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여호수아 4장] 요단 강을 마른 땅으로 건넌 사건은 홍해를 건넌 사건과 대조됩니다. 이번 사건을 통해서 여호수아는 모세와 대견될만한 지도자임을 인정받습니다. 역사를 통한 교훈을 지속하려고 했던 여호수아의 모습 속에서 우리에게 어떤 역사의식을 가진 지도자가 필요한지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아픈 역사를 통해서 배우려고 하는지 아니면 아픈 역사를 감추려고만 하는지에 따라서 지도자의 미래, 그 민족의 미래가 보입니다.

 

 

[정리1. 본문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1.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는 과정 중에서 행한 일.
  1)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각 지파 대표 한명씩 요단강에서 돌 하나씩을 취하여 오늘 유숙할 그곳에 두게 하라.
  2) 여호수아는 요단 강 중앙에 서 있는 언약궤를 맨 제사장 있는데까지 가서 각 지파별로 돌을 메라고 하고, 이것이 표징이 될 것인데 훗날 자손들이 이 돌들이 무엇인가 물을 때 여호와의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 그 앞에서 물이 끊어졌으므로 영원한 기념이 될 것이라 하라.
  3) 각 지파 대표들은 돌을 취하여 자기들의 유숙할 곳으로 가져가 거기 두었고, 여호수아는 요단 가운데 있는 언약궤를 맨 제사장의 발이 있는 곳에 돌 열둘을 세웠는데 지금까지 있더라.
  4) 요단 중앙에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서있고, 물은 멈췄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요단을 건넜다. 모두 건넌 후에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백성들의 목전에서 건넜다.
  5) 루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자파가 먼저 무장하고 모든 이스라엘보다 먼저 건넜다.
  6) 무장한 사만 명이 가량이 여호와 앞에서 건너가 싸우려고 여리고 평지에 이르렀다.
  7)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육지에 발을 밟는 동시에 요단 물이 본 곳으로 도로 흘러갔다. 그리고 전과 같이 언덕에 넘쳤다.

  [효과] 그 날에 여호와께서 모든 이스라엘 앞에서 여호수아를 크게 하시매, 생존하는 날동안 백성들이 모세를 두려워하듯이 여호수아를 두려워하였다.

 

2. 여리고 동편 길갈에 진을 치다.
  1) 1월 10일에 백성이 요단에서 올라와 여리고 동편 경계 길갈에 진을 쳤다.
  2) 길갈에 요단에서 가져온 돌 12개를 세웠다.
  3) 훗날 자손들이 묻거든 너희 자손들에게 알게 하라.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다는 것을... 요단을 마르게 하고 건너게 하신 것은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심과 같은 것임을 자손에게 알리게 하라.

  [효과]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고, 너희가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다.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내용을 다시 나의 말로 풀어말하기]

 

본장은 이스라엘 요단 강을 건너게 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은 요단의 중앙에 서서 물을 막고 있다.(물이 멈추었다) 그러는 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을 건너는데, 그 맨 앞에서 사람들은 요단 동편에 기업을 얻은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 사람들이다. 이들은 여호수아와 약속한대로 앞장서서 가나안을 향해서 갔고, 많은 무장한 사람들이 그 뒤를 따라갔다. 아마 그 뒤를 이어 다른 지파와 여인들, 아이들이 요단을 건넌 것으로 보인다.


요단을 건너는 중에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각 지파별로 하나의 돌, 그래서 12개의 돌을 요단에서 취하라고 말씀하신다. 여호수아는 즉각적으로 각 지파별 대표를 세워 12개의 돌을 취하도록 하고, 더 나아가 이 돌을 취하는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추가적으로 언급한다. 여호수아는 이것이 하나의 징표가 되는 것인데, 후손들에게 지속적으로 지금의 이 사건을 기억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한듯 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여호수아는 모세와 같은 권위를 인정받게 된다. 백성들은 모세를 대하듯 여호수아를 대하게 되었다고 기록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이 사건은 홍해의 사건과 같은(유형의) 사건임을 확인하면서 하나님이 모든 백성의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그 백성이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도록 하기 위함임을 분명히 했다.

 

[정리3. 정리하면서 발견하는 자연스러운 메시지와 교훈]

 

1. 여호수아는 사건을 교육의 과정으로 연계했다.

