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정리]


[성도 간의 세상 법정에서의 송사 문제]

1. 성도 간에 문제를 세상 법정으로 가져가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훗날) 세상이 교회로부터 심판 받을 텐데, 너희들이 지극히 작은 일을 판단하지 못하고 세상 법정의 판단을 의존해야 한다니 부끄럽다.


2. 교회 지도자를 어떻게 세운 것이냐? 너희 형제간의 문제를 판단할 만한 지혜로운 사람이 교회에 아무도 없단 말이냐? 어떻게 교회 성도 간에 서로 고발하게 만들며, 그 일을 믿지 않는 사람들 앞으로 가져가게 만드는가? 


3. 이미 피차 고발했다는 것이 너희 가운데 뚜렷한 허물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그들은 너희의 형제가 아니냐?

  : 너희 자신들도 불의하고, 음행하였으며 우상숭배와 간음을 행하고 도적이나 탐심을 가졌던 자가 아니냐? 너희가 그와 같은 처지에 있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로움을 받은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너희 형제가 그와 같은 문제로 인해서 교회 안에서 일이 발생했을 때, 세상 법정까지 가도록 하는 것은 삼가야 하지 않겠느냐? 그냥 불의를 당하고, 속임을 당하는 편이 나은 것이 아니냐?) 


4. 모든 것이 가하지만,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다. 가능하다고 무엇이든 하려고 해서는 안된다.(절제) 왜?

  1)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2)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3) 너희 몸을 창녀와 합할 것인가? 아니면 주와 합할 것인가?

   (1) 사람의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는 것이다. 

   (2) 너희 몸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너희 몸을 하나님께서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생각 정리]


1. 바울은 교회 공동체가 올바른 판단을 못내리고, 세상 공동체(가치관)에게 판단을 맡기는 자리로 나아간 것에 대해서 마음 아파했다. 


이 말은 교회 성도들간의 문제는 세상 법정으로 가져가면 안된다는 것이라기 보다는, 마땅히 교회 안에서 다루고, 다룰 수 있는 문제조차 세상 법정을 의존해야 하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표현한 말일 것이다. 이것은 고린도교회 공동체가 그만한 것도 제대로 판단할 수 없는 수준의 상태라는 것에 대한 바울의 안타까운 마음의 표현이다. 이런 분명한 문제조차 교회가 판단하지 못한다면, 훗날 종말의 중요한 판단을 내려야 할 교회가 어떻게 그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란 말인가!


교회는 세상의 수준보다 높은 혹은 더욱 고상한 판단을 내리는 공동체여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교회에 대해서 놀라게 되는 것이다. 무조건 용서하고 관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그러면 세상은 교회를 우습게 알것이다.) 갈라디아서의 말씀처럼, '온유한 심정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더불어 자신을 돌아보아 더욱 거록한 공동체로 성숙해져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받는 평가는, 교회가 세상만 못하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현실인가! 그것이 교회가 세상에서 조롱받게 된 이유이다. 


2. 복음은 '자유'를 말하지만, 그릇된 사람들은 '방종'을 따른다.


복음은 확실하게 '자유'를 강조한다. 갈라디아서는 그것을 선명하게 한다. 그러나 바울이 복음 안에서 말하는 '자유'는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라는 방식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즉,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라를 법으로 말미암아 <구속된 삶>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의롭게 되기 위해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법에서 자유롭게 된 것이다. 사람이 의롭게 되기 위해서 <율법>에만 묶여있었지만, 이제 그리스도 예수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서 <율법>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의를 얻게 되었다는 측면에서의 '자유'인 것이다. 


율법과 무관하게 살아도 된다는 '방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이 그릇된 이해를 풀기위해 늘 복음을 설명하면서 추가적인 설명을 해야 했다. 자유지만 방종이 아니다. 


탐식에 사로잡힌 자들... 아무거나 자신이 먹고 싶고 먹을 수 있는 것은 다 먹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자유라는 이름으로 과거 전통이 부여했던 '가치관'을 무시했다. 심지어 윤리적인 가치관에서도 그와 같은 일들이 벌어졌다. 자신의 몸을 함부로 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복음 안에서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그것을 자신의 욕구(육체적 소욕)의 근거로 생각한 사람들이 고린도교회에도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성경이 가르쳐준 복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를 지지하는 근거를 '복음으로부터 뽑아, 복음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에 불과한 것이다. 


