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23]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25]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해설]


[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23]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이 어떤 처지에 있는 자인지를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서 비유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창세기 16장과 21장에 자세히 나와있다. 두 아들 중 여종(하갈)에게서 난 아들은 이스마엘이고, 자유 있는 여자(사라)에게서 난 아들은 이삭이다. 바울은 여종에게서 난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났다'고 언급한다. 이는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난 아들이 아님을 말한다. 반면에 사라를 통해 난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았음을 설명한다. 

하갈을 통해서는 육체를 통해서, 사라(자유 있는 여자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자유'를 강조하기 위함이리라 본다.)는 약속을 통해서, 즉 육체와 약속을 대조하는 방식으로 하갈과 사라를 비교하고 있다.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25]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바울은 창세기 16장과 21장에 나온 하갈과 사라의 이야기가 하나의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사건으로 해석해 냈다. 즉,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을 상징하는 것으로 '하갈'은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로 본 것이다. 시내산은 율법을 받은 장소로, 애굽 여인 하갈을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여인으로 본 것은 하갈이 율법을 상징하는 인물이요, 그의 자손은 자유자의 자녀가 아니니 종의 자녀 즉 율법의 종의 자녀임을 상징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바울은 더 나아가 하갈을 시내 산(율법)이라고 규정하고, 지금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라고 말함으로써(25절) 현재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여전히 율법의 종 아래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정리하면 바울은 하갈은 율법을 상징하고, 율법을 받고(시내 산) 율법을 따르고 있는 지금의 예루살렘도 여전히 율법의 자손(종의 자손)이라고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물론 예루살렘을 율법의 종이라고 규정한 것은 부정적인 평가다. 왜냐하면 하갈의 자식은 '육체를 통해서' 난 자로서 '성령을 통해서' 난 것과 대조되어 설명되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약속'을 따라 아들을 낳은 사라에 대해서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라 말한다. 즉 사라를 통해서 난 자손, 약속을 따라 난 약속의 자녀들은 사라의 자녀이며 이들은 자유자의 자녀인 것이다. 이들은 지금 땅에 있는 예루살렘(율법의 종된 곳)과 대조적으로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자유의 자녀, 약속의 자녀)요 참된 예루살렘임을 밝힘으로서 율법이 아닌, 약속을 통해서 난 자들이 참된 예루살렘임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처음에는 잉태하지 못한 자(사라)로 불행해 했지만, 훗날에는 큰 복의 여인이 되었던 것처럼 자유자의 자녀(율법의 종에서 벗어난)에게 큰 복이 있게 될 것을 말한다.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지금은 성도가 마치 아이를 낳지 못한 사라처럼 자유하는 여인이었으면서도 여종에게 위축되어 있지만, 우리는 이삭과 같은 '약속의 자녀'다.


갈 3: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갈 3: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갈 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갈 3: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의 자녀인 우리가 '육체를 따라 난' 자들에게 박해를 받게 되는 것은 마치, 율법의 종인 이스마엘(하갈의 아들)이 자유 자의 아들은 이삭(사라의 아들)을 놀렸던 일(창 21:9)과 같은 것이라 해석하는 것이다. 이 또한 바울이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창 21:9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현재는 율법의 자녀가 자유자의 자녀를 놀리고 박해하지만, 바울은 그들에게는 '유업'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유자의 자녀가 아니요 여종의 아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갈이 사라의 요청으로 하갈을 아브라함의 집에서 내쫓기게 된 것을 말한다. 


바울은 지금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유대인들과 그들로 인해 흔들리고 혼란 가운데 있는 갈라디아 교회 안에 있는 성도의 상황을 하갈과 사라의 이야기로 알레고리적으로 잘 풀어서 설명했다. 알레고리 해석이 옳은 해석이냐를 떠나서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현재 예루살렘 유대인들의 입장이 무엇이고, 그들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그들의 유혹 혹은 박해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까지 하갈과 사라의 이야기로 잘 풀어서 가르쳤다. 


[묵상]


1. 바울은 예루살렘 유대인들을 까(?)고 있다. 


예루살렘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까고 있다기 보다는, 그들의 그릇된 복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들은 복음 안에서 들어설 수 없는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를 끼워 넣으려 했고, 그것을 끼워 넣어야만 '복음'이 완성될 수 있다고 믿고 가르쳤기 때문이었다. 바울이 디스하고 있는 대상은 바로 그와 같은 그릇된 복음을 믿고 전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있지만, 종의 자녀다. 하나님의 약속의 기업으로부터 배제된 자들임을 바울은 서슴없이 말한다. 

유대인들에게는 상당히 비아냥거리는 조롱으로 들렸을 것이다. 유대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지키기 위해, 선을 명확하게 해주어야 했다. 


2. 복음에 율법을 끼워넣으면 사라의 자손이지만, 하갈의 자손이 된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과 사라 가운데서 태어난 약속의 자녀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혈통적으로만 그렇지 영적인 면에서는 여전히 시내 산 율법의 자녀, 즉 하갈의 자녀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율법을 통해서 의롭게 되는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의롭게 되는 복음'이 선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려는 우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시 옛 날로 돌아가려고 한 것이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부정하거나 혹은 불완전한 것으로 보는 행위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다시 종의 자녀, 하갈의 자녀가 되어 버린 것이다. 


3.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것은 역사적 회귀를 불가능하게 한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예수를 이 땅위에 보내셨다. 즉 새로운 시대를 열기로 한 것이다. 이전 시대를 끝내고 싶으셨고, 끝낼 때가 되었다는 것을 하나님이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이전 시대로 돌아갈 이유도 없고, 돌아 가서도 안된다. 예수 이후 새로운 시대가 온 것이다. 


그런데 다시 옛 방식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들은 대표적으로 유대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역사를 되돌릴수는 없다. 일어난 일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십자가 죽으심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가 하신 사역의 결과도 마찬가지다. 


예수 이후 다시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의란 없다. 예수는 율법의 마침이 되었다. 


