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기

이사야가 소명을 받은 시기는 웃시야 왕이 죽는 해인 주전 739년경이다. 이사야의 예언 사역은 적어도 히스기야 시대까지 적어도 주전 701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공격한 뒤까지 이어졌음을 암시한다.

 

  1. 역사적 정황

시기는 후에 북왕국의 침입, 사마리아의 몰락 그리고 유다의 엄청난 파괴를 주도산 신앗수르 제국의 발흥과 패권을 경험한 격동의 세기였다.

이사야의 소명 시기는 공교롭게도 디글랏 빌레셀 3세가 주전 740-738년에 1 서부 원정을 지휘하면서 앗수르가 새로운 위협의 대상으로 등장한 일치한다. (성경배경주석, 구약 841, IVP)

 

  1. 역사적 분기점

(1) 1:1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를 걸쳐 이사야가 받은 예언

(2) 6:1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3) 7:1 아하스 때에 아람의 르신과 이스라엘 베가가 올라와 예루살렘을 공격

  - 아하스 왕과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림(7:2)

  - 이사야가 아하스 왕에게 말씀을 전함(지지 않을 것이니 견고할 것을 격려)

  - 아하스는 믿지 못하고 여전히 두려워 (흔들림)

  - 이사야의 예언: 열국의 심판 / 앗수르를 도구로 사용하신다.(열방을 심판할)

     바벨론도 마찬가지, 모압, 암몬, 블레셋… 애굽도 마찬가지다.(애굽을 의지 말라)

(4) 36:1-37 히스기야 14 앗수르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침공함

  -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앗수르로부터 구원받음(앗수르의 심판)

(5) 38:1-39:8 히스기야의 발병과 회복 / 바벨론의 사자들의 방문(바벨론 포로 예언)

(6) 40-66 희망과 회복의 약속(구원자의 약속) / 바벨론 포로로부터의 회복

  - 고레스를 도구로 쓰시겠다.(페르시아. 45)

  - 바벨론을 심판하시겠다.( 47)

  - 이스라엘의 회복(49)

  - 고난 받는 종을 통한 회복(53)

  - 회복으로의 초청(55)

 

  1. 이사야의 내용에 대한 간략한 정리

이사야는 웃시야 말렵부터 히스기야 왕까지 사역했던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에 대한 내용이다. 유대 왕조가운데 그래도 인정받았던 웃시야 왕의 죽음을 통해서 역사적 흐름이 꺾였다고 인식한 이사야는 암울한 상황 속에서 말씀을 받는다. (당시 유다의 상황은 암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상황 속에서 이사야는 소명을 받는다.

그러나 이런 영적 상황과 맞물려 국가적 상황도 위태롭게 되었다. 그것은 아하스 때에 아람(르신) 북이스라엘(베가) 유다를 공격한 것이다.  아하스는 정신을 못차리고 두려워할 오히려 이사야 선지자는 , 하나님의 전적 구원을 선포하고 믿을 것을 요구했으나 아하스는 믿지 못한다.  그래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증거를 선포하지만, 여전히 아하스 왕은 믿기를 어려워 한다.

 

이런 정황 속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심판에 대한 이야기를 하신다.(10-35)

앗수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 분노를 표출하신다. 사용하신후 앗수르도 심판하신다.  바벨론도 심판하신다.  블레셋을 심판하신다. 모압을 심판하신다.  에브라임과 다메섹을 심판하신다. 구스와 애굽도 심판하신다. 두마와 아라비아에 관한 경고, 셉나에 대한 경고, 두로와 시돈에 대한 경고, 모압… 에브라임의 밟힘. // 애굽과의 맹약은 헛되다.(애굽의 도움을 의지하지 말라)

 

히스기야가 왕이 되었을 때에도 앗수르의 위협이 있었다.(36) (아하스 때에는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위협이었으나, 때는 앗수르의 도움으로 구원을 받았다.(왕하 16) 이제 앗수르에 의해서 유다가 멸망의 위협에 처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아하스 왕처럼 외부의 힘을 빌리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였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기도를 통해 앗수르로부터 유다를 보호하시고, 앗수르를 크게 심판하셨다.