[적용 생각]


1. 교회가 성장한다는 것은 교회의 가치적 판단이 성장한다는 것이다.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교회가 그 일을 어떻게 판단하고 진행하는가가 그 교회의 성숙도를 드러내 준다고 할 수 있다. 예루살렘 교회에 '헬라파 과부와 히브리파 과부'간의 갈등이 생겼을 때, 사도들은 그 문제를 통해서 자신의 한계를 발견하고 오히려 자신의 본연의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고 그 일에 집중하게 되었다. 


또한 교회에 사도들이 아닌 '일꾼'일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도적인 장치가 따라와야 했던 것이다. 교회는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뭔가를 결정해야 하는 과정 속에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 결정과 과정을 중요시하면, 성장을 위한 계기로 삼아야 한다. 늘 최상의 선택만 할 수는 없다. 그런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전체적인 성숙이 함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2. 복음은 언제나 오해스럽기에 늘 보완되어 설명되어져야 한다.


갈라디아서도 그렇지만, 고린도전서도 마찬가지다. 바울의 전한 복음은 늘 어떤 대상들로 인해 오해를 받는다.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이 완전할 수 없다. 바울의 입장에서도 그렇고 받아들이는 고린도 교회의 사람들의 입장에서도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자는 듣는 자가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그와 같은 행동하는지 살펴야 한다. 그릇되게 이해하는 부분이 반드시 나타나게 될 것이고 그것을 수정하고 교정하는 것이 또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몫이어야 한다. 


복음은 완전하지만, 복음에 대한 설명은 늘 보완되어져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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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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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지도자 만들기, 로버트 클린턴, 베다니출판사(81쪽)


<수렴 단계>는 하나님께서는 지도자를 은사에 적합하고 사역 경험에 맞는 역할로 인도하여 그의 사역을 극대화시키는 단계이다. 지도자는 자신이 가진 최선의 것을 사역에 활용하는 때요, 그의 재능에 적합하지 않은 사역은 하지 않아도 되는 때이다. 이 시기는 인격적인 성숙과 사역의 성장이 함께 만나 절정을 이루는 황금기다. 


많은 지도자들이 이 수렴 단계를 경험하지 못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어떤 경우에는 인격적인 개발 부족이 원인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을 소속 단체에서 제한된 직책에 예속시킴으로써 더 이상 지도자로서 크지 못하게 가로막기도 한다. 


도슨 트로트만(네비게이토 창시자)의 경우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몇 가지 섭리가 존재하지만 우리는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것은 우리 손에 종합적인 그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수렴 단계에 이르면 지도자의 잠재력은 최대한도로 드러나게 된다. 


<수렴 단계>에서 필요한 것은, 


지도자가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드러낼 수 있는 직책과 역할로 이끌어주는 일이다. 지도자는 하나님의 인도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심령에 평온을 유지하면서 지금까지 개발된 모든 자질들을 함께 구현하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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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각]


최대의 역량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자신이 준비해야 할 것과 공동체가 준비해야 할 것이 모두 맞아야 한다. 어느것 하나 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한 개인의 성숙 뿐 아니라, 공동체의 성숙함이 사람의 역량을 극대화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둘 중 하나만으로는 불충분하다.



1. 해당 되는 사람이 자신의 인격적인 개발이 충분하지 못했을 경우 수렴 단계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 


   자신의 역량이 극대화 될 수 있는 리더십은 기능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기능만으로는 한계에 부딪히고 만다. 관계를 이끌어 갈 수 있어야 역량이 극대화되는데, 관계를 이끄는 힘은 인격을 기초로 한다. 인격은 짧은 시간에 형성되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도 아니다. 오랜시간 꾸준히 단련하여 오는 것이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사람들에게 신뢰도 얻고 인정도 받게 된다. 이런 기초가 있어야 무슨 일을 하고자 할 때, 집중력이 나오고 열매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평소부터 인격을 훈련하는 기회로 삼지 못한 사람은 이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다. 


2. 소속되어 있는 단체(장)은 해당되는 사람의 역량이 극대화될 수 있는 직책을 맡겨 환경을 조성해 주어야 한다. 