 롬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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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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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1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17]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해설]


[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때가 차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심으로 우리에게 아들의 영을 주셨는데, 그것을 알지 못했을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너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도 너희들을 아는데 어떻게 다시 옛날의 방식(초등교사인 율법에게 종노릇하던 시절, 이 시절을 거쳐서 이제 자유의 아들이 되게 하셨는데...)으로 돌아가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을 하려고 하는가!! 지금 너희들이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예수를 믿고 의롭게 되는 방식으로 지키려 하니... 지금까지 너희를 향해 해온 수고가 모두 헛되게 될까 두렵다.



[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들에 대해서 책망조로 시작하면서 계속해서 개인적이 이야기를 진행한다.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내려놓고 이방인과 같이 되었다. 이 말은 자신이 전한 복음 속에서 유대인의 문화와 가치관은 배제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 속에서 순수한 복음과 유대인의 문화와 가치를 구분할 수 있었다는 것이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에 불필요한 유대문화적 요소들을 가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바울이 복음과 문화적 요소를 구분할 수 있었던 것처럼 갈라디아 교회들도 그렇게 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13절부터의 말씀은 갈라디아 교회들과 바울 간의 개인적인 경험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라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다. 대략적인 분위기만 파악하는 것으로 한다.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에 이르렀을 때 육체의 약함이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그 지역의 풍토병으로 인한 것일 수도 있고, 유대인의 박해로 인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런 처지에 있는 바울을 갈라디아 지역의 이방인들은 불쌍히 여겨졌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바울이 복음을 전한 것으로 보인다. 보잘것 없고 초라한 상황이었지만,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을 마치 천사를 대하듯 따듯하게 영접해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애정은 '바울에게 눈이라도 빼줄듯 한 것'이었다. 



 즉, 바울과 갈라디아 교회와의 관계는 이와 같은 정서적 친밀관계가 기본으로 전제된 것이다. 그런 사역지에 대한 바울의 애착이 얼마나 컸겠는가? 또한 갈라디아 교회들이 보여 준 바울에 대한 애정은 얼마나 남달랐는가? 그런데 그 갈라디아 교회가 <다른 복음>으로 인해 바울에 대해서 오해하고, 바울이 전한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으로 치우져 버리게 되는 것 같은 상황이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는가! 갈라디아서 중간 중간에 바울의 흥분하고 책망하는 내용이 나오는 것은 인간적인 바울의 심정을 잘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다.



[1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17]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이런 관계속에서 갈라디아 교회가 <다른 복음>으로 속히 넘어가게 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바울은 감정적으로 흔들렸을 것이고, 그것을 진압하기 위해 <직접적인 권면과 책망>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미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인해 <바울의 사도성>과 <바울의 복음의 권위>에 대해 열등하게 생각했던 갈라디아 교회들은 바울의 충고를 우습게 여기고, '지가 뭔데?'라는 식으로 반응을 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로인해 바울은 더 큰 감정적 상처를 입게 되었던 것 같다.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는 이 표현은 바울과 갈라디아 교회들간의 이런 감정적 상태를 보여준다 하겠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열심은 너희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그릇된 열심에 불과하다. 좋은 일에 열심이라면 얼마든지 좋지만, 그들의 열심에 속지 말라. 그들의 열심은 너희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열심이었던 것 같다. 열심이라고 다 좋게 볼 수 많은 없는 것이다. 



[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결국 바울의 마음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겠다는 것이다.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이 구절 속에 바울의 심정이 담겨져있다. 말로 권면으로 이들을 바로잡아 보려고 했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함을 바울은 느꼈다. 자신이 처음에 보냈던 진심어린 충고에 대한 갈라디아 교회들의 반응을 보고 바울은 '벽'을 느낀 것이다. 감정적으로 큰 상처를 입었을 것이고 낙심이 많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을 전도하다가 유대인들에게 돌아 맞아 거의 죽게 되어 성 밖으로 버려졌을 때, 다시 일어나 더베로 가서 복음을 전했던 것처럼(행 14장) 감정적 돌팔매를 당하고 나서 다시 툴툴 털고 일어나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하겠다>고 그들 속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한다. 


바울은 감정적으로는 <언성을 높일 만큼> 흥분되어 있었으나 감정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의지를 드려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이라면, 다시 처음부터 다시하겠다는 의지를 밝힌다. 



[묵상]


1. 바울은 매우 감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어느 누구보다 믿고 확신했지만, 그러나 숙명주의자는 아니었다. 잘못되어 간다고 보여지는 것에 대해서는 신속하게 바로잡으려 했다. 편지를 썼고, 충고를 했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최소한에 머물러 있던 사람도 아니었다. 문제가 터지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지런했다. 

갈라디아서를 보면 바울의 이와 같은 감정들이 모두 살아 있는 것 같아서 좋다. 바울도 사람이고 바울도 감정적 격정이 있었던 사람이며 바울도 언성이 높아지는 사람이다. 더불어 바울조차도 사역의 허술함이 나타날 수 밖에 없음도 알수 있다. 바울은 감동도 잘 했고, 배신감도 느꼈으며 원수와 같은 관계로 인식될 만큼 감정의 요동이 있는 사람이었다. 


감정이 없다는 것은 좀 더 이성적으로 비춰질 수 있을지 모르나, 감정없는 로봇처럼 비인격적이다. 사람은 감정이 뭍어나는 사람을 좋아한다. 물론 감정적인 사람(감정에 휘둘리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고 감정이 매마른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는 사람도 별로 없다. 사람을 상대하는 목회자 혹은 리더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감정을 다스리고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렇다고 감정을 숨기려 해서도 안된다. 감정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이성적으로 보일 수는 있었도 상대에게 감동을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동질감을 느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감정은 상대방을 가장 멀리 내쫓기도 하지만, 가장 가까운 곳으로 들어오도록 하기도 한다. 



2. 바울은 매우 이성적이고 의지적인 사람이다. 


이성적이라는 말은 감정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는 감정적으로 큰 홍역을 알았다. 그래서 절망도 했을 것고 사역적인 허무감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다시 자신을 추스린다.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서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다.  감정은 큰 손상을 입었지만, 그것이 자신의 사역을 마음대로 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그 가운데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다시 파악하고 그것을 하기로 결단한다. 


