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교회 한가족예배(2014.3.9)


제목: 달란트 비유2_비교의식

본문: 마 25: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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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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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교회 한가족예배 예수님의 비유 설교


본문: 마 25:14-30

제목: 달란트 비유1_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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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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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시에 들어온 사람들


글: 김수억 간사


마태복음에는 '비유'가 많이 나온다. 그 많은 비유의 많은 비중을 '천국'이라는 주제가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마태복음을 찬찬히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쉽게 '천국은 ... 와 같으니'라는 문구를 접하게 되기 때문이다. '천국'은 문자적인 의미로만 따진다면 '하늘 나라'를 말한다. 그러나 마태복음이 유대인들을 주 대상으로 쓴 글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유대인들인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매우 조심하고 삼가고 있다는 것은 익히 들은 상식일 것이다. 그래서 마태복음이 아닌 마가 복음서에서는 '천국'이라는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이 언급된다는 것을 다른 복음서와 조금만 비교해 봐도 알 수 있다.(비교, 마 4:17 / 막 1:15) 간단하게 말하자면, 마태복음에서 '천국'이란 의미는 '하나님의 나라'와 같은 의미로 봐도 된다고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천국'이나 '하나님의 나라'나 글자의 차이 말고 무슨 차이가 있는가 생각하시겠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그 약간의 차이는 큰 차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천국'이라고 할 때, 성도들의 궁극적으로 기대하고 소망하는 나라가 '이 곳'이 아닌 '저기 어딘가'로 규정되기 쉽다. 문자대로만 본다면 '천국'의 반대말은 '이 땅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로 이해하면 그 의미는 약간 달라진다. 공간적인 개념이 아니라, 통치권의 개념으로 옮겨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문자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의 영역은 하늘일 수도 있고, 땅일 수도 있다. 이곳일수도 있고, 저곳일 수도 있다. 우리 안 일수도 있고, 우리 밖일 수도 있는 것이다. 공간적인 개념이 아닌, 누구의 다스리심을 받는가의 문제로 전환된다. 


따라서 우리가 마태복음에서 '천국'에 대한 비유를 읽을 때, 하나님 나라가 어떤 공간이냐?라는 정적인 개념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어떤 원리와 다스림으로 운영되는 곳인가로 읽어야 한다. 서두가 길었지만, 이런 이해가 어떤 분들에게는 필요했으리라 생각한다. 



천국은 품꾼을 얻어 자기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다(마 20:1)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집 주인(포도원 주인)의 행동을 관찰해야 하고 특별히 그 중에서 이상한 행동(왜냐하면 이 땅의 원리와는 다른 원리를 제시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 땅의 원리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좀 이상한 것이고, 그것이 천국 비유의 핵심에 다가갈 수 있는 열쇠가 된다.)에 주목해야 한다. 가장 대표적으로 이상한 행동은 오후 5시(십일시)까지 아무 일도 얻지 못해 놀고 있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이 사람이 포도원 주인의 부름을 받아 1시간이라도 일했다는 것에 주목해서는 안된다. 이 사람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고, 할 수도 없었던 사람이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 포도원 주인의 호출이 없이는 하루를 공친 존재인 것이다. 누구도 하루 해가 지는 그 순간에 사람을 불러다 일을 시키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그런데도 포두원 주인은 그 사람을 불러 들였다. 


왜 이 사람은 오후 5시까지 놀고만 있었는가?(마 20:6) 이 사람들은 품꾼으로 써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20:7) 몇 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노동 시장에 늦게 나온 사람일 수 있다. 그렇다면 게으르거나 책임감이 약한 사람일 수 있다. 어떤 이유든 사회는 이런 사람들의 변명에 귀기울이지는 않다. 인력은 언제나 넘치니까. 어쩌면 이른 아침부터 나와있었지만 고용주로부터 주목을 받지 못한 사람일 수 있다. 체격이 외소해서 노동 효율이 적은 사람처럼 보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신체적인 장애가 있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고용주의 입장에서 인상이 별로 였을 수도 있다. 암튼, 오후 5시가 되도록 이들은 부름을 받지 못함으로 소외 되었다. 이는 이 사람이 이 사회에 무능하며 무가치한 존재 즉 잉여에 불과하다는 무언의 싸인이였다.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이 말처럼 이들의 마음을 후벼파는 말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그 말을 부인할 수 없었고 정말 그들은 아무도 자신을 써주지 않아 놀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 집에 돌아갈 수도 없었다.(가장이 어찌 빈손으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 나라의 반전은 여기에 있다. 포도원 주인에게도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이 사람을 포도원 주인인 천국은 불러들인다.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20:7) 


