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2:1]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2]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6]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7]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9]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해설] 


1절. 14년 후에


여기서 말하는 14년 후라는 시점이 언제인가가 갈라디아서의 저작 시기와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내용상으로 보면 갈라디아서 2장에 언급된 내용이 사도행전 15장에서 다루어지는 문제(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해야 하는가?)와 같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서 사도들과 <이방인의 할례> 문제에 대한 이슈를 다루었다는 것은 같은 사건이라 볼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갈라디아서의 기록연대는 사도행전 15장 이후(주후 49년 이후)로 넘어가게 될 것이다.


   [참고] 갈라디아서의 저작 시기를 주후 49년으로 보고 14년 전이면 주후 35년이 된다. 여기서 다시 3년(아라비아에서의 3년) 전으로가면 주후 32년이 된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주후 29년으로 보니, 바울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 사역 이후 3년 뒤에 회심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반면 사도행전 15장의 내용과 다른 것도 있다. 일단 '디도'를 데리고 올라갔다는 것에서는 다르다. 그리고 논의 결과에 대해서도 차이가 난다. 이방인에게 할례를 요구하지는 말자고 결정하는 것은 동일하지만, 그 외의 요청에서는 차이가 난다.


 (갈 2: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행 15:19-21) 『[19]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20]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21]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

 

또한 사도행전은 예루살렘에서 행해진 공적인 회의인데 비해, 갈 2장에서 14년 후에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은 <사사로이 한 것>이다. 


이와같이 갈라디아서의 기록연대를 이른 시기로 혹은 좀 늦은 시기로 잡을만한 증거들이 둘다 있을 경우에는 좀 열린 태도를 가지고 본문의 내용을 살펴봐도 좋을 듯 하다.  



3절. 디도에게 억지로 할례를 시키지 않았다.


디도가 헬라인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은(거짓 형제들) 디도와 함께 예루살렘에 오고 혹 성전에라도 들어갈거라면 <할례>를 하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았다. 바울은 그들과 타협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울이 원칙주의자는 아니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울이 <디모데>를 제자로 불러 함께 사역하고자 할 때 그의 아버지가 헬라인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할례를 행했다고 나온다. 


 (행 16:1-3) 『[1]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2]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3]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이것은 매우 의미하는 바가 큰데, 그 앞에 사도행전 15장에서는 바울이 예루살렘 유대 그리스도인 지도자들과 <이방인의 할례>문제로 심각하게 논쟁해서 이방인에게 할례의 짐을 지우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해놓고, 16장에서 와서는 유대인들의 강력한 요구가 있지도 않았음에도 바울은 먼저 사역을 위해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도록 했다. 


그런데 갈 2장에서는 유대인들의 강력한 요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디도'에게 할례를 의도적으로 시키지 않았다. 이것은 바울이 자기 멋대로 기준을 바꾸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그는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었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할례>는 본질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 때 그 때 상황에 따라 고려하면서 결정하면 될 문제인 것이다. 



 디모데는 앞으로의 사역을 위해서 <할례>를 받게 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지만, 디도의 경우는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신학적이고 전체적인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떤 요구에도 <할례를 받지 않도록>한 것이다. 



8절. 베드로는 유대인의 사도로,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바울이 예루살렘의 유력한 사도(게바, 야고보, 요한)들에게도 동등한 인정을 받았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과 친교의 악수를 했고, 서로 사역의 대상(유대인, 이방인)이 차이가 있을 뿐이지 어떤 복음의 내용에 있어서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다만 가난한 자를 돌봐 달라고 요청한 예루살렘의 교회 요청에 대해서는 완전히 수긍하지만, 그것조차도 전혀 새로운 요구라기 보다는 이미 바울이 신경써서 하고 있던 사역임을 밝힌다. 즉, 복음 이외의 것에 있어서도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빚진 것이 전혀 없음을 말한다.