다시 해산하는 수고. 이 말은 바울에게 부모의 심정과 의지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부모는 자식으로 인해 수 없이 많이 감정적 좌절을 경험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로 인해 자식을 포기하는 부모는 없다. 바울도 그와 같은 심정으로 다시 선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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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4: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해설]


[4: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일반적인 원리로부터 시작한다.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지만, 임시적으로 제한을 받을 때가 있다.

예를 들면,


1. 어렸을 동안에는 '종'처럼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는다. 

2. 이와 같이 우리들도 '아들'이지만, 어렸을 때에는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서 종노릇했다.


이 원리는 당시 일반적인 이야기를 통해서 앞으로 바울이 하려고 하는 논리를 이해시키기 위함이다. 이미 있던 제도인 '초등교사'(몽학선생)의 역할이 주인의 자녀를 훈육하는 일을 담당했기에 주인의 아들이었지만 마치 그 초등교사의 통제 아래에서 시간을 보내야 할 때가 있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원리도 이와 같다는 것이다.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하나님께서 이전까지는 자기 아들들을 율법(초등교사) 아래에 두셨다. 그리고 초등교사(율법)은 하나님의 아들을 훈육하듯이 엄격하게 대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어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때가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들(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에게까지)을 더이상 율법의 아래에 두지 않을 때가 된 것이다. 즉 초등교사(율법) 아래에서 자기의 아들을 해방시키신 것이고 원래의 위치인 아들의 신분을 주실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율법 아래에서 나게 하시고, 그를 통해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셨다. 이것은 우리에게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을 향해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대속, 부활 그리고 성령의 사역은 하나의 신호탄처럼 하나님의 아들들을 율법 아래에서 해방되어 아들의 자격을 누리는 때가 되었음을 알려주는 사건인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속량하신 이후로는 우리가 종이 아니요 아들이다. 시간이 꺼꾸로 흐를 수 없는 것처럼 이제 아들이 된 자는 다시 초등교사 아래로 들어가야 할 이유가없다. 하나님으로부터 유업을 받을 자의 신분만 남은 것이다. 



[묵상]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은 그 이전 시대와 그 이후 시대를 구분하는 신호탄이 된 것이다. 그 이전에 우리를 인도했던 것은 율법(율법으로 말미암은 의)이었다. 유대인에게는 모세의 율법이요, 이방인들은 마음에 새겨진 율법, 양심이었을 것이다. 핵심은 자신의 공로와 수고로 이룰 수 있는 의가 구원의 핵심이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시간이 일부러 두신 것이다. 마치 어린 자식에게 초등교사를 붙여 어린 시절의 훈육을 담당하듯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 시대는 율법과 양심이라는 초등교사가 유대인과 이방인을 훈육했다. 마치 자신이 주인인 것처럼 그리고 우리는 그의 종인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류의 역사에 그와 같은 시간을 허락하신 것이다. 즉 율법의 종되어 살아야 했던 기간이 필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영원히 그 아래에 두고자 한 것은 아니다. 왜?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가 되었다. 더 이상 초등교사인 율법에 맡기지 않아도 될 때가 된 것이다. 


그 때에(때가 차매)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율법 아래에 보내셨고, 그 가운데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 마치 모세를 애굽의 종 되었던 때에 종의 아들로 태어나게 하시어 그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셨던 것처럼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을 통해 이제 우리는 종이 아니라 아들이었음이 분명해졌다.(사실 그 전까지는 초등교사의 통제 아래에 맡겨졌기 때문에 주인의 아들인지 종이었는지 확인할 방법이 모호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우리가 '종'이 아니라 '아들'이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신 것이다. 그것을 바울은 '아들의 영을 보내셨다'는 것으로 표현한듯하다. 그 때로부터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향해서 '아빠 아버지'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새로운 관계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종이 아니라, 자유자의 아들로 말이다. 


갈라디아서 4장에서 때가 되었다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역사적인 큰 시점이 되었음을 말한다. 주전과 주후는 종의 시대에서 아들의 시대로 바뀐 역사적인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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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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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5]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그리스도라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20]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해설]


[15]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그리스도라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내용을 정리해 보면

1. 사람의 언약이라도 일단 정해진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한다. 즉 변할 수 없다.

  - 언약이라는 단어보다 '유언'이라는 말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고 보기도 하나, 문장안에서 바울이 사용할 때는 변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한 것은 분명하다. 

2. 하나님은 그 약속을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하신 것인데, 그 자손이라 함은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다. 

3. 하나님이 이미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 있는데, 그 언약 이후 430년 지나서 생긴 <율법>이 폐할수는 없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 더 상위적 권한을 가진다는 것을 말한다. 

4. 따라서 유업은 하나님이 약속으로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지,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변할 수 없는 언약을 근거로, 그 유업을 약속한 것이다. 430년 후에 생긴 율법이 그 유업의 유무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앞 본문에서처럼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 즉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둔 유대인과 이방인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언약>을 근거로 주어진 것이므로 여기서 <율법>이 나서서 무엇인가를 추가하거나 빼거나 할 수 없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20]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의 의롭게 되는 일과 그 유업을 얻는 일이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로 칭해진 것과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과 맺은 언약에 근거한 것이라면, 도대체 하나님이 율법은 왜 주신 것인가? 하는 유대인들의 상식적인 질문에 대해서 바울이 설명하고자 먼저 그 질문을 던진 것이다. 


1. 범법함으로 더하여 진 것이라.

2. 천사들을 통해서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

3 그 중보자는 한 편만을 위한 자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구체적인 해석을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율법은 무엇이냐?에 대한 굵직한 답변은 이것이다. 율법의 용도는 <임시적인 것>이었다는 것이다. 범법함으로 더 하여 진 것(원래부터 있던 것은 아닌)이고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끝이 정해져있다.)이다. 그런데 이것을 그냔 <율법> 자체에 대한 이야기로 해석하면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기 위해서 오셨고, 바울이 율법의 폐기를 주장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율법>이란 엄밀하게 말해서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방법론>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율법과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방법론을 혼돈해서 이해해서는 안된다. 보통 성경에서 율법이라고 사용할 때 이 두 개념이 혼용해서 서술할 때가 많은데 읽는 사람은 문맥을 통해서 이 둘을 구분해서 읽어야 한다. 바울은 율법 자체를 폐기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도 여전히 그렇게 믿고 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더불어 폐기된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방법론>의 폐기다. 그 방법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의의 방법론: 은혜>이 명확하게 드러나게 되었고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방법론>은 폐기 되었다. 