 

여호와께서는 여호수아에게 각 지파별로 한 명씩 돌을 하나 취하여 오늘 묵을 곳에 두게하라는 명령을 여호수아에게 했다. 여호수아는 그 명령을 수행하면서 좀 더 구체적인 목적까지 부여한다. 그와 같이 하는 것은 우리의 후손들을 위함이라는 것이다. 훗날 요단 강바닥에 있어야 할 돌이 길갈이라는 곳에 쌓여있는 것을 볼 때, 색다른 저 돌들은 무엇인가? 묻는 후손들에게 요단 강의 기적을 상기 시키고, 그것은 또한 홍해 사건으로까지 이어지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여호수아는 간파한다.

 

여호수아는 위대한 지도자였다. 능력면에서 모세와 비견되는. 그리고 더불어 그는 교육적인 지도자였다. 지금 당장의 기적을 약간의 흥분이 아닌, 후대의 교훈으로 가지고 가고자 했던 지도자였다. 위대한 지도자란 당대에 위대한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의 영향력이 후대에까지 더 확대되도록 준비하는 지도자이다. 그래서 교육은 백년지계라고 했고, 교육은 향상된 미래를 준비하는 과정인 것이다.

 

우리가 참된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사건을 교훈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좋은 사건이든 나쁜 사건이든 그것을 교육의 장으로 활용해야 하는 것이다. 좋은 사건을 통해서는  그것을 지속할 수있는 시스템을 만들고, 나쁜 사건을 통해서는 재발을 방지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교육의 목적이다. 지금의 우리의 잘못과 실수가 정당화 될 수있는 유익할 이유는, 우리 다음 세대에는 이와 같은 잘못을 하지 말라는 측면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그래서 역사를 배워야한다. 속이려는 자는 역사를 감추겠지만, 바르게 인도하려고 하는 자는  역사를 들춰낸다. 잘못을 인정한다. 타인의 잘못에 대해서도 정확히 짚고 넘어가려 한다. 과거 혹은 현재의 아픔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안고 미래로 도약하기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

 

과거의 역사를 어떻게 인식하는가? 아프더라도 과거의 역사를 공개하고 들춰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미래를 위한 지도자라고 할 수 있겠다. 역사를 감추고 은폐하는 자에게 밝은 미래를 기대할 수는 없겠다.

 

  * 회개에 대해서, 반성과 성찰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에서 설명할 수 있으리라 본다.

 

2. 여호수아는 모세와 요단강 기적은 홍해의 기적으로 대조된다.

 

요단강 사건은 홍해 사건과 비견된다. 여호수아가 계속해서 모세와 비교되고 있는 것처럼. 그럴수 밖에 없을 것이다. 선임 지도자 모세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사람들은 은연중에 여호수아의 말과 행동 그리고 그의 결정과 결과들을 통해서 모세와의 끊임없는 비교를 하고 있을 것이다.

 

성경은 요단 사건을 통해서 여호수아가 완전하게 모세에서 자신에게로 백성들의 신뢰가 옮겨 왔음을 보여주고 있다.(14절) 여호수아가 처음 모세를 대신해 지도자로 부름 받았을 때, 여호수아의 고민은 바로 이와 같은 고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몇 번이나 격려해 주셨는지 모르겠다. 암튼, 여호수아는 첫 사역을 완벽하게 해냄으로서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오히려 모세보다 더 나아가 다음 세대를 위한 준비를 하는 더욱 위대한 일을 감당했다고 봐도 좋다고 본다.

 

모든 후임 지도자가 선임 지도자보다 뛰어날 수 없다. 오히려 그만 못한 경우가 더 많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된 자리라면 우리는 여호수아처럼 강하고 담대함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사람의 눈치와 평가에 연연하지 말고 자신의 해야 할 일을 해야한다. 그 결과는 하나님의 손에 있게 마련이다. 그 자리에 집착하게 되고, 사람들의 평가를 먼저 의식하게 될 때 자신을 세운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못하고, 다른 일을 하게 되고 만다. 자고로 하나님이 세워 준 지도자 혹은 백성을 통해서 세워진 지도자는 소신을 가지고 시대적 부르심을 감당하는 자여야 한다.

 

3. 이 모든 일을 두가지 목표를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 요단강을 가르신 것은 두 가지 목적을 위함이었다.

