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9-11> (정리하기)

1. (권면)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라(9절)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10절)

    (이유)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1)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11절)


(질문하고, 묵상하기)

1. (질문) 낮은 형제가 자랑할 '자신의 높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묵상) 낮은 형제란 누구인가? 일차적으로는 신분적으로 낮은 자를 말할 것입니다. 종과 노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과 노예라 할지라도 예수의 자녀가 되고 교회 안의 성도가 되면 육체적인 신분의 차이를 넘어 주 안에서 형제요 자매가 된다. 당시의 상황이 교회 안에서 주어진 이 관계가 사회에 적용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교회 안에서 높아진 자신의 위치를 잊어서도 안될 것이다. 야고보는 종과 노예의 신분에 있는 자라 할지라도 교회 안에서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형제된 성도의 신분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낮은 형제란 이차적으로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고 볼 수 있겠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 주류에 들어갈 수 없는 자들을 포함한다고 볼 수 있겠다. 이들조차 교회 안에서는 한 형제요 자매로서 인정받아야 하고, 이들이 그렇게 느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할 것이다. 가난한 사람에 대한 배려, 나그네에 대한 배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있어서 교회 안에서는 이들이 자신의 높음을 자랑할 수 있는(교만이 아니라 구성원의 한 명으로 인정되는) 공동체가 되도록 해야 한다. 

한 가지 기억할 것은 교회가 사회 선교로서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것과는 구별해서 봐야할 것이다. 여기서는 교회의 구성원 중 '낮은 형제'에 대한 권면으로 그 대상을 교회 공동체 안으로 제한해서 봐야 할 것이다. 


2. (질문) 부한 자로 하여금 겸손하라고 권면하는 것이 보통이라 할 수 있다. 그것과 자신의 낮아짐을 자랑하라는 권면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묵상) 부자를 향해서 겸손하라고 말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바르고 성숙한 '태도'에 대한 권면이다. 그러나 야고보는 그것과는 좀 다른 권면을 한다고 봐야 한다. 야고보는 부자가 부자로 지내는 시절을 '풀의 꽃'이라고 봤고, '꽃'은 계절의 변화를 따라 필 때가 있고 질 때가 있다는 측면에서 설명했다. 지금 부자라고 해서 영원히 부자인 것이 아니다. 지금 젋다고 해서 영원히 젊을 수 없듯이 '인생의 영광'이라는 것이 '영원'할수는 없는 것이다. 부의 영광도 지나가는 것이다. 

  부한 자는 현재의 부과 과거의 축적으로서의 영광만을 생각하면 어리석어진다. 미래를 봐야 하고 인생의 역사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부한 자가 낮아지고 있다면 그것은 '헛된 영광'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는 계기가 된다. 특히 교회 안에서 부한 자, 높은 자의 경우 낮은 형제와 함께 형제 자매로 지내야 하기에 그는 교회 안에서 자신이 낮아진다. 그러나 부한 자는 그와 같은 과정을 통해 더 교만해지지 않고 자신이 피조물이며 인생에 불과하다는 자기 한계를 인정하게 된다. 


[정리] 교회란 어떤 곳인가? 모든 계층과 계급의 사람들이 주 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의 관계가 되게 하는 곳이다. 낮은 자는 높은 자존감을 가지게 만들어 주고, 높은 자들은 자신의 낮음을 자랑하게 하는 곳이 바로 교회다. 오늘날의 교회가 가진 문제는 무엇인가? 낮은 자를 더 낮아지게 만들고, 높은 자를 더 높게 만들어 더 깊은 격차와 비교의식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낮은 자로 자신의 높음을 자랑할 수 있는 곳, 부한 자로 자신의 낮아짐을 기뻐할 수 있는 곳 그곳이 교회가 될 때 교회는 이 땅의 소망이 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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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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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교회 한가족예배(2015.7.26)

본문: 몬 1:16-22

제목: 종이 아니라 사랑받는 형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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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정리]


[부부와 결혼 문제에 대한 답변 형식]

1. 정식으로 자기 남편, 자기 아내를 두라.(결혼하라) 결혼은 서로에 대한 구속(4절)과 의무를 전제로 하지만, 음행을 피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라고 권면한다.

  1) 혹 분방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기도하기 위해서만 가능하다. 절제하지 못함을 사탄이 시험하지 못하게 하라. 바울은 자신과 같이 혼자 있기를 추천하지만, 누구나 그럴수는 없으니 자기 은사를 따라서 하라.