[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또 다른 질문이 유대인들에게서 나올 수 있다.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라는 질문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우선하여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해석하려고 했던 것 같고, 바울은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약속을 우선적으로 근거로 하여 율법의 한계성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율법과 약속이 대립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율법은 모든 사람이 죄 아래에 있기 때문에 율법으로는 의를 이룰 수 없다는 한계를 하나님이 아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 오기 전에(예수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율법은 단순히 수동적이고 어쩔 수 없이 임시적인 것은 아니다. 즉, 생각지 못한 일로 인해 임시방편으로 보강해 놓은 것과 같은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율법은 죄 아래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우리의 시선을 돌리도록 안내해 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즉, 율법이 없었다면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율법은 임시적이지만 고유의 역할이 있었고, 이 역할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향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 믿음(예수 그리스도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온 후로는 율법이라는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는 않는다. 왜? 궁극적인 목적지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까지 와 있기 때문이다.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은 이미 믿음이 왔기 때문에(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의를 얻게되는 복음을 들었고, 그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1.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그리스도)에게 주신 약속과 유업을 얻게 되었다.(그 자손, 곧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이기에)

2. 교회에 속한 자는 모두 세례를 받았을텐데, 그 세례를 받을 때 성도는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함이었기에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것이다 .

  - 그리스도의 옷을 입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세례와 연관함)

3. 그래서 너희들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다.

4.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다. 


이 구절에서의 핵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들(유대인 헬라인, 자유자나 종, 남자나 여자 등)이 다 하나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그 유업을 이을 자라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차별이 없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주시는 칭의의 옷을 입는다'는 개념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리스도와 같은 옷을 입었다는 식으로 간단하게 이해할 수도 있겠다. 마치 과티를 입듯이 모두가 한 옷을 입음으로서 한 팀, 한 몸과 같은 것을 강조하듯이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옷을 입음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백성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묵상]


순수한 복음을 전할 때, 가장 오해되기 쉬운 것이 그럼 율법의 용도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조건으로서 으뜸되는 기준은 당연히 <율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울은 다른 방식의 조건(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방식)을 제시했고, 그것의 구약 성경의 근거로 아브라함이 의롭게 인정받는 것을 들고왔다. 율법보다 상위가 언약이고 이 언약은 변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절대적으로 생각했던 율법의 용도는 무엇이고 한계는 무엇이란 말인가? 일단 율법은 인간의 범법함을 제한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지만, 영원한 법으로서 주어진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만 유효한 역할을 부여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 기간중에 율법이 복음과 관련해서 해야 할 중요한 역할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지향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율법이 가진 한계이면서 동시에 복음을 위한 결정적인 역할(꼭 필요한)인 것이다. 


1. 여전히 율법의 법에 매여 믿음의 때를 얻지 못한 자들에게는 이제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시대가 왔음을 선포해야 한다. 이것이 복음이다. 


2. 그러나 이미 그 믿음의 시대 안으로 들어와 있는 성도들에게는 다시 옛 율법의 방식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가르쳐야 한다. 믿음의 시대 이후에 다시 율법으로 인정되는 방식(옛 방식)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3. 그 다음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백성들에게 그럼, 율법의 역할은 무엇이었느지를 가르쳐야 한다. 

  1) 믿음이 오기 전 율법의 역할(약속의 경주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해줌)

  2) 믿음이 왔을 때 율법의 역할(바톤을 믿음에게 넘겨줌)

  3) 믿음이 온 이후의 율법의 역할

    - 율법을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라는 방식과 혼돈하여 이해하면, 율법 폐기론자가 된다.(방탕과 방임)

    - 율법을 행해야 하는데, 율법의 의를 쫓으려 한다면 다시 율법이 바톤을 빼앗아 뛰게 하는 것.

    - 율법의 의를 쫓지는 않지만, 율법을 삶의 중요한 원리로 인식하여 살아가고자 하는 삶.(추천)


  * 갈라디아서 5-6장에 가면 성도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자세하게 알려주는 것은 복음과 율법에 대한 올바른 이해 가운데서 권면으로 주어진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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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순수성을 파악하는데 기여한 갈라디아서.



기독교 초기 이방인 선교에 있어서 핵심적인 이슈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이 유대인에게 한해서 인가 아니면 이방인에게도 흘러가는 복이었던가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구약적 선민의식과 맞물려 유대인에게만 제한된 것으로 믿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초기에는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으로 교회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견해에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은 없었을 것이다.(이미 이들은 '할례'를 받았고, 유대인으로서 율법의 절기를 지키는 것이 <의롭게 되기 위해> 뭔가 추가되는 어떤 요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인의 테두리를 넘어 이방인으로 흘러가고 그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복음 가운데 나아올 때 그 때 문제가 불거지게 된 것이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해하는 바울의 입장에서는 본래적 복음(유대인들에게는 당연하게 여겨졌던 할례와 절기와 같은 의식적 요구가 빠진)만 전하면 될 문제였다. 그러나 유대인으로 태어나 유대인으로 살다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유대 사도들의 입장에서는 (혹은 당시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서는) 순수한 복음의 내용과 기존의 문화와 가치관이 함께 섞여 있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것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나 복음이 이방인에게 넘어가면서 순수한 복음과 문화/가치관이 분리되어야 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복음 안에 할례와 절기를 지키는 것까지 같이 들어와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이방인 사이에서는 발생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사도 바울과 유대인 사도들(그리스도인들) 간에 갈등이 있었던 것같다. 그런 문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성경이 바로 갈라디아서가 아닌가 싶다. 이방인들에게 순수한 복음을 전한 바울, 그 이후 유대 문화와 가치관이 섞인 복음(다른 복음: 유대인들에게는 별로 해롭지 않았지만, 이방인들에게는 복음을 왜곡하는 결과를 낳게되는 치명적 해로움이 된 복음)이 들어오자 갈라디아 교회는 큰 병을 앓고 말았다. 이를 고치기 위해서 바울은 유대의 사도들(혹은 그리스도인들)과 복음의 순수한 내용을 가지고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이에서 태어난 것이 갈라디아서다. 


