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2:14-26>

(정리하기) (질문하기) (묵상하기)

1. (설명)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는가.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는가?(14절)

(예시)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15절)

너희 중에 (말만 하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16절)

  - 그에게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말만하고

  -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원리)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17절)


(정리) 신자라고 하면서 말만 하고 실질적인 행동이 없으면 그것을 어떻게 참된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말이 안된다. 그런 믿음은 없다. 

(질문) 여기서 말하는 행함이 없는 믿음과 행위가 아닌 것으로의 믿음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묵상) 야고보가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말만 앞서고, 행함이 없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상식적인 측면에서 모든 종교나 도덕이 마찬가지다. 행함이 없는 종교나 도덕은 죽은 것이다. 야고보는 그런 측면에서 <행함없는 믿음/신앙>에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다. 

바울이 구원의 방법으로서 말한 오직 믿음은 우리 인간에게 구원의 조건이 없다는 측면에서의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리하면 야고보의 문제제기가 일반 종교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문제라고 볼 수 있지만, 바울이 말하는 <행위가 아닌 믿음>의 문제는 일반 종교와는 차별되는 구원의 방법을 말하는 것이다.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은 신앙이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을듯 하다. 참된 신앙이란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수반되고 희생이 수반되는 것이어야 한다. 평안을 잃고, 춥고 배고픈 사람들을 만나거든 그들을 평안하게 해주고 따듯하게 해주고 먹을 것을 나눌 수 있어야 참된 신앙인이라 말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이런 요소는 잊고 간과한채 구원의 방법으로서만 <행위 아닌 믿음>을 주장하니 초점도 못 맞춘 것일 뿐더러 오히려 말만 하는 종교인으로 비판을 받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2. (설명)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18절)

(첨언)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그러나)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19절)

  (원리)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20절)


(정리) 신앙은 행위로 증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말과 지식은 귀신들도 하는 것이다. 말만 하는, 행위가 없는 신앙은 헛된 것이다. 

(질문) 야고보는 믿음을 보이는 문제를 지적한다. 믿음은 보여야 하는 것인가? 

(묵상)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행위없는 구원의 방법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인간편에서 근거도 없는 것이고 보이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보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고보가 '믿음은 보여야 한다'는 취지로 말할 때 그 믿음은 바울의 것과 다른 것이다. 야고보는 믿음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지만, '신앙'이라는 의미를 생각하면 더 적절하다고 보인다. 신앙이 있다는 것은 신앙이 없다는 것과는 다른 구별이 존재한다.(자기 희생, 이웃 사랑의 가시적인 형태)

 

(예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 아니냐?

-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21절)

(원리)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다.(22절)

(말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의 의미이다.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다.(23절)

(결론)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다.(24절)

  (예시)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원리)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정리) 아브라함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믿음이란 그 행함으로 온전해 지는 것이다. 기생 라합도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영혼 없는 몸처럼 죽은 것과 다름없다. 

(질문)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자신의 믿음을 온전하게 보였다는 주장을 함으로 아브라함의 의롭게 됨이 아브라함의 행위를 통한 믿음으로 말미암음이라고 주장 했다. 이것은 바울의 주장과 비교할 때 어떤가? 

(묵상) 야고보는 여전히 믿음에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이어가고 있고 그 주장의 예로서 자신의 아들을 하나님께 바침으로서 자신의 믿음을 보인 아브라함을 들고 있다. 신앙이란 자신의 희생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행위로서 자신의 희생을 감수할 수 없는 신앙을 참 신앙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기생 라합도 목숨을 걸고 정탐꾼을 살려준 것이다. 믿음은 자신을 희생하는 행위를 따르게 된다. 이런 맥락이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믿음과 초점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롬 4장. 행위가 아닌 은혜로서의 믿음, 약속을 바라는 믿음)


[최종정리]

1. 행함이 없는 믿음(신앙)은 헛것이다.(17절, 20절, 26절)

2. 아브라함도 아들의 목숨을 드리려 했고, 라합도 자신의 생명을 걸었다.