2. 가능하면 현재 있는대로 살라. 아직 결혼하지 않았거나 과부라면 굳이 결혼하려고 애쓰지 말라. 그러나 절제할 수 없다면 결혼하라. 결혼한 사람들은 나뉘기를 바라지 말라. 서로 버리거나 갈라서지 말라. 

  1) 지속적인 결혼유지보다 더 중요한 원칙은 거룩하게 되어지는가이다.(14절) 거룩하여 지는 과정에서 갈라지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하기를 원하시지 다툼속에서 그렇게 되기를 원치 않으신다.(15절) 아내들아, 네가 남편을 구원할지.. 남편들아, 네가 아내를 구원할지 누가 알겠는가?


3.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네 상황을 받아들이라.

  1) 할례자도 아무것도 아니고, 무할례자도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그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다.

  2) 네가 종일때 부름을 받았느냐? 주 안에서는 종도 자유자요, 자유자도 주 안에서 종이다. 너는 세상에서는 종일지라도 사람의 종이 되지 말라.(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4. 각각 부르심을 받은 대로 하나님과 함께 지내라.(24절. 17절, 20절)


5. 결혼이라는 문제를 생각하기 전에 임박한 환란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먼저 인식해라.

  1) 아내에게 매인 자는 놓이기를 구하지 말고, 아내에게 놓인 자는 아내를 구하지 말라. 하나님의 법 안에서 장가를 가든 안가든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장가를 간 사람에게 육신의 고난이 더 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2) 이 땅의 외형은 모두 지나가는 것이니(31절) 있는 자들은 없는 자처럼 생각하고 살아가라. 어떤 것이든 있다고 너무 즐거워할 필요도 없고, 없다고 불행해 할 필요도 없다. 

  3) 그런데 장가가고 시집간 사람들은 결국 자기 남편과 아내를 기쁘게 하기 위해 더욱 힘쓰는 것만은 사실.

  4) 결혼은 하면 잘 하는 것이고 결혼을 하지 않는다면 더 잘하는 것이다.(38절) 남편이 죽어 재혼을 해도 좋지만 바울 생각에는 그대로 있는 것이 더 좋을 수 있다.  



[생각 정리]


1. 결혼 혹은 이혼 문제가 큰 이슈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정'은 큰 고민거리 중 하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성도들은 이미 가정을 이룬 상태에서 신앙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서 이미 결혼한 가정은 신앙이 없는 남편 혹은 아내와의 관계에서 어려움이 생겼을 것이다. 그리고 결혼을 앞둔 청년들의 입장에서는 결혼할 배우자를 찾는 것이 매우 
까다로운 것이 되고 말았다. 이유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때문이었다. 

믿지 않는 남편 혹은 아내로 인해서 갈등이 발생한 사람도 적지 않았을 것이고, 신앙이 없는 사람과 결혼하지 않겠다는 청년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로 힘들어 하는 청년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신앙이 있다고 하면서, 그것과 상관없이 배우자를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바울을 무엇이라고 권면하고 있는가? 결혼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부름 받았을 때의 모습으로 살아갈 것을 권면한다. 이는 혹 결혼을 하지 못하더라도, 아니면 신앙으로 인해 남편 혹은 아내와 헤어져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너무 비참해 하지 말라는 것이다. 억지로 결혼에 매이지 말라는 것이다. 

반면에 결혼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억지로 깰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 관계 속에서 믿지 않던 배우자가 믿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박영선 목사의 말씀처럼, 텍스트를 가진 자가 어떤 컨텍스트 속에서도 텍스트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자가 되라는 것으로 이해된다. 결혼이라는 상황, 신앙으로 인해 이혼이라는 상황, 결혼할 수 없음 등과 같은 상황이 나타날 수 있지만, 그 다양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텍스트를 가진 자로서 컨텍스트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것으로 성도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으로 들린다. 


(고전 7:17)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고전 7:18-19) 『[18]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19]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2. 결혼 문제뿐 아니라 할례를 받았느냐 안받았는냐? 종이냐 자유자냐에 대한 논의도 함께 있었다.


이 논의도 마찬가지다. 바울은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서로 그리스도 안에서 타인이 될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한다. 유대인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은 이방인으로서 족하다는 것이다. 종과 자유인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할 수 있다면 자유인이 되도록 하라고 하지만, 종이라고 해서 신앙 생활에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즉 종이 되어서도 우리는 올바른 신앙 생활을 할 수 있고, 무할례자가 되어서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전혀 손색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혁명을 말하지는 않는다. 절대적 가치로서의 컨텍스트를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텍스트(복음)를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어떤 조건과 상황 속에서도 신앙생활을 하는 것에 제한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컨텍스트는 점점 나아져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컨텍스트가 완전한 시대는 오지 않는다. 