첫째, 이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홍해 사건을 통해서 이 지역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 떨었다. 바로의 손에서 건져낸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신이간에 대한 두려움을 가졌던 것처럼, 요단의 마른 땅으로 건너게 한 이들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가에 대한 다시 한번의 확인을 통해 두려움을 확증해 주신 것이다.

둘째는 이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을 항상 경외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 사건은 이 백성들의 머리 속에 대대로 박혀서 크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을 일으키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적은 늘 이 두가지를 고려한 것임을 기억하자.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크심에 놀라고, 그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여 다른 것에는 관심을 돌리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기적에 대한 체험이 부족해지고 멀어질 때, 우리는 쉽게 신앙이 약해지게 되는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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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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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한 설교인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네요.

 

하나님은 리더에게 더 큰 책임을 물으신다는 내용으로 했던 설교입니다. 

민 20장 1-13절의 말씀입니다. (약 25분)

(제가 직접 녹음한 거라, 꼬맹이들의 잡음이 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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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15장] 하나님도 지쳤다. 아무도 하나님을 말릴 수 없다. 하나님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하나님을 지치제 만든 우리들의 고집과 악의, 참 대단합니다.(묵상만 읽으세요)



[정리1. 본문의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요약할 수있으면 요약하면서]


1. 여호와 앞에 모세와 사무엘이 있더라도, 이 백성은 용서받을 수 없다. 

  1)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다. 쫓아 보내라.

  2) 유다 백성들이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란 말입니까?

  3) 죽을 자는 주음으로, 칼을 받을 자는 칼로, 기근을 당할 자는 기근으로, 포로 될 자는 포로 됨으로 나아가라.

  4) 여호와께서 이 백성을 네 가지로 벌하신다.(죽이는 칼, 찢는 개, 삼켜 멸하는 공주의 새, 땅의 짐승)

  5) 유다 왕 므낫세가 예루살렘에서 행한 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들을 여러 민족에게 흩음.


2. 예루살렘을 불쌍히 여길 자가 없다.

  1) 너를 위해 울 자 누구며, 돌이켜 네 평안을 물을 자 누구냐?

  2) 네가 날 버리고 가지 내가 내 손을 펴서 너를 멸하리라. 내가 뜻을 돌이키는 것도 지쳤다.

  3) 너희 자식이 끊어지고, 과부는 모래보다 많아졌고, 갑작스러운 멸망에 놀라고 두려울 것.

  4) 그 남은 자들은 그들의 대적의 칼에 붙이리라. 


3. 예레미야의 고통(사역자로서의 고통)과 하나님의 약속

  1) 내가 잘 못한 것도 없는데, 모든 사람들이 나를 저주하는 구나.

  2)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를 강하게 할 것을 약속하신다. 원수로 간구하게 할 것이라 약속함.

  3) 그러나 유다는 북방의 공격으로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포로로 잡혀가게 될 것이다. 

  4) 예레미야는 여호와께 자신을 기억하고 돌봐주시도록 그래서 멸망당하지 않도록 간구한다. 

  5) 예레미야는 자신을 기뻐하는 자의 자리에 앉지 않고, 하나님이 보내신 일을 위해 홀로 앉아있다.(고독한 자신의 사역을 말함) 이는 주의 분노를 내게 채우신 것이다. 나의 고통은 점점 중하여 낫지 않고,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습니다.(낙심)

  6) 여호와는 예레미야에게 다시 돌아오면 내 앞에 세울 것이고, 헛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말한다면 다시 여호와의 입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에게 돌아가지 말라고 하신다. 예레미야를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여 그들이 너를 칠지라도 이기지는 못하게 하신다.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글을 다시 내가 이해한 방식으로 펼치기]


여호와께서 유다를 판단하고 심판하시는데 어떤 중보자도 이를 막을 수 없다. 모세와 사무엘이라 할찌라도 하나님의 분노를 막을 수 없다.(광야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진노를 막았으나) 그만큼 유다의 죄가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네 가지로 백성을 벌하신다는 것은 결국 완전한 심판을 말하고 작은 것 하나 남김없이 심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준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몰인정하셨던 분은 아니다. 하나님은 한없이 좋은 분이시고 인자와 자비로 자기 백성을 대하셨던 분이다. 그런데 유다는 교만했고, 하나님의 은혜를 악용했다. 하나님도 이제는 지쳤다. 내가 뜻을 돌이키는 것도 지쳤다고 말씀하신다. 오래 참으신 만큼 하나님의 진노 또한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식을 끊고, 수많은 과부가 일어나게 하며 갑작스러운 멸망에 놀라고 두렵게 할 것이다. 남은 자들은 대적의 칼에 모두 죽게 할 것이다. 