3. 신앙인이 말만 하고 자기 희생이 없는 것은 죽은 신앙과 다름없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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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해설]


[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해설] 아브라함의 의롭게 인정됨이 어떤 행위와 율법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의' 여기셨다(창 15:6)의 말씀을 근거한 내용이다. 따라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자들>은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이는 아브라함이 유대인의 조상(할례자의 조상)이면서 동시에 이방인(비할례자, 아브라함은 비할례시에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 받았기에)의 조상이 되기도 한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롬 4장에서도 바울이 잘 설명하고 있으니 참고하라.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해설] 아브라함이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다.(창 18:18)라는 말씀을 근거로 바울은 이방인들도 아브라함을 통해서 복을 받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이 이미 미리 정하신 것이라 본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복이 유대인에게 뿐 아니라,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된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함을 말씀하고 있다. 


  6-9절을 정리하면, 이방인도 유대인과 같이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복을 유대인과 함께 누릴 백성임을 말한다.  바울은 계속해서 믿음으로 의를 얻은 자들이 같은 백성(아브라함의 자손)이며 같은 복을 누리게 됨을 강조한다.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해설] 바울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했는지는 잘 모른다고 하지라도, 큰 맥락에서 의미는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 중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되어 있는 율법을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율법의 행위를 통해 의를 이루기 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결국 저주 아래에 놓인 존재라는 것이다.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해설] 10,11절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결론적으로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의인은 율법으로 말미암음이 아니고(말미암을 수 없고), 믿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믿음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의 '믿음'이란, 믿는 행위라기 보다는 율법적 자기 의가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하나님의 의, 즉 은혜로서의 의를 말한다.)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는 말은, 율법의 방법론(자기 의)과 믿음의 방법론(하나님의 의)이 서로 연관되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듯 하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에 율법이라는 것이 것이 작은 것 하나라도 끼어들어올 수 없음을 말한다 보인다. // 율법을 행하고자 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아야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삶 안으로 율법을 끌어들여 와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 같다.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해설] 우리는 율법으로는(율법의 방법으로 의롭게 되고자 하는 것으로는) 저주에 이를 수 밖에 없는 자이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나무에 달려 저주를 당하심으로 우리를 속량하셨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인데(또 우리가 믿는 바인데), 왜 이렇게 행하셨는가 하면 


  1. 사람들을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했다.

  2.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려 한 것이고(십자가 사건이 6-9절의 내용에 근거 제공)

  3.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율법의 저주 아래 있던 자들을 저주에서 속량하고,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도 미치게 했다. 그리고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셨다. 



[오늘 본문 정리]

1.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 받은 것처럼,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받는 자는 이방인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2. 따라서 이방인도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복을 얻을 자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율법을 의지하는 모든 자를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다. 

4. 이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다시 율법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에 미치고,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하신다.  



[묵상]


기독교 초기 이방인 선교에 있어서 핵심적인 장애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이 유대인에게 한해서 인가 아니면 이방인에게도 흘러가는 복이었던가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구약적 선민의식과 맞물려 유대인에게만 제한된 것으로 믿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초기에는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으로 교회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견해에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은 없었을 것이다.(이미 이들은 '할례'를 받았고, 유대인으로서 율법의 절기를 지키는 것이 <의롭게 되기 위해> 뭔가 추가되는 어떤 요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인의 테두리를 넘어 이방인으로 흘러가고 그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복음 가운데 나아올 때 그 때 문제는 불거지게 된 것이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해하는 바울의 입장에서는 본래적 복음(유대인들에게는 당연하게 여겨졌던 할례와 절기와 같은 의식적 요구가 빠진)만 전하면 될 문제였다. 그러나 유대인으로 태어나 유대인으로 살다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유대 사도들의 입장에서는 (혹은 당시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서는) 순수한 복음의 내용과 기존의 문화와 가치관이 함께 섞여 있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것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나 복음이 이방인에게 넘어가면서 순수한 복음과 문화/가치관이 분리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 안에 할례와 절기를 지키는 것까지 같이 들어와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과 유대인 사도들(그리스도인들) 간에 갈등이 있었던 것같다. 그런 문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성경이 바로 갈라디아서가 아닌가 싶다. 이방인들에게 순수한 복음을 전한 바울, 그 이후 유대 문화와 가치관이 섞인 복음(다른 복음: 유대인들에게는 별로 해롭지 않았지만, 이방인들에게는 복음을 왜곡하는 결과를 낳게되는 치명적 해로움이 된 복음 )이 들어오자 갈라디아 교회는 큰 병을 앓고 말았다. 이를 고치기 위해서 바울은 유대의 사도들(혹은 그리스도인들)과 복음의 순수한 내용을 가지고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그 덕분에 순수한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는 은혜를 얻게 된 것이다.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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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개관02-창세기1(아브라함, 이삭)