(고전 7:20)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고전 7:21-23) 『[21]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22]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고전 7:24)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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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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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23]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25]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해설]


[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23]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이 어떤 처지에 있는 자인지를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서 비유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창세기 16장과 21장에 자세히 나와있다. 두 아들 중 여종(하갈)에게서 난 아들은 이스마엘이고, 자유 있는 여자(사라)에게서 난 아들은 이삭이다. 바울은 여종에게서 난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났다'고 언급한다. 이는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난 아들이 아님을 말한다. 반면에 사라를 통해 난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았음을 설명한다. 

하갈을 통해서는 육체를 통해서, 사라(자유 있는 여자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자유'를 강조하기 위함이리라 본다.)는 약속을 통해서, 즉 육체와 약속을 대조하는 방식으로 하갈과 사라를 비교하고 있다.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25]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바울은 창세기 16장과 21장에 나온 하갈과 사라의 이야기가 하나의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사건으로 해석해 냈다. 즉,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을 상징하는 것으로 '하갈'은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로 본 것이다. 시내산은 율법을 받은 장소로, 애굽 여인 하갈을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여인으로 본 것은 하갈이 율법을 상징하는 인물이요, 그의 자손은 자유자의 자녀가 아니니 종의 자녀 즉 율법의 종의 자녀임을 상징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바울은 더 나아가 하갈을 시내 산(율법)이라고 규정하고, 지금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라고 말함으로써(25절) 현재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여전히 율법의 종 아래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정리하면 바울은 하갈은 율법을 상징하고, 율법을 받고(시내 산) 율법을 따르고 있는 지금의 예루살렘도 여전히 율법의 자손(종의 자손)이라고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물론 예루살렘을 율법의 종이라고 규정한 것은 부정적인 평가다. 왜냐하면 하갈의 자식은 '육체를 통해서' 난 자로서 '성령을 통해서' 난 것과 대조되어 설명되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약속'을 따라 아들을 낳은 사라에 대해서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라 말한다. 즉 사라를 통해서 난 자손, 약속을 따라 난 약속의 자녀들은 사라의 자녀이며 이들은 자유자의 자녀인 것이다. 이들은 지금 땅에 있는 예루살렘(율법의 종된 곳)과 대조적으로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자유의 자녀, 약속의 자녀)요 참된 예루살렘임을 밝힘으로서 율법이 아닌, 약속을 통해서 난 자들이 참된 예루살렘임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처음에는 잉태하지 못한 자(사라)로 불행해 했지만, 훗날에는 큰 복의 여인이 되었던 것처럼 자유자의 자녀(율법의 종에서 벗어난)에게 큰 복이 있게 될 것을 말한다.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지금은 성도가 마치 아이를 낳지 못한 사라처럼 자유하는 여인이었으면서도 여종에게 위축되어 있지만, 우리는 이삭과 같은 '약속의 자녀'다.


갈 3: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갈 3: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갈 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갈 3: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의 자녀인 우리가 '육체를 따라 난' 자들에게 박해를 받게 되는 것은 마치, 율법의 종인 이스마엘(하갈의 아들)이 자유 자의 아들은 이삭(사라의 아들)을 놀렸던 일(창 21:9)과 같은 것이라 해석하는 것이다. 이 또한 바울이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창 21:9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현재는 율법의 자녀가 자유자의 자녀를 놀리고 박해하지만, 바울은 그들에게는 '유업'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유자의 자녀가 아니요 여종의 아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갈이 사라의 요청으로 하갈을 아브라함의 집에서 내쫓기게 된 것을 말한다. 


바울은 지금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유대인들과 그들로 인해 흔들리고 혼란 가운데 있는 갈라디아 교회 안에 있는 성도의 상황을 하갈과 사라의 이야기로 알레고리적으로 잘 풀어서 설명했다. 알레고리 해석이 옳은 해석이냐를 떠나서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현재 예루살렘 유대인들의 입장이 무엇이고, 그들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그들의 유혹 혹은 박해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까지 하갈과 사라의 이야기로 잘 풀어서 가르쳤다. 


[묵상]


1. 바울은 예루살렘 유대인들을 까(?)고 있다. 