[묵상/정리]


1. 갈라디아서는 앞부분에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들을 향해서 책망한 것 이후로 하나의 일관된 내용은 바울 복음이 사람에게서 전수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받았던 오해가 그와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의 사도성에도 열등하다고 보았고(상대적으로 예루살렘의 유력한 사도들에 비해), 그렇기 때문에 그가 전한 복음의 내용에 있어서 추가적인 손질이 필요했다고 봤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논리는 상당히 사람들의 마음에 합리적으로 들렸을 것이다.


사실 바울은 그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에 비하면 <듣보잡>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바울의 말씀을 듣고 교회가 세워졌을 때는 몰랐지만,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들어와 다른 이야기를 하지 쉽게 넘어간듯 하다.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하기 위해서인지 바울은 꽤 많은 분량을 이야기를 하는데 집중한다. 아직까지 다 끝난게 아니다. 갈 2:11-14까지 이어진다.


2. 바울을 <이방인의 할례> 이슈로 초대 교회의 본고장인 예루살렘 유대인 교회들과 치열하게 논쟁을 하긴 하지만, 그 문제가 복음의 핵심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할례나 무할례나 복음의 본질은 아닌 것이다. 바울이 싸웠던 논지는 이것이다. <할례를 해야만 한다>는 것에 대해서 <할례를 필수는 아니다>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의 글 속에서는 마치 <할례를 하지 말아야 할 것>처럼 들려질 수 있겠다.(마치 율법으로 말미암은 구원이 아니다라고 말할 때, 율법은 불필요한 것이다라고 오해하는 것처럼)


바울은 상당히 균형잡혀 있는 성도다. 그러나 그 균형이 늘 중간을 택하는 것은 아니다. 치우친 자들에게 균형을 잡아주기 위해서 상당히 강한 어조로 반대 방향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의 진심을 알기 위해서는 바울의 입장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한 다각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바울은 지금 논쟁 중이기 때문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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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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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8]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19]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20]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 [21]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22]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23]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24]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해설]


18절. 그 후 3년 만에


다메섹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나와 아라비아에서 3년의 시간을 보낸 후 바울은 게바를 만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이 때가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처음으로 예루살렘으로 간 때이며, 이 때 처음 유대 사도들을 만난 것이다. 이 때의 배경에 대해서는 사도행전 9장 26-30에 나와 있다.


 (행 9:26-30) 『[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28]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29]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30]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18절. 그와 함께 15일을 머무는 동안...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게바와 함께 있었던 15일 동안 복음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없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하는데, 현실성이 많이 떨어진다고 보인다. 복음을 전하는 대표적인 두 사도가 15일을 함께 보내면서 복음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다는 것이 오히려 더 어색하다. 오히려 진지하게 자신들이 이해하고 받은 복음을 서로 나누었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울이 게바(베드로)에게서 복음의 내용을 전수받는 차원에서의 만남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바울이 지속적으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15일 동안 함께 있었지만 그 시간을 통해서 복음을 전수받은 것은 아니라는 행간의 의미를 읽어야 할 것이다.(그 기간 중 바울과 베드로는 이미 자신의 복음에 대한 내용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복음을 이야기하는 정도의 나눔이 있었을 것이라 본다) 그 기간 중 야고보(예수님의 동생)  정도만 보았지 다른 사도들은 만나지도 않았다. 즉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내용을 형성하는데 그 기원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있지 않음을 바울은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는 말아야 한다. 


22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 교회들은 사실 바울을 제대로 본자는 거의 없다는 말이다. 즉, 처음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베드로와 야고보만 잠시 보았을 뿐 유대인들과의 공개적인 접촉은 거의 없었음을 말한다. 바울은 계속해서 자신이 예루살렘 사도들에게 영향을 받지 않았음을 강조하는데, 이는 갈라디아 교회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이 예루살렘 사도들의 복음에 비해 열등하거나 부족하다는 생각을  추호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묵상]


갈 1:11절 이후로 1장의 마지막까지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논지는 자신이 전한 복음이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에게서 직접적으로 온 것임을 회심 후 자신의 활동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다. 