 

그러나 하나의 잠재적 위험이 히스기야 때에 있었다.(38) 그것은 히스기야가 병으로부터 고침을 받고 회복되는 과정에서 바벨론의 신하들의 방문을 받았고, 그가 바벨론의 신하들에게 궁중 소유를 전부 보여주었다.(바벨론을 우방국으로 성급히 봤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앞으로 펼쳐지게 바벨론에 의한 침략의 전조와 같은 일이 되고 말았다.

 

이사야 40 이후부터는 이스라엘의 회복(바벨론 포로의 상황을 염두해 ) 대한 메시지가 주를 이룬다.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구원자(하나님의 사자) 등장한다. 오히려 사건을 통해서 이전의 백성으로서의 회복이 일어날 것이고 완전한 통치자(구원자) 것을 예고한다.  지금이라도 하나님의 뜻을 알고 돌이켜 앞에 나오기를 요청한다.( 55)



[참고: 이사야서의 저자와 목적 문제]

이사야서 40-66장이 8세기의 이사야에 의해서  쓰여졌든지 아니면 후대에 그의 통찰력을 적용한 다른 저자에 의해 쓰여졌든지 간에 장들은 주로 포로시대의 공동체에게 말해진 것임이 분명하다.(독자의 상황) (E. J. Young 1958,71) 지적한 바와 같이 1-39장은 '앗시리아 시대에서 갈대아 시대로 다가가는 계단을 제공해 준다. 양자는 함께 속해 있다. 왜냐하면 전자는 후자의 준비이며, 후자는 전자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 최신구약개론, 레이모든 딜러드 /트럼퍼 롱맨 공저(박철현 번역), 크리스찬 다이제스트(414)

 

  * 신명기의 34장을 모세가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오경에 대한 모세의 저작을 받아들이는 것에 문제가 없듯이, 40-66장을 후대의 사람이 이사야의 통찰을 적용하여 작성했다고 본다고 하더라도 이사야의 저작을 인정하는 것에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40-66장의 영감에 있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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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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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한 장]


1. 화가 가득한 피의 성에 대한 묘사(니느웨의 멸망 모습)


  1) 무수한 시체들이 시체들에 걸려 넘어진다. 

  2) 이는 마술에 능숙한 미모의 음녀가 많은 음행을 함이라. 

: 그가 음행으로 여러 나라를 미혹하고 그의 마술로 여러 족속을 미혹하였다. 


* 니느웨는 여러 민족을 미혹하고 넘어뜨렸음을 묘사한다.


  3) 그래서 하나님은 여자가 치마가 들려 얼굴에 이르는 수치를 당하듯 이 나라를 벌거벗겨 이 나라의 부끄러움을 뭇 민족에게 보일 것이다. 

  4) 니느웨를 곁에서 지켜보던 모든 자들이 도망치며, 니느웨의 황폐함을 애곡할 것이다. 


   (1) 노아몬은 강들 사이에 있어서 그 강과 바다가 그의 방어벽이 되었고

   (2) 구스와 애굽은 그 힘이 강하여 끝이 없고, 붓과 루빔이 그를 돕는 자가 되었으나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들은 포로가 되어 사로잡혀 가고 말았다. 자녀들은 죽임을 당하고 존귀한 자들은 나뉘어졌고, 모든 권세자들은 사슬에 결박되었다. 

   (4) 그러니 너도 자랑하지 말고, 술에 취하여 숨으라. 너도 원수들 때문에 피난처를 찾으리라. 


  5) 다가올 전쟁을 준비하고 대비하라. 메뚜기처럼 네 숫자를 많게 하라. 

