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splash-logoSandy Millar

Photo by Sandy Millar on Unsplash

[성경본문 정리]

31절.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32절.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33절.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34절.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35절.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성경내용 정리]

1. 예수님은 집에 계셨고, 무리들은 예수님을 찾아와 식사할 겨를도 없을 정도였다.(3:20) 예수의 친족들도 그 곳을 찾았고(3:21),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도 예수를 찾았다.(3:31)

2. 사람이 많아 집에 들어올 수 없었던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을 대신해서 사람들은 예수님께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는다'는 사실을 예수님께 전한다.

3.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의외다. 지금 밖에서 당신을 찾고있는 사람들이 내 어머니와 동생들이 아니라 여기에 둘러 앉은 자들이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고 말씀하셨다. 


[질문하기]

1. 예수님은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을 무리 앞에서 부정하신 것인가?(무시하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어머니를 제자 중 한 사람에게 의탁하신 것이나 부모를 공경해야 함을 소중히 여기셨던 태도를 생각할 때 어머니와 형제들을 부정하거나 무시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이런 상황(기회)을 통해서 혈육을 중심으로 한 가족에서 완전히 새로운 가족의 관계를 말씀하시고자 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라 봐야한다. 

2. 예수님의 백성으로서 새로운 가족의 형태는 무엇인가?(혈연인가?)

  예수님을 따르는 백성들에게 가족은 혈연의 육체적 관계를 넘어서 이어지게 된다.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그 뜻을 행하고자 하는 자들이 새로운 가족 관계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이루게 될 새로운 나라의 백성이며, 하나님을 부모로 모시는 새로운 가족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새로운 관계, 새로운 가족 속으로 들어가는 행위가 된다. 


[묵상하기]

우리가 교회 안에서 형제, 자매라고 부르는 것은 단순히 남녀를 구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개념이 근저에 있는 것이다. 당신은 여자 성도, 당신은 남자 성도를 말하는 것이 자매와 형제가 아니라 당신은 나의 형제, 나의 자매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로 한 새로운 백성이며 새로운 가족이다. 

복음의 시작으로서 예수는 이 땅에 새로운 나라와 질서를 가져온다. 그리고 그 나라의 질서를 따르는 사람들간의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그것은 가족이다. 혈연의 가족을 넘어 믿음의 가족, 영적 가족 관계를 만든다. 

성도인 우리는 이 땅에 있으면서 두 영역의 가족과 연관되게 된다. 육체적 관계로 이루어진 가족 관계는 혈연 가족의 폐쇄적 테두리 안에 머물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 반면 영적 관계로 이루어진 가족은 실제적인 가족처럼 마음을 다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와 자매요 어머니다'라는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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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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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23]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25]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해설]


[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23]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이 어떤 처지에 있는 자인지를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서 비유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창세기 16장과 21장에 자세히 나와있다. 두 아들 중 여종(하갈)에게서 난 아들은 이스마엘이고, 자유 있는 여자(사라)에게서 난 아들은 이삭이다. 바울은 여종에게서 난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났다'고 언급한다. 이는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난 아들이 아님을 말한다. 반면에 사라를 통해 난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았음을 설명한다. 

하갈을 통해서는 육체를 통해서, 사라(자유 있는 여자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자유'를 강조하기 위함이리라 본다.)는 약속을 통해서, 즉 육체와 약속을 대조하는 방식으로 하갈과 사라를 비교하고 있다.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25]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바울은 창세기 16장과 21장에 나온 하갈과 사라의 이야기가 하나의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사건으로 해석해 냈다. 즉,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을 상징하는 것으로 '하갈'은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로 본 것이다. 시내산은 율법을 받은 장소로, 애굽 여인 하갈을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여인으로 본 것은 하갈이 율법을 상징하는 인물이요, 그의 자손은 자유자의 자녀가 아니니 종의 자녀 즉 율법의 종의 자녀임을 상징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바울은 더 나아가 하갈을 시내 산(율법)이라고 규정하고, 지금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라고 말함으로써(25절) 현재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여전히 율법의 종 아래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정리하면 바울은 하갈은 율법을 상징하고, 율법을 받고(시내 산) 율법을 따르고 있는 지금의 예루살렘도 여전히 율법의 자손(종의 자손)이라고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물론 예루살렘을 율법의 종이라고 규정한 것은 부정적인 평가다. 왜냐하면 하갈의 자식은 '육체를 통해서' 난 자로서 '성령을 통해서' 난 것과 대조되어 설명되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약속'을 따라 아들을 낳은 사라에 대해서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라 말한다. 즉 사라를 통해서 난 자손, 약속을 따라 난 약속의 자녀들은 사라의 자녀이며 이들은 자유자의 자녀인 것이다. 이들은 지금 땅에 있는 예루살렘(율법의 종된 곳)과 대조적으로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자유의 자녀, 약속의 자녀)요 참된 예루살렘임을 밝힘으로서 율법이 아닌, 약속을 통해서 난 자들이 참된 예루살렘임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처음에는 잉태하지 못한 자(사라)로 불행해 했지만, 훗날에는 큰 복의 여인이 되었던 것처럼 자유자의 자녀(율법의 종에서 벗어난)에게 큰 복이 있게 될 것을 말한다.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지금은 성도가 마치 아이를 낳지 못한 사라처럼 자유하는 여인이었으면서도 여종에게 위축되어 있지만, 우리는 이삭과 같은 '약속의 자녀'다.