우리는 이 갈등 덕분에 순수한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는 은혜를 얻게 된 것이다.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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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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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해설]


[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해설] 아브라함의 의롭게 인정됨이 어떤 행위와 율법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의' 여기셨다(창 15:6)의 말씀을 근거한 내용이다. 따라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자들>은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이는 아브라함이 유대인의 조상(할례자의 조상)이면서 동시에 이방인(비할례자, 아브라함은 비할례시에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 받았기에)의 조상이 되기도 한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롬 4장에서도 바울이 잘 설명하고 있으니 참고하라.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해설] 아브라함이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다.(창 18:18)라는 말씀을 근거로 바울은 이방인들도 아브라함을 통해서 복을 받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이 이미 미리 정하신 것이라 본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복이 유대인에게 뿐 아니라,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된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함을 말씀하고 있다. 


  6-9절을 정리하면, 이방인도 유대인과 같이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복을 유대인과 함께 누릴 백성임을 말한다.  바울은 계속해서 믿음으로 의를 얻은 자들이 같은 백성(아브라함의 자손)이며 같은 복을 누리게 됨을 강조한다.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해설] 바울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했는지는 잘 모른다고 하지라도, 큰 맥락에서 의미는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 중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되어 있는 율법을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율법의 행위를 통해 의를 이루기 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결국 저주 아래에 놓인 존재라는 것이다.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해설] 10,11절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결론적으로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의인은 율법으로 말미암음이 아니고(말미암을 수 없고), 믿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믿음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의 '믿음'이란, 믿는 행위라기 보다는 율법적 자기 의가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하나님의 의, 즉 은혜로서의 의를 말한다.)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는 말은, 율법의 방법론(자기 의)과 믿음의 방법론(하나님의 의)이 서로 연관되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듯 하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에 율법이라는 것이 것이 작은 것 하나라도 끼어들어올 수 없음을 말한다 보인다. // 율법을 행하고자 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아야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삶 안으로 율법을 끌어들여 와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 같다.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해설] 우리는 율법으로는(율법의 방법으로 의롭게 되고자 하는 것으로는) 저주에 이를 수 밖에 없는 자이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나무에 달려 저주를 당하심으로 우리를 속량하셨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인데(또 우리가 믿는 바인데), 왜 이렇게 행하셨는가 하면 


  1. 사람들을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했다.

  2.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려 한 것이고(십자가 사건이 6-9절의 내용에 근거 제공)

  3.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율법의 저주 아래 있던 자들을 저주에서 속량하고,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도 미치게 했다. 그리고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셨다. 



[오늘 본문 정리]

1.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 받은 것처럼,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받는 자는 이방인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2. 따라서 이방인도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복을 얻을 자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율법을 의지하는 모든 자를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다. 

4. 이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다시 율법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에 미치고,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하신다.  



[묵상]


기독교 초기 이방인 선교에 있어서 핵심적인 장애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이 유대인에게 한해서 인가 아니면 이방인에게도 흘러가는 복이었던가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구약적 선민의식과 맞물려 유대인에게만 제한된 것으로 믿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초기에는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으로 교회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견해에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은 없었을 것이다.(이미 이들은 '할례'를 받았고, 유대인으로서 율법의 절기를 지키는 것이 <의롭게 되기 위해> 뭔가 추가되는 어떤 요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인의 테두리를 넘어 이방인으로 흘러가고 그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복음 가운데 나아올 때 그 때 문제는 불거지게 된 것이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해하는 바울의 입장에서는 본래적 복음(유대인들에게는 당연하게 여겨졌던 할례와 절기와 같은 의식적 요구가 빠진)만 전하면 될 문제였다. 그러나 유대인으로 태어나 유대인으로 살다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유대 사도들의 입장에서는 (혹은 당시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서는) 순수한 복음의 내용과 기존의 문화와 가치관이 함께 섞여 있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것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나 복음이 이방인에게 넘어가면서 순수한 복음과 문화/가치관이 분리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 안에 할례와 절기를 지키는 것까지 같이 들어와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과 유대인 사도들(그리스도인들) 간에 갈등이 있었던 것같다. 그런 문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성경이 바로 갈라디아서가 아닌가 싶다. 이방인들에게 순수한 복음을 전한 바울, 그 이후 유대 문화와 가치관이 섞인 복음(다른 복음: 유대인들에게는 별로 해롭지 않았지만, 이방인들에게는 복음을 왜곡하는 결과를 낳게되는 치명적 해로움이 된 복음 )이 들어오자 갈라디아 교회는 큰 병을 앓고 말았다. 이를 고치기 위해서 바울은 유대의 사도들(혹은 그리스도인들)과 복음의 순수한 내용을 가지고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그 덕분에 순수한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는 은혜를 얻게 된 것이다.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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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 정리]


갈라디아서 내용의 큰 덩어리 중 하나는 1:6-2:21(본론1)까지다. 다른 복음으로 속히 떠난 갈라디아 교회들에 대한 책망으로 시작해서 바울 자신의 사도성과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이 사람, 특히 예루살렘의 유대 사도들로부터 기인된 것이 아님을 주장하는 내용들이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 내용은 2:15-16을 통해서 간략하고 명료하게 전해지는데,유대인들도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로마서의 표현으로 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의에 근거해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를 폐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세운 것이기에,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움을 받은 후 추가적으로 다시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를 요구하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헛되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바울의 논지를 통해서 볼 때, 바울이 경계하고 갈라디아 교회들을 변질시켰던 <다른 복음>의 내용이 의로움을 얻게 하기 위해 혹은 완성하기 위해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의 방식을 추가적으로 주장한 것이라 보인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복음의 말씀 만으로는 부족하고 거기에 '할례'를 덧붙임으로 의와 완성을 이루려고 했던 것 아닌가 싶다.(할례와 더불어 날과 달과 해와 절기를 지키는 것도 포함된다.)