이런 완악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진실된 경고의 메시지를 전해야만 하는 예레미야의 심정이 편하지 않았다. 그는 즐거워할 수 없었고, 늘 고통과 소외와 영적 부담에 눌려 고통가운데 지냈다. 어쩌면 이와 같은 영적 고난의 자리에서 피하려고 했었던 것 같기도 하다.(여호와께서 그에게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분노가 예레미야에게 쌓였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암튼, 신음하던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놋 성벽이 되게 하여 대적들이 너를 칠지라도 이기지는 못하게 하리라는 약속을 남기신다.


[정리3. 묵상 및 적용_인상깊었던 문구, 자연스럽게 올라오는 메시지 등]


1. 하나님의 진노, 중재자가 없은 유다 백성.


누가 좀 하나님을 말려보세요. 이러다가 큰일 나겠어요.... 아니요, 아무도 하나님을 말릴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중재자가 없는 유다의 상태를 말한다. 모세와 사무엘이 온다고 해도 하나님의 진노를 막을 수 없다. 모세와 사무엘의 중재 능력이 부족하다는 말도 아니고, 하나님이 막무가내라는 말도 아니다. 그만큼 유다의 죄가 넘친다는 것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중재자를 잃어버린 관계. 풍랑 속에 표류하는 땟목같은 운명이 아니겠는가? 죄를 짓더라도 중재자가 언제나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죄를 지어야 한다. 엄마가 내 편이 되든지, 아니면 아빠라도 내 편이 되어 줄 수 있을 때 그것도 아니라 형제나 주변 사람들이 나를 위해서 중재할 수 있을 정도의 관계(최소한의 정의와 사랑)는 실현하면서 살아야지 그렇지 못하면 마지막 날 중재해 줄 사람이 없거나, 효력이 없어 그대로 망하게 되고 말 것이다. 


2. 이제 하나님도 지쳤다. 


성경에 있는 표현 중에 가장 충격적인 표현은 하나님도 이제는 지쳤다는 것이라 본다. 하나님도 더 이상 자기 백성인 유다를 위해서 뜻을 돌이키시는데 지쳤다고 말씀하신다.(6절) 하나님의 한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격자이신 하나님께서 관계속에서 이 백성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는 상황, 용서와 끊임없는 자비가 더이상 이들을 선한 길로 인도하지 못한다는 이 백성의 한계가 분명하게 드러났다는 것을 묘사하는 것이다. 


유다 백성은 참 대단하다. 이 백성 앞에 하나님도 무릎을 꿇었다. 하나님이 지친것이다. 여호와의 천사가 야곱과의 씨름에서도 지쳤다.(창 32:25) 야곱의 포기하지 않는 자기 고집 때문이었다. 그래서 여호와의 천사는 그의 허벅지 관절을 침으로 그 싸움에서 벗어나 그를 버리고 가려고 했다.(26절) 


하나님을 지치게 하는 사람들, 이들은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다. 하나님으로하여금 한계(?)에 이르도록 했으니 이는 하나님이 감당치 못할 사람이다. 하나님을 지치게 만드는 인간.... 하나님께 죄송하다는 생각이 든다. 


3. 사역자가 짊어져야 할 고통


사역자가 짊어지는 진짜 고통은 가난과 핍박과 같은 외부적 고통이 아니다. 내면적 영적 고통이다. 하나님의 고통이 자기 자신에게 전해지고 채워지는 고통이다. 그것이 사역자가 본질상 느껴야 할 고통인 것이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표면적 고통 속에서, 이는 하나님의 고통을 자신에게 채우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17절) 그래서 고통이 큰 것이다. 그래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지만, 그럼에도 벗어 버릴 수 없는 것은 그 고통이 하나님의 고통이기 때문인 것이다. 


