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 정리]



[오늘의 내용]


1. 이성은 감각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왜 감각될 수 밖에 없었는지 설명을 요구한다.

  1) 이성이 중심이된 사고는 그것을 인간이 경험하는 영역의 내용으로 설명하려는 경향성을 가진다.(설명주장)

  2) 그런데 성경은 보통 설명보다도 복종을 요구한다.(계시_권위를 주장)

   : 그래서 각 특성상 이성과 계시는 충돌할 수 밖에 없다. 이성은 설명을 통해 이해를 시켜주길 원하고, 계시는 권위로 순종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2. 오늘의 주제는 그런 측면에서 권위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1) 우리의 일반적 개념: 권위 <-> 자유 /  자유의지 <-> 하나님의 절대주권

    : 자유란 구속과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는 개념으로 형성됨.(권위에 대한 나쁜 경험때문임)

  2) 그러나 긍정적인 권위가 있다. 

   (1) 부모가 어린 자녀들에게 권위를 가지고 말한다.(주사를 맞음, 학교에 가야함..)

   (2) 어떤 신뢰와 믿음을 바탕으로 한 결정권을 갖는 힘이다. 

  3)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란(소극적인 자유)

   (1) 소극적 개념의 자유, 즉 무엇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 무엇을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이다. 

   (2) 소극적 개념의 자유는 결국 어떤 권위라는 개념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개념이 되고 만다. 

   (3) 독재를 깨고 자유를 누리자고 했는데, 독재를 깨고나면 자유도 함께 없어지는 꼴이 되고 만다. 

      예) 수업하지 말고 놀아요~ 그래 그러자 그러면 심심해요.(소극적 거부만 있는 것)

   (4) 이런 소극적인 자유(권위를 거부하는)는 우리 인간의 죄성에서 나온 것(권위자에 대해 싫어하는 마음)이다. 


  4) 적극적인 의미에서 권위란 무엇인가? 

권위란 권위를 행사하는 쪽의 힘에 의해서 권위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자꾸 독재성으로 가게 된다. 그러나 권위란 그 권위가 갖는 진리 됨과 힘이, 그것을 요구받아 순종해야 되는 대상의 만족에 의해서만 성립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권위란 자신을 힘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 자체로 자신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권위이다. 

   (1) 그러나 권위는 상대방에게 설명이 되지 않으니, 상대방은 그것을 독재라고 느끼게 된다.

   (2) 하나님이 계신가 안계신가?를 증명할 수 없다. 그렇다고 투표로 할 수도 없다. 다만 있다고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날 죽이려면 죽여라. 있는 건 있는 거다'라고 우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3) 기독교가 편협하다고 듣는다. 왜냐하면 한 끝차이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중재안을 거절하면 편협하다함)


  5) 권위에 대한 반발이 정당한가?

  우리는 보통 권위에 대한 반발이 정당한 정신 위에서 시행된 것이 아니라 권위 자체에 대한 반발을 위해 인간의 죄성과 유치한 기분파적인 반발에 불과할 때가 많다. 그것을 어떻게 확인했는가 하면, 자유를 기껏 권위를 반대하기 위해서만 사용했다.(권위의 부정에 온 힘을 다 기울임)


  6) 자유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free from)만이 아니라 무엇을 위한 자유(free for)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정당한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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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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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도서 3장은 두 부류의 권위자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2:15을 포함해서) 첫째는 그레데에 있는 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디도의 권위에 대해서, 다른 하나는 당시 정치권력의 통치자에 대해서 권면한다. 요즘처럼 민주주의적 사고가 편재하고, 탈 권위적인 사회 속에서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권면같지만, 시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 메시지가 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

1. 목회자의 권위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서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아야 한다.(2:15)

목회자가 권위로 권면과 책망을 해야 한다는 것과 누구에게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우선 이 말이 목회자의 권위주의를 인정하는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것이다. 권위주의란 자기 스스로가 권위의 근거가 되어 언제든지, 누구든지, 어떤 일에 대해서건 권위를 가지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권위는 권면과 책망의 내용에 대한 권위를 말하는 것이다. 목회자가 권면하고 책망하는 근거가 권위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을 때, 그 권위가 흔들리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또한 그것을 시행하는 목회자는 평소에 권위있는 내용이 가벼운 것이 되지 않도록 품위를 잃지 않아 업신여김을 받지 말아야 한다.

포장보다 내용이 중요하긴 하지만 내용에 맞는 포장이 있어야 한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이 권위있게 교회와 세상 가운데 들려지기 위해서는 그것을 전하고 보여주는 목회자와 성도(교회)가 걸맞는 포장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야 권위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가톨릭의 권위, 불교의 권위는 사제와 승들의 자기 희생적 삶의 태도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는 목회자와 교회의 삶에 모습으로 업신여김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목회자와 성도는 품위있는 겉모습을 가져야 한다. 정직하고, 공중도덕을 잘 지키며 자신의 꾸밈에 있어서도 품위를 잃지 말아야 한다. 편하다고 다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2. 통치자의 권위

  통치자들에게 대해서 다른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복종하고 순종하며 선한 일을 하기에 준비하게 하라고 권면한다. 국가의 권력이라는 것이 악을 지양하고 선을 격려하는 것이 기본일찐데 우리는 마땅히 그 권위 아래에서 순종하고 복종하여 선을 격려하고 악을 멀리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권위를 잃게 만드는 것은 공직자들(권세자들)의 부정과 부패다. 권위는 인정하되 그들의 부정과 부패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책임을 묻고, 밝혀 낼 수 있는 구조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방치된다면 국가의 권위라도 정당한 힘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 권력의 권위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공직자들의 부정과 부패는 반드시 감시되고, 처벌되어야 하는 구조를 가져야 한다.

 

교회든 국가든 권위가 중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가 잃어지지 않도록 목회자와 성도는 품행을 단정하게 해야 할 것이다. 성도다운 높은 수준의 삶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국가는 공직자의 권위가 손상되지 않도록 권력을 가지고 사적 이득을 취하려고 하는 부정과 부패를 척결해야 한다. 그래야 공직자의 권위가 살고, 그들이 권위를 주장하여 선을 격려하고 악을 제지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한가지 더 있다. 어떤 일을 결정하는 절차가 옳아야 한다. 절차가 합법적이지 못하면 그 권위의 기반이 약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민주적이다, 비민주적이다라는 것은 그런 절차의 합법성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최근 통진당의 행태를 보면서 만약 당권파가 다시 당 권력을 장악한다고 한들 거기에 무슨 권위가 실리겠는가 생각한다. 만에 하나 그들이 다시 당을 장악한다고 하더라고 그 당은 금세 무너질것이고 지리멸멸해 질 것이 분명하다. 스스로의 권위를 헐어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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