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04 새벽기도회

본문: 룻기 2:14-23

제목: 기본에 충실한 성도

  1. 환영과 대표기도
  2. 찬송가 310장. 아 하나님의 은혜로
  3. 본문읽기: 룻기 2:14-23

 

4. 본문의 내용

오늘 본문은 어제 이야기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축복과 위로의 말만 한 것이 아니라 안정적인 일자리까지 확보해 주었습니다. 오늘은 식사 시간과 식사 이후에 베푼 보아스의 특별한 혜택에 대해서까지 다루고 있습니다. 이제 식사할 때가 되었습니다. 보아스와 일꾼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준비해 온 식사를 하고 있었겠지만 룻은 식사를 위해 준비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어색하게 따로 있었을 것입니다. 보아스는 그와 같은 룻을 주목해서 보고는 그를 불러서 떡을 먹도록 해주었고 볶은 곡식도 넉넉히 주어 먹도록 했습니다. 식사 후에 다시 일할 때에는 룻으로 하여금 곡식 단 사이에서 줍도록 하고 심지어 의도적으로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리도록 했습니다. 룻에게 더 많은 이삭을 줍게 하기 위한 의도적인 혜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녁이 되어 룻은 주은 곡식을 가져왔는데 보리가 한 에바쯤 되었습니다. 대략 20리터 정도된 것입니다. 상당히 많은 양이었습니다. 나오미도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누군가의 돌봄이 있었다는 것을 눈치 챘습니다. 룻이 보아스의 밭에서 일했다는 것을 말하자 나오미는 보아스를 위해 축복의 말을 합니다. (20절.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여기서 룻기가 새롭게 알려주는 정보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오미의 집 안과 보아스가  특별한 관계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나오미의 집 안과 관련하여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인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즉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땅을 대신 사줄 책임이 있는 사람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룻에게 호의를 베풀어 준 것입니다. 나오미는 룻으로 하여금 다른 밭에 가거나 소년들 사이에서 일하지 말고 보아스의 밭에서 그의 소녀들과 가까이에 있도록 지침을 줍니다. 룻은 그렇게 보리 추수와 밀 추수가 마치기까지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주우며 나오미와 함께 거주했다는 것으로 오늘 본문은 마무리 됩니다.

 

5. 함께 나눌 구절과 말씀

  1) 14절 그(보아스)가 볶은 곡식을 주매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

이 말씀 속에는 두 가지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는 보아스가 룻에게 볶은 곡식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룻 스스로에게는 먹을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아주 적은 요기거리 정도만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눈치 챈 보아스가 룻을 불러서 식사 하라고 자리를 내 주었고 떡과 함께 볶은 곡식도 주었던 것입니다. 또 한 가지의 은혜는 보아스가 그 볶은 곡식을 넉넉히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먹고 남을 수 있었습니다. 룻은 그 남은 볶음 곡식을 싸와서 자신의 시어머니 나오미에게도 전해 주었습니다. 그만큼 넉넉한 양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룻만 배불리 먹을 정도만 주었다면 룻은 충분히 배불리 먹지 못했을 것입니다. 집에 있는 시어머니를 생각해서 다 먹지 않고 일부를 남겨 놓았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염두한 보아스가 룻도 배불리 먹고 넉넉히 챙겨갈 수 있을 만큼 큰 배려를 해 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수 많은 무리를 먹게 하시는 기적을 베풀면서 열 두 바구니가 남았다고 했습니다. 이는 모인 무리가 아껴서 조금씩 먹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풍족하게 먹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을 주시는 분일 뿐만 아니라 넉넉히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길 축복합니다.(시81:10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 하나님의 풍요로움과 넉넉함을 기억하시며 믿음으로 크고 넉넉하게 기도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2) 20절.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이니라

우리는 룻과 보아스가 만났고 서로에게 호감이 있었기 때문에 결혼해서 나중에 잘 되었다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사실은 그 저변에 룻의 가정과 보아스의 가정이 ‘기업 무를 정도로 가까운 친족’이라는 관계가 전제되어 있을 때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 전제가 있기 때문에 룻은 보아스에게 기업을 물어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었고, 보아스도 책임을 다해 자신의 기업 무를 의무를 성실히 지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룻기는 단순히 남녀간의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기업 무를 제도’를 제정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스럽게 순종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봐야합니다.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나오미를 섬기려고 했던 룻과 자신의 재산에 손해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다하려고 하는 보아스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이어져서 어둡고 우울한 사사시대를 넘어 영광스러운 다윗의 시대로 확장되고 부흥하게 되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룻기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교회의 회복과 부흥은 특별한 기도회를 한다고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효과 좋은 프로그램을 돌린다고 되는 문제도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전부터 늘 해야 하는 것에 우리 자신의 안락함과 유익을 포기하면서라도 끝까지 충성스럽게 순종하여 지켜 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예배, 성령의 임재를 확인하는 예배입니다. 그리고 기도 아니겠습니까? 늘 일상의 기도도 중요하겠습니다만 우리 교회가 정한 기도 시간, 새벽에 기도하고 수요일 저녁에 기도하는 그 시간을 기억하고 함께 나와 기도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성도간의 교제 아니겠습니까? (히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기본에 충성하는 우리 성도님들 되길 축복합니다. 거기에 힘이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그 은혜가 있길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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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03 새벽기도회

본문: 룻기 2:1-13

제목: 서로 잘 되기를 축복하는 성도

 

  1. 환영과 대표기도
  2. 찬송가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3. 본문읽기: 룻기 2:1-13

