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정리]


1. 바울과 소스데네가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한다. 

2. 너희들은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함.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이 끝까지 견고하게 할 것이다.

3. 난 너희들이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이 되기 원한다.(바울파,아볼로파,게바파,그리스도파)

  - 바울이 너희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었느냐?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느냐로 파당을 지어서도 안된다.

4. 십자가의 도라는 것이 지식을 추구하는 자에게는 미련해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히려 미련함을 통해서(전도)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길 기뻐하셨다.

  - 너희들을 보라. 너희 중에 지혜로운 자가 어디 있느냐? 문벌 좋은 자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세상의 천한 것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고 하셨다. 그러니 자랑할게 없지 않느냐?



[해설]


1. 고린도교회의 문제 중 하나는 그들이 매우 말과 지식이 넘치는 지역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2. 그런데 그 인간적인 지식의 넘침이 교회 안에서 분파를 만들어냈다. 즉 신앙의 파당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의 메시지를 인상깊게 들었고, 어떤 사람들은 에베소에서 사역하다가 온 아볼로의 성경강해가 인상적이었던 것이다.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 직접 사사받은 예루살렘 사도 베드로(게바)가 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가깝다고 보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더 나아가 '그리스도파'란 분파를 만들어 자신들이 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가까운 것으로 포장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언변도 좋고, 논리적으로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자들이니 교회 안에서 하나가 되기 보다는 자신의 입장을 강화하는 쪽으로만 나아갔던 것 같다. 마치 인간적인 학파를 따지며, 누가 더 뛰어난가를 겨루는 세상의 학자들처럼 말이다. 


3. 바울은 이들의 말과 지식으로 세운 파당의 집을 허문다. 누가 너희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는가? 바울도 아볼로도 게바도 아니다. 바로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다는 그 사실을 전하기 위해서 부름받은 사람일 뿐이다. 

교회에 들어올 때 받은 세례는 누구의 이름으로 받은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포함한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받은 것이지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의 이름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런데 왜? 그들에게 집착하는가! 그들이 유명하고 탁월하기 때문인가? 


4. 우리가 논리적 설명에 설득해서 혹은 우리의 지적 능력이 다른 사람에 비해 뛰어나서 <복음과 생명>에 이르게 되었는가? 너희 중에 그런 사람이 있는가? 아니다. 하나님은 낮은 것으로 높은 것을 폐하시는 분인데, 낮은 우리가 우리의 낮음을 자랑할 수 있겠는가? 자랑할게 없다. 


[묵상]


1.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지만, 그리스도를 잘 소개하고 전하며 가르치는 누군가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어떤 '인간 스승'이 존재하게 된다. 그 탁월한 스승은 자신의 이름으로 하나의 학파를 형성하게 된다.(그를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서)

  - 그래서 나는 종종 강단에서 '칼빈'의 입장을 듣고, '박00' 목사님은 뭐라 말씀하셨는지에 대해 듣는다.


2. 이와 같은 현상을 부정할 수는 없다. 우리는 누군가를 통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듣게 되고, 그 누군가가 탁월하게 잘 소개하는 사람이면 듣는 우리에게는 도움이 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누군가의 이름만 남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분들이 원했던 것은 자신을 통해 <그리스도>를 보도록 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그 분들의 많은 주옥같은 말과 글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더 잘 드러나도록 하여야 하는 것이지, 그 표현 자체의 탁월성만이 남아서도 안되는 것이다. 

  * 인간 스승들을 다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불완전성을 인식하고 절대화하려는 우를 범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래야 서로들에게서 배울 것이 아닌가!


3. 결론적으로 내가 누구에게서 배웠는지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 누구'가 드러나는 방식으로, '그 누구의 권위'를 근거로 해서 성경을 가르치는 것 만큼 위험한 것은 없지 않은가 싶다. 아무리 바른 교리와 정통이라는 토대위에 있다고 해도 말이다. 


4. 주님이 말씀인 성경이 빠지고, 그것을 이해하고 해석한 사람들의 입장(교리)만 남을 때 교회는 누구파, 누구파, 누구파로 나누어지게 되고 만다. 주님의 본질적인 말씀인 '사랑과 용납과 한 몸의식'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배운것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5. 오늘날 이 시대는 고린도 지역처럼 말과 지식이 넘쳐나는 시대다. 그럼에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삶으로부터 더 멀어지는 것을 느낀다. 오히려 당연한 것이라 싶다. 지식과 말의 결여가 신앙을 퇴보시키는 것이 아니라, 말과 지식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우리의 '자기 자랑'이 고린도 교회처럼 신앙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6. 무지를 자랑할 것은 아니지만, 말과 지식을 자랑하는 것도 헛되다. 그리스도의 신앙에서는 말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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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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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가 역시 정리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단락별로 정리는 할 수 있지만, 전체적인 흐름을 잡아가면서 하는 것은 쉽지 않네요. 그래서 다른 성경에 비해서 제 개인적인 해설(주관적일수 있는)이 많이 들어가게 될 것 같습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제가 이해하는 방식으로서의 해설이라고 보면 될 듯 합니다.(처음부터 정답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일을 시작할 수 없습니다. 약 60점 이상만 되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해야 나아질 수 있는 것이지요. 큰 테두리(정통교리)에서 어긋나지 않는 정도 선에서 해설을 해보려고 합니다.)