  6) 그러나 그 많은 병사들도 메뚜기의 날아감같이 한 순간에 사라져갈 것이다. 

  7) 앗수르 왕이여, 네 목자는 자고 네 귀족들은 누워쉬며 네 백성은 산들에 흩어지나 그들을 모을 자가 없도다.

  8)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부상은 중하다. 

  9) 네가 고통을 당하여도, 너를 돕는자는커녕 너로 인해 고통 당했던 자들이 손뼉을 치며 좋아한다. 



[묵상 한 모금]


1. 니느웨(앗수르)의 멸망을 다룬다.그 멸망을 안타깝게 다룬다기 보다는 고소하다고 여겨지도록 다룬다. 그 동안 니느웨가 힘과 능력으로 많은 주변 사람들을 능멸했기 때문인지, 사람들은 니느웨의 멸망에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민족들은 니느웨를 조롱한다. 전쟁이 임할 것이니, 성을 쌓고 병사를 준비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병사들은 메뚜기 떼가 한 순간에 사라지는 것 같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노력에도 불구하고 니느웨의 멸망을 돌이킬 수 없다고 판단이 들때에라야 할 수 있는 말들을 쏟아낸다.  그 만큼 니느웨의 멸망은 확실한 것이라고 나훔은 보았다. 


2. 마지막 종말의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악인의 멸망을 많은 의인들이 기뻐하며 고소해할 것이다. 그것은 이전까지 악인들의 행태가 얼마나 악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무고한 자를 죽이고 모함했다. 약한자를 두 번 죽이는 행태를 자행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때에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악과 거짓증언들이 난무하기 때문에, 악인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구약은 의인을 이스라엘로 보고, 심판받아야 할 악인은 앗수르였다. 신약 시대로 와서 의인은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 즉 교회다. 반면 심판받아야 할 악인은 특정 대상이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사단과 그 세력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3.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다. 반드시 망할 것이다. 이 확신과 내용이 없다면, 오늘은 사는 하나님의 의지하는 약자들은 절망적이다. 사망이 끝이 아니라 부활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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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한 장]


1. 파괴하는 자가 니느웨를 치기 위해서 올라왔다. 

 

  1) 힘을 다해서 성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라.

  2)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 니느웨의 멸망을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니느웨로 인하여 많은 고통을 당했기 때문에 니느웨의 심판은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3) 치열한 전쟁의 모습(병사들의 싸우는 모습, 병거들의 움직임들)을 묘사하면서, 결국 강들의 수문이 열리고 왕궁이 소멸되며 왕후는 벌거벗은 몸으로 끌려감으로 시녀들이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장면을 묘사한다. 



2. 하나님이 니느웨를 대적함으로 말미암은 니느웨의 형편. 


  1) 니느웨는 예로부터 물이 모인 곳 같은 곳인데, 이제는 모두 도망하니 서라고 해도 돌아보는 자가 없다. 

  2) 그 무궁히도 많았던 은과 금은 노략당했다. 

  3) 니느웨가 완전히 공허하고 황폐하게 되었더니 주변 사람들이 이 모습에 놀라고 떠는 모습을 묘사한다. 

        -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힌다. 모든 낯이 빛을 잃도다.

  4) 전에는 니느웨과 숫사자와 암사자처럼 자신의 굴에 먹을 것을 많이 채워넣는 존재였는데, 이제는 전혀 그렇지 못함을 말한다. 니느웨가 더 이상 사자이지 못하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라 보인다. 


  5) 하나님께서 니느웨의 대적이 되시어 병거를 불사르고, 젊은 사자들을 칼로 멸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 니느웨가 이와 같이 멸망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대적하시고 심판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한다. 