 

4. 본문의 내용

 

오늘 본문은 모압 여인 룻과 베들레헴에 유력한 자 보아스가 처음 만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오미와 룻을 위해서 베들레헴에 보리추수만 준비해 놓으신 것이 아니라 보아스라는 인물도 준비해 놓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 이야기는 두 장면으로 나눠서 볼 수 있는데 첫 번째 장면은 룻이 우연히 보아스 소유의 밭에 들어가서 일하게 되는 과정입니다. 룻은 추수하는 밭으로 가서 이삭이라도 주워오겠다고 나오미의 허락을 받습니다. 그리고 우연히 들어간 밭이 보아스의 밭이었습니다. 그곳에서 한 참 일하고 있는데 마침 보아스가 등장하게 됩니다. 보아스는 거기서 룻을 처음 보게 됩니다. 보아스는 낯선 여인이 누구인지를 사환에게 물어보고 그를 통해 그 여인이 룻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환은 룻에 대해서 성실하고 부지런한 여인으로 보고 했습니다. (7절.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

 

두 번째 장면은 보아스가 룻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풀고 있는 장면입니다. 보아스는 이미 소문을 통해서 룻이라는 여인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습니다.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위해 자신의 고향을 떠나 낯선 백성들에게로 왔다는 것을 듣고 기특하게 여겼던 것 같습니다. 보아스는 룻의 이와 같은 결단과 행동에 대해서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보아스는 하나님께서 룻에게 복 주시기를 축복했고 하나님께 상 주시기를 바랐습니다. 보아스의 이런 축복은 말로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구체적으로 본인이 할 수 있는 것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계속 자신의 밭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소년들이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단속을 시켰고 목이 마르면 소년들이 떠온 물을 마시도록 해 주었습니다. 룻도 보아스의 이와 같은 특별한 혜택에 감사해 했으며 적지 않게 큰 위로를 받게 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으로 오늘 이야기는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13절... 나는 당신의 하녀 중에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5. 함께 나눌 구절과 말씀

  1) 3절 (룻이)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기적은 상식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실제 일어난 것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일어 날 수는 있는 일이긴 하지만 내가 필요한 순간에 그 일이 나에게 일어나게 되는 것도 기적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룻이 보아스에 밭에서 일하게 된 것이 바로 그와 같은 기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룻은 보아스라는 인물을 몰랐을 뿐 아니라 여러 밭 중 어떤 밭이 보아스의 밭인지 알 수도 없었습니다. 아무 밭이나 들어갔는데 우연히 그 밭의 주인이 엘리멜렉과 친족관계에 있는 보아스의 밭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때마침 그 날 보아스가 그 밭에 나타나서 정말 운명처럼 룻과 보아스가 만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우연히’, ‘마침’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사람들은 이것을 ‘운명’이라고 읽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도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일상 속에서 ‘기적’을 만들고 계십니다. 우리는 누구의 간섭도 없이 내가 스스로의 결정해서 한 행동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거기에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위급한 중에 생각지 못한 사람을 만나 도움을 얻게 되고 갑자기 생각지 못한 일에 참여하게 되면서 내 스스로의 결정으로는 하지 못했을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도 역사하고 오히려 그런 방식으로 대부분 일하시는지 모릅니다. 이런 기적을 ‘섭리’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저는 이런 기적, 즉 섭리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지는 것은 매우 높은 수준의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모든 일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바라볼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것은 무리가 따르지만 하나님의 섭리라는 안목으로 일상으로 바라보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좀 더 선명하게 느끼게 될 때가 많고 때로는 너무 놀라워 감탄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일하심이 더욱 선명하게 보이시는 복된 하루가 되길 축복합니다. 

 

 2) 12절.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면...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룻이 나오미를 위해서 선택한 자기희생적인 삶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보답해주시고 상주시기를 원하는 보아스의 따듯한 마음이 담겨져 있는 구절입니다. 저의 마음도 동일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새벽마다 교회에 오셔서 이 예배당을 기도로 채우고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병들고 낙심한 영혼들이 일어설 수 있도록 중보해 주시는 성도님들에게 하나님께서 복 주시길 기도합니다. 이 자리에 있는 분들이 건강하셔서 매일 이 새벽을 놓치지 않도록 기도하고, 다른 분들과 교회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는 것만큼 하나님께서 여기 이 자리에도 함께 해 주길 바라고, 가정에서 새벽을 깨워 중보하고 있는 분들에게 복 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우리 산울교회는 수고하고 애쓰는 성도를 보면서 ‘하나님 저 분 복을 주세요. 하나님께서 직접 상을 주세요.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 복되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해주세요.’ 서로가 서로에게 이런 기도를 올려드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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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02 새벽기도회

본문: 룻기 1:15-22

제목: 끝까지 하나님의 편에 붙어있으라

 

  1. 환영과 대표기도
  2. 찬송가 429장.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3. 본문읽기: 룻기 1:15-22

 

4. 본문의 내용

 

지난 1월부터 3월까지 룻기 본문으로 설교를 해왔는데 공교롭게도 이번 주는 룻기 말씀으로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들었던 말씀을 다시 생각나게 하는 기회로 삼고 더불어 이번 기회에 새롭게 주시는 메시지를 얻는 복된 한 주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은 크게 두 장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했습니다. 오르바는 결국 나오미의 말에 설득되어 돌아갔으나 룻은 끝까지 나오미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나오미를 떠나지 않으려고 하는 룻의 결심이 얼마나 굳건한지 우리는 확인하게 됩니다.(18절. 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룻은 나오미를 향해서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 나도 머물고,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고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 나도 거기 묻히겠다고 말합니다. 한 마디로 어머니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기를 원한다는 서원으로 자신의 이 결심을 바꿀 수 없도록 단단히 묶어 놓습니다. 

