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해설]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하고 있는 권면은 개인적인 경건을 위한 권면은 아니다. 공동체 안에서 성도 간에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권면이다. 6장 1절이 '한 사람의 범죄'한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을 때 교회 공동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권면하고, 6장 2절에서는 성도 중 누가 자신의 짐을 지는 것이 힘겨워할 경우 그 짐을 서로 져주라는 권면을 하고 있다. 


교회는 지상의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이지만, 여전히 '죄'가 있고, '연약함'이 있다. 죄의 문제를 다룰 때, 그 죄를 범한 자를 온유한 심정으로 바로 잡는 것이 우선이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서는 안된다. 그 죄가 드러나게 된 <공동체>의 문제도 개선되어야 한다. 죄는 그냥 발생하지 않는다. 그와 같은 토양이 마련되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자란 것이다. 그와 같은 토양이 형성되도록 방치한 공동체도 문제가 없지는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식이 교회 공동체 내에서 죄를 다루는 방식이다. 


또 다른 문제는 <연약한 지체>에 대한 교회 성도들의 태도다. 그들의 연약함에 대해서 공동체가 함께 감당해 주어야 한다고 바울은 말한다. 각자 개인의 짐을 개인에게만 두어서는 안된다. 기본적인 원칙은 자기의 일은 자기가 해야 한다.(각자 자기의 일을 돌아보는 것이 기본이다.) 그러나 개인의 역량이 부족할 수도 있고, 개인의 주변 환경이 그것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될 수도 있다. 그와 같을 때, 교회 공동체는 그 사람의 연약함을 보고(게으름이 아니다.) 남의 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 짐을 함께 져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한 몸을 이룬 지체다. 지체가 지체를 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강한 지체가 약한 지체의 부족함을 보완하는 것은 한 몸으로서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래야 한 몸이라 말할 수 있고, 한 몸은 당연히 그렇게 한다.  


[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자랑하지 말고 교만하지 말라는 바울의 권면이다. 자랑할 만한 것이 있을 것 같을 때에라도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만 그렇다고 생각해야지... 다른 사람들에게 모두 자랑할 만큼 스스로 높이지를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높이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 주님도 사람들에게 상석에 앉지 말고, 낮은 곳에 앉으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높여서 자리를 옮겨주면 모르지만, 괜히 높은 곳에 먼저 앉다가 나중에 낮은 자리로 쫓겨나게 되면 부끄러운 일이라고 하셨다. 


연약한 자의 짐을 많이 져주었다고 할찌라도 그것이 자랑이 되지 못하도록 늘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강한 자일수록 자신의 일을 늘 살피어, 겸손해야 함을 바울은 권면하고 있다.


[묵상] 


1. 바울의 권면은 개인 경건의 권면이라기 보다는 공동체 안에서 성도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2. 죄를 범한 자에게 대해서는 바로잡도록 하고, 공동체의 경계를 삼아야 한다. 


3. 연약한 자에 대해서는 서로 짐을 져주는 관계를 맺어야 한다. 남의 일처럼 여겨서는 안된다. 


4. 능력있어서 자신의 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까지 섬긴 자는 교만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교회 공동체는 강한 자도 있고 약한 자도 있다. 모든 사람을 공평케 만드는 곳이 아니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는 약해도 절망할 필요가 없고, 강해도 자만할 수 없는 곳이어야 한다. 약한 자도 함께 존중받으며 공존할 수 있는 공동체여야 한다. 강한 자의 능력은 섬기기 위한 능력으로 인식되어야 하는 곳이 교회 공동체다. 

교회 공동체는 심지어 '죄'가 일어나는 곳이지만, 그 죄를 일으킨 사람을 '옳게 세우는 곳'이며 심지어 그 한 사람의 죄로 인해 교회 전체가 새롭게 갱신되는 곳이다. 교회를 이런 공동체여야 하는 것이다. 