  그래야 그 사람은 불필요한 한 일 혹은 다른 사람이 할 수도 있는 일로부터 분리되어 자신의 은사에만 집중하여 열매를 거둘수 있게 된다. 이것은 그 사람의 성취이면서 동시에 공동체의 열매가 된다. 그런 측면에서 인사가 매우 중요함을 알게 된다. 잘못된 인사는 제한된 직책에 예속 시키는 결과를 낳고 그 결과 불필요한 일에 매이게 되어 집중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그로 인해 성취감도 얻지 못하게 되고 만다. 결국 사람을 잃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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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여호수아 4장] 요단 강을 마른 땅으로 건넌 사건은 홍해를 건넌 사건과 대조됩니다. 이번 사건을 통해서 여호수아는 모세와 대견될만한 지도자임을 인정받습니다. 역사를 통한 교훈을 지속하려고 했던 여호수아의 모습 속에서 우리에게 어떤 역사의식을 가진 지도자가 필요한지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아픈 역사를 통해서 배우려고 하는지 아니면 아픈 역사를 감추려고만 하는지에 따라서 지도자의 미래, 그 민족의 미래가 보입니다.

 

 

[정리1. 본문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1.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는 과정 중에서 행한 일.
  1)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각 지파 대표 한명씩 요단강에서 돌 하나씩을 취하여 오늘 유숙할 그곳에 두게 하라.
  2) 여호수아는 요단 강 중앙에 서 있는 언약궤를 맨 제사장 있는데까지 가서 각 지파별로 돌을 메라고 하고, 이것이 표징이 될 것인데 훗날 자손들이 이 돌들이 무엇인가 물을 때 여호와의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 그 앞에서 물이 끊어졌으므로 영원한 기념이 될 것이라 하라.
  3) 각 지파 대표들은 돌을 취하여 자기들의 유숙할 곳으로 가져가 거기 두었고, 여호수아는 요단 가운데 있는 언약궤를 맨 제사장의 발이 있는 곳에 돌 열둘을 세웠는데 지금까지 있더라.
  4) 요단 중앙에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서있고, 물은 멈췄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요단을 건넜다. 모두 건넌 후에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백성들의 목전에서 건넜다.
  5) 루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자파가 먼저 무장하고 모든 이스라엘보다 먼저 건넜다.
  6) 무장한 사만 명이 가량이 여호와 앞에서 건너가 싸우려고 여리고 평지에 이르렀다.
  7)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육지에 발을 밟는 동시에 요단 물이 본 곳으로 도로 흘러갔다. 그리고 전과 같이 언덕에 넘쳤다.

  [효과] 그 날에 여호와께서 모든 이스라엘 앞에서 여호수아를 크게 하시매, 생존하는 날동안 백성들이 모세를 두려워하듯이 여호수아를 두려워하였다.

 

2. 여리고 동편 길갈에 진을 치다.
  1) 1월 10일에 백성이 요단에서 올라와 여리고 동편 경계 길갈에 진을 쳤다.
  2) 길갈에 요단에서 가져온 돌 12개를 세웠다.
  3) 훗날 자손들이 묻거든 너희 자손들에게 알게 하라.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다는 것을... 요단을 마르게 하고 건너게 하신 것은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심과 같은 것임을 자손에게 알리게 하라.

  [효과]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고, 너희가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다.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내용을 다시 나의 말로 풀어말하기]

 

본장은 이스라엘 요단 강을 건너게 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은 요단의 중앙에 서서 물을 막고 있다.(물이 멈추었다) 그러는 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을 건너는데, 그 맨 앞에서 사람들은 요단 동편에 기업을 얻은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 사람들이다. 이들은 여호수아와 약속한대로 앞장서서 가나안을 향해서 갔고, 많은 무장한 사람들이 그 뒤를 따라갔다. 아마 그 뒤를 이어 다른 지파와 여인들, 아이들이 요단을 건넌 것으로 보인다.


요단을 건너는 중에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각 지파별로 하나의 돌, 그래서 12개의 돌을 요단에서 취하라고 말씀하신다. 여호수아는 즉각적으로 각 지파별 대표를 세워 12개의 돌을 취하도록 하고, 더 나아가 이 돌을 취하는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추가적으로 언급한다. 여호수아는 이것이 하나의 징표가 되는 것인데, 후손들에게 지속적으로 지금의 이 사건을 기억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한듯 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여호수아는 모세와 같은 권위를 인정받게 된다. 백성들은 모세를 대하듯 여호수아를 대하게 되었다고 기록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이 사건은 홍해의 사건과 같은(유형의) 사건임을 확인하면서 하나님이 모든 백성의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그 백성이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도록 하기 위함임을 분명히 했다.