 

결국 나오미는 룻과 함께 베들레헴에 이르게 됩니다. 성읍 사람들은 10년 만에 돌아온 나오미를 알아봅니다. 사람들은 나오미를 알아보고 이게 나오미가 아니냐고 묻지만 정작 나오미는 자신을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부르라 했습니다. 나오미가 ‘기쁨’이란 의미인데 자신의 인생은 즐거움 보다는 고통이 더 컸기 때문에 ‘쓴’이란 의미를 가지 ‘마라’라는 말로 자신의 현재 상황을 대변하려고 했습니다. 나오미는 전능자가 자신을 괴롭게 하였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풍족하게 나갔는데 비어 돌아오게 했다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여호와가 자신의 인생을 괴롭힌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들은 베들레헴에 보리추수 때에 돌아오게 되었고 이는 하나님께서 이들을 향해서 주실 양식과 풍요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5. 함께 나눌 구절과 말씀

  1) 18절 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오늘 본문에서 룻이 보여준 위대함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룻은 나오미와 운명을 함께 하기로 굳게 결심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젊은 사람의 치기어린 결심이나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룻의 이런 결정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 때문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앙의 요소가 없지는 않겠지만 나오미의 가정을 생각해 볼 때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깊게 가졌을리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히려 자신보다 더 연약한 운명이 되어버린 나오미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기로 결심한 룻의 충성스러움이 더 큰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룻은 나오미를 떠나 자신의 인생을 새 출발하는 것이 자신에게는 더 유익이 되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홀로된 시어머니를 혼자 둘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운명을 함께 하기로 했는데 그 결과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자기를 희생한 그 결정이 결과적으로 자기에게 가장 유익한 결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1)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언제나 하나님의 편에 서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운명을 함께 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붙어있는 사람은 어리석어 보여도 지혜로운 결과를 얻게 되고, 실패하는 인생처럼 보일지라도 성공하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결국 유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룻의 인생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나오미를 선택함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품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언제나 하나님의 편에 서시는 성도님들이 되길 축복합니다. 

 

 2) 21절.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나오미의 입장에서는 베들레헴을 나갈 때는 풍족하게 나갔다고 돌아올 때는 비어 돌아오게 된 것이 서살입니다. 나갈 때는 남편과 두 아들이 함께 했지만 지금은 남편도 두 아들도 죽고 며느리 한 명만 데리고 돌아오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베들레헴에 기근이 왔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살아보겠다고 이사한 것인데 오히려 남아있던 사람들보다 더 초라하고 빈궁한 모습으로 돌아오게 되었기에 나오미의 이 탄식은 지극히 사실적인 탄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어쩌면 나오미는 자신이 비었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남편도 잃고 두 아들도 잃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품 안으로 들어오게 될 수 있었습니다. 마치 탕자가 재물을 다 잃고 기근이 들어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을 때 비로소 아버지가 생각나 그 품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처럼 나오미는 모든 것을 잃었기 때문에 다시 모든 것에 풍요로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보리 추수를 준비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나쁜 일이 나쁜 결과만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의 눈에는 우리의 고통과 결핍만이 전부인 것처럼 보이겠지만 보리 추수를 준비해 놓으신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기억하시고 믿음의 길을 놓치지 않으시는 성도님들이 되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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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29 새벽기도회

본문: 시편 80:1-19

제목: 자녀의 뻔뻔함, 자녀의 당당함

 

  1. 환영과 대표기도
  2. 찬송가 490장. 주여 지난밤 내 꿈에
  3. 본문읽기: 시편 80:1-19

 

4. 본문의 내용

 

시인은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구원해 달라고 반복적으로 요청하고 있습니다. 한 문단의 마지막은 이와 같은 요청으로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3절, 7절, 14절, 19절)

 

1-3절의 내용은 이스라엘의 인도자이신 하나님께 요청합니다. 귀를 기울여 달라고, 빛을 비춰달라고, 능력을 보여 구원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구원을 얻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4-7절의 내용은 이스라엘이 충분히 혼날만큼 혼났으니 이제 용서해 달라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계속 노하셔서 이스라엘이 기도해도 듣지 않으실 생각인가 따지듯이 묻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많은 눈물을 이미 마셨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원수들에게서 조롱거리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이제 회복시켜 주시고 구원해 달라고 합니다.

 

8-14절의 내용은 한 포도나무의 비유를 듭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포도나무를 가나안 땅에 옮겨와 심고 잘 가꾸어서 그 포도나무를 무성하게 하셨는데 갑자기 포도나무 울타리를 다 허물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열매를 다 따게 하고 멧돼지와 들짐승들이 망쳐놓았다고 말합니다. 지금 하나님이 하신 일이 이와 같은 일이니, 이제 이스라엘에게 돌아오셔서 포도나무를 돌봐 달라고 요청합니다. 