지상의 교회 공동체에 죄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습니다. 또한 지상의 교회를 세상의 어떤 공동체보자 강한 공동체로 만들려고하는 시도도 위태롭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교회는 '죄'와 '연약함'을 부정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세상의 여느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죄'와 '연약함'으로 불완전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선'을 만들어 내는 공동체가 바로 이 땅의 교회 공동체가 지향해야 하는 목표입니다. 한 사람의 죄를 통해 공동체의 자정능력을 키우고, 한 사람의 연약함이 공동체의 한 몸 됨을 드러냄으로 불완전하지만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죄와 연약함을 부정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려는 것이 아니라, 죄와 연약함을 거쳐서 '하나님 나라'에 이르려 하는 것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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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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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5장은 1장부터 이어져 오는 이야기의 연속입니다. 1,2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천사와 비교해서 천사 우위에 있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3장에서는 모세와 비교해서 모세(하나님의 집의 종) 우위에 있는 예수그리스도(하나님의 집의 아들)를 소개합니다. 4장에 이르러서는 <안식>에 대한 주제로 넘어가면서 참된 안식을 이스라엘이 얻지 못했지만, 그 아들의 언약을 믿고 의지하는 자는 참된 안식에 이르게 될 것을 말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 중간에 완고하게 되어서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거역한다면 광야에서 엎드러진자와 같이 안식에 이르지 못할 것을 경고하신다.)

오늘 5장은 천사와 모세에 이어 대제사장이신 예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이라는 것이지요.(대제사장 보다 월등하지만, 그것을 강조하기 보다는 그와 같은 분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유대인에게 대제사장은 아론처럼 하나님의 부르신 자에 한해서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친히 부르시어 내 아들이라고 하셨다. 더불어 예수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제사장이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고 있다.

이것보다 더 강조하려고 하는 것은 이미 구약시대부터 내려오던 대제사장의 역할은 특별하지만, 그 자격됨에 대해서는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대제사장이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기때문이다.(2절) 그래서 백성을 위해서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속죄제를 드려야 할 존재가 대제사장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대제사장을 세우실 때, 대속해야 할 사람과 대속의 과정을 도와야 할 사람의 격차를 두지 않았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대속해야 할 사람을 능히 용납하게 하기 위함이었다.(대속의 과정을 돕는 본인도 연약함에 휩싸여있는 존재니까) 하나님은 일부러 다른 사람과는 절대적으로 구분되는 사람을 제사장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같은 연약한 자를 부른 것이다. 왜? 같은 처지에 있으므로 해서 능히 용납하게 하시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우리와 절대적으로 다른 존재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와 같은 존재가 되도록 하셨고, 우리와 같은 연약함이 되도록 환경을 만드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심한 통곡과 눈물과 간구와 소원을 올리면서 살수 밖에 없도록 하셨다.(7절) 그리고 그 아들되신 예수님은 고난으로 순종을 배우셨다. 예수님도 연약함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은 무식하고 미혹된 우리 인생을 용납하실 수 있으신 것이다. (이 표현은 능력의 측면이라기 보다는 정서적 동질감을 강조하는 표현일 것이다.)

[묵상]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는 아론의 혈통을 따라 온 분은 아니지만,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전혀 다른(그러나 아론보다 더 본질적 제사장인) 혈통을 따라 온 대제사장임을 지적한다. 더불어 그 예수가 우리와 같은 인간의 연약함을 입고 왔다는 것이 우리가 메시야로 받아들이기에 부족한 조건으로 이 땅에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필요충분의 조건(연약함에 휩싸여야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용납할 수 있기에)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 많은 사람이 예수를 좇기도 했지만, 많은 사람이 예수를 버리고 떠나기도 했다. 예수가 자신의 기대를 만족시켜줄 때(능력자와 강한 자로 나타날 때)는 그를 따르다가도 그가 무력한 자, 연약한 자로 드러나게 될 때는(십자가에 달리실 때) 모두가 그를 떠나 버렸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무력함에 휩싸였기 때문에, 통곡과 눈물과 간구와 소원을 달고 살아야 하는(살면서 기도제목이 많은_평생 잘 안풀리는 성도와 같이) 삶을 살아기 때문에 그는 진실로 메시야 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의 무력함과 연약함이 그가 진실로 모든 사람들의 대제사장이 되기에 합당함을 증거해 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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