예루살렘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까고 있다기 보다는, 그들의 그릇된 복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들은 복음 안에서 들어설 수 없는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를 끼워 넣으려 했고, 그것을 끼워 넣어야만 '복음'이 완성될 수 있다고 믿고 가르쳤기 때문이었다. 바울이 디스하고 있는 대상은 바로 그와 같은 그릇된 복음을 믿고 전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있지만, 종의 자녀다. 하나님의 약속의 기업으로부터 배제된 자들임을 바울은 서슴없이 말한다. 

유대인들에게는 상당히 비아냥거리는 조롱으로 들렸을 것이다. 유대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지키기 위해, 선을 명확하게 해주어야 했다. 


2. 복음에 율법을 끼워넣으면 사라의 자손이지만, 하갈의 자손이 된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과 사라 가운데서 태어난 약속의 자녀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혈통적으로만 그렇지 영적인 면에서는 여전히 시내 산 율법의 자녀, 즉 하갈의 자녀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율법을 통해서 의롭게 되는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의롭게 되는 복음'이 선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려는 우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시 옛 날로 돌아가려고 한 것이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부정하거나 혹은 불완전한 것으로 보는 행위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다시 종의 자녀, 하갈의 자녀가 되어 버린 것이다. 


3.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것은 역사적 회귀를 불가능하게 한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예수를 이 땅위에 보내셨다. 즉 새로운 시대를 열기로 한 것이다. 이전 시대를 끝내고 싶으셨고, 끝낼 때가 되었다는 것을 하나님이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이전 시대로 돌아갈 이유도 없고, 돌아 가서도 안된다. 예수 이후 새로운 시대가 온 것이다. 


그런데 다시 옛 방식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들은 대표적으로 유대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역사를 되돌릴수는 없다. 일어난 일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십자가 죽으심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가 하신 사역의 결과도 마찬가지다. 


예수 이후 다시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의란 없다. 예수는 율법의 마침이 되었다. 


 롬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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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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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도서 2장은 디도가 그레데에 있는 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대상 별로 권면하고 있는 그 내용과 특징을 간략하게 정리해 본다.  대상은 늙은 남자, 늙은 여자(젊은 여자), 젊은 남자, 종. 이렇게 다섯 부류로 나누어 권면한다.

1. 신중하라.

늙은 남자들을 향해서도, 젊은 남자들을 향해서도 마지막 전체적인 권면가운데에서도 '신중하라'는 권면을 반복적으로 하고 있다. 또한 젊은 여자들에게도 신중하라는 권면으로 늙은 여자들로 하라고 하는 것으로 볼 때, 사실은 늙은 여자들은 당연히 신중해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젊은 남녀, 늙은 남녀 모두에게 신중할 것을 권면한 것이라 볼 수 있다.

NIV는 셀프 컨트롤이라고 번역했고, 다른 번역본에서는 센서블이라고 번역했다. 원어적으로는 절제하는, 사려깊은, 신중한 이란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교회 안의 모든 대상들에게 있어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 중에 하나는,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여 흥분하고 신중하지 못하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란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교회가 흥분을 조장하고, 감정을 의도적으로 증폭시켜 절제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요 비성경적인 것이다. 교회는 오히려 성도들로 하여금 감정을 가라앉히고(감정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신중히 생각하도록 그래서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곳이 되어야 한다.

충동하고, 선동하는 것처럼 교회에서 위험한 것은 없는 것이다.

2. 성도들의 행동지침의 근거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책잡힐 것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5,8,10절)

  교회의 성도들은 적극적인 면에서는 사랑과 선행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늘 그렇게 살수는 없다.(늘 이 같은 삶을 산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에너지와 희생이 따르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삶에서는 그 기준을 좀 낮추어야 한다. 그 기준이란, 책잡히지 않는 삶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 속에서 최소한 책잡히는(흠있는) 삶을 살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이것도 힘든것은 사실이지만)

   물론 모함하는 사람들과 꼬트리 잡는 사람들의 모함까지 우리가 다 빗겨 갈수는 없을 것이다.(이들은 근거없는 사실과 억지 확대해석으로 모함하는 자들이니) 그러나 이들에게 책망할 어떤 정당한 빌미를 만들어 주어서는 안될 것이다.