바울이 예루살렘의 유대 사도들과 자신과의 연관성에 섯을 긋는 것은 그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거나 그들과 자신을 구별하기 위함이 아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 바울이 직면한 문제(오해)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예루살렘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에 비해서 열등한 복음(충분하지 못한 복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상황이고, 더 핵심적인 문제는 그래서 바울이 전한 복음 외에 추가적인 어떤 내용들을 가미하여 갈라디아 교회를 그릇된 길로 인도 했다는 것에 있다. 지금의 상황이 이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 교회 사도들과의 관계성 속에서 대등한 위치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더불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예루살렘의 게바다 야고보가 전하는 복음에 대해서 불충분하다고 인정하는 것도 아니다. 



 갈라디아서를 단순히 복음과 율법의 문제로만 봐서는 안된다. 또한 바울이 처한 입장에 대해서도 이해가 있어야 바울의 표현이 좀 더 엄밀한 의미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이 게바(베드로)와 야고보의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예루살렘 공회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권위를 인정해주는 사람이 바울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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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해설] 


11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다.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제부터 바울은 본격적인 자신의 논지를 펴려고 한다. 우선 <바울이 전한 복음의 신적 계시성>에 대한 강조다.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이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배운 것도 아님을 강조한다. 이와 같은 강조는 갈라디아서를 시작하는 첫 구절부터 드러났던 방식이다. 


 바울의 사도됨이 사람에게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갈 1:1)임을 강조한다. 


방식은 비슷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좀 다르다. 갈 1:1은 <바울의 사도성>에 대한 강조이지만, 갈 1:11,12은 <바울이 전한 복음이 직접적인 계시>로 말미암은 것에 대함이다. 바울의 서신서 여러곳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성>을 변호하는 경우가 종종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에서의 주 내용은 바울의 사도성에 대한 변호가 아니라,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직접적 계시성>에 대한 것이다.


13절.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하기 전의 자신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사도행전 9장에 잘 드러나 있다. 유대인 중 다른 누구보다 유대교에 열심이었고,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려고 했던 자였다. 


 (행 9:1-2)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16절.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을 부르셔서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실 때, 사울은 이미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된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을 만나러가지 않았다.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세멕으로 돌아왔다. 이 부분에 대한 역사적인 배경은 사도행전은 9장에 언급되는데, 바울이 아라비아로 갔다는 것에 대해서는 사도행전에 언급이 없다. 따라서 사도행전의 기록과 갈라디아서의 기록은 조합해 보면, 사울은 다메섹에서 아나니아를 통해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전도를 하다가 유대인에게 미움을 받고 생명이 위험해지자 그것에서 피신해서 <아라비아>로 간 것 갔다. 


거기서 사울은 3년 정도의 시간을 보낸 것 같다. 이 때 바울은 하나님을 통해서 직접적인 복음의 내용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 기간 중 셋째 하늘에도 올라갔다 온 신비한 경험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후 12:2, 개역)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여기서의 핵심 논지는 사울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이방인의 사도로 세워졌을 때, <복음의 내용>에 대해서 사람에게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순수하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직접적인 계시를 통해 받은 것임을 강조한다. 


 이는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사울에 대해서 어떤 모함을 했는지 짐작케 하는 근거가 된다. 갈라디아 교회들을 교란하기 위해서 들어온 자들은(1:7) 바울은 다른 사도들보다 늦게 부름을 받았고, 예수님을 직접 따라다니면서 배운 사도가 아니기 때문에 사도로서의 권위도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사도들에 비해서 떨어지고, 그가 가르치는 복음은 아직 미숙하기 때문에 예루살렘 사도들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을 것이다. 즉 복음의 내용에 있어서도 예루살렘의 유대 사도들보다 바울의 복음은 불완전하여 보완이 필요하다고 넌즈시 말하자, 갈라디아 교회들은 쉽게 그들의 논리에 넘어갔던 것 같다. 



