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 부자 관리


저는 지금 구원의 조건과 관련된 논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조건을 천국, 즉 하나님 나라가 가진 특성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을 통해서 묘사되고 있는 천국의 특징은 입장하는 것보다는 끝까지 남아 있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드렸고, 그것은 입장권과 같은 티켓 개념보다는 시민권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함이 더 적절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난 글에서는 구체적으로 삭개오의 구원에 대해서 살펴봤고, 같은 맥락에서 마태복음 13장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를 해석했습니다. 또한 빌립보서 3장에 언급된 바울의 고백에서도 그와 같은 개념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그와 반대되는 상황에 처한 사람의 예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관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18-23절) 어떤 관리가 예수님을 찾아 옵니다. 그는 자신이 선한 선생이라고 생각한 예수님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하나님이 말씀하신 계명 몇 가지를 말씀하십니다.(20절) 그러자 그 관리는 그와 같은 내용의 계명은 자신이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말합니다.(21절) 이 관원은 영생과 관련된 자신의 삶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그는 영생과 관련해서 좀 더 높은 수준, 좀 더 완전한 조건이 있다면 그것을 소개받고 그것을 시도해 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관리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음을 지적하고 다음과 같은 요구를 합니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22절) 예수님은 이 관원의 근본적인 문제가 ‘땅에 쌓아둔 재물이 중심된 삶’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땅에 쌓아둔 재물을 버리고 하늘에 재물을 쌓으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그것이 핵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관리는 ‘큰 부자’이므로 예수님의 요구에 순종하지 못하고 심히 근심했습니다.(23절) 마태복음에는 ‘이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마 19:22)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관원은 예수님께 나오지 못하고 돌아갑니다. 


이 부자 관원은 종교적인 계명들에 충실했지만, 그의 삶의 중심 가치는 ‘땅에 쌓아 둔 재물’이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성도들이 돈을 벌어 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돈과 재물이 성도의 삶에 우선되는 가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관원의 문제점은 세상의 질서를 그대로 간직한 채, 종교적인 요구를 잘 따른다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생은 새로운 질서로 들어가는 것이고 그것은 이전 질서의 핵심가치를 포기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부자 관원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예수님을 떠나간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는 다는 개념이 무엇인지를 갈라디아서에서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예수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이전의 나는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나 자신이 이전에 가지고 있는 세상적인 가치체계를 모두 버린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 땅을 살아가셨을 때 새로운 나라의 질서를 가져오시고 그 질서에 따라 사셨던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질서에 따라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좀 더 선명해 집니다. 삭개오는 세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확인받을 수 있었던 것이 이전 질서를 버리고 새로운 질서 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계명을 어려서부터 잘 지켰던 부자 관원이 영생을 원했지만 결국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은 이전 질서의 가치체계를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두 사람의 운명을 갈라놓았던 것입니다. 


저는 이 논의를 시작하면서 처음 다룬 본문이 마태복음 22:1-4 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비유 안에서 ‘예복’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잔치에서 쫓겨난 사람에 대한 것으로 문제제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혼인잔치에 남아있는 자와 쫓겨나게 된 자의 차이를 만든 ‘예복’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다시 질문하게 됩니다. 이 예복을 교리적인 접근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 본래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복이란 일반적으로 ‘어떤 행사의 격식에 맞추어 입는 옷’입니다. 이는 그 행사가 진행되고 있는 시공간에 적절한 의상 질서를 말하는 것입니다. 길거리에서 갑작스럽게 초청받은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왕의 아들 혼인잔치를 참석하는 사람들은 그 잔치에 걸맞는 예복을 준비하고 들어왔다. 그들은 미리 초대받은 사람들도 아니고 그 잔치에 걸맞는 신분도 아니었지만, 그 자리의 무게감과 질서를 알고 그들 나름대로 예복을 입고 온 것(질서를 존중하고 따르겠다는 의식)입니다. 그러나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그 잔치가 주고 있는 혜택에만 관심이 있었지, 그 공간이 주고 있는 격식과 무게감에는 관심이 없는 자였던 것입니다. 그는 왕의 아들 혼인잔치에 합당치 않은 자였던 것입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