[묵상 한 모금]


1. 거대하고 강한 나라 앗수르(니느웨)라도 영원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나라가 홀연히 망하게 되어 완전한 약탈을 당하게 될 것임을 보여준다. 이 땅에 영원한 나라는 없다. 영원히 강대한 나라도 없다. 세계 역사는 제국이라 하더라도 흥망성쇠가 있음을 보여준다. 앗수르는 젊은 사자처럼 강했고, 아무도 상대할 수 없을 만큼 잔혹했다. 그런데 그 나라도 결국은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영원한 나라, 영원한 왕조, 영원한 왕조는 없다. 마지막을 생각해야 한다. 멸망을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멸망을 받아들이고 대비해야 한다. 멸망하지 않겠다고 무리하게 잔혹하게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고 하는 자는 다음 권력에 의해서 더욱 비참한 종말을 기하게 될 것이다. 끝을 생각하지 않은 정권처럼, 무모한 정권도 없는 것이다.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다.


2. 제국은 망함은 단순히 자연적 멸망은 아니다. 시대적 흐름만도 아니다. 역사적 숙명만으로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앗수르의 멸망에 대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이 직접 그들을 대적하셨다고 표현하고 있다. 자기 백성들을 괴롭힌 것에 대한 보복이며, 악한 행위에 대한 심판인 것이다. 영적인 면에서, 신학적인 면에서 그렇게 해석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너무 협소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개인적인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으로 만 생각해서도 안된다. 한 나라, 한 제국, 한 시대를 움직이시는 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스라엘의 멸망이후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함께 사라져버린게 아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영토를 넘어 온 세상의 주인이라는 것을 드러나고 밝혀지게 된 것이다. 크신 하나님. 세상을 운행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한다면, 우리 일상의 작은 일들에 대해서는 기도가 응답되든 그렇지 않든 좀 더 초연해 질 수 있다. 여전히 하나님의 크심에 대해서 존경과 경외를 드리면서 말이다. 


이 나라의 지금 모습을 보면, 사방이 막힌듯 답답하다. 출구가 없다. 비상구도 없는 것 같다. 때론 숨죽이고 살아있는 것이 오히려 최선이라는 생각도 든다. 때를 기다리기 위해서 말이다. 미리 용쓰다가 나자빠지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하나님은 크시다. 하나님은 섭리하시고 운행하신다. 믿음은 소망가운데 기다림을 낳는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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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한 장]


1. 니느웨에 대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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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나님의 분을 쏟아 내시는 장면들


  1)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다. 

  2) 자기를 거스르는 자들에게, 대적하는 자들에게 진노를 품으신다. 

  3) 회오리바람이나 광풍에 있는 구름은 그의 발의 티끌에 불과하다. 

  4) 그는 바다를 꾸짖고, 말리시며 강을 말리신다.

   * 바다는 통제가 되지 않는 곳이고, 그 물의 풍성함을 마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일을 대수롭지 않게 행하시는 분이시다. (마 5:27)

  5) 산들이 진동하며 작은 산들은 녹고, 땅은 솟아 오른다. 


3. 누가 능히 하나님의 분노 앞에 설수 있겠는가! 누가 그 진노를 감당하랴!


4. (그러나)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리라.

  * 하나님은 잔혹한 심판을 말씀하시면서도 한 줄, 자기를 의지하는 자는 잊지 않으심을 말씀하신다. 혹 세상의 큰 심판 가운데 함께 공존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염려하게 될까봐 그러신지.. 늘 한 두마디씩 언급하신다. 


5. 그 범람하는 물로 그 곳을 진멸하시고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시리라.

  * 노아의 홍수 사건을 연상하게 된다. 물이 범람함으로 니느웨를 진멸함으로서 노아 홍수를 당시 죄악된 세상을 심판하셨던 것과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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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다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서 대적하지 못할 것이다. 


  1) 그를 온전히 멸하실 것이기에 다시 재난이 있지 않을 것이다.(완전한 멸망으로 인해, 재기 불능)

  2) 악을 꾀하는  한 사람이 너희 중에서 사악한 것을 권할 것이지만, 그들이 비록 강하고 많을 지라도 반드시 멸절 당하리라. 다시는 괴롭히 일이 없을 것이다. 