[묵상]


1.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의 권위는 어디에 있는가?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의 권위를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했다. 즉, 신의 직접적 기원에 둔 것이다. 바울 뿐 아니라 유대 사도들의 복음도 실은 다 마찬가지다. 다만 이들은 복음을 전해야 하는 대상이 다른 것이었다. 그래서 본질은 다르지 않았지만, 구체적인 요구사항은 약간의 차이가 있었을 수 있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가? 지금도 바울과 같이 <신의 직접적 계시>를 받아야만 하는가? 그건 아니다. 이미 바울을 통해서 그리고 유대 사도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도들의 복음은 정리가 된 것이다. 우리의 과제는 그것과 다른 <복음>을 직접적으로 받는 것에 있지 않다. 이미 신적 기원을 통해서 기록되고 정리된 복음을 명확하게 파악하여 아는 것에 있다. 


우리는 누군의 복음이 어떤 방식으로 주어졌는가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는 없다. 그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 성경적인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아무리 신비한 역사와 권세가 나타난다고 해도,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을 떠난 내용을 권위를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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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문

2. 해설

3. 묵상



[1.본문]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2. 해설]


[6절]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만약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이른 시기에 썼다면(주전 49년 이전) 1차 전도여행의 기간을 대략 3년 이내로 보는데, 힘들게 복음을 전하여 세운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가 1,2년이 채 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다른 복음(거짓 복음)으로 거의 넘어가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거의 멘붕의 상태라고 봐야 할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의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할 때,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의 충동으로 돌에 맞아 거의 죽을 뻔 한 적이 있었다.




(행 14: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갈라디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돌아오는 길에 바울은 다시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오면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는 일에 다시 한번 힘쓰고 돌아왔었다.




(행 14:22-23) 『[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바울은 외부적인 환난과 박해를 염두하고, 이들의 믿음을 견고히 할 것에 대해서 당부하고 왔으나, 갈라디아 교회들은 외부적인 환난이 아닌 변질된 복음, 거짓 복음에 의해서 내부적으로 허물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도 바울의 허망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상하게 여기노라> 이해하지 못한다기 보다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든 바울의 심적 상태를 말하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7절] 다른 복음은 없다.


다른 복음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말하는 것인지 아직 알수는 없으나 다른 복음은,


7절. 갈라디아 성도들을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는 것이다.

9절. 바울을 통해 전해 받은 것과 핵심적인 관점이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 즉, 그리스도의 복음과도 다르며 바울 자신이 전한 복음과도 다른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표현은 바울 자신이 전한 복음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핵심에 있어서도 동일한 복음이라는 것을 말한다.


10절. 바울 자신이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 아님을 언급함으로서 <다른 복음>은 사람들을 만족하게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즉, 다른 복음은 복음의 본질에서는 떠났지만, 사람들의 이성이나 혹은 정서에 잘 들어맞는 형태로 변형된 복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지도자로부터 시작해서 일반 성도들까지 다수가 <이같이 속히 (참 복음으로부터) 떠나 다른 복음>으로 넘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위험성을 생각한다면, 그리스도의 복음과 유사하지만 다른 복음은 성도들에게는 매우 위험한 <독>과 같은 것이었다.



[8절]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바울이 저주를 선언하고 있는 구절이다. 복음의 핵심 내용을 변질시킨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가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그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혹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의 유력한 사도들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 역시 저주를 받을 것이다. 누구든지 바울이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9절)


바울이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임할 [저주]에 대해서 두 번이나 반복하여 언급하고 있다. 지금 갈라디아서를 쓰고 있는 바울의 심정을 엿볼 수 있는 표현이다.





갈라디아서는 인사말을 마치고 본론을 시작하면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 대한 책망으로 시작하고 있다.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감정이 중간 중간 충분히 뭍어나고 있는 성경이다. 따듯하고 온화한 감정은 아니지만, 그릇된 자식의 행실과 가치관을 탓하는 부모의 심정이 뭍어나고 있는 성경이다. 바울의 당황스러움이 드러나며, 감정적인 경고등도 모두 드러난다. 바울의 허망함과 안타까움이 모두 드러난다.