 

[정리3. 정리하면서 발견하는 자연스러운 메시지와 교훈]

 

1. 여호수아는 사건을 교육의 과정으로 연계했다.

 

여호와께서는 여호수아에게 각 지파별로 한 명씩 돌을 하나 취하여 오늘 묵을 곳에 두게하라는 명령을 여호수아에게 했다. 여호수아는 그 명령을 수행하면서 좀 더 구체적인 목적까지 부여한다. 그와 같이 하는 것은 우리의 후손들을 위함이라는 것이다. 훗날 요단 강바닥에 있어야 할 돌이 길갈이라는 곳에 쌓여있는 것을 볼 때, 색다른 저 돌들은 무엇인가? 묻는 후손들에게 요단 강의 기적을 상기 시키고, 그것은 또한 홍해 사건으로까지 이어지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여호수아는 간파한다.

 

여호수아는 위대한 지도자였다. 능력면에서 모세와 비견되는. 그리고 더불어 그는 교육적인 지도자였다. 지금 당장의 기적을 약간의 흥분이 아닌, 후대의 교훈으로 가지고 가고자 했던 지도자였다. 위대한 지도자란 당대에 위대한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의 영향력이 후대에까지 더 확대되도록 준비하는 지도자이다. 그래서 교육은 백년지계라고 했고, 교육은 향상된 미래를 준비하는 과정인 것이다.

 

우리가 참된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사건을 교훈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좋은 사건이든 나쁜 사건이든 그것을 교육의 장으로 활용해야 하는 것이다. 좋은 사건을 통해서는  그것을 지속할 수있는 시스템을 만들고, 나쁜 사건을 통해서는 재발을 방지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교육의 목적이다. 지금의 우리의 잘못과 실수가 정당화 될 수있는 유익할 이유는, 우리 다음 세대에는 이와 같은 잘못을 하지 말라는 측면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그래서 역사를 배워야한다. 속이려는 자는 역사를 감추겠지만, 바르게 인도하려고 하는 자는  역사를 들춰낸다. 잘못을 인정한다. 타인의 잘못에 대해서도 정확히 짚고 넘어가려 한다. 과거 혹은 현재의 아픔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안고 미래로 도약하기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

 

과거의 역사를 어떻게 인식하는가? 아프더라도 과거의 역사를 공개하고 들춰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미래를 위한 지도자라고 할 수 있겠다. 역사를 감추고 은폐하는 자에게 밝은 미래를 기대할 수는 없겠다.

 

  * 회개에 대해서, 반성과 성찰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에서 설명할 수 있으리라 본다.

 

2. 여호수아는 모세와 요단강 기적은 홍해의 기적으로 대조된다.

 

요단강 사건은 홍해 사건과 비견된다. 여호수아가 계속해서 모세와 비교되고 있는 것처럼. 그럴수 밖에 없을 것이다. 선임 지도자 모세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사람들은 은연중에 여호수아의 말과 행동 그리고 그의 결정과 결과들을 통해서 모세와의 끊임없는 비교를 하고 있을 것이다.

 

성경은 요단 사건을 통해서 여호수아가 완전하게 모세에서 자신에게로 백성들의 신뢰가 옮겨 왔음을 보여주고 있다.(14절) 여호수아가 처음 모세를 대신해 지도자로 부름 받았을 때, 여호수아의 고민은 바로 이와 같은 고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몇 번이나 격려해 주셨는지 모르겠다. 암튼, 여호수아는 첫 사역을 완벽하게 해냄으로서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오히려 모세보다 더 나아가 다음 세대를 위한 준비를 하는 더욱 위대한 일을 감당했다고 봐도 좋다고 본다.

 

모든 후임 지도자가 선임 지도자보다 뛰어날 수 없다. 오히려 그만 못한 경우가 더 많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된 자리라면 우리는 여호수아처럼 강하고 담대함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사람의 눈치와 평가에 연연하지 말고 자신의 해야 할 일을 해야한다. 그 결과는 하나님의 손에 있게 마련이다. 그 자리에 집착하게 되고, 사람들의 평가를 먼저 의식하게 될 때 자신을 세운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못하고, 다른 일을 하게 되고 만다. 자고로 하나님이 세워 준 지도자 혹은 백성을 통해서 세워진 지도자는 소신을 가지고 시대적 부르심을 감당하는 자여야 한다.

