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 22장] 하나님은 고니야(여호야긴)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다윗의 왕위를 이어갈자가 없음을 말씀하신다. 다윗과 맺은 영원한 왕권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이 폐기되는 것 같다. 500년 이상 그 언약은 폐기된 채로 유다의 역사는 끝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왕, 다윗의 혈통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신다.

 

 

[정리1.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1. 여호와께서 유다 왕과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말씀하신다. 
  1)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2)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3) 이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4) 너희가 이 말을 들으면 그 영광이 유지되지만, 이 말을 듣지 않으면 이 집은 반드시 황폐되리라.
  5) 여호와 하나님이 너를 파멸할 자를 준비하리니 그들의 손에 들린 무기를 가지고 네 아름다운 백향목을 찍어 불에 던지리라.
  6) 여러 민족은 지나가면서 여호와가 이 큰 성읍을 이같이 행함은 어찌됨인가? 놀랄 것이다.
  7) 그 이유는 그들이 자기 하나님을 버리고, 여호와의 언약을 떠나 다른 신에게 가서 그에게 절한 까닭이라 하셨다 하라.

 

2. 여호와께서 유다 왕 살룸(여호아하스)에 대해서 말하다.
  1) 너희들은 죽은 자를 위해서 애통하지 말고, 사로 잡혀간 자를 위해 애통하라.
  2)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죽게 될 것이다.
  3)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살룸이 결국은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죽게 될 것이다.

 

3. 여호와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에 대해서 말하다.
  1) 화있을 진저:
   (1)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부정하게 그 다락방을 지으며 자기의 이웃을 고용하고 그 품삯을 주지 아니하는 자.
   (2) 큰 집과 넓은 다락방을 짓고 창문을 만들고 그것에 백향목으로 입히고 붉은 빛으로 칠하도다.
   (3) 네가 백향목을 많이 사용하여 왕이 될 수 있겠느냐?
  2) 네 아버지는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않았는가? 그 때 형통하지 않았는가?
   (1)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고 형통하였다.
   (2)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3) 그런데 네 두 눈과 마음은 탐욕과 무죄한 피를 흘림과 압박과 포악을 행하려 할 뿐이다.
  3) 여호와께서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에게 말씀하신다.
   (1) 그가 끌려 예루살렘 문 밖에 던져지고 나귀같이 매장함을 당하리라.

 

4. 예루살렘에 대한 탄식
  1)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너는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
  2) 네 모든 악 때문에 수치와 욕을 당하리라.
  3) 레바논에 살면서 백향목에 깃들이는 자여, 여인이 해산하는 고통 같은 고통이 네게 임할 때에 너의 가련함이 얼마나 심하겠는가!

 

5. 여호와께서 유다 왕 여호야긴(고니야)에 대해서 말하다. 
  1) 유다 와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여호야긴)가 나의 인장 반지라도 내가 빼어서 네가 두려워하는 자의 손 곧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손과 갈대아인의 손에 줄 것이라.
  2) 너와 너를 낳은 어머니를 너희가 나지 아니한 다른 지방으로 쫓아내리니 너희가 거기서 죽으리라. 돌아오기를 사모하는 땅으로 돌아오지 못하리라.
  3) 고니야(여호야긴) 이후로 다윗의 왕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글을 다시 풀어서 쓰기]

 

본문은 유다의 왕과 신하들, 그리고 백성들의 죄를 구체적으로 지적한다. 더불어 유다 왕 중에 살룸(여호아하스)과 여호야김, 여호야긴(고니야)의 죄과 그에 대한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유다의 사회적인 죄악은 그들이 마땅히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탈취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져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았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 즉 사회적인 약자를 오히려 학대한 것이며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린 것이다. 이와 같은 잘못에 대한 시정요구를 듣지 않은 것이 이들의 죄다. 결국 하나님은 이로 인해 이들을 적의 손에 넘겨주게 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요시야 왕 이후로 살룸(여호아하스)과 여호야김 그 뒤를 이은 여호야긴(고니야) 왕의 악행과 그 행위에 따른 결과가 어떠할지를 말씀한다. 살룸 왕은 죽은 자보다 더 비참한 살로잡혀간 자의 운명을 살게 될 것이다. 잡혀간 땅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죽을 것을 말씀하신다.