  3) 이제 네게 지운 그의 멍에를 하나님이 깨뜨리고 네 결박을 끊으리라.


  * 이스라엘이 여전히 앗수르의 강함을 의지하고 기대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이번에 완전하게 멸망시키심으로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도록 할 것임을 확인하신다. 그로부터 당했던 결박을 이번 기회에 완전히 끊어 버리실 것이다.(이스라엘은 앗수르의 결박을 결박으로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오히려 든든한 배경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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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앗수르의 영광은 이제 끝났다. 


  1) 네 이름이 다시는 전파되지 않을 것이다. 

  2) 내가 네 신들의 집에서 새긴 우상과 부은 우상을 멸절하며 네 무덤을 준비하리니.

  3) 네가 쓸모없게 되었음이라. 


8. 이제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지어다.

 

  1)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2) 이제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들이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못하리니 절기를 지키고 서원을 갚으라.


  * 앗수르(니느웨)의 멸망이 곧 이르게 될 터이니, 니느웨를 핑계삼아 절기를 지키지 않고, 서원을 소홀이 여겼던 것에 대해서 다시 제대로 지킬 것을 명하신다. 핑계거리를 없애심으로서 유다로 하여금 더이상 변명하지 못하도록 하신다. 


[묵상 한 모금]


1. 하나님은 크고 두려우신 분이다. 그것은 그의 진노를 보면된다. 그가 진노하실 때, 어디까지 동원할 수 있는가를 보면 그의 권능을 가늠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바다를 말리고, 산들을 녹인다. 땅을 솟아나게 한다. 모든 피조세계가 하나님의 진노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음을 말한다. 


국방부를 움직이고, 국정원으로 조정할 수 있으며 모든 국가기관을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것은 그가 태통령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움직일 수 있는 만큼이 그의 권한이 되고, 보통 위기의 순간(전쟁, 비상사태 등) 그 권한은 최대치가 된다. 요즘 대통령의 권한이 최대치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려한다. 그것은 지금이 평시가 아니라, 위기 상황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이념적 위기상황... 그것이 대통령 권한의 최대치까지 인정해 버리는 것은 아닌가 싶다. 

문제는 지금이 정말 특수상황인가와 아무리 특수상황이라고 해도 그 절차의 중요함마져 함부로 훼손한다면 그것은 독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2. 하나님은 엄청난 진노와 심판을 말씀하시면서도, 자기 백성들(자기를 의지하는 자들)에 대한 안전에 대해서는 짧게라도 분명하게 언급하고 지나가신다. 자신의 뜻을 비추시고, 자신의 구원을 알리시고, 조금만 참고 기다리라는 위로를 하시는 하나님의 따듯함을 발견하게 된다. 


3. 하나님이 심판하시면, 재기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 놓으신다. 앗수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설마 설마 하겠지만, 결국 완전히 멸망시키신다. 역사 속에서 더이상 앗수르의 이름을 듣지 못하게 될 것이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백성을 압제하는 자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이와 같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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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창한 가을 하늘입니다. 맑은 정신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아요.

 

[정리1. 내용을 잘 정리하면서 읽기]

 

1. 유다와 아하스에 대해서
  1) 유다 왕 요담의 아들로 20세에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16년간 다스렸다.
  2) 다윗과 같지 않고,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지 아니했고 이스라엘 여러 왕의 길로 행하였다.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낸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따라 아들을 불가운데 지나게 하고, 산당들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리게 했다.