(갈 4: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바울은 언성을 높여 혼을 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이 목숨을 걸고 낳은 자식과 같은 교회 이기 때문이다.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고 첫 이방 선교를 통해서 얻은 첫 아이이기 때문이다.


(갈 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3. 묵상]


1. 바울이 전한 복음은 충분했지만, 듣는 성도의 이해와 확신은 불충분했다.

그래서 성도들이 잘못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만큼 우리들의 이해는 한계를 가질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바울만큼 분명하게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복음 생생하게 전할수 있는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그러나 사람의 말이라는 것은 불완전한 것이다. 듣는이의 이해와 상황에 따라 가변적인 것이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다.

그래서 복음은 다양한 상황과 입장 혹은 질문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다시 들려져야 한다. 복음은 입체적이지만, 우리는 한번에 한 면씩 밖에는 보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바울이 전해도 이와같다면, 우리는 복음을 알고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반복적으로 해야 한다. 바울의 서신을 통해서 해야 하겠지만, 야고보서의 말씀 속에서도 복음서의 말씀과 요한계시록의 말씀 속에서도 복음을 보는 수고를 해야한다. 구약도 다르지 않다. 구약의 말씀이 예수를 지향한다는 것은 우리가 믿는바다.

복음을 전하는 자도 마찬가지다. 바울이 전한 복음도 충분한 이해가 될 수 없다면 우리는 더욱 그렇다. 따라서 우리는 성도들에게 복음의 다양한 측면을 반복적으로 가르치는 수고를 해야 한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이단이 발생하는 그 지점은 정통교회가 잘 풀어가르치지 못한 부분임을 알아야한다. 충분한 설명을 해주지 못한 곳에서 [다른복음]이 자라는 것이다. 어찌보면 이단의 긍정적 역할은 정통교회의 사각지대를 보여줌으로, 우리로 보완할 것을 가르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복음은 전하는 자나 듣는 자나 반복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단순한 내용의 무한반복이 아니라 풍성한 내용의 다각적 반복이어야 한다.


2. 사람에게 이성적 정서적 합당함이 진리의 합당함과 다를 수 있고, 심지어 치명적인 위험성이 될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른 복음의 특징 중 하나는 <사람을 좋게 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과 이성에 부합하다는 특징을 가진다. 이 말은 복음이 사람의 이성과 감성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다른 복음]은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에 비해 그럼 측면에서 더 밀착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위험한 것이다.

복음으로서 하늘로부터 온 것임은 분명한데, 하나님의 진리에 가깝기 보다는 우리의 정서와 이성에 더 가깝게 여겨지기에 위험한 것이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은 이것을 구분할수 있어야 한다. 즉 복음의 내용의 핵심과 주변을 구분할수 있어야 한다. 이 구분이 어려우면, 우리 마음에 더 부합한 주제들인 주변에 있는 것들이 중심으로 들어오도록 허용하기 때문이다. 갈라디아 교회에서는 할례와 절기를 지키는 것들이 들어왔고 오늘날은 성공과 번영과 기적과 능력이 들어온 것이다.

갈라디아서를 통해 복음 내용의 중심과 주변이 무엇인지를 보는 안목을 배우는 기회가 되길 소망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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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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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개역개정]


[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2]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3]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5]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해설]


1. 바울의 서신은 주로 편지를 받는 대상의 교회의 이름을 따거나 받는 사람의 이름을 따서 지어져있다. 그리고 보통 바울이 교회에 편지를 보낼 적에는 본인이 전도하여 개척한 교회에 대한 AS차원에서의 서신이다. 물론 <로마서>의 경우는 예외다. 그러나 고린도전후서나 데살로니가 전후서 그리고 빌립보서와 같은 서신들은 바울의 전도 활동을 통해서 세워진 교회에 보낸 편지다.


