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더 7장에 오면, 에스더 이야기는 대반전에 이른다. 강자와 약자가 바뀐다. 주도권이 바뀌고 운명이 바뀐다. 마치 외통수에 걸려있다가 누군가의 훈수로 아무도 예상치 못한 반격을 가하듯이 말이다. 오히려 대적이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반격에 적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만다. 반전 또 반전이다.

 

[정리1. 본문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

1. 에스더가 왕과 하만을 위한 두 번째 잔치를 열다.

  1) 두 번째 잔치에서 왕이 술을 먹을 때 에스더의 소원이 무엇인가를 다시 묻는다.

  2) 그제서야 에스더는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내 생명과 내 민족의 생명을 달라고 한다. 자기 민족이 종으로 팔려가는 것이라면 이런 부탁을 드리지 않았을 것이다. 대적에 의해서 내 민족이 살육을 당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노예로 팔려간다고 해도 그 손해가 엄청 클 것이다.

  3) 왕이 그런 일을 하는 자가 누구냐?고 묻고 에스더는 그는 바로 악한 하만이라고 한다.

  4) 하만은 그로 인해 왕과 왕후 앞에서 떨고, 왕은 노하여 왕궁 후원으로 나간다.

2. 에스더에게 생명을 구걸하는 하만, 하만의 죽음

  1) 하만은 왕이 자기에게 벌을 내릴 것이라고 알고 에스더에게 자기의 생명을 구걸한다.

  2) 하만은 에스더가 앉은 걸상 위에 엎드려 에스더에게 간청하는데, 왕은 이것을 무례하게 보았고 왕의 왕후를 겁탈하려고 하는 것으로까지 표현하였다.

  3) 왕이 말을 이 정도까지 하자, 신하들은 하만을 끌고 나갔다.

  4) 왕의 내시 중 하르보나가 하만의 집에 모르드개를 죽이기 위한 나무가 이미 세워져 있다는 것을 왕께 알리자 왕은 하만을 그 나무에 달게하였다.

  5)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한 나무에 하만을 다니 왕의 노가 그쳤다.

 

[정리2. 본문 내용의 재정리]

간 밤의 불길한 사건(모르드개를 오히려 높이게 된 사건)으로 인해 정신이 없는 중에 에스더의 두 번째 잔치로 나간 하만은 정신이 없었던 것 같다. 왕은 에스더의 소원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뜸을 들이는가 궁금해 했던 것 같다. 술을 어느 정도 마시자 소원이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 그제서야 에스더는 자신의 소원을 이야기하는데, 금은보석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자기의 생명과 자기 민족의 생명을 살려달라는 것이다. 이는 자기도 유대인이라는 것을 밝히는 셈이 된 것이다. 어쩌면 왕후 에스더는 하만의 모략으로 에스더 자신이 유대인인 것을 알고, 자기를 죽이기 위해서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을 왕에게 제안한 것이라고 어필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암튼, 왕은 하만의 계략으로 왕후를 잃게 되고, 수많은 경제적 이득을 주는 유대인들을 죽게 함으로 왕에게 큰 손실을 일으킬 것이라는 것을 말한다.

정상적인 상태라면 하만은 이 사태를 잘 극복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하만은 멘붕상태다. 갑작스러운 에스더의 말(하만도 에스더가 유대인인줄은 몰랐다.)에 충격을 받았을 것이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이미 그의 마음 속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결국 살고자 에스더에게 애걸하는 것이 자신의 죽음을 더 재촉하는 것이 되고만다. 결국 자신이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만든 나무에 자기 자신이 달려 주는 아이러니가 벌어졌다.

[정리3. 묵상 및 적용]

1. 대적자는 의외로 쉽게 무너질 수 있다.

하만은 왕의 총애를 받던 신하다. 왕의 다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만은 감히 누구도 범접하기 힘든 권세를 가진 사람인것은 분명하다. 반면에 에스더나 모르드개는 매우 미력한 사람이다. 에스더가 왕후이긴 하나 왕이 부르지 않으면 왕 앞으로 마음대로 나아갈 수 없는 사람이다.(반면, 하만은 아무때나 왕에게 나아갈 수 있을 만큼 권세자다)

그런데 에스더의 작은 돌 한개가 적절한 타이밍에 던져지자, 하나의 큰 파장을 일으켰고 골리앗을 쓰러트리듯 거대했던 하만이 쓰러지는 것을 오늘 본문은 보여준다. 이렇게 쉽게 무너져 내릴 줄 몰랐을 것이다.

세상에서 강해 보이는 대적자들은 의외로 쉽게 넘어질 수 있다. 한 순간에 무너져내릴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을 의지했던 사람도 함께 무너져내리는 것은 지극히 다연하다. 대통령을 배경으로 해서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대통령의 형이 저축은헁비리로 조사를 받고 구속을 당하는 모습을 우리는 언론을 통해 본다. 이 땅의 권력이라는 것은 끝이 있기 마련이고, 이 땅의 역사도 끝이 있기 마련이다.

지금 악인의 길에 선 자는 아무리 든든한 반석 위에 있다고 해도, 무너지지 않을 권력을 등에 업고 있다고 해도 안전할 수 없다. 그것은 모두 바람에 나는 겨와 같아서 바람 한번 불어오면 모두 무상한 것이기 때문이다. 태풍이 올라온다. 쭉정이들은 모두 날아갈 것이다.

2. 하나님은 반전의 드라마 작가다.