예수님께서 왜 세리와 죄인들을 가까이 하셨는지 왜 사람들로부터 소외되고 버려진 병자들을 외면하지 않으셨는지 오히려 그들만을 위해 오신것처럼 행동하셨는지 이제는 더욱 분명해 진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이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예수가 복음(자기와 같이 버려진 존재를 담아주셨기에)인 것처럼, 오후 5시에도 놀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 나라'는 복음이 된다. 왜? 다른 포도원 주인들은 오후 5시까지 놀고 있는 잉여들에게 자기의 포도원에는 들어 올 수 없다는 신호를 주었지만, '하나님의 나라'인 포도원 주인은 그들의 처지를 알자 자기의 포도원으로 들어오라고 초청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들어간 포도원에서 그들은 무엇인가를 했다고 말하기도 부끄러울 만큼 일했다. 아니 아무것도 한 것이 없고, 자신을 부른 포도원 주인에게 어떤 유익을 끼쳤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런데 주인은 다른 일꾼보다 먼저, 그 사람에게 하루치의 품삯을 주었다. 일을 한 사람에게는 그 삯이 은혜가 아니라 보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일을 하지 않은 자에게 주어진 삯은 은혜다.(롬 4:4,5) 오후 5시에 들어간 사람이 경험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 비유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적어도 하나 더 있다고 본다. 이른 아침에 온 사람의 모순되지만 누군가에게는 굉장히 공감되는 항변을 통해서 주시고자 하는 교훈도 있다. 그러나 여기까지만 다루고자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떤 일꾼으로 생각하는가? 이른 아침에 온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고도 하나님에게 불합리의 죄를 뒤집어 씌우며 불평하는 성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오후 5시에 들어온, 이 세상에서는 '잉여'로 판명된 그 순간에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로 인정하셨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신앙 생활하는 우리의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성도의 또 다른 이름은 '오후 5시에 들어온 사람들'이다. 


 - 간이역 2.0 / 2014. 2월호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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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이어> 과부의 기도(눅 18장)에 대한 해석

 보통 붙잡고 늘어지는 기도를 해야 한다고 해석하지만, 낙망하지 말고 기도해 한다는 것이 핵심 메시지다. 

 기도하는데 낙망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기도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방식/때 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불의한 청지기 비유> 눅 16장.

이 비유는 불의한 청지기가 지혜가 있다는 것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 세대를 사는 사람은 다음 세대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대를 사는 사람들이 다음 세대를 준비하지 않더라...빛의 자녀들도. 이 세대의 것으로 다음 세대를 준비해 한다는 것이 비유의 핵심이다. 


밤에 찾아온 친구 비유> 눅 11장. 

눅 10장의 주기도문을 보충하는 비유다. 강청(부끄러움없는 고집)이란 의미는 요구함에 있어서 당연한 관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마치 부모와 자식의 관계처럼 친한 친구에게는 자기 것인양 달라고 요구하는 것(예의와 법도를 떠나서)이다. 서로 배려하고 구분하고 하는 것은 이미 관계가 남임을 의미한다. 강청함이란 그런 관계를 전제한 행동이다. 


------------- 정리하자.


1.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 성경의 주제가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가 가장 근접하다. 

 

  1) 하나님 나라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주권>이다. 

  2) 이것은 성경의 최고 사상이 하나님의 주권 사상이라는 말과 일치한다. (칼빈주의)

  3) 하나님의 주권과 함께 중요한 것은 그의 백성들이 그 통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 성경 신구약 통틀어서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목표로 하고 대주제로 삼고 모든 사건과 약속들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 진행에서 하나님의 주권의 유일성, 절대성, 사실성, 이런 것들이 강조되는 것과 함께 그 통치의 대상인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통치를 기쁨으로 수용하고 그들의 소원으로 삼고 양식으로 삼는 자로서 고쳐지고 훈련받고 완성되는 것이 동시에 다루어진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을 알려주고, 그 계획에 우리가 순종하도록 설득하고 납득하는 것이다. 그래서 비유와 같은 방식이 쓰이고 있는 것이다. 설득시키고 이해시켜서 설복하도록 만드신다. 왜냐하면 우리가 인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때가 차매"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고집스럽게 거절한다. 그래서 이와 같은 우리를 향해서 성경에 자주 사용되는 표현이 무엇인가? '나를 믿어라', '나는 네 편이다'라는 설명 밖에는 할 것이 없는 것이 되고 만다. (부모가 자식을 키울 때, 때리거나 더불어 사랑으로 편이 되어 주는 것처럼)


설명해야 하는 데 설명이 안되니까? 사랑하는 말로 밖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랑한다는 것의 가장 강력한 메시지가 십자가다. 그런데 못 알아들으니까? 억지로 끌고 가고, 개같이 끌고 가는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결국 복받는 자리로까지.


우리가 성경을 보는 이유는 그 이유를 알아서 그의 뜻에 순복하게 되어 가는 것이다 .그것을 묘사함에 있어서 다양한 장르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장르를 사용해도 상관없다. 목적은 같다. 그러나 장르에 따라 사용하는 칼라가 다르다. 풍경화를 그리면 초록이 많이 들어가고, 인물화를 그리면 초록이 많이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묘사함에 있어서 진노로 나타날 수도 있고, 용서로 나타날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훈련하시는 것이 상을 주시는 것으로 나타날 때도 있고, 매를 드는 것으로 나타날 때도 있는 것이다. 색깔과 그림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하듯이 표현과 내용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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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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