2. 갈라디아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바울의 전도여행 내용을 읽어보면 '갈라디아'라는 언급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곳은 빌립보와 같은 식의 한 지명이 아니다. 갈라디아라는 지역의 이름인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2절에서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이라고 언급한다. 비시디아 안디옥,루스드라, 이고니온, 데베라는 도시를 포함하고 있는 지역이 갈라디아인 것이다. 

 

3. 그러나 사실 일반적으로 <갈라디아 지역>이라고 하면 위에 언급한 지명이 있는 남갈라디아 지역이 아니라, 북갈라디아 지역(위 지도 참고)이다. 남갈라디아 지역은 나중에 갈라디아 지역으로 편입된 곳이기에 <갈라디아 사람들>(갈 3:1)이라고 했을 때 일반적으로는 북갈라디아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래서 여기에서 약간의 논란이 있다. 


4. 일반적인 북갈라디아 지역의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라면, 바울의 갈라디아서는 적어도 2차 전도여행 이후가 된다. 왜냐하면 바울이 1차 전도여행을 통해서 전도한 지역은 남갈라디아 지역이기 때문이다. 2차 전도여행때 1차 전도여행한 지역인 남갈라디아 지역을 지나 유럽으로 넘어가기 전에 북갈라디아 지역을 다녀간거 같다.(행 16:6) 그렇게 되면 적어도 2차 전도여행 이후에 갈라디아서를 쓰게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안에 중요한 이슈 중에 하나인 '할례'문제를 다루는데 이 문제와 관련하여 사도행전 15장에 공식적으로 다루고 있고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공식적인 결론을 맺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갈라디아 지역 교회에서 '할례' 문제로 복음의 내용에 있어서 혼선이 있다는 것은 갈라디아서가 사도행전 15장 이전, 즉 예루살렘 공의회가 있기전(주전 49년)에 기록된 것이라는 견해가 있는 것이다. 그게 맞다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이란 바울이 1차 전도 여행을 통해서 세웠던 <남갈라디아 지역> 교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 하겠다.  



   * 좀 더 세부적인 논의가 더 있긴 하지만, 이 정도로만 정리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어떤 분은 남갈라디아 지역과 북갈라디아지역에 있는 모든 교회를 포함하여 말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기도 하신다. 

  * 갈라디아서의 저작 시점에 대한 논의가 있는데... 정작 논의를 하는 분들도 갈라디아서의 본문을 파악하는데 저작 시가 이르던 좀 늦던 큰 상관은 없다고 보는듯 하다. 



5. 이제 다른 주제로 넘어가서 바울이 자신의 사도됨을 설명할 때,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예수님과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은 표현은 본론에 가서도 자주 반복된다. 특히 자신의 사도됨을 <사람>으로부터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대한 것을 분명히 한다. 그러니까 바울은 갈라디아서의 시작부터(1:1) 자신의 이야기 하려는 논지의 <색깔>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 갈라디아서를 읽다보면 논지 파악이 혼란스럽다고 한다. 나도 다르지 않은데... 읽으면서 느낀 것은 갈라디아서는 차분히 앉아서 쓴 글이라기 보다는, 약간은 감정적으로 흥분한 상태에서 쓴 글로 보인다. 그래서 중간 중간 차분한 설명을 하다가 갑자기 감정적 표현들을 한다. 논리적인 글이 아니라는 느낌 보다는 바울의 감정이 많이 뭍어나는 글이라 생각하면 보면 좋을 것 같다. 


 

6. 한 절에 축약한 복음(4절)


간략하게 정리하면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주셨다>는 것이다. 왜?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지시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그리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역사는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된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짧지만 명확한 복음의 내용이다. 


자세한 설명보다는 갈라디아서의 편지의 서문의 특징을 생각해 보자. 다른 편지 서문에 비해 상당히 짧은 편이다. 이 짧은 인사말 속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성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과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밝힌다. 갈라디아서의 글이 상당히 밀도 있고, 공격적(?)인 글이 될 것임을 예견해 볼 수도 있겠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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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바울의 서신 중 하나인 갈라디아서에 대해서 조금씩 소개해 볼까 한다.