 

3. 이 모든 일을 두가지 목표를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 요단강을 가르신 것은 두 가지 목적을 위함이었다.

첫째, 이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홍해 사건을 통해서 이 지역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 떨었다. 바로의 손에서 건져낸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신이간에 대한 두려움을 가졌던 것처럼, 요단의 마른 땅으로 건너게 한 이들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가에 대한 다시 한번의 확인을 통해 두려움을 확증해 주신 것이다.

둘째는 이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을 항상 경외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 사건은 이 백성들의 머리 속에 대대로 박혀서 크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을 일으키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적은 늘 이 두가지를 고려한 것임을 기억하자.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크심에 놀라고, 그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여 다른 것에는 관심을 돌리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기적에 대한 체험이 부족해지고 멀어질 때, 우리는 쉽게 신앙이 약해지게 되는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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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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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서의 마지막 장이네요. 멀게만 보이던 에스라서도 이제 마지막 장에 이르게 됩니다. 에스라서의 결론과고 같은 장일텐데... 통곡하던 에스라가 어떤 행동으로 이어지게 될지 봐야 할 듯 합니다.

 

[1차. 본문 내용에 대한 정리로, 소제목으로 나누고 정리해서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도록 합니다.]

1. 에스라가 성전 앞에서 엎드려 울며 기도하며 죄를 회개할 때, 에스라를 돕는 사람들

1) 엘람 자손 중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나아옴

2) 우리가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아 범죄하였으나, 아직 이스라엘에게 소망은 잇다.

3) 하나님의 교훈과 명령을 따라 이방 여인을 다 내보내고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4) 이는 당신이 주장할 일이니 당신이 시작하면,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

2. 에스라의 본격적인 행동

1)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에게 이 말대로 행하기를 맹세하게 하매 맹세함.

2) 에스라가 엘리아십의 아들 여호하난의 방으로 들어가 거기서 죄를 근심하며 음식도 먹지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3)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모이도록 공포했다. 3일내에 모이지 않으면 재산을 적몰하고 공동체에서 쫓아내겠다고 공포함.

4) 사람들은 3일 이내에 모였고, 그 상황과 큰 비로 인해서 두려워했다.(9절)

3. 에스라의 명령

1) 이방 여인과의 관계를 끊어 버리라.

2) 회중이 큰 소리로 말씀대로 행하겠다고 말합니다.

: 많은 백성이 모인 것(심각성)과 큰 비로 두려워했다고 함.(13절)

3) 이방 여자에게 결혼한 사람은 기한 내에 모두 고을의 장로들과 재판장과 함께 오게하라.

: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에게서 떠나가게 하라.

4) 아홉째 달 20일에 모이고, 열째 달 초하루에 조사를 시작해서 첫째 달 초하루에 마침

* 이런 에스라의 공포에 반대하는 무리들도 있었다.(15절)

4. 이방 여자와 결혼한 남자들 명단

1) 제사장의 무리 중에서도 이방 여인을 아내를 맞은 자들이 있었는데, 속건제를 드림.

: 예수아 자손 중 요사닥의 아들과 그의 형제 마아세야와 엘리에셀과 야립과 그달랴.(18절)

2) 레위 자손 중에서도...

3) 노래하는 자 중에서도(성전에서 예배를 섬기는 자들 중에도)

4)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5) 이들 중에는 자녀를 낳은 사람들도 있었다. -끝-

 

[2차. 1차 정리를 토대로 자기 자신의 표현으로 재정리합니다. 내가 그 본문에 대해서 그 상황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사전 정보가 있느냐에 따라 개인별 차이가 생기겠죠?]

1. 에스라가 하나님 앞에서 다시 일어설 염치가 없고, 무력했을 때 그를 독려한 사람은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였다. 그가 에스라에게 나와서 우리가 죄를 지었으나 회개하고 새롭게 언약한다면 소망이 있다고 한 것이다. 에스라 당신이 이 일을 주도해야 할 사람이니, 당신이 시작하면 우리가 돕겠다고 하면서, 에스라를 격려한 것이다.

2. 에스라는 이들의 격려에 힘을 얻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제사장과 레위인과 이스라엘에게 이 맹세를 하도록 하기 전에 그는 여호와의 성전으로 들어가 온전한 금식을 수행했다. 그리고 힘과 용기를 얻은 후 귀환한 동포들을 3일 이내에 예루살렘으로 모이도록 명령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재산을 몰수하며 유다공동체에서 쫓아내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다.