 

여호야김은 화려한 건축을 위해 그 백성들에게 그 품삯도 주지 않고 일을 시킴으로서 악을 행했다. 여호야김은 탐욕과 허영 그리고 무죄한 피를 많이 흘렸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 왕을 예루살렘 문 밖에 끌려가서 나귀처럼 매장당하는 비참한 운명이 될 것을 말씀하신다.

 

고나야(여호야긴) 왕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인장 반지 같은 자라 할찌라도 빼서 바벨론의 손에 넘겨주겠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이 왕은 여호와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 다윗의 왕 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이다.

유다는 왕으로부터 시작해서 신하와 그 백성 모두가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멀어졌다. 특히 왕들은 허영에 가득차 정의와 공의를 잊고 무죄한 자의 피를 많이 흘리게 한다. 이것이 결국 왕과 그 나라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원인이 되고 만다.

 

예루살렘은 평안할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고질적인 병처럼 이들의 습관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이들은 결국 가련한 운명이 될 것이다.

 

[정리3.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교훈과 묵상들]

 

1. 요시야 이후로 왕들은 허영으로 가득하고 공의와 정의를 잊었다.

 

권력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왕은 자기 자신들의 권력을 자신의 허영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였다. 품삯도 주지 않은 채 아름 다운 집을 짓는데 혈안이되었으며 그로 인해 백성의 고통은 말이 아니게되었다. 왕과 권력자들은 정의과 공의를 실현하는 것에는 무관심했다. 정의를 왜곡하여 무고한 자의 피를 흘리게 했다.

 

요시야 왕 이후로 국가적으로 하향 곡선을 그리며 추락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은 여전히 자신의 허영을 채우기 위해 급급했다. 앞을 보지 못했다. 그와 같은 유다의 운명은 여호야긴(고니야)을 마지막으로 그 후손 중에 다윗의 혈통이 왕이 되는 것은 끊어지고 만다. 다윗의 위가 영원할 것이라는 그들의 믿음과 기대가 무너지는 순간이다.

 

권력과 힘이 올바른 룰 안에서 통제됨이 없이 사용되어질 때 권력은 언제나 권력을 가진 자를 중심으로 타락하게 되어 있다. 부정한 방식으로 재물을 축적하든지, 그 권력을 자신의 허영을 위해 낭비하게 된다. 그로 인해 고통 받는 것은 무고한 자들이며, 힘없는 자들이다. 백성의 원성이 높아가게 마련이다. 유다는 하나님과의 신앙 문제에 있어서도 깊은 골이 형성되었을 뿐 아니라, 일반 사회적인 상황에 있어서도 긴장과 갈등으로 인한 위험이 커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인장 반지와 같은 유다 왕을 빼어 버리기로 결정하신다. 그리고 원수의 손네 넘겨주시기로 결정하신다. 공의와 정의를 잊은 권력이 마지막은 원수에게 넘겨짐이 되고 만다.

 

2. 고니야(여호야긴) 이후로는 다윗의 왕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자가 없을 것이다.

 

다윗에게 주신 영원한 왕권에 대한 언약이 깨지는 순간이다. 유다가 철저하게 믿었던 믿음, 다윗의 왕권은 결코 빼앗길 수 없을 것이다라는 그들의 믿음은 산산조각이 나고 만 것이다. 하나님은 언약에 있어서 신실하신 분이지만, 결코 언약에 매여 하나님의 이루어가질 정의와 공의를 포기하시는 분은 아님을 알 수 있게 된다.

 

이제 유다와 그 백성들은 그들의 언약에 대해서 믿음에 대해서 하나님 신앙에 대해서 전면적인 새로운 인식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언약에 대한 재해석을 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 된 것이다.

 

3. 너는 어려서부터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유다의 죄가 얼마나 오래되고 뿌리깊은 문제인지를 보여주는 표현이라 하겠다. 하나님은 이전까지 관심이 없다가 갑자기 사춘기 자녀에게 관심을 보이셨던 것이 아니다. 그들이 평안했을 때(어렸을 적부터)부터 관심을 가지고 말씀하셨으나, 이들은 그 때부터 듣지 않았다. 이들은 어려서부터 완악했음을 말한다.

 

갑작스러운 반항이나 임시적인 탈선이 아니었다. 이들의 반항과 탈선은 뿌리가 깊은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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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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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새벽예배 마치고 바로 제기동으로 출근했습니다. 회관도 세상도 조용합니다. 어디서 기타소리와 함께 기도하는 소리가 들리긴 하는데... 이 아침부터 어디서 나는 걸까요??