 

15-19절의 내용도 포도나무 비유와 유사합니다. 하나님의 오른 손이 심고 기른 가지가 불타고 베임을 당했다고 말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주의 오른쪽에 있는 자(이스라엘에 왕, 메시야)를 세우시면 다시 소생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5. 함께 나눌 구절과 말씀

  1) 4절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 

시편 기자의 이 표현을 보면 하나님을 향해서 약간은 따지듯이 묻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 큰 고통을 당했고 너무 오랫동안 이 문제를 가지고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외면하시고 듣지 않으시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주께서 그들에게 눈물의 양식을 먹이시며, 많은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5절) 이 문제로 이들이 당한 고통이 얼마나 컸고, 그로 인해 기도하면서 울었던 시절이 얼마나 길었는지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시편기자는 억울했던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잘 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진노가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혼날 만큼 혼났으니 이제는 그만 돌아오셔서 우리를 보살펴 달라는 것입니다. 저는 시인의 이런 기도 속에서 사랑받는 자식의 건강한 태도가 보입니다. 잘못해서 혼나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부모를 부정하고 가출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 잘못에 대한 책임을 영원히 짊어지고 불행한 운명을 안고 살아갈 생각도 없습니다. 이정도 혼났으면 된 거 아니냐고 따져 묻는 것입니다. 자신이 사랑받은 자식이란 인식이 없이는 이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종이나 노예는 주인에게 이렇게 따져 물을 수 없습니다. 오직 자식만이, 그것도 건강한 관계 속에 있는 자식만이 할 수 있는 탄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 혼나는 중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라는 인식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시편 기자처럼 당당하게 나아가시는 건강한 성도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2) 12절.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허시사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따게 하셨나이까?

이 표현도 같은 맥락입니다. 잘못한 이스라엘이 오히려 하나님을 향해서 따져 묻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한 포도나무를 가져다가 가나안의 나무(민족)들을 다 없이하고 그것을 심고 잘 가꾸어서 뿌리도 깊고 높게 자라며 가지가 주변까지 넘쳐흘러 풍성한 열매를 거두도록 해 놓고서는 포도원의 담을 다 헐어서 지나가는 아무나 그 열매를 따 가게 하는게 말이 되냐?는 것입니다. 숲 속의 멧돼지들 포도원을 망치도록 하고 들짐승들이 와서 포도를 다 먹어치우도록 방치하는게 말이 됩니까? 따지는 것입니다. 

 

아이를 기르다 종종 당황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 동안 키워준 것에 대한 고마워하기를 바라서 ‘널 키우면서 먹이고 입히느라 학교 보내주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라고 물어보면 ‘낳았으면 그 정도는 해야지’ 너무 당당한 그 모습에 오히려 헛웃음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한 반성이나 자신이 받은 은혜에 대해서 깊은 감사보다는 자신이 누려야 할 자식의 권리에 대해서 당당한 모습이 참 건강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로 거듭난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죄 중에 위축되기 보다는 죄 가운데도 당당하실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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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28 새벽기도회

본문: 시편 79:1-13

제목: 진노 가운데서 긍휼을 기대하는 사람들

 

  1. 환영과 대표기도
  2. 찬송가 368장. 주 예수여 은혜를 
  3. 본문읽기: 시편 79:1-13

 

4. 본문의 내용

 

시인은 주님의 땅과 성전 그리고 예루살렘이 침략당하고 파괴된 것을 탄식하며, 고통당하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께 탄원하는 내용의 시편입니다. 

 

1-4절의 내용은 이방인들에 의해서 성전이 더럽혀지고 예루살렘이 돌무더기가 된 것에 대한 시인의 탄식입니다. 많은 수의 백성들이 죽임을 당해 시체가 공중의 새에게, 땅의 짐승들의 먹이가 되었음을 탄식합니다. 이들을 매장할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시신들이 방치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로인해 유다는 주변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음을 슬퍼합니다. 

 

5-9절의 내용은 시인의 탄원이 이어집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두시겠냐?’고 하나님께 탄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이렇게 노략한 이방인들에게 진노를 쏟아 부으셔야 하는 것 아니냐?고 탄원합니다. 과거 우리 조상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합니다. 지금 우리의 처지가 너무 가련하게 되었으니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도와 달라고 탄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10-12절의 내용은 이방인들이 오히려 교만하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고 말하는데 보란 듯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피 흘리게 한 것에 대한 복수를 우리의 목전에서 보여 달라고 합니다.(복수해 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이기로 정해진 자도 주의 크신 능력을 따라 보존됨을 보여주시고 오히려 주를 비방한 그들의 품에 칠배나 갚아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13절은 시인의 찬송으로 마무리 됩니다. 우리는 주의 백성이고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라는 믿음과 신앙의 고백으로 마무리 됩니다. 

 

5. 함께 나눌 구절과 말씀

 

  1) 5절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영원히 노하시리이까

시편 기자는 지금 하나님께 따지듯이 묻습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우리가 이렇게 고통당하고 수치를 당하는데 내버려두시겠냐고 따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방인들에게 너무 큰 피해를 입었고 모멸을 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아무 이유 없이 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들에게 죄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조상들의 죄로 인해 지금 이와 같은 결과가 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기자는 ‘하나님 해도 해도 너무 한다’고 말합니다. 이제 우리가 가련하게 되었으니 과거의 죄악은 잊으시고 긍휼히 여겨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백성이 가지는 당당함을 여기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죄가 없어서 당당한 것이 아닙니다. 잘못이 있고 그래서 책망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도 ‘이제 그만 용서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잘못했지만 원수는 아니지 않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로 연결되어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당당함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 잘못할 수 있지만 주님의 자녀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종종 죄를 짓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원수는 아닙니다. 부모님, 제가 잘못했으니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라고 빌면 부모의 마음이 누그러지듯이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아가시는 성도님들 되길 바랍니다.