처음부터 보호하고 처음부터 막아주었으면 될 것을 처음에는 허락하고 조장하는 것처럼 보이다가, 나중에 가서 극적인 대 반전을 이끌어 내시는 것이 하나님이시다. 성경의 이야기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와 같은 대 반전의 스토리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요한계시록도 마지막 날의 대반전으로 마무리하고 있으니...

하나님이 진행하시는 역사는 언제나 반전이 있다. 따라서 지금 내가 주류를 따를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를 잘 분별해야 한다. 왜냐하면 지금은 역사의 끝이 아니고 언젠가 반전이 반드시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내게 있어서 흔들리지 않는 가치는 <의인의 자리>에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주류인가? 다수인가? 권력인가? 부한가? 성공인가?가 아니다. 나는 <의인의 자리>에 있는가이다.

이것만이 실패하지 않는 역사의 주인공으로 남는 길이다. 약자라고 슬퍼하지 말자, 강자라고 자랑하지 말자. 현재 약자인가와 강자인가 만으로는 결과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역사의 반전 속에서도 우리는 흔들리지 않고 살아 남을 수 있는 의인이 되어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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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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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 5장입니다. 주변 민족들의 방해로 인해 13년간 성전 재건을 멈출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지난 4장의 내용입니다. 그럼 성전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대로 귀환한 유다인들의 역사는 끝나는가? 아니면 다른 길이 열리는가?

에스라 5장은 성전 재건의 길을 하나님이 다시 열어가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1차. 내용정리] 본문 내용을 가능한 충실하게 이해하기 용이하게 정리합니다.

 

1.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전 재건을 촉구하는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1-2절)

1) 스룹바벨과 예수아가 일어나 예루살렘에 있던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건축하기 시작함.

2)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함께 있어 그들을 도왔다.

2. 성전 재건에 다시 제동을 거는 사람들(3-17절)

1) 그 때에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 동관들이 찾아옴.

2) 누구의 허락을 받고 성전을 재건하는가 물었으나, 겁먹지 않고 공사를 계속 했다.

: 과거 고레스의 명을 받아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을 담담하게 말했을 것이고, 그것을 근거로 다시 성전을 재건하고 있다고 말했을 것이다.

3) 닷드내와 스달보스내가 다리오 왕에게 조서를 보내, 이들의 말처럼 고레스 왕의 허락을 받아 성전을 재건하고 있는 것인지를 확인해 달라고 요청함.

 

[2차. 내용정리] 이 때는 자기 자신의 말로 바꾸어 정리합니다. 내용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13년간 멈춰있던 성전 공사는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를 통해서 다시 시작된다. 스룹바벨과 예수아는 다시 용기를 내었고, 더 이상 늦추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성전 재건이라는 목표를 잊어버린 채 자기 자신의 삶에만 집중해버린 돌아온 유다인들의 정체성을 지금이라도 깨우쳐주어야 한다고 본 것일게다.

스룹바벨과 예수아가 앞에서 주도했고,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가 옆에서 보조해 주었다. 또한 유다의 장로들도 마음이 약해지지 않고 힘을 다했던 것 같다.(5절)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또 다시 성전 재건을 막으려고 왕의 힘을 빌리고, 위협하는 무리들이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이들은 떳떳하게 계속해서 공사를 했으며, 두려워하지 않았다. 유다인들의 공사를 막으려고 했던 유브라데 강 건너편 닷드내와 스달보스내는 당시 왕이었던 <다리오 왕>에게 조서를 보내 유다인들의 말(고레스 왕의 허락을 받았다.)이 진실인지를 알려달라고 했다. 만약 사실이 아니라면, 성전 재건을 막을 뿐 아니라 이들을 고소할 조건도 찾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리오는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공사는 계속 될 수 있는가? 아니면 다시 멈추어야 하는가? 성전재건을 위한 하나님의 시작은 있었던 것 같은데 과연 그것은 성취될 것인가?...를 기대하게 된다.

 

[3차. 묵상/적용] 정리한 내용 속에서 묵상하고 적용할만한 것들을 기록합니다.

1. 하나님의 뜻이 인간적인 방해로 잠시 멈출 수는 있다. 그 일을 맡은 사람들로부터 동력이 나오지 않을 때, 하나님은 친히 하나님의 사람들을 동원하여 일을 시작하게 하신다.

   :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일하시는 하나님

2.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동원하시어 일을 시작하지만, 여전히 주변 사람들의 방해는 존재한다. 방해하는 사람이 바뀌었을 뿐,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은 여전하기 마련이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방해와 장애가 없는 것은 아니다.

3. 하나님이 유다 장로들을 돌보셨으므로 그들이 능히 공사를 막지 못하였다.(5절) 하나님의 돌보심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무슨 외적으로 오는 특별한 보호하심이 아니다. 여기서는 유다 장로들의 마음을 강하게 해 주셨다는 것이다. 이들은 전처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마음에 흔들림이 없게 되어고 오히려 평안하게 자신의 일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돌보심이란 말의 구체적인 해석이다. 외부의 공격이 없는 것만이 아니라, 외부의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도 하나님의 돌보심이란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4. 에스라도 재미있는 이야기 서술방식을 가진다. 일이 잘 풀리는 것 같다가(고레스의 귀환과 성전 기초까지의 상황) 그러다가 뜻 밖의 대적을 만나고, 그것은 생각보다 큰 힘이 되어 성전재건을 중지할 수 밖에 없게 되고.. 그렇게 13년의 시간이 흐르고... 그러다가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의 등장으로 다시 시작하게 되고 또 전과 비슷한 패턴의 방해를 만나게 되고...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궁금증을 가지고 5장을 마친다. 재밌는 한 편의 스토리다. 그의 스토리. 드라마를 만드시는 그의 스토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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