 

[정리1. 내용의 정리_어떻게 보면 본문을 다시 쓰는 것 같은데.. 쓰다보면 내용도 좀 더 정확하게 파악하게 되고, 문단을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1. 이스라엘 왕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에 대해서
  1)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17년간 다스림.
  2)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함. 여로보암의 죄를 따름.
  3) 여호와께서 노하사 아람 왕 하사엘의 손과 그의 아들 벤하닷의 손에 넘기심
  4)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학대하니 이스라엘 왕이 여호와께 간구하니 하나님께서 들으셔서 구원자를 보내주심으로 아람의 손에서 벗어나 전과 같이 자기 장막에 거하게 하였다.
  5) 그러나 그들이 여로보암 집의 죄에서 떠나지 않고 사마리아에 아세라 목상을 그냥 두었다.
  6) 아람의 왕이 여호아하스의 백성을 멸절하고 병력을 약화시켰다.
  7) 여호아하스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사마리아에 장사되고 그 아들 요아스가 왕이 됨.

 

2. 이스라엘 왕 요아스에 대해서
  1) 요아스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16년간 다스렸다.
  2)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고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여로보암의 모든 죄를 떠나지 않고 그 가운데 행함.
  3) 요아스에 대한 이야기는 역대지략에 나오고, 그가 사마리아에 장사되고 여로보암이 왕이 됨.

 

3. 이스라엘 왕 요아스 때에 있었던 한 사건(엘리사의 죽음)
  1) 엘리사가 죽을 병이 들매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찾아와 슬퍼하였다.
  2) 엘리사는 요아스에게 활과 화살을 가져오도록 요청했다.
  3) 엘리사는 왕에게 활을 잡고 동쪽 창을 열도록 하고 그곳으로 쏘도록 했다. 왕이 활을 쏘자 엘리사는 이는 구원의 화살 곧 아람에 대한 구원의 화살이니 아람을 멸절하도록 칠 것이다.
  4) 엘리사는 왕에게 화살을 잡으라고 하고, 땅을 치라고 했다.
  5) 왕은 세 번만 치고 그쳤고, 엘리사는 왕에게 왜 세 번만 쳤냐고 화를 냈고, 대여섯번을 쳤다면 왕이 아람을 진멸하기까지 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6) 엘리사가 죽고 다음 해에 모압 도적 뗴들이 그 땅에 왔다. 그 땅에서 장사지내던 사람들이 도적 떼를 보고는 급한 나머지 엘리사의 묘실에 들이던졌는데, 그 시신이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난 일이 있었다.

 

  [여호아하스왕과 요아스 왕의 추가적인 이야기]
  1) 여호아하스 왕 때에 아람 왕 하사엘이 항상 이스라엘을 학대했으나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풀며 불쌍히 여기셨다. 멸하기를 즐겨하시지 아니하시고 이 때까지 자기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다.
  2) 아람에 하사엘이 죽고 벤하닷이 왕이 되자, 요아스 왕이 벤하닷의 손에서 성읍을 다시 빼앗았다. (부친 여호아하스가 빼앗긴 성읍을) 요아스가 벤하닷을 세 번 쳐서 무찌르고 회복했다.

 

[정리2. 내용을 재구성해서 씁니다. 순서대로라기 보다는 일목요연하게, 내 표현으로 다시 쓴다고 하는 것이 맞겠지요]

 

본 장은 이스라엘 왕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와 그의 아들 요아스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호아하스는 17년간 이스라엘을 통치했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보시기에 악을 행했고, 여로보암 집의 죄에서 떠나지 못하고 죄악 중에 있었다. 그가 다스리던 때에 아람과의 전쟁이 계속 있었고, 그 때 여러 성읍을 빼앗기고 백성들은 고통을 받았다. 국력은 매우 약화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성경은 여호아하스는 범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세운 언약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풀고 풀쌍히 여기셨다는 것을 언급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은 여기서 명을 다했을 수 있을 만큼 나라는 위태로웠다.(23절)


여호아하스를 이어 그의 아들 요아스가 왕이 되었으나,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의 아버지의 평가보다 낫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대에는 아람과의 전쟁을 세 번을 이김으로 인해 여호아하스 때에 빼앗긴 성읍을 다시 회복하는 성과가 있었다. 이것은 요아스 때에 병으로 죽은 엘리사의 예언대로 이루어진 성취이다.