[본문]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해설]


갈라디아서의 두번째 본론을 3장에서부터 시작하는데, 그 시작은 첫번째 내용은 <책망>이다. 첫번째 본론의 시작도 책망(1:6-10)이었는데...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전하고자 하는 내용들을 써내려가면서 중간 중간 감정적인 격정이 일어난 것이 아니었나 싶다.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전한 복음을 통해 세운 교회인데 너무나 속히 <다른 복음>에 넘어지는 모습에 얼마나 마음이 힘들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차분하게 편지로서 잘 가르치고자 하지만, 문득문득 올라오는 감정이 그의 글에 모두 묻어난다 하겠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바울을 좀 더 가까이에서 지켜 보는 것 같다. 인간적이라고 할까? ... 바울의 감정이 묻어나는 글이라 함께 감정의 흐름을 타는 것 같기도 하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1. 십자가의 복음을 전한 것이 얼마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쉽게 꾀임에 넘어갈 수 있는가!

2.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듣고 미음이 아니더냐!)

3. 너희가 어리석게도 성령으로 시작해놓고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4. 너희가 이 복음(믿음으로 의롭게 되는)을 받기 위해 많은 괴로움을 통과해서 받았는데..헛된 것이란 말인가!


본문에서의 특징들을 살펴보면,


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1절, 3절)


갈라디아 교회들의 어리석음을 두 번이나 말하고 있다. 바울의 답답함을 보여주는 표현이라 보인다. 바울이 생각할 때는 왜 이렇게 생생한 복음을 들은지 얼마되지 않아, 어리석게도 다시 옛날로 돌아가는 다른 복음을 따르게 되었는지 이해되거나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어리석음을 책망하기 보다는, 그들이 왜 이렇게 어리석은 행동을 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바울의 심정이지 않나 싶다. 


 <갈라디아 사람들아>라는 표현은 그 당시 북 갈라디아 지역의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이런 표현을 들어서 갈라디아서를 받는 수신자가 북 갈라디아지역의 교회들임을 말하고, 그렇기 때문에 1차 전도여행이 아닌, 2차 전도여행 이후라고 기록연대를 잡으려 한다. 

바울이 1차 전도여행을 한 지역은 남갈라디아 지역인데, 여기는 처음부터 갈라디아 지역은 아니었고 북갈라디아지역이 확대되어서 후에 갈라디아 지역으로 흡수된 곳이라 한다.  


2.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갈라디아 교회들이 받은 성령이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음을 말한다. 이 표현은 2장 15-16절에서 말한 복음의 내용에 있어서는 같으나 그곳에서는 '의롭게 됨'이 믿음으로 말미암았다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성령을 받은 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말한다.


믿음으로 받은 것이 <의롭게 됨>이라는 표현에서 <성령을 받은 것>으로 넘어가고 있다. 이것은 주제와 관점을 조금 다른 것으로 넘어가는 것이라 보인다.(칭의의 문제에서 성령의 문제로) 그러나 칭의와 성령의 문제는 별개의 문제는 아니다. 의롭게 됨과 동시에 성령의 내주가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롬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의>의 문제에서 <성령>의 문제로 주제를 넘기고 있는 것은 새로운 논지로 들어가기 위한 바울의 방식이라 생각한다. 구체적인 것에 대해서는 다음 본문에서 볼 수 있겠지만, 살짝 맛만 본다면


  (갈 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성령의 약속>이라는 관점으로 이어가고자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에게까지 확대된 것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성령의 약속>을 사용하고 있다. 다음 본문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어 보자.



[적용]


1. 바울의 흥분과 감정 노출

자신의 감정을 노출하는 것이 덜 성숙한 태도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의 감정을 노출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것 같다. 갈라디아 사람들을 향해서 어리석다는 표현을 2번이나 반복하고, 1장에서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 대한 저주를 두번이나 반복했다. 


매번 그러면 안되겠지만, 오히려 감정에 대한 충분한 표현이 상대로 하여금 전하고자 하는 내용의 논지 뿐 아니라 <강도>까지도 충분히 전달된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글 속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읽어낸다. 바울의 갈라디아서에서 우리는 바울의 감정을 충분히 읽어 낸다. 아니 어쩌면 바울은 감정까지도 전달되도록(부정적인 피드백을 주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런 오해를 피해 안전하게 글을 쓰는 것보다 자극적이고 그래서 신속하게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쓰고 있는 것이라 봐야 할 것이다. 


바울은 지금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논문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릇된 길로 빠지고 있는 자신의 양들을 향해 목양적 차원에서 정신이 번쩍 나도록 호통을 친다. 그리고 주목을 하면 그제서야 차분히 또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바울이 화가났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그것은 비이성적인 분노라기 보다는 부모로서 내고 있는 화라는 사실을 알게될 것이다.(갈 4:19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사역자인 우리도 감정을 잘 드러내야 한다. 이성적이어야 할 때도 있지만, 감정적이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충동에 의한 감정 표현이 아닌, 애정과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감정적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상대를 해산하는 수고가 먼저 있어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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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회심후 예루살렘에 두 번 올라간 것으로 갈라디아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라비아 기간 3년 후 한번, 그리고 14년 후 두 번째 올라갑니다. 이 때 사도들과의 악수사건이 있었지요. 사도행전에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이 행 9장 끝부분에 한 번 나옵니다.(첫번째 올라간 사건이라 볼 수 있겠죠.) 그리고 두번째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은 행 11:27-30이 나옵니다.(예루살렘 교회를 부조하기 위해서 올라갑니다.)_ 여기에서 약간의 논란이 있습니다. 11장이 갈라디아서 바울이 14년 후에 올라간 사건과 같은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 견해는 사도행전 15장 공의회 결과와 갈라디아서 2장에 나온 사건과 다르다고 보는 것이지요. 당연히 갈 2장의 악수사건이 사도행전 15장 사건 이전의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이 경우 갈 2장과 행 15장의 유사성보다는 차이점에 강조를 두겠지요. 갈라디아서의 기록연대로 주후 49년 이전으로 잡게 되고요.) 그러나 이 관점에 헛점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11장 사건의 시점을 주후 46년으로 잡는데.. 보기에 따라서는 바울의 회심시기가 예수님의 죽으심 전으로 될 경우도 있어서...

