* 품성이란 바로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인간관계를 통해 도야되는 것이며 인간관계 속에서 발현되는 것입니다. 


* 미인은 대체로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그일익을 담당하려는 자세가 부족합니다. 소위 꽃으로 '존재'하려는 경향이 우세합니다. 미인이라는 자의식이 없는 사람이 열심히 일함으로써 자기를 실현하려고 하는 것에 비해 매우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지요. 존재론과 관계론의 차이입니다. 

  - 존재로 증명된다고 생각하는 자의 태도와 관계를 통해서 자신을 증명하려는 자의 태도가 다를 수 밖에 없을 지적한 글이라 본다. 


* '아름다움'이란 우리말의 뜻은 '알 만하다'는 숙지성을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모름다움'의 반대가 아름다움이다. 오래되고 잘 아는 것이 아름답다는 뜻이다. ...( 그러나 세상은 모름다움이 아름다움으로 대체되었다. 이 시대의 미학이란 새로움이며 알아차리기 전에 다시 새로워짐으로서 실제를 감추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이 미의 본령이 아니라 모름다움이 미의 본령이 되어버리는 꺼꾸로 된 의식이 자리 잡은 것이다. 



<공존과 평화>


* 논어의  '동론(和同論)'은 근대사회 즉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을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는 담론이라고 생각한다. 화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관용과 공존의 논리입니다. 반면에 동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적인 가치만을 용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배와 흡수합병의 논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화와 동은 철저하게 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극좌와 극우는 통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적 격동기에 도처에서 확인되는 사실입니다. 나는 극좌와 극우가 다 같이 '동'의 논리에 기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국주의적 패권주의라는 극우 논리와 프로레타리아 독재라는 극좌 논리는 둘 다 '강철의 논리'이며 '존재론적 구조'이며 결국 '동의 논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낯선 거리의 임자 없는 시체가 되지 마라>


변혁기의 수많은 실천가들이 한결같이 경구로 삼았던 금언이 있습니다. "낯선 거리의 임자 없는 시체가 되지 마라"는 것이었습니다. 운동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중과의 접촉 국면을 확대하는 것, 그 과정을 민주적으로 이끌어가는 것 그리고 주민과의 정치 목적에 대한 합의를 모든 실천의 바탕으로 삼는 것, 이러한 것들이 모두 덕불고 필유린의 원리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신뢰를 얻지 못하면 나라가 서지 못한다>


진 나라 재상으로 신상필벌이라는 엄격한 법가적 개혁의 선구자로 알려진 상앙 에게는 '이목지신'이란 유명한 일화가 있다. 상앙이 진나라의 재상으로 부임하면서 나라의 기강이 서지 않는 원인은 바로 나라에 대한 백성들의 불신에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대궐 남문 앞에 나무를 세워고 방문을 붙였다. '이 나무를 옮기는 사람에게는 백금을 하사한다.' 그러나 옮기는 사람이 없자, 상금을 천금으로 인상하였다. 그래도 없어서 만금으로 인상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상금은 기대하지도 않고 밑질 것도 없다고 생각해 장난삼아 나무를 옮겼다. 그랬더니 방문에 적힌 대로 만금을 하사하였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 나라의 정책이 백성들의 신뢰를 받게 되고 진나라가 부국강병에 성공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물론 지어낸 이야기다.)


무신불립, 신뢰가 없으면 나라가 설수 없다는 것.


정치란 신뢰이며 신뢰를 중심으로 한 역량의 결집이라는 사실이다. 


<참된 지知는 사람을 아는 것>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알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애정 없는 타자와 관계없는 대상에 대해서 알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진정한 의미의  지知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인식의 혼란을 가져오는 엄청난 정보의 야적은 단지 인식의 혼란에 그치지 않고 인간에 대한 이해와 애정을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폄하하게 할 뿐입니다. 


(모든 것이 상품 가치와 자본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참된 지知를 얻기란 어렵다.) 이러한 체제에서 추구하는 지식은 인간에 대한 이해와는 한 점의 인연도 없습니다. 지知는 지인이라는 의미를 칼같이 읽는다면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회는 무지한 사회입니다. 무지막지한 사회일뿐입니다. 


<이론과 실천의 통일>


"학 하되 사 하지 않으면 어둡고, 사 하되 학 하지 않으면 위태롭다."

학: 배움. 이론(객관성,일반성)

사: 경험. 실천(실천성, 현장성)

배움이 있고 실천이 없으면 어둡게 되고, 경험이 있으나 일반성이 없으면 폐쇄적이 된다.


학 이란 협소한 경험의 울타리를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이다. 학이란 하나의 사물이나 하나의 현상이 맺고 있는 관계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자기 경험에 갇혀서 그것이 맺고 있는 관계성을 읽지 못할 때 완고해 지는 것입니다. 

크게 생각하면 공부란 것이 바로 관계성에 대한 자각과 성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은 것은 큰 것이 단지 작게 나타난 것일 뿐임을  깨닫는 것이 학이고 배움이고 교육이다.  우리는 그 작은 것의 시공적 관계성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지요. 


"책상에서는 한 가지이지만 실제로 일해보면 열 가지도 넘는다."

 - 교실보다는 현실이 훨씬 더 복잡하다는 것


<어리석음이 앎의 최고 형태입니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를 세상에 잘 맞추는 사람인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그야말로 어리석게도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세상은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인하여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해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세상에 부적응자가 세상을 변화시킨다.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알 고 있다는 의식>


모든 사람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의식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고 겸허해야 한다. 


<광고 카피의 약속>


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를 '당구공과 당구공의 만남'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짧은 만남 그리고 한 점에서의 만남입니다. 만남이라고 하기 어려운 만남입니다. 부딪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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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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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교회 한가족예배(2015.11.08)


본문: 시편 146:1-10(146-150편)

제목: 어른들, 얼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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