 

 2) 11절. 갇힌 자의 탄식을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며 죽이기로 정해진 자도 크신 능력에 따라 보존하소서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갇히게 되고, 자신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죽이기로 정해진 자도 크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 아래에서 보존될 수 있음을 시편 기자는 믿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죄악 중에서도 주를 바라보고 갇히고 죽임을 당하는 것 같은 순간에도 주님의 긍휼을 소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에 대해서 책임을 물으시고 고통을 당하게 하시는 것은 우리를 죽이기 위함도 아니요 복수하시기 위함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지을 때 어떤 고통과 아픔이 일어나게 되는가를 경험하게 하심으로서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성도인 우리가 죄로 인해 고통당할 때 그것은 죄에 대한 형벌이라기보다는 죄의 대가를 경험하게 하셔서 다시 죄를 짓지 않도록 하시기 위한 성화의 도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죄로 인해 고통 당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하며 오히려 그 사랑 때문에 거룩함과 성숙으로 나아가는 기회를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존하시고 우리를 성장하게 하십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고 나의 죄를 반성의 기회로 삼고 개선의 기회로 삼아야지, 낙심하고 절망하여 좌절의 길로 가지 않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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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27 새벽기도회

본문: 나훔 3:1-19

제목: 교만을 멀리하고 겸손하게

 

  1. 환영과 대표기도
  2. 찬송가 351장. 믿는 사람들은 주의 군사니 
  3. 본문읽기: 나훔 3:1-19

 

4. 본문의 내용

 

하나님의 대적이 된 앗수르/니느웨가 겪게 될 비참함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1-3절은 앗수르의 니느웨가 왜 이런 진노를 받게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들에게는 거짓이 가득했고 포악이 가득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쟁의 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그 결과 주검이 큰 무더기로 쌓여 피의 성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4-7절은 니느웨가 음행으로 여러 나라를 미혹했고 마술로 여러 족속을 미혹했다고 말씀하면서 오히려 더 노골적으로 수치를 드러내어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부끄러움이 되도록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니느웨를 보는 자들이 다 도망치며 어떻게 이렇게까지 되었는가 놀라게 하겠다고 말씀합니다. 누구도 니느웨의 멸망을 안타까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8-11절은 니느웨가 강물로 둘러싸여 천연 입지와 막강한 군대가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지만 자신들이 공격했던 애굽의 노아몬(테베)도 그런 입지를 갖추고 있었으나 자신들에 의해서 공격당했다는 것을 그들은 잊고 있었다. 그들도 포로가 되어 잡혀갔고 어린 아이들이 모퉁이에서 매어침을 당했던 것처럼 니느웨도 그와 같이 될 것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2-19절은 니느웨가 무력하게 무너질 것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산성도 쉽게 무너질 것이고 장정들도 여인처럼 약할 것이다. 군사를 동원해 많은 병사를 마련한다고 해도 마치 느치가 날개를 펴서 날아감같이 모두 도망갈 것임을 말씀합니다. 지도자들과 귀족들은 죽고 백성들은 흩어지나 다시 모을 사람이 없는 상황이 됩니다.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가 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니느웨가 이런 지경이 되었는데 주변에서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손벽을 치며 좋아하게 될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니느웨가 항상 행패를 부려 당해왔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5. 함께 나눌 구절과 말씀

  1) 8절 네가 어찌 노아몬보다 낫겠느냐?

여기서 ‘노아몬’이라는 곳은 지명인데 애굽의 테베를 일컫는 말입니다. 애굽의 테베는 나일강의 방어벽과 동맹국의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은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그 도시를 점령했던 나라가 바로 앗수르의 니느웨였습니다. 니느웨는 그 사실을 잊고 니느웨는 강물로 둘러쌓여 있고 막강한 군대가 자신을 지켜줄 것이기에 안전할 것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네가 어찌 노아몬보다 낫겠느냐?’라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의 문제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너무 과도하게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도전자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적극적인 도전 정신이 되어 실제로 성취를 이루어내는 경우도 있지만 방어하는 입장에서는 자신의 강점만 극대화 되고 자신의 약점에 대해서는 없는 것처럼 여기기 때문에 결정적인 허점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애굽의 테베가 앗수르에게 점령당했던 것도 그와 같은 교만 때문이었을 것이고, 앗수르의 니느웨도 결국 그와 같은 교만 때문에 망하게 될 것임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잠언(16:18)은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강하고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교만하기 쉽습니다. 반면에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저희 것(눅 6:20)임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부족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존하는 자에게 하늘의 복이 함께 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만을 멀리하시고 겸손히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시는 성도가 되길 축복합니다. 

 

 2) 19절. 네 소식을 듣는 자가 다 너를 보고 손벽을 치나니 이는 그들이 항상 네게 행패를 당하였음이 아니더냐

 

니느웨가 멸망을 당할 때 옆에서 안됐다고 생각하여 측은하게 여겨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잘 됐다고 박수를 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통을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얼마나 약이 오르겠습니까? 그런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니느웨가 주변에 행패를 부리며 살아왔기 때문에 그들이 니느웨의 고통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평소에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래야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주변에서 함께 마음 아파하면서 기도하고 응원해 주는 것입니다. 뭔가 구체적인 도움을 줄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평소에 내 욕심만 차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야박하게 행동하고 그들에게 과한 욕심을 챙겨왔다면 그들은 우리를 축복하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겠지만 우리에게 욕을 할 것입니다. 우리가 불행한 일을 만나면 속으로 박수를 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려분, 우리가 어려운 순간에 박수 소리가 아니라 기도 소리가 들려지는 삶을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2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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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26 새벽기도회