2013년 7월 17일(서울남지부 방중모임)



2성경 읽기를 위한 성경개관_남지부_족장이야기.pdf


강의1(20분)


강의2(20분)



강의3(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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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개관1. 아브라함의 생애 개략


창12장. 예상치 못한 일을 만났지만...

창 13장. 아브라함에게 약속은 이어짐

창 14장.생존과 풍요의 문제 해결

창 15장. 아브람의 몸에 서 난 자라야.

우르->하란->가나안(75세)


[약속] 큰 민족, 네 이름, 복의 근원


1. 가나안 사람들이 이미 거주

2. 제사 지냄(벧엘:여호와의 이름 부름)

3. 기근

4. 애굽으로 이주(두려움/자신의 노력)

5. 하나님의 구원

 1) 아내가 무사히 돌아옴

 2) 많은 재산을 얻어서 돌아옴

* 롯도 함께 옴

애굽-> 네게브-> 벧엘(제단/여호와)


1. 갈등: 아브람과 롯의 목자들 사이의 갈등(가나안, 브리스 사람도 포함)

2. 이전보다 많은 재산과 가축으로 인한 갈등이 발생

3. 롯은 요단(소돔, 고모라)_죄악이 큼

4. 아브람: 가나안

 - 보이는 모든 땅을 주리라.

    자손이 많을 것이다

5. 헤브론(제단을 쌓음)

1. 소돔이 전쟁에 휩싸임

2. 롯과 그 가족이 포로로 잡혀감

3. 아브람이 318명과 함께 구하러 감


4. 승리하고 돌아올 때, 소돔 왕이 영접

5.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

 1)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제사장

 2) 아브람을 하나님의 이름을 축복함

 3) 아브람은 십일조를 바침


6. 소돔 왕이 재물을 주려 했으나, 아브람은 거절함(소돔왕으로 치부했다 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

[후손문제]

1. 아브람이 자식이 없으니 집에서 길리운자를 상속자로 삼으려 함

2. 하나님은 네 몸에서 날자가 네 상속자라고 말씀하심.

 1) 하늘의 뭇 별을 보라.

 2)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갈대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다.


3. 아브람: 무엇으로 알리이까?

4.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우심

 1) 400년 동안 이방에서 객이 될 것

 2) 큰 재물을 가지고 돌아올 것

 3) 아직 아모리의 죄가 차지 않음.

창 16장. [후손문제: 하갈, 이스마엘]

창 17장. [언약, 할례, 후손 약속]

창 18장. 소돔의 심판/아브라함의 중보

창 19장.소돔의 심판 속에서 구원

1. 아브람: 사래가 하갈을 통해 자식을 낳도록 요청함

2. 하갈이 임신하자 사래를 무시함

3. 사래가 아브람의 허락을 받고 사래를 괴롭힘

4. 하갈이 도망침

5. 하나님께서 하갈을 설득하여 사래에게 돌아가라고 하심

 - 하갈이 아들을 낳고, 그 이스마엘을 하나님이 살필 것이다.

1. 하나님의 약속

 1) 상호 언약이 있으니, 아브람이 여러 민족의 아비가 될 것(아브라함)

 2) 너와 네 후손과 맺은 영원한 언약

 3) 가나안은 너와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될 것이다.