예레미야가 짊어진 고통,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짊어지신 고통... 예수님은 그 고통을 벗어 버리고 싶었지만, 벗어버리기를 원치 않았다. 짊어 지셨다. 그리고 죽음까지 간직하셨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 죄에 대한 것을 정하셨다. 예레미야에게서 예수의 모습을 본다는 말이 진실로 그렇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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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에스라 7장입니다. 성전 재건에 대한 이야기가 6장까지 나오고, 이제 그 이후로 약 58년의 시간이 지난 아닥사스다 왕 때의 이야기 이면서 동시에 성전 재건의 의미를 좀 더 명확하게 구현해줄 에스라의 출현을 보여주는 장입니다.

 

[1차. 성경 본문의 내용을 중심으로 충실하게 정리]

성전건축(주전 516년)으로부터 약 58년이 지난 후의 에스라 이야기(아닥사스다 왕,주전 458년)

1. 성전 건축 후 약 58년 후, 대제사장 아론의 16대 후손인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에 올라왔다.(5절)

1) 에스라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였다.

2) 여호와의 도우심을 얻어,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을 정도의 사람이었다.

3) 아닥사스다 왕 제 7년에 이스라엘 자손과 레위 사람, 노래하는 자, 문지기, 느디님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올 때에 에스라도 함께 올라왔다.

4) 넉달이 걸리는 거리를 하나님의 선한 손이 도우심으로 안전하게 도착했다.

5) 에스라는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함.

2. 아닥사스다가 에스라에게 내린 조서의 초본 내용(11절)

1)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중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뜻이 있는 자는 누구든지 에스라와 함께 가라.

2) 목적: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유다와 예루살렘의 형편을 살피기 위해 왕과 일곱 자문관의 보냄을 받았다.

3) 왕과 자문관들이 예루살렘에 거하시는 하나님께 성심으로 은금의 예물을 드리게 함.

4) 바벨론 온 도에서 얻은 모든 은금과 백성들과 제사장들의 예물을 가져다가 신속히 제물로 사서 하나님의 제단위에 드리고, 남은 것은 좋게 여기는 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쓰라.

5) 그 외에도 부족한 것이 있으면, 궁정 창고에서 내다가 쓰도록 해라.

6) 왕의 명으로 강 건너편 창고지기에게 명하니, 은은 백달란트, 밀은 백 고르, 포도주는 백 밧, 기름도 백 밧까지 하고 소금은 정량 없이 주라고 명함.

7) 귀환하는 유다인들에게 조공과 관세와 통행세를 받지 않도록 하라.

8) 너희들은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하나님의 율법을 아는 자를 법관과 재판관을 삼아 강 건너편 모든 백성을 재판하게 하고, 그 중에 알지 못하는 자는 너희가 가르치라.

9) 네 명령을 지키지 않는 자는 죄를 정하여 죽이거나 귀양 보내거나 가산을 몰수하거나 옥에 가두라.

10)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하늘의 하나님이 명하신 것을 삼가 행해서 그 진노가 왕과 왕자의 나라에 임하지 않도록 하라.

3. 여호와를 찬양하는 에스라

1) 왕의 마음으로 예루살렘 여호와의 성전을 아름답게 할 뜻을 두셨다.

2) 나로 하여금 왕과 그의 보좌관들 앞과 모든 방백 앞에서 은혜를 얻게 하셨다.

3) 내 하나님 여호와의 손이 내 위에 있으므로 내가 힘을 얻어 이스라엘 중에 우두머리들을 모아 나와 함께 올라오게 하였다.

 

[2차. 1차 정리한 내용과 이전의 흐름, 더 나아가 작성자가 가지는 기초 정보를 기반으로해서 본문의 내용을 자신의 것으로 정리한다]

 

1. 성전을 완공하고 나서 약 58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의 이야기다. 아닥사스다 왕 때 학사 겸 제사장인 에스라가 어떻게 왕의 은혜를 얻고 사람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오게 되었는지를 묘사한다. 특히, 에스라가 하나님의 말씀에 능통한 자임과 하나님의 율법으로 예루살렘에서 다스리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을 보여준다.

2. 이와 같은 그림은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으로 이스라엘 통치하시려고 했던 과거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기억나게 하고 에스라의 역할이 모세의 역할임을 연상케 한다. 또한 아닥사스다 왕이 적극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종이 되어 에스라의 귀환을 돕고, 예루살렘에서의 성전 제사 회복을 지원하는 모습은 출애굽 당시 바로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물론 바로는 자발적인 지원이 아니었다. 아닥사스 왕도 자발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에게도 모 종의 두려움에 기인한 것이다. 23절에 언급되어 있는 것처럼 ‘어찌하여 진노가 왕과 왕자의 나라에 임하게 하랴’라는 왕의 고백은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내쫓은 것이 재앙을 피하기 위한 것인 것처럼, 아닥사스다 왕도 크게 다르지 않는 이유 속에서 에스라와 함께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을 명하는 것 같다.