본문: 나훔 2:1-13

제목: 하나님의 대적이 된다는 것

 

  1. 환영과 대표기도
  2. 찬송가 357장. 주 믿는 사람 일어나 
  3. 본문읽기: 나훔 2:1-13

 

4. 본문의 내용

 

선지서를 읽을 때 어려운 것 중 하나가 심판에 대해서 이야기 하다가 이어서 구원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도 하고 그러다 다시 심판을 말하기도 해서 종잡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논리를 전개하는 방식과 우리가 이해하는 방식에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겪는 어려움입니다. 그래서 다 읽고 나도 당체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방식으로 기술되어 있어서 좀 나누어 설명을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7절은 세 부류의 대상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 대상은 유다에 대한 것입니다. 파괴하는 자가 유다를 치러 올라와도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미 약탈자들에 의해서 유다가 큰 피해를 입었지만 앞으로 회복 될 것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대상은 바벨론 연합군에 대한 것입니다. 바벨론 연합군들은 앗수르(니느웨)을 공격할 자로 유다의 입장에서는 니느웨의 압제로부터 구원을 해 줄 분처럼 여겨집니다. 바벨론 연합군은 강력한 무기와 군대를 거느렸는데 감당할 사람이 없는 것처럼 강력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 번째 부류는 니느웨인데 이들은 상대적으로 무력하고 그들이 의지했던 성도 물에 소멸되며 왕궁이 불타고 왕후들은 끌려가게 됩니다. 

 

다음 8-13절은 니느웨가 어떻게 멸망하게 되는가를 보여줍니다. 옛날과 비교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물이 모인 곳(물이 풍족하여 살기 좋은 곳)처럼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는데 이제는 모두 도망하는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전에 풍요로웠던 도시는 모든 것에 약탈을 당하고 말았다. 전에는 앗수르의 니느웨가 사자들이 사는 굴과 같았다. 그들은 마치 사자처럼 두려워할게 없었다. 사자가 풍족히 양식을 쌓아 놓듯이 니느웨에는 약탈한 것들로 가득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런 곳이 아니게 되었다. 이들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 겉으로 보면 바벨론 연합군에 의해서 힘의 균형이 깨어진 결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여호와께서 그들의 대적이 되셨기 때문에 그들이 노략을 당하게 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3절) 

 

5. 함께 나눌 구절과 말씀

  1) 2절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시키시되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시키신다는 말씀은 매우 좋은 소식이지만 사실 그 이전에 아픈 현실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나훔 선지자는 2절 하반부에 ‘이는 약탈자들이 약탈하였고 또 그들의 포도나무 가지를 없이 하였음이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앗수르에 의해서 모든 것이 약탈당했고 그래서 모든 풍요를 빼앗겼던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께서 다시 영광을 회복시켜주는 은혜가 있을 것임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가 없고 실패가 없어서 가지고 있던 것을 잃거나 빼앗긴 적이 없는 상태가 가장 좋은 상태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측면도 있습니다. 때로는 ‘어떤 것의 가치는 그것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선명하게 드러나게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잃기 전까지는 그 소중함을 알지 못해서 함부로 대하거나 다루기도 합니다. 그 소중함을 정확히 몰랐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건강’이 그렇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건강의 가치를 정확하게 인식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다 ‘건강’을 잃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것이 사람의 삶과 행복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건강을 회복하고 나서는 자신의 몸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생각한다면 한 번 잃었다가 다시 회복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성장의 기회가 되는 듯합니다.

 

소중한 것을 일부러 잃을 필요는 없겠습니다만 우리의 부주의로 만약 잃게 되었다면 그것을 다시 얻기 위해서 노력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얻게 되었을 때는 이전과 같이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영혼의 평안을 소중히 여기시고, 몸의 건강을 소중히 여기시고 다시 회복하게 하시는 우리교회를 더욱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시는 성도님들이 되길 축복합니다. 

 

 2) 13절.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어’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한 가지 굳은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절대로 내가 ‘하나님의 대적’이 되는 일은 없도록 하자. 여러분 이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시고 보복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바다를 말리고 강을 말리며 산을 녹이시는 분입니다.(욘1:4-5) 오늘 본문에도 하나님의 대적이 된 니느웨를 향해서 ‘네 병거들을 불살라 연기가 되게 하고 젊은 사자를 칼로 멸할 것이며 노략한 것을 땅에서 끊을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13절) 하나님의 대적이 되는 것 만큼 큰 재앙은 없는 것입니다. 

 

지난 말씀사경회를 통해서 우리는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반복하게 될 때 성령님은 우리로 인해 근심하시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일이 반복된다면 우리는 ‘성령을 소멸하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살전 5:17) 가장 무서운 상태가 무엇이겠습니까? 두려움이 아닙니다. 영적 무감각입니다. 영적 무감각이 지속되면 우리는 하나님과 무관하여 살게 되고 결국 하나님의 대적이 되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늘 깨어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나의 자리를 찾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축복합니다.  // 기도: 이번주 장로신임투표를 위해, 새로 구성될 당회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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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25 새벽기도회

본문: 나훔 1:1-15

제목: 진노하시고 보복하시는 하나님

 

  1. 환영과 대표기도
  2. 찬송가 70장. 피난처 있으니 
  3. 본문읽기: 나훔 1:1-15

 

4. 본문의 내용

 