 

만약 행 15장 사건과 갈 2장의 사건을 같은 사건으로 본다면 사도행전의 기록연대가 뒤로 밀리게 됩니다. 그럴 경우 또 다른 문제제기가 발생할 수 있는데... 그러면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작성할 때는 이미 행 15장을 통해서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이 있은 후인데,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편지를 쓸 때 왜 이 공적 결정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가장 간단하고 명백한 자료를 갈라디아서에서 제시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무래도 이상하지요.(그래서 갈라디아서를 행 15장 이전으로 보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더불어 그럼 왜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2번 밖에 예루살렘에 간적이 없다고 하는데, 사실은 바울이 행 11장에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을 빼먹었다는 것이 되기도 하구요...

 

좀 복잡합니다. 보통 학자들은 이렇게 정리해 놓고는 년대는 갈라디아서 메시지를 파악하는데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고 말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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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내용이해를 위해 몇 구절씩 잘라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15-16절.

2. 17-18절.

3. 19-21절.


[본문]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해설]


본 구절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이 언급된다. 우리에게 '이신칭의'의 교리로 잘 알려진 내용이 나온다. 본문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해 보면


 1. 바울은 '유대인'의 의롭게 됨에 대해서 말한다. 유대인들은 '이방인'과같은 죄인이 아니지만

 2. 유대인들도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다.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로마서에 잘 언급되어 있다. 


(롬 4:1-3) 『[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3. 그것을 알고 유대인들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었다.(예루살렘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바다.)

 4.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 유대인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정리하면, 유대인들도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인데, 이것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 그리스도인들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이고 게바와 야고보와 요한과 같은 유력한 자들이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고 이 복음을 통해서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들도 의롭다 여김을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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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해설]


본문의 표현 그 자체로 해석하려고 하면 이해하는데 좀 난해함이 있다. 그럴경우는 전후의 굵직한 맥락에 비추어서 난해해 보이는 표현을 해석하는 것이 안전하리라 생각한다.큰 맥락에서 17,18절을 풀어서 설명해 보려한다. 이 작업은 엄밀한 주석작업은 아니다.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풀어 설명한 작업이니, 읽고 큰 흐름을 이해하면 족하다. 내가 이해한 바는 이렇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의롭게 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위의 방법'이 아닌 '믿음(행위가 아닌)의 방법'을 따르게 되었다. 그런데 그 이후에 다시 '행위의 방법'으로 여겨지는 '할례'와 같은 것을 '의'의 조건으로 제시하게 된다면, 처음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방법'으로 인도했던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에게 잘못된 것을 가르치게 된 것이 되고 만다.(이것을 그리스도께 죄를 짓게 하는 것으로 묘사한듯하다.) - 따라서 이런 논리(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방법을 가르치고, 그 이후 거기에 덧붙여서 율법으로 그 의로움을 완성해야 한다는 추가적인 가르침)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비추어 볼 때 모순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죄를 짓게 하는 분이 될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믿음의 방법'으로 의롭게 되려 하는 자들이 거기에 추가해서 '율법의 방법'으로 의를 완성하려고 하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 (17절 해설)



바울이 전한 복음도 다르지 않다. 바울은 이전까지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됨'을 믿는 유대주의자였다. 그러나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복음의 내용을 받으면서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될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율법의 방법>으로는 의에 이른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전 것(율법으로 말미암은 의의 방법론)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전한 것이다.  

그런데 다시 '율법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들고나와 '할례'와 같은 율법을 해야 '의'에 이른다고 가르친다면 바울은 자신이 헐었던 것을 다시 세움으로 스스로 잘못함을 말하는 꼴이 되고 만다. 이것이 말이 되겠는가!(18절 해설)


  - 바울이 실제로 그렇게 가르쳤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식의 가르침을 주라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요구가 얼마나 모순적인가를 지적하는 것이다.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논리가 아마 이와 같은 것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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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해설] 


이제 바울은 자신의 입장을 신앙 고백적으로 말한다.


19절.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

     : 나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방법론>에 대해서는 죽었다.(그 방법론으로 의롭게 될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 방법론에 대해서는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방법이라는 공식에 <나>라는 변수를 넣어 보면 결국 <죽음_의에 이르지 못함>에 이를 수 밖에 없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고)


19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방법론>은 자신의 의를 근거로 살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방법론을 버림으로서, 다른 방법론(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의)을 택하게 된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살기 위해서 그런 선택을 한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문제를 풀기 위한 공식이 두 개가 있었다. A라는 공식이 있고, B라는 공식이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B라는 공식을 인식하지 못했다. A라는 공식은 심플했고, 이해하기도 용이했다. 그리고 왠만한 문제들은 A라는 공식으로 거의 다 풀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본질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 A라는 공식을 대입해 보지만 답이 나오지 않는다. 공식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A라는 공식으로 풀기 위해서 하나의 <변수>값이 주어져야 하는데 그 값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대략적으로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서 이 값과 저 값을 넣고 이런 저런 말로 이것이 <정답>이다라고 합리화하지만 확신을 줄수는 없었다. 

그런데 누가 B라는 공식(이미 전부터 알려져있었지만, 사람들에게는 주목받지 않은 방식)으로 이 문제를 풀었다. 그것은 <변수>의 값이 무엇이든지 정확하게 정답을 줄수 있는 공식이었다. 작은 문제에서부터 큰 문제에이르기까지, 단순한 문제에서 복잡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명확하게 풀어줄 수 있는 공식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B라는 공식이 알려지고, 그 공식이 인정된 이후로부터 사람들은 B라는 공식을 선택한다. 이 말은 이제 사람들이 A라는 공식을 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이런 비유가 이해를 돕기를 원한다.^^;;) 



20절. 


