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정리]


1. 내가 너희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너희들이 선호하는 방식(지혜로운 말)으로 가지 않고 <진리선포>(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목박히신 것)로 나아갔기에 나는 두렵고 떨렸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지혜로운 말이 아니라, 진리 선포에 있다. 


2. 그러나 바울이 지혜를 무시하는 것(반지성주의)이 아니다. 다만 너희들이 말하는 세상 지혜와 지혜의 차원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 지혜는 세상이 모르는 것인데(만세전부터 감추어져있었던 것임, 그들이 예수를 죽였을 만큼 이 지혜를 몰랐고 무지했다.) 왜냐하면 이 지혜는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지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알게 된 것이지 세상의 영을 가진 사람은 도저히 알 수 없는 진리이다. 


3. 육에 속한 자는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어리석게 본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적 진리에 이를 수 없기 때문. 



[해설]


우선 바울의 이 세상의 지혜를 무시하는 것과 같은 것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듯 하다. 왜냐하면 이 본문을 근거로해서 인간의 지성 자체를 경계하는 경향이 나올 수도 있고, 또 어떤 광신적인 사람들은 '신비적 지혜'를 말하면서 합리적인 대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의 어처구니 없는 논지의 근거를 이 본문에서 끌어오는 것은 아닌가 싶다.


그렇게 인용하여 쓸 수 있는 구절들이 다수 나온다.

 고전 2: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의 지혜도 아니요

고전 2:7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고전 2: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고전 2: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고전 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면, 과연 바울은 인간의 지혜(그 동안 인류가 축적해온 지혜와 지식들)를 부정하고 있는 것인가? 


고린도전서는 바울의 3차 전도여행 중 <에베소>에 있었던 기간 중에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 전에 바울은 2차 전도여행을 통해서 고린도 지역에서 1년 반 동안 사역을 했던 경험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고린도 교회를 세웠을 것으로 본다.(행 18장) 따라서 그곳이 복음 사역과 관련하여 어떤 곳인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이르기 전에 베뢰아를 떠나 도착한 곳은 '아덴'이었다.(행 17:13-15) 베뢰아에서 유대인들을 피신하여 도망치듯 온 '아덴'에서 바울이 봤던 것은 <우상이 가득한 것>이었다.(행 17:16) 이것을 본 바울은 마음에 격분이 일어났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과 날마다 변론하게 된다.(행 17:17)


(행 17:18-21) 『[18]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19]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20]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21]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그 지역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말과 지식에 대한 자랑이 얼마나 컸을 것인가에 대해서 충분히 보여주는 구절이라 하겠다. 고린도 지역이라고 해서 상황이 많이 다르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자신을 따라다니며 <복음 사역>을 방해하는 유대인들과 전부터 계속 싸워야 했지만, 인간의 지혜(헬라철학)를 말로 풀어내고 더 새로운 지식을 갈망하는 사람들인 이 지역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설득력이 없는 것인지를 몸소 경험했을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어리석게 들렸을 것이다. 신이 육체를 입었다는 것도 이해될 수 없을 것이고, 신이 죽었다는 것오 믿지 못할 일이다. 게다가 신이 부활하여 다시 육체를 입었다는 것은 그들의 지혜로는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복음>은 <능력>으로 나타났고 회심자가 생겼으며 교회는 세워졌던 것이다. 도저히 인간적인 지혜로는 설명하거나 설득할 수 없는 내용인데, 그 중에 일부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믿게 된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지혜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다.(바울은 이것을 체험적으로 안다.) 그런데도 이들 중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설득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은 '하늘의 지혜'(이 땅의 지혜로는 이해 불가능한 내용)를 얻은 것이고, 이것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사람의 노력과 탐구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음. 고전 2:12)를 통해서 된 것임을 바울은 말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2장의 '세상의 지혜'에 대한 말은 이런 맥락 속에서 된 것이다. 따라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세상 지혜의 무용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바울이 말하는 무용론은 '세상의 지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복음을 알수 없다'란 측면에서만 유효한 것이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2장의 내용을 근거로하여 '인간의 지성의 무용론'과 특수한 사람들에게만 '신령한 지식'이 주어졌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경솔하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이 본문 말고도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성적인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과 그 지성을 통해서 사고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뜻을 감추신 분이 아니라 드러내시는 분이고, 그것을 통해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고자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도 안될 것이다. 



[묵상]


1. 우리는 인간의 지성주의는 경계하지만, 인간의 역사 속에서 축적해온 지혜를 존중히 여긴다.


2.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보이신 구원의 지혜는 소수의 제한된 자들에게만 밝히 보이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온 천하에 하나님의 지혜를 밝히 드러내신 것이다. 자신들의 교회만이 그 지혜가 있고, 그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이단으로 봐도 무방하다.


3. 하나님의 지혜인 복음을 믿게 되는 것은 신비로운 것이지만, 신비주의를 추구하지는 않는다. 