2. 너는 언약을 지키라

 1) 할례를 받으라.

 2) 남자는 누구나 8일만에 할례하라.

 3) 아브라함은 99세에 할례를 함


3. 사래에게 주시는 말씀

 1) 복을 주어 여러 민족의 어미가 됨

 2) 사라가 네 아들을 낳아 줄 것이다.

 3) 그 아들 이삭과도 영원한 언약이 됨

* 창 3:20 모든 산자의 어미(하와)

1. 아브라함이 나그네(천사)를 영접

2. 극진히 천사를 대접함. 그들이 내년에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을 알려주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2. 하나님이 소돔의 죄악을 파악하기 위해서 천사를 그리로 보내심


3. 아브라함의 중보

 1)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겠습니까? (중보)

1. 롯은 나그네(천사)를 영접함

2. 소돔 백성들은 오히려 악을 행함

3. 롯의 제안도 받아들이지 않는 소돔의 사람들(딸을 대신하려 함)

4. 여호와께서 롯과 두 딸을 심판에서 구원하시는데 도움을 주심

5.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을 비처럼 내리심

6. 롯의 아내는 소금기둥이 됨

7. 심판 중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구원하셨다고 기록함(29절/중보)

8. 두 딸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모암과 압몬 사람들이 시작되게 됨.

창 20장.

창 21장. 이삭의 탄생/ 이스마엘 보냄

창 22장. 이삭을 바친 사건(결정적)

창 23장.

1. 아브라함이 그랄 땅에 거주할 때 이야기

2.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함

3. 그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이름

4. 아비멜렉: 주여 은혜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5. 하나님: 아브라함은 선지자다. 그가 널 위해 기도하리라.(중보)

6. 아브라함이 기도하매 아비멜렉과 아내와 여종을 치유해서 태의 문을 여심.

1. 이삭이 태어남(아브라함 100세)

2. 이스마엘이 아브라함 집에서 쫓겨남

 1) 이스마엘도 큰 민족이 될것을 약속

 2) 그러나 이삭에게서 난 자만이 하나님의 씨라 인정됨

3. 브엘세바에서 아비멜렉과 아브라함이 언약체결(우물을 사다)

4. 여호와의 이름을 부름

1.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려고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심.

2. 아브라함은 독자를 드림까지 순종하여 드리려 하자 하나님은 이것을 보시고 하나님 경외하는 줄 안다고 하심.

3. 숫양으로 번제 드림

4. 네 아들 독자라도 아끼지 아니했으니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별, 모래같이 될 것이다.

5. 네 씨가 대적의 문을 취하리라.

6.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7. 네가 나의 말을 준행했기 때문이다.


*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것에 비해, 아브라함은 순종했다.

1. 사라가 죽자 아브라함은 매장지를 찾음(127세의 나이)

2.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땅과 매장지를 구입함.

3. 그 땅이 아브라함의 소유로 확정됨.


<핵심 포인트>

12-14장: 아브라함이 생각지 못한 일을 경험하지만, 그래도 정착하고 풍성해지며 자신을 지킬 정도의 힘을 가짐

15- 21장: 후손에 대한 문제 / 언약 / 언약을 대상과 그렇지 않은 자(혈통이 아닌 약속) /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서 만.

               중보자로서의 아브라함(소돔에 대해서_18장/ 그랄 왕 아비멜렉에 대해서_20장)

22-23장: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아들 이삭을 바치는 순종을 통해 확인) / 그를 통한 만민이 복을 받음 /

  작은 매장지를 소유함으로 약속에 대한 작은 징표를 가짐.


전체적으로 제단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뜬금없이 멜기세덱(제사장)이 등장하고 십일조를 드리는 장면이 나온다.(이 당시에는 아직 이스라엘에게 십일조의 율법도 없었고, 제사장도 없었다.) 아브라함을 선지자와 중보자로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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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새벽예배 마치고 바로 제기동으로 출근했습니다. 회관도 세상도 조용합니다. 어디서 기타소리와 함께 기도하는 소리가 들리긴 하는데... 이 아침부터 어디서 나는 걸까요??