갈 3: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갈 3: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갈 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갈 3: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의 자녀인 우리가 '육체를 따라 난' 자들에게 박해를 받게 되는 것은 마치, 율법의 종인 이스마엘(하갈의 아들)이 자유 자의 아들은 이삭(사라의 아들)을 놀렸던 일(창 21:9)과 같은 것이라 해석하는 것이다. 이 또한 바울이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창 21:9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현재는 율법의 자녀가 자유자의 자녀를 놀리고 박해하지만, 바울은 그들에게는 '유업'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유자의 자녀가 아니요 여종의 아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갈이 사라의 요청으로 하갈을 아브라함의 집에서 내쫓기게 된 것을 말한다. 


바울은 지금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유대인들과 그들로 인해 흔들리고 혼란 가운데 있는 갈라디아 교회 안에 있는 성도의 상황을 하갈과 사라의 이야기로 알레고리적으로 잘 풀어서 설명했다. 알레고리 해석이 옳은 해석이냐를 떠나서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현재 예루살렘 유대인들의 입장이 무엇이고, 그들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그들의 유혹 혹은 박해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까지 하갈과 사라의 이야기로 잘 풀어서 가르쳤다. 


[묵상]


1. 바울은 예루살렘 유대인들을 까(?)고 있다. 


예루살렘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까고 있다기 보다는, 그들의 그릇된 복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들은 복음 안에서 들어설 수 없는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를 끼워 넣으려 했고, 그것을 끼워 넣어야만 '복음'이 완성될 수 있다고 믿고 가르쳤기 때문이었다. 바울이 디스하고 있는 대상은 바로 그와 같은 그릇된 복음을 믿고 전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있지만, 종의 자녀다. 하나님의 약속의 기업으로부터 배제된 자들임을 바울은 서슴없이 말한다. 

유대인들에게는 상당히 비아냥거리는 조롱으로 들렸을 것이다. 유대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지키기 위해, 선을 명확하게 해주어야 했다. 


2. 복음에 율법을 끼워넣으면 사라의 자손이지만, 하갈의 자손이 된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과 사라 가운데서 태어난 약속의 자녀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혈통적으로만 그렇지 영적인 면에서는 여전히 시내 산 율법의 자녀, 즉 하갈의 자녀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율법을 통해서 의롭게 되는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의롭게 되는 복음'이 선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려는 우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시 옛 날로 돌아가려고 한 것이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부정하거나 혹은 불완전한 것으로 보는 행위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다시 종의 자녀, 하갈의 자녀가 되어 버린 것이다. 


3.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것은 역사적 회귀를 불가능하게 한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예수를 이 땅위에 보내셨다. 즉 새로운 시대를 열기로 한 것이다. 이전 시대를 끝내고 싶으셨고, 끝낼 때가 되었다는 것을 하나님이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이전 시대로 돌아갈 이유도 없고, 돌아 가서도 안된다. 예수 이후 새로운 시대가 온 것이다. 


그런데 다시 옛 방식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들은 대표적으로 유대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역사를 되돌릴수는 없다. 일어난 일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십자가 죽으심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가 하신 사역의 결과도 마찬가지다. 


예수 이후 다시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의란 없다. 예수는 율법의 마침이 되었다. 


 롬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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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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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어머님께

어머님, 먼저 칠순을 맞으신 거 진심으로 축하드리고 또한 감사드려요.

어릴 적에 제 나이가 40이란 숫자를 훌쩍 넘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처럼, 어머님의 연세가 70을 넘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습니다. 제 마음 속 어머님은 언제나 마흔 아홉인데 말이지요.