 

[정리1. 본문의 내용을 단락별로 정리하는 것]

1. 요한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고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1)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은 죄를 전혀 행하지 않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가 아니라, 죄를 행하고도 죄로 알지 못하는 상황(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도 어둠에 행하는 상황. 1:6)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쓴다고 봐야 할 것이다.
  2) 왜냐하면 1,2절에서 누가 죄를 범하면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과 대언자이신 예수님이 있음을 강조함.
  3) 그와 같은 예수님을 안다고 하면서, 어떻게 우리가 (무감각하게) 율법을 어길 수 있는가? 그 분이 행하신 대로 우리도 행하려고 하지 않겠는가?(그래서 죄를 짓지 않는 경향성으로 갈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2. 내가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1) 새 계명은  새로운 계명이 아니다.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옛 계명이다.
  2) 새 계명은 형제를 미워하지 않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다.
  3) 빛 가운데 있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너희에게 이런 빛이 있으니 깨달으라)
  4) 너희의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라.(12절)/ 하나님을 알고, 악한 자를 이기었다.
  5) 세상의 가치관(어두움에 빠뜨리는)을 사랑하지 말고, 따르지 말라. 그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들이다.

3.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가 일어나니 그들에게 미혹당하지 말라. 
  1) 그들은 우리 안에서 나간 자이나, 우리에게 속한 자가 아니다.(그들은 처음부터 한 몸이 아니었기에 결국은 나간 것이다.)
  2) 이들은...
   (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다.
   (2) 예수의 하나님 아들 됨을 부인하기에 하나님의 아버지 됨도 부인하는 자들이다.
  3) 너희는...
   (1) 처음부터 들은 것처럼 아버지와 아들을 인정하는 것이요, 그 안에 거하는 자에게는 영생이 약속되어 있다.
   (2) 처음에 받은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있으니, 또 다른 (영지주의적?)가르침이 필요 없다. 너희를 가르친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정리2. 본문의 내용의 중심 흐름과 관전 포이트 중심으로 재정리하는 것]

우선 요한의 글이 적그리스도를 적극적으로 의식하는 중에 쓰여진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18-29절) 이들은 공동체 안에 있었던 자들이고, 그 안에 있다가 나간 사람들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고 배운(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은 또 다른 지식을 가지고 공동체를 떠났다. 이것은 요한의 공동체를 열등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는 요소가 된다. 요한의 공동체는 공동체를 떠난 자들이 가지고 있는 (추가된)지식에는 도달하지 못한 열등한 공동체로 비춰지는 것이다.(떠난 자들은 그렇게 주변에 소문을 냈을 것이다)


그들은 율법에 매이고, 도덕에 매이는 것은 무지한 것처럼 여겼던 것 같다.(영지주의자 중에는 육체는 본질적으로 악한 것이기에 그와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을 당연시 여기고, 영혼만 잘 간직하면 된다고 보는 부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도덕적 양심의 가책도 없이 죄를 행하고 저지른다. 사랑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서 별 구속력을 가지지 않았다. 심지어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조차 부인했다.(하나님이 악한 육체 속에 올 수 없다고 보기에) 이런 세속적인 가르침이 이들 가운데 들어가 결국 이들은 교회를 떠나고 또한 교회 안에 있는 자들을 그와 같은 논리로 미혹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이 이들과 이들의 거짓된 미혹에 현혹된 자들을 경계하면서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참된 성도란, 죄인된 자신의 죄를 위해서 대속하신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믿는 것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새 계명)을 마음에 간직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다.(비록 온전히 지키지는 못할지라도... 이런 의식조차 없는 자는 참된 성도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정리3. 묵상과 적용]

1. 지적 교만은 복음에서부터 이탈하게 만든다.

  교회 안에 있던 영지주의자들은 처음에 복음을 새로운 지식으로 보았을 것이다. 인과응보적 가치관 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와 그 아들 예수의 대속을 통한 구원을 가르칠 때, 그것은 지식을 추구하는 자들에게는 매우 신선한 지식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 안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새로운 지식에 대한 추구를 버리지 못했고 도를 넘었다. 예수의 복음에서 세속적인 영지주의 가치관으로 결합한 또 다른 가르침으로 발전시켜 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교회의 성도들을 미혹했다.

  만행이란 책을 썼던 현각 스님은 미국의 하버드를 졸업했고, 카톨릭 집에서 자란 사람이다. 그런 그가 불교에 접하고 스님이 되었다. 이런 스토리는 사람들에게 불교가 기독교적인 진리를 넘어서 더 본질적이고, 더 근원적이며 더 진리에 가깝다는 인식을 준다. 서양에서 동양의 종교, 특히 불교에 심취하고 있는 흐름을 볼 때 또한 그와 같은 인식을 준다.

 

2.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중심의 문제다.

  이는 지식의 문제가 아니다. 그 진리를 전해주는 중심의 문제다. 그 진리가 근거하고 있는 중심의 문제다. 자기 자신의 깨달음에 근거할 것인지 아니면 인격적 절대자(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에 근거할 것인지의 문제다.

  적그리스도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의 내용을 세상의 것으로 대치하거나, 그것에 세상적인 어떤 것을 첨가해서 더 완전해 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을 말한다 볼 수 있다.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인 복음만으로 충분하다.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에 복음은 부끄럽지 않다.(복음으로 충분하다). 롬 1:16-17.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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