 

[정리1. 내용의 정리_어떻게 보면 본문을 다시 쓰는 것 같은데.. 쓰다보면 내용도 좀 더 정확하게 파악하게 되고, 문단을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1. 이스라엘 왕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에 대해서
  1)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17년간 다스림.
  2)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함. 여로보암의 죄를 따름.
  3) 여호와께서 노하사 아람 왕 하사엘의 손과 그의 아들 벤하닷의 손에 넘기심
  4)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학대하니 이스라엘 왕이 여호와께 간구하니 하나님께서 들으셔서 구원자를 보내주심으로 아람의 손에서 벗어나 전과 같이 자기 장막에 거하게 하였다.
  5) 그러나 그들이 여로보암 집의 죄에서 떠나지 않고 사마리아에 아세라 목상을 그냥 두었다.
  6) 아람의 왕이 여호아하스의 백성을 멸절하고 병력을 약화시켰다.
  7) 여호아하스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사마리아에 장사되고 그 아들 요아스가 왕이 됨.

 

2. 이스라엘 왕 요아스에 대해서
  1) 요아스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16년간 다스렸다.
  2)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고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여로보암의 모든 죄를 떠나지 않고 그 가운데 행함.
  3) 요아스에 대한 이야기는 역대지략에 나오고, 그가 사마리아에 장사되고 여로보암이 왕이 됨.

 

3. 이스라엘 왕 요아스 때에 있었던 한 사건(엘리사의 죽음)
  1) 엘리사가 죽을 병이 들매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찾아와 슬퍼하였다.
  2) 엘리사는 요아스에게 활과 화살을 가져오도록 요청했다.
  3) 엘리사는 왕에게 활을 잡고 동쪽 창을 열도록 하고 그곳으로 쏘도록 했다. 왕이 활을 쏘자 엘리사는 이는 구원의 화살 곧 아람에 대한 구원의 화살이니 아람을 멸절하도록 칠 것이다.
  4) 엘리사는 왕에게 화살을 잡으라고 하고, 땅을 치라고 했다.
  5) 왕은 세 번만 치고 그쳤고, 엘리사는 왕에게 왜 세 번만 쳤냐고 화를 냈고, 대여섯번을 쳤다면 왕이 아람을 진멸하기까지 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6) 엘리사가 죽고 다음 해에 모압 도적 뗴들이 그 땅에 왔다. 그 땅에서 장사지내던 사람들이 도적 떼를 보고는 급한 나머지 엘리사의 묘실에 들이던졌는데, 그 시신이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난 일이 있었다.

 

  [여호아하스왕과 요아스 왕의 추가적인 이야기]
  1) 여호아하스 왕 때에 아람 왕 하사엘이 항상 이스라엘을 학대했으나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풀며 불쌍히 여기셨다. 멸하기를 즐겨하시지 아니하시고 이 때까지 자기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다.
  2) 아람에 하사엘이 죽고 벤하닷이 왕이 되자, 요아스 왕이 벤하닷의 손에서 성읍을 다시 빼앗았다. (부친 여호아하스가 빼앗긴 성읍을) 요아스가 벤하닷을 세 번 쳐서 무찌르고 회복했다.

 

[정리2. 내용을 재구성해서 씁니다. 순서대로라기 보다는 일목요연하게, 내 표현으로 다시 쓴다고 하는 것이 맞겠지요]

 

본 장은 이스라엘 왕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와 그의 아들 요아스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호아하스는 17년간 이스라엘을 통치했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보시기에 악을 행했고, 여로보암 집의 죄에서 떠나지 못하고 죄악 중에 있었다. 그가 다스리던 때에 아람과의 전쟁이 계속 있었고, 그 때 여러 성읍을 빼앗기고 백성들은 고통을 받았다. 국력은 매우 약화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성경은 여호아하스는 범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세운 언약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풀고 풀쌍히 여기셨다는 것을 언급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은 여기서 명을 다했을 수 있을 만큼 나라는 위태로웠다.(23절)


여호아하스를 이어 그의 아들 요아스가 왕이 되었으나,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의 아버지의 평가보다 낫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대에는 아람과의 전쟁을 세 번을 이김으로 인해 여호아하스 때에 빼앗긴 성읍을 다시 회복하는 성과가 있었다. 이것은 요아스 때에 병으로 죽은 엘리사의 예언대로 이루어진 성취이다.


