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정리]


[부부와 결혼 문제에 대한 답변 형식]

1. 정식으로 자기 남편, 자기 아내를 두라.(결혼하라) 결혼은 서로에 대한 구속(4절)과 의무를 전제로 하지만, 음행을 피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라고 권면한다.

  1) 혹 분방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기도하기 위해서만 가능하다. 절제하지 못함을 사탄이 시험하지 못하게 하라. 바울은 자신과 같이 혼자 있기를 추천하지만, 누구나 그럴수는 없으니 자기 은사를 따라서 하라.


2. 가능하면 현재 있는대로 살라. 아직 결혼하지 않았거나 과부라면 굳이 결혼하려고 애쓰지 말라. 그러나 절제할 수 없다면 결혼하라. 결혼한 사람들은 나뉘기를 바라지 말라. 서로 버리거나 갈라서지 말라. 

  1) 지속적인 결혼유지보다 더 중요한 원칙은 거룩하게 되어지는가이다.(14절) 거룩하여 지는 과정에서 갈라지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하기를 원하시지 다툼속에서 그렇게 되기를 원치 않으신다.(15절) 아내들아, 네가 남편을 구원할지.. 남편들아, 네가 아내를 구원할지 누가 알겠는가?


3.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네 상황을 받아들이라.

  1) 할례자도 아무것도 아니고, 무할례자도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그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다.

  2) 네가 종일때 부름을 받았느냐? 주 안에서는 종도 자유자요, 자유자도 주 안에서 종이다. 너는 세상에서는 종일지라도 사람의 종이 되지 말라.(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4. 각각 부르심을 받은 대로 하나님과 함께 지내라.(24절. 17절, 20절)


5. 결혼이라는 문제를 생각하기 전에 임박한 환란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먼저 인식해라.

  1) 아내에게 매인 자는 놓이기를 구하지 말고, 아내에게 놓인 자는 아내를 구하지 말라. 하나님의 법 안에서 장가를 가든 안가든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장가를 간 사람에게 육신의 고난이 더 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2) 이 땅의 외형은 모두 지나가는 것이니(31절) 있는 자들은 없는 자처럼 생각하고 살아가라. 어떤 것이든 있다고 너무 즐거워할 필요도 없고, 없다고 불행해 할 필요도 없다. 

  3) 그런데 장가가고 시집간 사람들은 결국 자기 남편과 아내를 기쁘게 하기 위해 더욱 힘쓰는 것만은 사실.

  4) 결혼은 하면 잘 하는 것이고 결혼을 하지 않는다면 더 잘하는 것이다.(38절) 남편이 죽어 재혼을 해도 좋지만 바울 생각에는 그대로 있는 것이 더 좋을 수 있다.  



[생각 정리]


1. 결혼 혹은 이혼 문제가 큰 이슈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정'은 큰 고민거리 중 하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성도들은 이미 가정을 이룬 상태에서 신앙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서 이미 결혼한 가정은 신앙이 없는 남편 혹은 아내와의 관계에서 어려움이 생겼을 것이다. 그리고 결혼을 앞둔 청년들의 입장에서는 결혼할 배우자를 찾는 것이 매우 
까다로운 것이 되고 말았다. 이유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때문이었다. 

믿지 않는 남편 혹은 아내로 인해서 갈등이 발생한 사람도 적지 않았을 것이고, 신앙이 없는 사람과 결혼하지 않겠다는 청년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로 힘들어 하는 청년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신앙이 있다고 하면서, 그것과 상관없이 배우자를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바울을 무엇이라고 권면하고 있는가? 결혼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부름 받았을 때의 모습으로 살아갈 것을 권면한다. 이는 혹 결혼을 하지 못하더라도, 아니면 신앙으로 인해 남편 혹은 아내와 헤어져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너무 비참해 하지 말라는 것이다. 억지로 결혼에 매이지 말라는 것이다. 

반면에 결혼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억지로 깰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 관계 속에서 믿지 않던 배우자가 믿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박영선 목사의 말씀처럼, 텍스트를 가진 자가 어떤 컨텍스트 속에서도 텍스트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자가 되라는 것으로 이해된다. 결혼이라는 상황, 신앙으로 인해 이혼이라는 상황, 결혼할 수 없음 등과 같은 상황이 나타날 수 있지만, 그 다양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텍스트를 가진 자로서 컨텍스트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것으로 성도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으로 들린다. 


(고전 7:17)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고전 7:18-19) 『[18]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19]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2. 결혼 문제뿐 아니라 할례를 받았느냐 안받았는냐? 종이냐 자유자냐에 대한 논의도 함께 있었다.