선지자 나훔은 니느웨 백성을 회개로 이끈 이전 선지자 요나와 대조적으로 앗수르 제국의 수도 니느웨에 멸망을 선포합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자신들의 영적 각성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폭력과 우상 숭배와 교만의 습관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 결과 바벨론이 니느웨를 파괴해서 니느웨는 흔적조차 남지 않을 것이라는 예언이 아주 구체적으로 실현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신 분이시기도 하시지만 돌이켜 회개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에게 대해서는 보복하시는 분이며 진노를 품으시는 분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번 분노를 발하시면 그 분노를 견디어 낼 자가 없음을 강조하십니다. 6절에 보면 ‘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 그의 진노가 불처럼 쏟아지니 그로 말미암아 바위들이 깨지는도다’ 성경은 ‘바다를 꾸짖어 말리고, 강을 말리신다고 했고 산들이 녹는다’고 말씀하기도 했습니다.(4,5절) 여호와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에게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지만 그렇지 않은 니느웨에 대해서는 범람하는 물로 그 곳을 진멸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에게 대해서는 심판을, 유대에게 대해서는 구원을 약속해 주고 있습니다. 니느웨는 재난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멸망시키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비록 강하고 많을지라도 반드시 멸절을 당하여 없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이보다 더한 저주와 독설이 없을 것 같을 정도로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반면 유다에게 대해서는 사과하듯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전에는 너를 괴롭혔으나 다시는 너를 괴롭히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유다에게 지운 멍에를 깨뜨리고 그 결박을 끊으시리라 말씀하십니다. 

니느웨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말씀하십니다. 니느웨가 쓸모없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더불어 유다를 향해서는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절기를 지키고 서원을 갚으라고 초대하고 있습니다. 

 

5. 함께 나눌 구절과 말씀

  1) 2절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성품을 생각하면 요나서 4장에 표현되어 있는 것에 익숙한 편입니다.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욘 4:2) 그러나 나훔서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을 보면 그와 전혀 다른 측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는 강하고 많을 지라도 반드시 멸절시키시는 분으로 나훔서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모습이 어디에서 드러납니까? 자신이 위태롭거나 간절할 때는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거나 하나님께 회개하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면 그것을 통해서 좀 더 나은 인생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니느웨도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40일이 지나면 무너지리라 경고할 때는 회개했다가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켜 용서해 주시니까 이들은 서서히 다시 옛날의 죄악 된 삶으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사사시대의 이스라엘 모습도 그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훔서는 그렇게 죄를 반복하여 살다가는 망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오용하는 자들에게 대해서 하나님은 더 큰 진노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비로운 하나님이시지만 더불어 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도 되신다는 것을 잊지 말고 두려움과 떨림 가운데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길 축복합니다. 

 

 2) 15절.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지어다.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대적자를 심판하시는 이유는 단순한 복수와 심판만이 아닙니다. 우리로 하여금 대적자로 인하여 하지 못했던 것을 다시 회복하도록 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유다의 대적자인 니느웨를 심판할테니 유다는 다시 절기를 지키고 네가 지킬 서원을 갚으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코로나 판데믹에서 코로나 엔데믹을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우리가 하지 못했던 신앙생활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예배의 현장에 참여하지 못했던 것이고 성도간의 교제를 나누는데 제약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코로나가 점점 끝나가고 일상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동안 코로나로 인해 참여하지 못했던 예배의 자리, 교제의 자리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이제 다시 현장 예배의 자리, 대면 교제의 자리, 기도회의 자리로 나아오시는 성도님들이 되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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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15 새벽기도회

본문: 요한복음 19:17-30

제목: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순종

 

  1. 환영과 대표기도
  2. 찬송가 150장. 갈보리산 위에 
  3. 본문읽기: 요한복음 19:17-30

 

4. 본문의 내용

 

빌라도는 결국 예수님을 유대인들의 손에 넘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가시는 과정을 보면 예수님은 누구의 돌봄이나 보호도 받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에게는 따르는 무리도 많았고 무엇보다 12명의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체포되자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법정의 자리에서 예수의 무죄함을 대변해 주어야 할 빌라도조차 결국 자신의 양심을 지키지 못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줍니다. 유대인들은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광기에 사로잡혀서 예수를 죽이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로 가시면서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주님은 외롭고 억울하게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모습도 비참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죄인들과 함께 묶에서 마치 동일한 죄인인 냥 예수님은 그들 사이에 달리셔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빌라도가 달아놓은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팻말조차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이 볼 때는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발가벗겨졌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예수의 옷은 나눠가졌습니다. 심지어 속옷까지 챙겼습니다. 그렇게 주님은 부끄러운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죽어 가셨던 것입니다. 

 

그 와중에 예수님은 당신이 어머니 마리아를 챙깁니다.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에게 당신의 어머니를 맡깁니다. 그 제자는 그 때부터 마리아를 자신의 집에 모십니다. 아마 주님께서 이 땅에서 누리셨던 마지막 위로는 그나마 이것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까지 성경의 말씀을 응하게 하기 위해서 힘쓰신 후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고는 죽으셨습니다. 

 

5. 함께 나눌 구절과 말씀

 

  1) 26,27절 당신의 어머니를 제자에게 맡기는 예수님의 모습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제자들에게도, 무죄하다고 판단했던 빌라도에게도 주님은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배신당하고 버림받으셨습니다. 사람에게서 뿐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에게서도 조차 이 순간만큼은 외면당하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것입니다. 