요아스 왕은 엘리사가 죽음에 임박하자 그를 찾아 애통해 했다. 엘리사는 요아스 왕에게 활과 화살을 잡게하고는 동쪽으로 구원의 활을 쏘개하고, 화살을 바닥에 치게 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요아스는 3번 밖에는 치지 않았다. 엘리사는 노하였고 안타까워했다. 왜냐하면 대여섯번을 쳤다면 아람을 완전히 이길 수 있었을 것인데 3번 밖에는 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요아스 왕은 활을 땅에 친다는 것이 무엇을 의지하는지 알수 없었기 때문이었겠지만 그것은 어떻게 보면 요아스 왕의 한계이기도 했던 것이다. 암튼, 엘리사와 관련된 그 사건은 하나의 예언이 되었고, 그 예언대로 요아스 때에 이스라엘은 아람과의 전쟁을 이기면서 잃었던 성읍을 되찾았다.

 

 

[정리3. 묵상과 적용]

 

1. 가계에 흐르는 저주는 몰라도 가계의 흐르는 축복은 확실하다.

 

오늘은 이스라엘의 왕 중 두 왕, 여호아하스와 요아스 왕에 대한 이야기다. 특히할만한 것은 여호아하스 왕은 악하고 무력한 왕이었다. 그는 여호와보시기에 악을 행했고 여로보암의 집의 죄악에서 떠나지 못했다. 고통속에서 부르짖을 때 하나님의 구원이 임했음에도 그는 다시 악을 행하는 자리로 나아갔다.(5,6절) 게다가 그는 무능했다. 아람의 전쟁에서 완전히 패배하여 많은 성읍을 빼앗겼다.

 

그런데 열왕기 기자는 여호아하스를 서술하면서 특이한 기록을 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풀고 불쌍히 여기시며 돌보사 멸하기를 즐겨하시지 않으셨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23절) 한마디로 여호아하스는 철저하게 선조들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보존되고 유지된 것이지, 만약 그것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은 여호아하스 때에 이미 아람에 의해서 완전히 멸절되었을 것이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악인의 저주와 의인의 축복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악인의 가계의 흐르는 저주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을 나는 잘 모르겠다. 물론 악인의 자녀들이 더 악한 환경 속에 노출되어 있어서 쉽게 악해질 수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알 수 있다. 여로보암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에 그와 같은 죄악이 대를 거쳐 흘러갔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그것이 기계적으로 흐른 것은 아니다. 그 뒤를 이은 왕들이 그것을 개혁하지 못했다는 것이요 그 흐름에 편승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선친들이 받은 저주가 계속해서 죄없는 자녀들에게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는 구체적인 사례를 나는 모르겠다.(있으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다. 진심으로... 나도 궁금하니...) 그러나 선친들의 선행으로, 선친들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말미암아 후손들이 복을 누리는 것을 나는 종종 보게 된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그와 같은 구체적인 사례중에 하나라고 하겠다.(23절) 남 유다의 아비얌 때의 평가도 마찬가지다. 그는 선한 것이 없었지만, 다윗 왕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유다를 견고하셨다고 성경은 언급하고 있다.(왕상 15:1-5)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말하는 것이 성경적인지 난 모르겠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가계에 흐르는 축복과 은혜가 있다는 것은 확실히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2. <긍정적 사고>라는 말보다는 <적극적 태도>라는 말이 좋다.  

 

긍정적 사고를 통한 긍정의 힘이 교회 안에서도 강조되고 있는듯 하다. 일반 상식적인 차원에서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그 근거가 성경에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인정하기가 곤란하다. 그래서 늘 교회 안에서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 한다고 하고, 긍정적인 말을 해야 한다고 한다면 구약에서 선지서는 모두 제거해야 할 책이 되고 말 것이다. 아니 선지자들의 활동을 모두 부정해야 할 것인지도 모르겠다.

 

긍정적 사고와 말에 대해서 나는 긍정하지만, 그것이 성경적이라는 논리에 대해서는 부정하고 싶다. 오히려 성경은 <적극적 태도>를 강조한다고 본다. 오늘 본문에서 요아스가 활을 세번 만 친것이 문제가 되었다. 대여섯번을 쳤다면 아람을 완전히 이겼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세번만 친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요아스의 입장에서도 활을 땅에 치는 숫자대로 아람을 이기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요아스는 열번도 쳤을 것이고 백번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요아스는 자신의 행동과 아람과의 전쟁 승리와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힌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미 앞에서 엘리사의 지시에 따라 활을 동쪽으로 쏘고는 구원의 화살이라는 힌트를 엘리사가 주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의 힌트를 가지고 요아스는 활을 땅에 여러번 치는 시도를 해 봤음직 할만도 한 것이다. 그러나 요아스는 적극적인 태도가 없었던 것이고 수동적이었던 것 같다.