요아스 왕은 엘리사가 죽음에 임박하자 그를 찾아 애통해 했다. 엘리사는 요아스 왕에게 활과 화살을 잡게하고는 동쪽으로 구원의 활을 쏘개하고, 화살을 바닥에 치게 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요아스는 3번 밖에는 치지 않았다. 엘리사는 노하였고 안타까워했다. 왜냐하면 대여섯번을 쳤다면 아람을 완전히 이길 수 있었을 것인데 3번 밖에는 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요아스 왕은 활을 땅에 친다는 것이 무엇을 의지하는지 알수 없었기 때문이었겠지만 그것은 어떻게 보면 요아스 왕의 한계이기도 했던 것이다. 암튼, 엘리사와 관련된 그 사건은 하나의 예언이 되었고, 그 예언대로 요아스 때에 이스라엘은 아람과의 전쟁을 이기면서 잃었던 성읍을 되찾았다.

 

 

[정리3. 묵상과 적용]

 

1. 가계에 흐르는 저주는 몰라도 가계의 흐르는 축복은 확실하다.

 

오늘은 이스라엘의 왕 중 두 왕, 여호아하스와 요아스 왕에 대한 이야기다. 특히할만한 것은 여호아하스 왕은 악하고 무력한 왕이었다. 그는 여호와보시기에 악을 행했고 여로보암의 집의 죄악에서 떠나지 못했다. 고통속에서 부르짖을 때 하나님의 구원이 임했음에도 그는 다시 악을 행하는 자리로 나아갔다.(5,6절) 게다가 그는 무능했다. 아람의 전쟁에서 완전히 패배하여 많은 성읍을 빼앗겼다.

 

그런데 열왕기 기자는 여호아하스를 서술하면서 특이한 기록을 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풀고 불쌍히 여기시며 돌보사 멸하기를 즐겨하시지 않으셨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23절) 한마디로 여호아하스는 철저하게 선조들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보존되고 유지된 것이지, 만약 그것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은 여호아하스 때에 이미 아람에 의해서 완전히 멸절되었을 것이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악인의 저주와 의인의 축복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악인의 가계의 흐르는 저주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을 나는 잘 모르겠다. 물론 악인의 자녀들이 더 악한 환경 속에 노출되어 있어서 쉽게 악해질 수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알 수 있다. 여로보암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에 그와 같은 죄악이 대를 거쳐 흘러갔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그것이 기계적으로 흐른 것은 아니다. 그 뒤를 이은 왕들이 그것을 개혁하지 못했다는 것이요 그 흐름에 편승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선친들이 받은 저주가 계속해서 죄없는 자녀들에게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는 구체적인 사례를 나는 모르겠다.(있으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다. 진심으로... 나도 궁금하니...) 그러나 선친들의 선행으로, 선친들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말미암아 후손들이 복을 누리는 것을 나는 종종 보게 된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그와 같은 구체적인 사례중에 하나라고 하겠다.(23절) 남 유다의 아비얌 때의 평가도 마찬가지다. 그는 선한 것이 없었지만, 다윗 왕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유다를 견고하셨다고 성경은 언급하고 있다.(왕상 15:1-5)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말하는 것이 성경적인지 난 모르겠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가계에 흐르는 축복과 은혜가 있다는 것은 확실히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2. <긍정적 사고>라는 말보다는 <적극적 태도>라는 말이 좋다.  

 

긍정적 사고를 통한 긍정의 힘이 교회 안에서도 강조되고 있는듯 하다. 일반 상식적인 차원에서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그 근거가 성경에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인정하기가 곤란하다. 그래서 늘 교회 안에서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 한다고 하고, 긍정적인 말을 해야 한다고 한다면 구약에서 선지서는 모두 제거해야 할 책이 되고 말 것이다. 아니 선지자들의 활동을 모두 부정해야 할 것인지도 모르겠다.