그런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생각하셨습니다. 홀로 남겨질 어머니를 생각해 그 자리에 있는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맡기는 모습을 봅니다. 세상은 주님을 잊었지만 주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어머님을 제자에게 부탁한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무죄를 증명해 달라고 요청하지도 않았습니다. 주님은 그저 자신이 이 땅에서 당연히 짊어져야 할 마지막 책임감, 자신의 어머니를 부탁하는 것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가 생각해 보게 되는 장면입니다. 마지막 순간에도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2) 죽기까지 순종하시는 예수님의 순종

 

가장 큰 순종은 죽기까지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큰 순종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억울하게 종교 지도자들의 음모 때문에 돌아가셨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빌라도의 비겁함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 앞에 죽기까지 순종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스스로의 힘으로 죽음을 거부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 십자가 죽음을 향해서 가셨고 스스로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어 유월절의 제물로 드려지셨던 것입니다. 

 

그 과정에 억울함도 있었고 제자들의 배신도 있었습니다. 과도한 수치와 조롱을 당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 자리를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죄인들과 함께 취급 받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셨고 발가벗겨져 십자가에 달려 모든 사람 앞에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서 순종하셨고 결국 죽기까지 순종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통해서 사죄함을 얻었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을 통해 주님의 의를 덧입게 된 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죄의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 앞에 충분하게 의롭지 못하지만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을 통해 우리는 또한 의로운 존재로 여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산다는 것은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대속과 더불어 예수님의 온전한 순종을 알아서 하나님의 의가 우리 안에 있음을 잊지 않으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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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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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14 새벽기도회

본문: 요한복음 18:39-19:16

제목: 빌라도의 변명, 빌라도의 죄

 

  1. 환영과 대표기도
  2. 찬송가 80장. 천지에 있는 이름 중
  3. 본문읽기: 요한복음 18:39-19:16

 

4. 본문의 내용

 

빌라도는 예수를 심문했지만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무리가 예수를 정죄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풀어줄 수도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유월절 특사 제도를 이용해 예수를 풀어주고자 했습니다. 무리를 향해서 바라바라는 강도를 풀어줄 것인가 예수를 풀어줄 것인가 거래를 한 것입니다. 빌라도는 당연히 강도 바라바를 풀어주자고 할리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무리는 완강하게 예수를 풀어주어서는 안되고 오히려 바라바를 풀어주라고 요청합니다. 그만큼 유대인들의 판단은 이미 그릇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채찍질 하도록 합니다. 군인들은 가시나무로 관을 만들어 예수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는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놀리며 손으로 때렸습니다. 자신을 왕이라고 한 예수님을 조롱하고 모독한 것입니다. 

빌라도는 이 정도의 체벌과 모욕을 주었으면 무리들의 흥분이 가라앉혀지지 않았을까 기대했습니다. 빌라도는 자신이 죄를 찾지 못한 자지만 너희들의 요구가 있어서 이정도 했으니 이 정도로 끝내면 되지 않겠는가? 하고 기대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은 이 정도로 만족이 안 되고 반드시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소리쳤습니다. 빌라도는 하는 수 없이 예수를 그들에게 내어 주고 맙니다.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6절) 

 

빌라도는 다시 한 번 예수를 심문한다.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예수를 가볍게 넘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빌라도는 어떻게든 예수를 죽이고자 하지 않았고 오히려 놓아주려고 했으니 유대인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힙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놓으면 기이사의 충신이 아니라’라는 논리로 압력을 가했습니다. 자기를 왕이라고 주장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인데 그것을 알고도 예수를 놓아준다는 것은 가이사에게 반역하는 것이라고 압박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빌라도는 무리들의 요구와 대제사장들의 압력에 의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주고 맙니다. 

 

5. 함께 나눌 구절과 말씀

  1) 4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빌라도는 세 번에 걸쳐서 예수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38절에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19:4에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그리고 19:6 ‘나는 그에게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 빌라도는 예수의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적어도 예수를 죽여야 할 만한 죄를 찾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주고 맙니다.(19:16) 예수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확신했던 빌라도였지만 예수를 살릴 수가 없었습니다. 바라바라는 강도와 대체하려고 했지만 그것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진짜 죄인인 강도 바라바만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예수에게 채찍질 하는 것으로도 사람들은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요구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때까지는 변하지도 멈추지도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가이사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인 것처럼 빌라도의 주저함이 가이사를 반역하는 행위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습니다. 

 

예수의 죽음에 대해 빌라도의 입장에서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바로 여기에서 판결납니다. 예수님의 편에서 자신이 희생할 각오를 하지 않는 자는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리로 내 모는 사람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결국 빌라도는 무리의 두려움, 로마 황제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양심과 다른 결정을 했고 결국 그것은 평생 빌라도의 과오로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그 사실을 영원히 반복해서 기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는 이런 변명이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쩔 수 없었다고...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신앙적 양심을 따라 주님의 편에 서실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2) 유대인들의 완악함

오늘 본문에서 유독 강조하고 있는 것은 예수를 죽여야하겠다는 무리들의 의지입니다. 빌라도는 강도 바나바와 예수를 거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강도 바나바를 선택했습니다. 예수님은 평생을 생명을 살리며 평화를 전하며 유대인들에게 참된 진리를 가르쳤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강도보다 못하게 취급한 것입니다. 예수가 채찍질 당하고 조롱과 모욕을 당한 것으로도 그들은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가이사에 충성하는 사람이라도 되는 냥 로마를 위해서라도 예수를 죽여야 한다는 논리를 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반복해서 외쳤습니다. 빌라도를 통해서 죄가 없다는 것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예수를 이렇게 죽여야 우리가 얼마나 완악한 죄인임을 깨닫게 될까요? 나를 사랑하는 자를 내가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사실을 언제 깨닫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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