  다니엘이 책망 잡으려고 하는 자들에게도 책망잡힐 것이 없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귀한 귀감이 된다.(그러나 악한 자들의 모함 속에 책망잡힐 일이 만들어졌다는 것도 우리는 안다.) 그래서 거룩하고 선해야 하며, 자신의 역할(당시 사회적 한계가 있었지만)_ 심지어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는 것과 주인에게 충성해야 하는 종의 입장에 있어서도 _을 소홀히 하지 않으므로 책망받지 않도록 해야 함을 바울은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는 성경만 봐서는 안된다. 늘 주변 사람들,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과 질서도 봐야 한다. 무조건 기존의 전통과 관습을 무시해서는 그들의 비판과 책망에 빌미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종교적 열심이 너무 뛰어난 사람들에게서 이런 무모한 일들이 발생한다. 그러면서도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모른다는 것이 더 큰 문제가 된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 사회의 일반적인 상식과 관습의 기본적인 인식 위에서 지혜롭게 생활해야 한다. 그래야 비난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나라를 구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3. 젊은 여자들에 대한 권면의 방법

이것을 성경적이라고 봐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바울은 디도에게 젊은 여자들에게 대한 권면은 본인이 직접하라고 하기보다는 늙은 여자를 통해서 하도록 권면하고 있다. 이분들이 오늘날 권사로 보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권사들을 통하여 젊은 여인들을 권면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본 것 같다.

또한 목회자와 젊은 여자들의 직접적인 대면을 조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요즘같은 미혹의 시대에는 그런 이유에서라도 너무 가까운 접촉은 피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

4. 종과 가정안에서 여자의 역할에 대한 견해

바울의 서신에는 이와 같은 내용이 반복적으로 나오는데, 결혼한 여자를 향해서 남편에게 복종하도록 권면한다. 바울은 기회 있을 때마다 이런 권면을 한다. 또한 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주인에게 순종하고 종의 역할을 다하라는 것이다.

오늘날 남녀가 평등한 사회에서, 종과 노예가 없는 사회에서 이 권면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할 것인지에 대한(적어도 노예제도의 성경적 근거나 남성 상위의 성경적 근거라고 볼수는 없는 것이다) 고민이 생긴다.

난, 바울이 당시의 관습과 제도라는 상식 속에서 바울이 세상 사람들에게 책망할 것에 대한 빌미를 제공해 주지 않으면서도 그리스도의 사랑과 선행을 행할 수 있었던 것이 바울의 권면이 아니었나 싶다.

종은 더 종되도록 한 것이다. 당시의 보통 종은 신분적으로는 종이어서 겉 모습은 주인에게 순종하는 척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권면은 더 진실된 종이 되라는 권면이다. 상전에게 범사에 순종하고 더 진실되고, 더 정직한(9,10절) 종이되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아내된 여성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여성이여 해방하라는 권면으로가 아니라 더 본질적인 아내가 되라고 권면한 것이라 보인다. 남편에게 복종하라(남성 중심의 사회였으니, 기본적으로 그런 관념이 팽배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으로부터 남편을 존중하고 복종하는 아내는 흔치 않았을 것이다.)는 권면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한 것으로 생각된다.

종과 아내의 리버럴한 생각의 시작은 교회와 기독교의 가르침에서 시작되었다. 모든 사람을 형제, 자매로 부르고 대하는 평등사상, 그것은 남자와 여자라는 구분 속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교회는 당시 사회의 관습과 제도에 반하는 운동이 일어나는 곳처럼 여겨졌을 것이고, 이것을 위협적으로 보았을 것은 당연하다. 교회가 커질수록 당시 지도자들에게는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교회 내부적으로도 혼란스러웠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 교회의 지도자였던 바울은 <평등하다, 대등하다>와 같은 측면에서 성도들을 가르치거나 권면하여 그 혼란을 더 격화시키지 않았던 것 같다.(바울의 서신서를 보면) 오히려 매우 래디컬한 방식으로 권면을 한 것이다.

 

종은 참된 종이 되라.(진실하고 정직하며 성실하여 주인의 말에 복종하는 종)

아내는 참된 아내가 되라.(마치 남편에게 종속된 자처럼 남편의 말에는 순종하고, 가정의 일을 잘 돌보는 자가 되라)

주인은 참된 주인이 되라.(종을 인격적인 존재로 대우하고, 형제처럼 따듯하게 대해주라.)

남편은 참된 남편이 되라.(아내된 여인을 사랑하되, 목숨을 걸고라도 책임져주는 남편이 되라)

 

바울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만 세상 사람들로부터 교회가 책망받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평등적(인격적) 가치관의 나라가 형성될 것이라고 본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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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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