(딴 이야기지만, 에스더서를 보면 모르드개가 애굽에서의 요셉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

3. 에스라가 아론의 16대 후손이라는 것과 모세의 율법에 능통한 자라는 것은 성전 제사와 모세 율법 통치의 회복을 위해, 약 60여년 전에 다시 세워진 성전을 근거로 그 토대를 온전케 하고 확대를 목적으로 한 귀환 공동체를 위한 2차 부르심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3차, 묵상 및 적용]

1. 에스라서는 지금 아닥사스다 왕 때에 일어나고 있는 일을 과거 출애굽 역사와 유사한 패턴으로 해석해 내고 있는 것 같다. 저자는 과거 출애굽 역사를 기억하면서 독자로 하여금 지금과 그 때를 비교해서 보도록 하고, 그것은 지금 이시대가 그 때와 같은 하나님의 때로 전에는 실패한 공동체(제사와 말씀 중심)의 회복의 때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2. 따라서 제사장이면서 율법 학자인 에스라의 귀환은 마치 모세의 등장, 그러면서도 모세보다도 어느 면에서 뛰어난(모세는 예루살렘에 들어오지는 못했고, 모세는 제사장은 아니었으니...) 존재로서의 에스라를 보여준다. 에스라는 이스라엘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 사람으로 기대된다.

3. 하나님은 이 일을 주도적으로 역사하고 있고, 아닥사스다 왕은 그 일의 종처럼 일한다. 하나님은 아닥사스다로 하여금 두려움을 가지게 했고,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어 그 위협을 피해보려고 했던 것 같다. 하나님은 이 땅의 권세도 사용하시고, 그들의 두려움도 사용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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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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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3장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 대한 천사와의 비교에서 모세와의 비교로 옮겨가고 있다. 모세와 관련해서는 모세가 하나님의 집에 신실한 종이었다면, 신실성에 있어서는 같이 인정을 받지만 예수는 하나님의 집의 종의 신분이 아니나 아들의 신분으로서  신실했음을 강조한다.

따라서 모세를 따르는 것에 잘못이 없었지만, 이제는 모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더욱 큰 신실함의 혜택을 누리게 됨을 강조하게 된다.

히브리서 기자는 율법의 절대성을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율법의 수여자 모세를 인정하면서도 이제는 그 보다 더 큰 예수를 알게 되었으니 그 분을 끝까지 의지하고 순종할 것에 대한 권면을 하는 것이다.

 

그 다음의 이야기는 모세를 따르던 이스라엘 백성들(조상들)이 항상 마음에 미혹을 받아 하나님께 믿음으로 순종하지 못하고 완고했던 것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샀던 것처럼, 너희들(이 편지를 보고 있는 성도들)도 그렇게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권면한다. 성도들끼리 서로 권면해서 너희 중에 그와 같은 사람들이 나오지 않도록 주의 하라고 경고하고 있다.(12,13절)

 

히브리서 3장에 중요한 주제중에 하나는 현재 성도로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 믿음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고 배교하거나, 예수 신앙을 떠나게 되는 사람들(아마 유대 그리스도인들 중에서)에게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모세의 신실성보다 예수의 신실성이 더욱 큼을 강조하는 것을 보면, 다분히 유대인들 중에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에게 더 큰 확신을 주기 위함으로 보인다.

더불어, 지금 현재의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미혹에 의해서든, 완고함으로 믿음을 가지지 못해서 그렇게 된 것이든) 현재의 믿음(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주어진 구원의 약속)을 버린다면 광야에서 믿음으로 순종하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엎드러지게 될 것(심판, 그래서 안식에 들어오지 못함)을 경계한다.

 

구원얻는 믿음이란 현재적으로 확인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현재적으로 믿음이 유지 되지 않았다면, 과거의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었던 것으로 밝혀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에게 있어서 구원을 확증할 수 있는 순간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다. 현재적으로 예수 안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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