 

나는 여기서 <적극적인 태도>의 소중함을 본다. 성경은 적극적인 태도를 가지라고 말한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말한다. 이루어질 때까지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고 권한다. 어떤 환경에서도 자족하는 법을 배우면서 환경에 굴하지 말고 해야할 일을 행하라고 말한다. 사랑할 때도 적극적으로 5리를 가고자 하는 자에게 10리까지 가주라고 한다. 종은 적극적으로 종의 역할을 하고, 주인은 적극적으로 주인의 역할을 하라고 한다. 부모와 자식, 남편와 아내 모두 마찬가지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하라고 한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그것으로 내 제자인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긍정적인 사고와 긍정적인 말을 성경적이라고 하면, 교회 안에서는 비판도 평가도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면 교회는 건강해지는가? 아니다. 죄인들이 모인 교회는 적절한 비판과 평가 속에서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성경은 많은 비평과 평가와 고민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긍정적이란 말보다 적극적이란 말을 사용하면 좋을 것 같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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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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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1. 내용의 정리]

1. 예후가 아합의 아들들을 모두 죽이도록 하다.
  1) 예후가 사마리아에 있는 장로들과 아합의 여러 아들을 교육하는 자들에게 편지를 보내다.
  2) 너희 주의 아들 중 왕으로 세우고 너희 주의 집을 위하여 전쟁을 준비하라고 알림.
  3) 그들은 예후를 두려워하여, 오히려 예후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4) 예후는 왕자들의 목을 내일 이맘때까지 이스르엘로 가지고 오라고 하고, 장로와 왕자를 교육하는 자들은 왕자 70명의 머리를 광주리에 담아서 이스르엘로 보냄.
  5) 예후는 왕자들의 머리를 이스르엘 성 어귀에 두 무더기로 쌓아 놓아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신 대로 아합 집을 심판하시는 것으로 삼았다.
  6) 예후는 아합의 집에 속한 사람들을 다 죽이고, 그의 귀족들과 신뢰받는 자, 제사장들을 죽이되 그에게 속한 자를 하나도 남겨두지 않고 죽였다.

2. 아하시야 왕의 형제들을 예후가 살해하다.
  1) 예후가 이스르엘에서 사마리아로 가다가 도중에 목자가 양털깎는 집에 이르렀다.
  2) 예후가 유다 왕 아하시야의 형제들을 만난다. 이들은 (이스라엘) 왕자들에게 문안하고 태후의 아들들에게 문안하러 내려가는 사람들이었다.
  3) 예후는 이들 모두를 잡아 죽이니, 42명이었다.

3. 예후에게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이 함께 하다.
  1)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은 예후를 만나기 위해서 찾아 옴
  2) 예후와 여호나답은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고는 서로 함께 하기로 하고 예후를 따름.
  3) 예후는 여호나답과 함께 사마리아에게 가서 아합에게 속한 자를 죽여 진멸함으로서 여호와를 위한 자신의 열심을 여호나답에게 보여주었다.

4. 예후가 바알의 제사장들과 바알의 신전을 제거하다.
  1) 예후는 사마리아에 와서 바알을 위한 큰 제사를 드리겠다고 하고는 모든 바알 선지자와 모든 섬기는 자와 모든 제사장들을 한 사람도 빠지지 않게 불러모았다.
  2) 예후는 예복을 준비해 바알 선지자는 모두 예복을 입혀 쉽게 구분되게 하였다.
  3) 예후는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에게 바알을 섬기는 자들을 제외하고는 밖으로 내보냈다.
  4) 예후는 제사가 진행되는 때에 따로 80명을 밖에 두어 바알 섬기는 자를 모두 죽이도록 명령하였다.
  5) 바알을 위한 제사가 마친 후 바알 섬기는 자들을 모두 죽이고, 바알 신당으로 가서 목상들을 가져다가 불사르고, 신당을 헐어서 변소를 만들었다. 그것이 오늘까지 이르렀다.