이 구절은 유명하고 얼마든지 은혜롭게 설명할 수 있는 구절이지만, 지금까지 전체적인 논지의 흐름으로 간략하게 설명하면, 바울 자신은 이제 더 이상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라는 방식>에 대해서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셨듯이 자신도 죽었다는 것이다. 그 방법을 다시 가져오지 않기로 한 것이다. 

이제 자신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라는 방식으로 산다는 것이다. 이 말은 다시는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라는 방식>을 끌어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제부터 바울은 위의 예대로 말한다면 A라는 공식은 버리고, B라는 공식을 가지고만 산다는 것이다. 그것을 성경의 말로 표현하면,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인 것이다.... 이제부터 바울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감을 신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21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율법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추가해야 한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헛된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즉, 이후로는 율법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성도의 삶에 가미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한다. 



[전체적인 정리]


1. 유대인 성도들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줄 알고 믿음으로 나왔다.

2.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게 될 자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얻은 것이다. 

3.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택한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의 방식을 버린 것이다. 

4. 그런데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를 버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택한 자들이 다시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가 더하여 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_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주장이 문제있음을 주장.

5. 나 바울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라는 방법에 대해서는 완전히 버렸고, 이제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해서만 살려고 한다. 이것이 참된 <믿음>이다. 

6. 거짓 복음을 전하는 자들아,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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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4]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해설]


11절. 바울이 모든 자 앞에서 공개적으로 게바를 책망하다.(14절)


위 본문에서 가장 눈의 띄는 것은 바울이 게바를 공개적으로 책망했다는 것이다. 이전까지 바울이 예루살렘의 유력한 자들과 자기 자신을 비교해서 열등하지 않았는 것을 강조해 왔고, 그들로부터 복음의 내용을 전수 받은 것도 아님과 바울의 부르심도 그들에게서 요청된 것이 아님을 강조해서 설명해 왔다. 

그러나 여기서는 한 반 더 나간다. 바울이 게바(베드로)를 책망했던 일을 언급함으로 오히려 바울이 게바(예루살렘에 유력한 자 중 하나) 이상의 사도이기도 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물로 게바보다 바울이 더 높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만큼 서로에게 동등한 권위가 있어서 누구라도 잘못을 행하면 서로 책망할 수 있는 권위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12,13절. 게바다 안디옥에서 이방인과 식사를 자연스럽게 하다가 야고보가 보낸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그 자리를 피한것이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게바가 그와 같은 <외식>을 행함(13절)으로 다른 유대인들도 심지어 바나바까지도 그것에 미혹되었다는 것이다. 게바의 행동이 적절치 않았을뿐 아니라 오히려 그 상황에서 거짓 메시지까지 주변에 주게 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1) 함께 식사하던 이방인들에게는 유대인들과 한 몸일 수 없다는 메시지를 준 것이다. 함께 식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예루살렘으로부터 올라온 유대인들의 눈치를 보면서 자리를 피했기 때문에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상처를 주었고, 이방인과 유대인은 여전히 그리스도 안에서도 하나일 수 없다는 메시지를 준 셈이다. 


  2) 베드로는 자신이 확신한 것에 대해서조차 '유대인들의 눈치'를 봄으로 자신의 확신을 불완전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10장에서 이방인인 고넬료의 집에 가서 식사를 함께 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더럽다고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행 10:15)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행 11:17-18) 『[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1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와 식사한 것에 예루살렘에 소문이 나서 문제가 되자 그 모든 과정을 일일이 예루살렘 공회에서 설명함으로 <이방인에게도 구원얻는 믿음을 주셨다>는 결론을 내게 된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즉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이방인까지도 유대인들과 똑같이 구원하신다는 것을 몸소 경험하고 증언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지금 안디옥에서 유대인을 두려워한 나머지 자리를 피하는 일을 벌인 것이다. 


이것은 베드로가 복음 안에서 가지는 확신을 온전히 붙잡지 못하고 유대인의 관습과 율법에 매인 행동을 함으로서, 베드로가 전한 복음이 불완전한 것처럼 들려지게 하는 큰 잘못을 한 것이다. 


14절.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3) 베드로의 이와 같은 외식은 다른 유대인들과 심지어 바나바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베드로의 행동 하나가 교회 안에 상당히 큰 메시지를 전한 꼴이 되었고, 그릇된 베드로의 행동으로 안디옥 교회의 중심적인 사람들을 함께  외식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 사건은 상징적 사건이 되고, 하나니의 복음을 훼손 시키는 사건이 되었다는 것을 바울이 간파하고 개인적인 책망이 아니라, 모든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책망함으로 베드로의 잘못을 지적할 뿐 아니라 안디옥 교회 전체에 <교육>을 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묵상]


1. 바울은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게 함으로 자신이 그리스도의 종, 즉 그리스도의 복음의 종임을 강조했다.(갈 1:10) 헬라인 '디도'에 대해서 '할례'를 요구하는 유대인들에 대해서 바울은 굴복하지 않고 할례를 행하지 않았다.(갈 2:3-5) 그러나 베드로는 달랐다. 그는 유대인들을 거스르기 싫어서, 그리스도의 복음에 충실하지 못했다.(갈 2:12, 14) 그럼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복음의 내용은 불충분한 것이 되고 말았다. 


2. 바울은 베드로 개인의 잘못을 개인의 문제로만 보지 않았다. 그것은 그 한 사건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과 영향력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와 같은 부정적인 영향력이 교회 안에 미쳤다. 그랬기 때문에 전체를 향한 공개적인 책망을 하였다. 

물론 바울이 베드로를 치리한 것은 아니지만, 교회는 영적인 지도자들을 통해서 그릇된 일에 대해서 개인적인 권면을 통한 훈계도 필요하지만, 공개적인 책망을 통해서 교회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공개적으로 드러내야 할 때가 있다. 이것을 치리라고 하는데, 가능한 치리 해야 할 일이 없도록 해야 하지만, 만약 그 잘못이 상징성이 있고, 부정적인 파급효과가 크다는 공적 치리를 통해 교회를 순결하게 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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