4. 우리는 우리의 합리성을 넘어서는 사실과 실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지만, 그것이 지성주의로 흐르지도, 초월주의로 흐르지도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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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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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은총론


[정리]

이성은 납득과 설명을 요구하고, 계시는 복종을 요구하기 때문에 충돌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권위가 누구에게 있느냐의 싸움이 된다고 했다. 그런데 권위는 힘에 의해서 시행되는 것이 아니라, 내용에 의해서 확인되는 것이라고 했다. 


[오늘 다른 이야기]


그런데 그 권위를 내용으로 끌고 가지 못하고, 초월이란 형식으로 권위를 가지려고 하면 문제가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즉, 신앙의 내용을 증명하려고 하는데 상대방에게 납득을 못시키니까... 초월을 입증함으로서 증명하려는 방식으로 가게 된다.(즉, 기적과 같은 방식으로 증명하고 싶어진다는 것)


1. 기독교적 권위를 초월성으로 이해한 곳이 바로 가톨릭(로만 카톨릭)이다. 

  1) 로마 가톨릭은 세계를 초월과 자연의 대립되는 두 영역으로 보았다.(이원론)

  2) 로마 가톨릭의 인간론: 

  인간은 원래 이성적이고 도덕적으로 창조되었다. (중립적인 존재) 그런 상태에서 그것이 선을 좇아갈 수도 있고, 더러운 욕망을 좇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선한 쪽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것이 <덧붙여진 은사>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타락으로 인해 이 덧붙여진 은사가 파괴되었다고 본다. 그러니까 타락 이후의 인간은 덧붙여진 은사가 없는 중성적 입장에서 태어난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적으로 완전하게 선을 행하면 천상의 자리에 이를 수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그러기 위해서는 초월적인 어떤 방법이 동원되어야 한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초자연적인 신의 은혜를 입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은혜를 시여해 주는 곳은 교회고, 그 시여의 방편은 교회의 성례라는 것이다. 


   참고] 연옥: 가장 선하게 살다가 죽으면 가는 곳(초월적 은혜를 배제하고)

          펠라기안주의: 로마 가톨릭은 펠라기안니즘에 많이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중립적 상태에서 태어난다는 것이고,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모범을 보이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대속이 아닌 모범)


  3) 초자연주의와 자연주의가 발생하게 된 과정

로마 가톨릭은 하나님이 전 우주를 통치하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자연과 초자연을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그러나 초자연이 신적 영역이라는 것을 강조하다 보니 자연이란 영역에서 하나님의 역할이 축소되게 된다.(소극적) 그래서 원래의 의도와 다르게 초자연과 자연이 대립되는 개념이 되어 버림(구분->대립) 더 나아가서 자연 속에서는 초월이 없다고 본다. 자연속에서 하나님의 영역을 빼 버림. 자연은 자연의 손에 넘겨지고, 인간도 자연의 영역이 된다. 그리고 영원한 가치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초월에 귀의해야 했다.(교회에 귀속됨)


  4) 그러면서 하나님의 계기가 자연 속에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놓치게 됨. 자연의 참된 가치를 놓치게 된다.(자연 세계에 대한 가치) 자연보다 초월이 우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심지어 종교재판이라는 것까지 생기게 되었다. 종교 재판에서 항변하는 방법으로 결투를 신청할 수 있다는 것이다.(초월적인 방식으로 심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함)


2. 이와 같은 기독교의 초월주의로 말미암은 부작용

  1) 난관과 고난을 <죄>의 문제로 귀결시키려는 경향, 초월주의적 성향... 회개하자, 기도하자라는 답변으로 간다.

  2) 난관을 만났을 때, 죄의 문제로 인한 것도 있지만(요나), 극복해야 하는 과정으로 겪는 경우도 많다.(욥, 요셉)

  3) 죄값을 받는다? 벌을 받아 행실을 고친다?(징계)

    예] 죄의 결과들이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평생 죄를 짓지 않도록 경각심이 일어나게 한다. 


3. 초월과 자연으로 세상을 구분하면서 생기는 문제


  1) 이신론: 자연에 법칙을 심어 놓고 멀리 물러가 계신 하나님 / 

  2) 자연주의: 자연신론_ 자연은  자연의 법칙이 있어서 스스로 다스린다 

 - 성경 속에서 언급되는 기적을 통해서 볼 때, 하나님은 한 법칙을 만들어 놓고 방관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섭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 심지어 하나님의 계시를 얻는 방식도 자연주의적 방식으로 얻게 된다고 생각(캐는 만큼 가져간다고 생각함)

  3) 초월을 얻기 위해서 자연주의적 방식을 도입한다.

    예] 방언을 받기 위해(초월의 내용) 할렐루야를 천번해라.(자연주의법 발상)

         대입에 합격하기 위해서 100일 기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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