먼저 밝힐 것은 이글은 전문가의 글이 아니다. 신학을 공부하기는 했지만, 원어의 뜻까지 세밀이 살피고 다양한 학자의 견해까지 소상히 밝힐만한 능력은 없는 자다. 다만 성경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읽으면서 그 안에 핵심적인 내용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기를 즐겨하는 자이기에 나와 같이 성경을 사랑하고 배우기를 원하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자 쓰는 글이다


갈라디아서로부터 시작하게 된 것은 이 본문에 가장 자신이 있어서가 아니다. 최근에 공부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것보다 좀 더 자신있는 본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내가 읽는 방식을 함께 나누고 또 점검도 받으면서 가고 싶은 마음이기 때문에 이 본문을 택했다.(어떤 페친분의 개인적 요청이 자극이 되었는데, 울고 싶었는데 뺨을 맞은 격이기도 하다) 


끝까지 완전히 정리한 다음에 쓰는 글이 아니기 때문에 본문을 다루어가면서 조금씩 논지가 바뀔수도 있다. 그래서 열린 글이 아닐까 싶다. 나는 교리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글을 써내려가는 성경 기자의 의중을 파악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그 의중의 메시지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가 찾아보고 싶은 것이다. 끝을 알아버린 글처럼 읽기에 흥미가 없는 책은 없을 것이다. 결론도 중요하지만, 그 결론에 이르게 되는 논지도 중요하다고 본다. 보통 글은 앞에서부터 읽는 것이고 읽어가면서 처음 읽은 것이 보완되기도 하고, 구체화되기도 하는 법이다. 종종 처음의 생각이 그게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을 마지막까지 다 읽고 하게 되기도 한다. 나는 이런 과정이 모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신학적인 토론을 할만큼 실력은 없으니, 읽으시는 분들 중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으면 댓글로 남겨주시라. 일일이 답변드릴 능력은 안되지만, 타당한 견해는 언제든지 수용할 마음을 가지고 있다. 바로 수정할 수도 있고, 검토해서 나중에 다시 글을 쓰게 될때 사용할 수도 있겠다. 객관적인 팩트의 오류가 있다면 즉각적인 지적을 해주시면 좋겠다. 논문을 쓰듯이 쓰는 작업이 아니라 편하게 쓰는 글이므로 중간중간 오류가 있을 것이다. 지적해 주시면 감사의 마음으로<바로> 수정하도록 할 것이다. 어떤 주제에 대해서 견해가 다르시면 그것도 남겨주시면 감사하겠다. 다른 견해도 듣고 내 생각도 보완하도록 하겠다. 


나는 성경은 읽으면 해석이 되는 책이라고 믿는다. 원어가 아닌 모국어로 번역된 성경이라도 마찬가지다. 물론 번역자체가 가지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누구나 인정하는, 핵심을 흔드는 결정적인 오류는 없을 것이다. 우리 나라의 성경학자들이 그와 같은 오류를 알고도 남겨두지는 않았을테니...그렇다면 시중에 나와 있는 공인된 번역본들을 믿고 봐도 충분하다고 나는 본다. 사소한 표현의 차이로 인한 오해에 집착하고 싶지는 않다.(그것은 학자들의 몫이라 본다) 이런 생각으로 쓰여지는 글이니, 도움이 되겠다 싶은 분들은 참고하시고 이런류의 글에 관심이 없는 분들은 패스하시라.


다른 것도 마찬가지지만, 이 글도 나 자신을 위한 글이다. 내가 과제를 하기 위해 내가 나에게 과제를 내 준 꼴이다. 그리고 그 과제를 해 가는 과정을 나는 즐기고 싶을 뿐이다. 그 과정이 누군가에게도 도움이 된다면 이는 덤이다. 


 - 읽어 주신 분들에게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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