 

긍정적 사고와 말에 대해서 나는 긍정하지만, 그것이 성경적이라는 논리에 대해서는 부정하고 싶다. 오히려 성경은 <적극적 태도>를 강조한다고 본다. 오늘 본문에서 요아스가 활을 세번 만 친것이 문제가 되었다. 대여섯번을 쳤다면 아람을 완전히 이겼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세번만 친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요아스의 입장에서도 활을 땅에 치는 숫자대로 아람을 이기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요아스는 열번도 쳤을 것이고 백번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요아스는 자신의 행동과 아람과의 전쟁 승리와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힌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미 앞에서 엘리사의 지시에 따라 활을 동쪽으로 쏘고는 구원의 화살이라는 힌트를 엘리사가 주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의 힌트를 가지고 요아스는 활을 땅에 여러번 치는 시도를 해 봤음직 할만도 한 것이다. 그러나 요아스는 적극적인 태도가 없었던 것이고 수동적이었던 것 같다.

 

나는 여기서 <적극적인 태도>의 소중함을 본다. 성경은 적극적인 태도를 가지라고 말한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말한다. 이루어질 때까지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고 권한다. 어떤 환경에서도 자족하는 법을 배우면서 환경에 굴하지 말고 해야할 일을 행하라고 말한다. 사랑할 때도 적극적으로 5리를 가고자 하는 자에게 10리까지 가주라고 한다. 종은 적극적으로 종의 역할을 하고, 주인은 적극적으로 주인의 역할을 하라고 한다. 부모와 자식, 남편와 아내 모두 마찬가지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하라고 한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그것으로 내 제자인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긍정적인 사고와 긍정적인 말을 성경적이라고 하면, 교회 안에서는 비판도 평가도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면 교회는 건강해지는가? 아니다. 죄인들이 모인 교회는 적절한 비판과 평가 속에서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성경은 많은 비평과 평가와 고민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긍정적이란 말보다 적극적이란 말을 사용하면 좋을 것 같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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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라는 단어에 여러가지 의미들이 포함되겠지만, 여기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개념과는 다른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부분을 설명해 보고자 한다.(의라는 단어의 한 측면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다룬다)

단어는 텍스트 안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점검해야 한다.

 

느헤미야 9:8에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 땅을 그의 씨에게 주시리라 하신 말씀을 그대로 이룬 것을 보면서, 주는 <의>로우시다라고 표현한다. 따라서 여기서 <의>란 하나님은 그분의 언약에 성실하게 행하심을 의미한다 하겠다.  

(느 9:8) 『그의 마음이 주 앞에서 충성됨을 보시고 그와 더불어 언약을 세우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의 땅을 그의 씨에게 주리라 하시더니 그 말씀대로 이루셨사오매 주는 의로우심이로소이다』(의=차다크, 체데크의 동사형)

 

창 38장의 내용은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이다. 유다는 다말에게 해야 할 도리로서 언약을 지키지 않았다. 반면, 다말은 그 언약에 근거해서 무리한 방식(비도덕적 방법)을 통해 언약 성취를 이루어 내려고 했다. 그런데 유다는 다말의 그와 같은 행동을 향해서 그것을 <옳도다> 평가하고 있다. 비윤리적인 행위를 옳다고 평가한 것은 <옳다>라는 행위가 여기서는 윤리적 도덕적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그 언약에 있어서 신실하고 정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겠다.  

(창 38:26)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옳도다=차다크, 체데크의 동사형)

롬 3:25 '...하나님이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로마서의 말씀 속에서도 언약 백성들이 지은 죄를 오래 참으시고 간과하셔서 마땅히 받아야 할 진노와 심판을 내리지 아니했다는 면에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이라 말할수 있으며, 그것을 바울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에서 의란 바로 언약적 개념 속에서의 성실함을 일컫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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