 

  [결정적인 사건 하나]
  3) 당시 아람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가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싸우려고 하였다.
  4) 아하스는 앗수르 왕에게 사자를 보내 예물을 주며, 아람과 이스라엘을 치도록 요청함.
  5) 앗수르 왕은 아하스의 요청에 따라 올라와서 다메섹을 점령하고 아람 왕 르신을 죽였다. 
  6) 아하스는 다메섹에 온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을 만나러 다메섹으로 가고, 거기서 큰 제단을 보고 그 양식을 그려 예루살렘에 있는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냈다.
  7) 제사장 우리야는 그 양식을 보고 아하스 왕이 오기 전에 신속하게 그 제단을 만들었다.
  8) 아하스 왕이 오자 그 제단에서 번제물과 소제물을 드리고, 원래 있던 놋제단을 새 제단과 여호와의 성전 사이에 옮겨다고 놓았다.
  9) 앞으로 아침 번제물과 저녁 소제물과 왕의 번제물, 전제물, 소제물을 다 이 큰 제단 위에서 불사르고 제물의 피를 이 단 위에 뿌리고, 놋제단은 내가 주께 여쭐 일에만 쓰게 하라.
  10) 제사장 우리야는 아하스 왕의 명대로 행하였다.
  11) 아하스는 그 이외에서 성전에서 쓰는 물건을 마음대로 옮겼는데, 물두멍 받침의 옆판을 떼내고, 물두멍을 그 자리에서 옮기고 또 놋바다를 놋 소위에서 내려다가 돌판 위에 두었다. 안식일에 쓰기 위해 성전에 건축한 낭실을 앗수르 왕을 두려워하여 여호와의 성전에 옮겨 세움.
  12) 아하스와 관련된 다른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을 보고, 그가 죽고 아들 히스기야가 왕 됨.

[정리2. 내용을 다시 정리하여 내것으로 쓰기]

 

본 장은 유다 왕 아하스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다루고 있다.


아하스 왕은 다윗에 못미칠뿐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북 이스라엘의 영향을 받은 왕으로 평가되고 있다. 예전에 쫓아냈던 이방인들의 가증한 일들을 다시 행하도록 했던 왕으로 평가된다.


아하스에 대한 자세한 일들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언급된 것을 참고하면 되겠지만, 열왕기 저자가 꼭 기록하고 싶은 사건 하나가 있다. 그것은 아하스 왕이 아람과 이스라엘의 연합 공격을 받았을 때,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 앗수르의 힘을 빌리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아하스는 앗수르의 직접적인 도움을 통해 아람을 제압하고 아람 왕 르신이 죽게 되어 국가적 재난을 극복하는 업적을 이루기는 했으나, 오히려 앗수르를 유다 땅으로 불러들이는 명분을 만들어주게 되었다.


아하스는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셋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다메섹에까지 찾아갔는데, 그곳에서 본 큰 제단과 종교의식에 마음이 현혹되어, 유다에도 그 모양과 같은 제단을 만들도록 당시 제사장인 우리야에게 지시했고, 우리야는 그 지시를 그대로 따랐다. 돌아온 아하스 왕은 앞으로는 그 제단에서 제물을 드리도록 했고, 이전에 쓰던 성전의 기물들은 제단 뿐 아니라 물두멍과 놋바다 등 자기 임의대로 아무대나 놓는 무례함을 행하게 된다. 이것이 아하스의 행적에서 저자가 주목하여 보고자 한 것이다.

 

[정리3. 묵상과 적용]

 

1. 이전에 버렸던 것을 다시 들고 나타난 아하스 왕

 

아하스 왕에 대한 평가 중에 주목하여 볼 것은 그는 유다 왕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여러 왕의 길로 행하며 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따라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3절)

 