5. 예후에 대한 평가
  1) 예후가 이스라엘에서 바알을 멸하였으나, 벧엘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 섬기는 죄에 대해서는 떠나지 않음.(여로보암의 죄)
  2) 여호와는 예후가 아합의 집을 심판한 것에 대해서 칭찬하며 왕 위를 4대를 지내도록 약속해 주셨다. 그러나 예후는 전심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않았다.
  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영토를 잘나내셨다. 아람 왕 하사엘이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요단 동편 길르앗 온 땅 곧 갓 사람과 르우벤 사람과 므낫세 사람의 땅을 빼앗김.(영토의 축소)
  4) 예후는 28년을 다스리고 죽었다. 그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이 되었다.  

[정리2. 내용을 내 말로 재 구성하여 정리]

본 장은 예후가 요람왕과 아하시야 왕을 죽이고, 더불어 이세벨 여왕까지 심판하고 나서 아합 집의 아들들을 포함한 그의 신하와 바알의 제사장들을 모두 심판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예후는 먼저 사마리아에 있는 지도자들에게 자신을 대항하여 왕의 아들 중 왕을 세워 전쟁을 준비하라고 대담하게 편지를 보낸다. 그러나 사마리아에 있는 신하들은 요람 왕과 아하시야 왕을 동시에 죽인 아합을 대항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오히려 예후의 지시에 따라 아합의 70명의 아들의 목을 예후에게 바친다. 예후는 간단하게 왕의 아들들을 제거하고, 사마리아에 있는 신하들의 포섭한다.


예후가 사마리아로 내려가는 도중에서 아하시야(남 유다)의 형제들 중에서 여전히 북이스라엘의 왕자들을 문안하러 오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을 모두 죽인다. 그렇게 이스라엘 왕가와 연관사람들을 심판한다. 한편 예후와 마음을 같이 할 수 있는 사람,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과는 힘을 모은다. 이들은 마음을 같이 하여 사마리아로 내려갔고, 그곳에서 바알을 섬기는 자들을 모두 제거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함으로서 예후는 아합의 일가들을 모두 제거함과 동시에 바알을 섬기던 사람들 그리고 바알의 신전의 우상을 제거했으며, 바알의 신전은 변소를 만들어 버렸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해서 했던 예언처럼, 아합의 집안을 완전히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예후를 통해서 실행하셨음을 보여준다 하겠다.
하나님은 예후에게 4대에 걸쳐 왕 위가 이어지는 복을 주셨다. 그러나 예후는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는 못했고, 전심으로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는 않았다.


여로보암 때에 아람으로 인해 요단 동편과 같은 영토를 잃고 이스라엘의 영토는 많이 축소되었다. 예후는 28년 간의 통치를 마치고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이 되었다.

[정리3. 묵상 및 적용]

1. 예후는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였으나, 선과 의의 도구는 되지 못했다.

예후는 분명하게 아합의 집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도구였다. 아합의 아들, 요람과 70명의 아들들을 심판했다. 아합의 아내 이세벨을 심판했고 아합과 연관되는 주변 인물들, 아하시야 왕과 아하시야의 형제들도 심판했다. 더불어 바알의 제사장을 모두 제거했으며, 바알의 우상과 성전도 훼손했다. 그는 철저하게 아합의 집안을 심판하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행한 예후에게 그 보답으로 왕위를 4대에 이어갈 것을 약속해 주셨다.(30절) 예후는 아합의 집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도구였다.

그러나 예후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 행하는 의의 도구는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여로보암의 죄를 떠나지 못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는 못했다.(31절)

악을 심판하는 도구라고 해서 선한 도구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적어도 하나님께는 이 두 과정이 서로 구분되어 있다. 우리는 악을 심판하는 자는 의로운 자라고 쉽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악을 심판하면서도 여전히 악한 자가 있다. 악인이면서도 악을 제지하는 자인 것이다. 이스라엘과 유다를 멸망시킨, 앗수르와 바벨론이 그렇다. 그들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를 심판한 자들이지만, 이스라엘과 유다보다 더 큰 죄인들이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징계하시고 교정하시기 위해 앗수르와 바벨론이란 악한 도구를 사용하신 것이다.

악을 심판한다고 정의가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악을 심판하는 사람들, 경찰이나 검사나 판사와 같은 사람들 혹은 공권력을 가지고 사회의 악을 제지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해서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일 수 있다. 어쩌면 악을 심판하는 자신의 역할을 정당할 수 있겠지만, 자기 자신은 그 보다 더 악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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