3.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 앞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모여든 많은 인파에 오히려 놀라고 두려워했다. 더불어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큰 비를 경험하면서 뭔가 하나님의 준엄함을 느낀 것 같다. 에스라가 이들을 향해 어떤 명령을 내리기전 이들은 이미 충분히 자신들의 잘못이 무엇인지 그것을 이행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진노하실지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찼다.

4. 에스라는 이방여인과의 관계를 끊으라고 요구했고, 그것을 속히 시행하며 해당되는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에스라의 말에 그대로 순종하는데, 그 명단을 작성하는 일에만 두 달의 시간이 걸렸다. 결혼하겠다고 데려온 아내를 다시 돌려보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 중에는 아이문제까지 걸려있어 사실상 온전히 실행하기가 쉽지 않은 문제였다는 것을 본문은 마지막에 살짝 언급한다. 물론 내부적으로 반대하는 여론도 있었다. 소수이긴 했겠지만 말이다.(15절)

5. 에스라의 개혁이 어떻게 진행되고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에스라는 어쩌면 그 결과가 중요하다고 보지는 않은 것 같다. 그와 같은 시도를 했다는 것, 하나님이 이방여인과의 결혼을 싫어한다는 것 정도를 말씀하시려는 것 같다.

 

[3차. 묵상과 적용]

1. 에스라를 일으켜 세운 사람은 '스가냐'아는 사람이었다. 지도자라도 뛰어난 신앙인이라도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이를 수 있다. 오히려 에스라처럼 더 민망해서 하나님 앞에서 아무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기도 한다. 지식인이 회의주의에 빠지게 되는 이유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미리 절망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때 필요한 것은 '스가냐'같은 의지를 가지고 열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들이 돕겠다고 나오면 힘을 얻는다.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사람은 지도자다. 그러나 지도자라고 늘 생생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 많은 절망에 노출되며, 더 높은 벽에 부딪힌다. 이 때 필요한 사람은 바로 스가냐와 같은 사람들이다. 내가 너를 돕겠다고, 힘을 내시라고, 당신이 앞장 서기만 하면 내가 사람들을 이끌어서 당신의 가는 길을 지지하겠노라고...

지도자에게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은 복중에 복이다. 지도자에게 이런 사람이 없다는 것은 부족한 2%로다. 평시에는 지도자 혼자도 잘 감당할 것이다. 그러나 위기의 순간을 견디고 이기게 해주는 것은 바로 스가냐와 같은 사람이 옆에 있느냐 없느냐인 것이다.

이와 같은 순간을 위해서라도 지도자는 자기 주변에 예비 '스가냐'를 많이 키워놓아야 한다. 지혜롭다면 위기의 순간을 대비해야 한다.

 

2. 매우 중요한 순간에 하나님은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도록 '큰 비'라는 분위기를 조성해 주셨다. '큰 비'는 사람들로 하여금 에스라의 공포를 더욱 효력있는 명령으로 들리게 했다. 이로 인해 어떻게 보면 매우 무리한 요구(이미 결혼한 이방여인들을 돌려보내라는... 한 두 집도 아니고 엄청나게 만은 가정에서 아내를 돌려보내야 했을 것이다.)를 이스라엘로 큰 잡음없이 순종하게 하셨는지 모른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세운 사람을 통해 그 일을 이루어 가실 때 전면에 드러나시기 보다는 무대 셋팅을 하신다. 이것이 섭리이면서, 하나님의 계시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역사에 있어서 완전한 무대 연출가라는 것은 이런 것에서도 보게 된다.

 

3. 끊어야 한다. 죄는 끊어야 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은 끊어야 한다.

  그로 인해 얼마나 큰 손실이 있더라도 하나님은 끊으라고 한다. 가정 안에 이별이 있고, 부부간의 깨어짐과 분란, 자녀들이 엄마를 잃게 됨과 같은 많은 부작용이 당장 눈에 띄이겠지만, 하나님은 끊으라고 한다. 한 두 가정의 문제가 아니다. 전국가적인 문제로 대두될 지라도 하나님은 끊으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죄를 끊어야 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할 때, 하나님은 엄청난 것을 요구하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어떤 일,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하나님은 끊게 하신다. 그렇지 않는다면 하나님과 무관한 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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