당시 이스라엘의 여러 왕들이 여로보암의 죄를 떠나지 않고, 이스라엘로 범죄케 하였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유다 왕이 이스라엘 왕의 길로 따라갔다는 것은 심각한 타락을 한 것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쫓아내신 이방 족속의 가증한 일을 따라 행했다는 것은 아하스의 죄악이 얼마나 컸는지, 그가 여호와 하나님을 얼마나 무시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한 마디로 그래도 공부좀 하던 학생(남유다)이 반에 있던 노는 아이들(북이스라엘)과 어울려 그들처럼 되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조폭들(가증한 일을 행하는 이방인들)과도 어울리며 그들처럼 행동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하스 왕은 자신 뿐 아니라, 유다 전체를 탈선으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오랜 시간을 걸쳐서 제거했던(오래 전에 제거하기도 했던) 그것을 다시 들고 나타남으로 그 동안의 수고와 노력을 모두 물거품처럼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역사란 늘 진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국가의 리더로 서느냐에 따라서 진보할 수도 있고, 퇴보할 수도 있는 것이다. 경제는 좋아질 때도 있고, 나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국가적 도덕성과 시민의식은 진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긍정적 진보를 위해서 좋은 리더를 세우는 일에 힘쓰는 것이야 말로 책임감있는 역사의식이 아닐 수 없겠다. 올 해 대통령 선거가 있고, 온 국민이 책임감있는 역사 의식으로 긍정적 진보를 이룰 수 있기를 기대한다. (성도들에게 이런 책임감있는 역사 의식을 가지도록 가르치는 것도 성경을 가르치는 목사의 역할 중 하나라고 본다.)

 

2. 앗수르에 대한 사대주의로 여호와 하나님께 범죄한 왕

 

아하스 왕의 큰 죄 중에 하나는 앗수르를 이스라엘 땅으로 불러들인 일이다. 물론 유다의 생존을 위해서 앗수르의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그 이후 아하스의 행동을 보면 아하스 왕의 마음은 궁여지책으로 앗수르의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기 보다는, 앗수르의 부와 힘을 부러워하고 배우고 따라야 겠다는 의식에까지 갔던 것을 보게 된다.

 

한 마디로 아하스는 앗수르를 추종하는 왕이 되었던 것이다. 앗수르의 제단을 들여왔고, 여호와 하나님의 제단과 기물들을 임의로 변경했다. 앗수르 때문에 말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앗수르에 의해서 밀려나게 된 모습은 참으로 민망한 모습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킬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우리는 누군가의 힘을 의지해야 할 때가 있다. 이웃의 강대국을 의지해야 하기도 하고, 경제를 의지하고 자원을 의지하고 학문을 의지하기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자리를 밀어내는데까지 가게 해서는 안된다. 인간은 홀로 살 수 없으며, 세상은 복잡하기 때문에 여러가지 복합적인 요소와 관계를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은 복잡한 이해 속에서도 어떤 것이든 여호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게 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영적 사대주의며, 우상 숭배며 영적 간음인 것이다.

 

우리는 세상과 손잡을 때, 언제든지 내 편에서 놓을 수 있는 정도 만큼만 의지해야 한다. 그 이상을 넘을 때, 그 손은 결국 하나님과 잡고 있는 그 손을 뿌리치게 만들기 때문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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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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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서 5:5-6

"이 사람은 평강이 될 것이라 앗수르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궁들을 밟을 때에는 우리가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을 일으켜 그를 치리니 그들이 칼로 앗수르 땅을 황폐하게 하며..."

 

여기서 <앗수르 사람>이라는 문자적 표현이 실제로 <앗수르 사람>을 의미하는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역사상 이스라엘이 <앗수르의 침공>에 대해서 성공적으로 방어하고 더 나아가 앗수르 땅을 황폐하게 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자들은 여기서의 <앗수르 사람>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이방 세력>을 통칭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본다.(호크마 주석 참조)

 

따라서 문자적 해석이란

<문자주의>하고는 다른 것이다. 문자적으로 쓰인 표현이 직접적인 표현인지 아니면 상징적 혹은 비유적인 표현인지를 살펴보는 과정이 해석에서 필요하다는 것이다. 미가서 본문에서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해석해야 한다. 이것이 문자적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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