제가 아이 둘을 키워보니 보람 있을 때도 많지만, 서운할 때도 엄청 많더라고요. 맛있는 음식 있을 때, 저희 부모에게 드시어 보라는 말도 없이 두 녀석이 다 먹어버리면 서운하고, 적어도 부모 생일이나 어버이날에는 좀 챙길 줄 알았는데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거나 형식적으로 선물하는 것을 보면 또한 서운하더라고요. 어떻게 키웠는데 하는 본전 생각도 나구요. 애정이 큰 만큼 서운함도 크다는 생각을 합니다. 얼마 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로 아이들에게 크게 혼내고 훈계한 적이 있었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제가 저희 아이들만 했을 때, 죄송하게도 부모님을 생각하고 배려하고 챙겨드렸던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는 참으로 혼자 무안해 했었습니다. 딸 하나 없는 아들 삼형제를 키우시면서 어머님은 여자로서 누려야 할 어떤 것도 저희 아들들에게 받지 못하셨던 것같습니다. 같이 옷을 사러 간적도 없고, 장을 보기 위해서 여유롭게 시장 구석구석을 함께 다녀본 적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깜짝 놀랄만한 선물을 준비해드린 적도 없었구요. 그렇다고 살갑게 어머님을 안아드리거나 팔짱을 끼거나 하지 못 했던것 같습니다. 그저 바쁘시고 일상에 피곤하신 어머님을 위해서 저희가 했던 것은 설거지를 하고, 이불을 깔고, 간단한 청소 정도 형제들이 나누어서 했던 것 밖에는 기억이 없네요.

어릴 적 아버님과 어머님은 결혼기념일이 언제냐고 여쭈어 보시면, 잊어버리셨다고 하시곤 했지요. 저희 형제들은 그게 정말인지 알고 우리 자신이 결혼을 하기 전까지 한 번도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을 챙겨드린 적이 없었지요. 저희 삼형제가 다 결혼하고 나서 생활이 어느 정도 여유가 있으실 때, 결혼기념일이 언제라는 것을 알려주셨을 때에야 어릴 적 저희들에게 잊어버렸다고 하신 말씀이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답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부끄러운 일들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무심한 아들이었음을 이제 와서 깨닫고 자책하게 되나 봅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종종 엄마가 보고 싶습니다. 저희 아이들이 엄마의 품을 찾아 갈 때, 저도 등촌동에 계신 어머님의 품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도 마음뿐일 때가 대부분입니다.

어쩌다 어머님을 위로해 드리고 기쁘게 해드리려고 찾아가면 기쁨을 얻는 것은 언제나 제 자신이었습니다. 저와 저희 가정이 도착하기 전에 미리 챙겨주시려고 한 아름 쌓아 놓은 것들과 더 줄 것을 잊었다고 몇 번이고 냉장고를 뒤지시는 어머님의 분주함 때문에 사실은 손 한번 제대로 잡지도 못하고 돌아와 버리곤 합니다.

나이가 들어 제가 어른이 되면,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아드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어머님, 아버님의 은혜는 갈수록 커져만 가고 저와 저희들은 여전히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어머님 아버님 연세가 있으시니 종종 어머님 없는 세상, 아버님 없는 세상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머리를 흔들어 그 생각을 지워버리곤 합니다. 왜냐하면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흔을 넘어 오십을 향해 가는 어른임에도 불구하고, 기둥 같고 그늘 같은 아버님 어머님의 부재를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어린 아이처럼 두렵고 막막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어머님 아버님의 존재가 지금 우리 형제들과 자녀들에게 얼마나 큰지를 새삼 발견하게 됩니다. 저희 형제들은 가까이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경험하지 못하고 컸기에 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지냈던 친구들이 부러웠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저희의 아들, 딸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랑을 가까이에서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어머님 아버님, 저와 저희 삼형제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으로 자라가는 저희 손자 손녀를 위해서라도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아계셔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지금 저희 자녀들에게 이것보다 더 큰 복과 기도제목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머님, 저희 삼형제를 이렇게 반듯하게 건강하게 잘 키워 주신 거 다시 한 번 감사드려요.

편지를 접으려 하니, 두 가지 생각이 나네요. 하나는 제가 주일에 교회 예배에 빠질 수 없어서 고3 담임선생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할 때, 학교까지 찾아와 주셔서 제 편을 들어주신 거, 두고두고 감사드립니다. 저는 그 덕에 어린나이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순간에 신앙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또 하나는 제가 학사 장교가 되기 위해 경상북도 영천에서 훈련받을 때, 훈련 중에 가족들이 방문하여 면회하러 오는 날 장사하시는 거 때문에 오실 거라 기대하지 않았는데, 못 오는 마음을 편지로 대신 보내주신 거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저는 어머님께 신앙과 사랑의 큰 빚을 졌습니다.

2012년 5월22일

존경하는 어머님과 아버님께 둘째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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