이 논의도 마찬가지다. 바울은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서로 그리스도 안에서 타인이 될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한다. 유대인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은 이방인으로서 족하다는 것이다. 종과 자유인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할 수 있다면 자유인이 되도록 하라고 하지만, 종이라고 해서 신앙 생활에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즉 종이 되어서도 우리는 올바른 신앙 생활을 할 수 있고, 무할례자가 되어서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전혀 손색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혁명을 말하지는 않는다. 절대적 가치로서의 컨텍스트를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텍스트(복음)를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어떤 조건과 상황 속에서도 신앙생활을 하는 것에 제한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컨텍스트는 점점 나아져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컨텍스트가 완전한 시대는 오지 않는다. 


(고전 7:20)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고전 7:21-23) 『[21]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22]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고전 7:24)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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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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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시대에는 성경의 사본을 아름답게 꾸는 것이 유행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양한 서체와 그림을 통해 사본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 중에 보존되어 있는 사본 중 가장 아름다운 서체라고 평가 받고 있는 것은 <켈즈 사본>이라고 합니다.

 

신앙심이 예술의 경지에 까지 이른 작품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구글에서 검색한 사진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켈즈 사본은 가장 아름다운 중세의 예술품 중 하나이긴 하지만, 그것은 무엇보다도 신약성경의 한 부분이고, 그 예술은 복음서를 장식하기 위한 것이었다. 위의 그림에 나온 페이지는 마태복음 24장 19-24절이다. 각 절의 첫 글자를 문양모양으로 그린 것이다.(잘 보이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켈즈 사본은 라틴어로 된 네 복음서를 담고 있다. 이 책은 주후 800년경에 스코트랜드의 서해안에 위치한 아이오나 섬에 있는, 성 콜럼바가 세운 한 수도원에서 만들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바이킹의 침략을 받아 수도사들이 켈즈에 있는 아일랜드 사원으로 도망가서 그 책을 완성했다. 1006년에 두달 동안 도둑을 맞은 적이 있어고, 그 때 표지와 몇 페이지를 잃게 되었으며, 1661년에 더블린에 위치한 트리니티 칼리지 도서관에 기증되어 지금까지 진열되어 있다.

켈즈 사본의 필체는 최상급에 속하고 그 장식 또한 훌륭하기 그지없다.

"거의 각 페이지마다 다른 디자인과 다양한 색채가 등장한다... 훌륭한 장인기술이 당신을 둘러싸고 있지만, 당신은 그것을 알아채지 못할지 모르겠다. 그것을 좀 더 면밀히 살펴보라. 그리하면 예술의 전당 속으로 들어가게 되리라. 당신은 그토록 복작하고 섬세하고 미묘한 디자인, 수많은 장식 매듭과 고리, 너무도 생생하고 참신한 색채를 파악하게 되어 그것을 인간이 아닌 천사의 작품이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12세기 웨일즈의 성직자요 역사가였던 제럴드가 했던 표현인데, 아마 켈즈 사본을 묘사한 대목으로 보인다.

이 사본의 장신은 너무도 복잡다단해서 확대경을 써야 잘 볼 수 있을 정도이다. 당시는 물론 확대경이 없던 시대였지만 말이다. 각 복음서의 첫 마디는 너무도 화려하고 정교하게 장식되어 있어서 텍스트를 거의 읽을 수 없을 정도이다. 동방과는 달리 서방에서는 미적인 면이 실용적인 면보다 더 중요시되었다.

성경번역의 역사, 래리 스톤 저, 포이에마, p106-108.

 

[개인적인 생각들]

1. 종교심을 동기로한 것들 속에서 예술적 가치를 생산하게 된다. 이것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술력에서 나왔다기 보다는 장인으로서의 기술과 더불어 종교적 열정과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창조물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종교심을 읽어버린 현대의 과학과 기술이 과연 역사에 남을 예술과 문화를 생산해 낼지 의심이 간다.

2. 극도의 종교심과 재능은 텍스트를 훼손시킨다. 켈즈 사본은 최고의 서체로 인정받는다. 너무 정성을 들이고 꾸민 글씨는 본래의 텍스트를 거의 읽을 수 없도록 만들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과도한 열정과 능력이 본래의 텍스트를 감출수 있다는 것을.

  중세는 기독교 사회고, 그것은 과도하게 종교적인 열심과 열정으로 흐른 사회였다. 성경의 내용을 과도하게 지키려고 하다보니, 평민들이 성경을 읽지 못하게 하는 방식으로 흘렀다. 그래서 교회 안으로 성경 이야기를 담은 성화가 텍스트의 자리를 대체하게 되었다. 과도한 열심이 텍스트를 감춰버린 것이다.

3. 과도한 종교적 열심과 재능은 예술로 승화되고, 반면 과도한 종교적 열심과 재능은 텍스트를 훼손한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반면 예술을 배격하여 텍스트에만 집착하면 건조하고 딱딱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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