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2:4-9

아닥사스다 왕에게 느헤미야가 요청하고 아닥사스다 왕에 그 요청에 수락해주는 과정을 통해서 느헤미야는 이것을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셨다>고 해석했다.

(느 2:8) 『또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그가 성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과 내가 들어갈 집을 위하여 들보로 쓸 재목을 내게 주게 하옵소서 하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시므로> 왕이 허락하고』

느헤미야는 지금 비상한 능력을 만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감히 엄두도 내기 어려운 일을 하나님이 열어가시는 모습을 보고는 <하나님이 도우셨다>라고 신앙의 고백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해석이다. 역사를 바라보는 해석이요 사건을 바라보는 해석이다.

어떤 사람은 이와 같은 현상을 경험하면서도 <운이 좋았다> 혹은 <내가 말을 잘 했다>와 같은 해석을 달기도 하고, <아닥사스다 왕은 참 좋은 분이다>라는 것으로 평가를 달 수도 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다른 방식으로 이 현상을 해석해 낸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다스리고, 자신의 입술을 다리스고 분위기와 상황을 다스려 주셔서 마치 순풍에 돛단 배처럼 일이 술술 풀리게 해 주셨다고 본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 중심으로 세상의 현상과 역사적 흐름을 해석하는 해석법이라 하겠다. 아마, 함석헌 선생과 같은 분은 <성서로 본 한국 역사(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주관적이기는 하지만 그런 관점에서 한국 역사를 해석해 내려고 했던 것이리라 본다.

 

우리도 세상을 해석하면서 볼 수 있어야 한다. 사건과 현상을 해석하면서 봐야 한다.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볼 것인가에 따라(사관에 따라) 해석은 전혀 다른 곳으로 나아간다. 하나님의 섭리(구속사적인 섭리)라는 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 개인의 역사에서도 나라와 민족의 역사에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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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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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주일을 지난 월요입니다. 피곤하기도 하지만, 새로운 한주의 업무가 시작되는 활기찬 날이기도 하지요. 죠이에서는 여름 수양회를 위한 선발대가 출발하고 본격적인 수양회모드로의 변경되는 날이지요.

저야, 올해부터는 참석해야 할 이유가 크게 없게 되었지만 말이죠. 하지만 응원합니다. 하나님의 선한 손이 이시대의 청년 대학생들의 생각과 삶을 만져주시기를 말이죠^^

느헤미야 2장으로 들어갑니다.

[1차. 본문의 내용을 정리하기. 국어 시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1. 아닥사스다 왕이 느헤미야의 근심을 알아차리다.(1-4절)

1) 왕 앞에 포도주가 있어 잔을 드릴 때, 느헤미야에게 있는 근심을 왕이 먼저 알아차리고 무슨 일이 있는지 왕이 먼저 물어 봄

2) 느헤미야는 자기 조상들이 뭍혀 있는 성읍이 지금까지 황폐한 상태라 근심한다고 말함.

3) 느헤미야는 왕의 무엇을 도와주랴라는 질문에 하나님께 묵도하고, 요청한다.

2. 느헤미야의 요청과 아닥사스다 왕의 허락, 그리고 반대세력(5-10절)

1) 나의 조상의 묘실이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건축하게 하옵소서.

: 기한을 정해서 보내주기로 함

2) 강 서쪽 총독들에게 내리시는 조서를 내게 주사 그들이 나를 용납하여 유다까지 가게 하소서. 그리고 왕의 삼림 감독에게 문과 성곽과 집을 위한 재목을 가져다 쓸 수 있도록 해주소서.

: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심으로 왕이 허락하였다.

3) 호른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가 이스라엘의 흥왕케 하려는 사람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심히 근심함.

3. 예루살렘 성벽을 돌아보고, 성벽 재건을 독려하는 느헤미야(11-20절)

1) 예루살렘에 온지 3일 만에 느헤미야는 몇 몇 사람들과 예루살렘 성벽을 돌아보았다.

2) 성벽이 무너져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3)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을 모아 이야기 한다.

(1)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곤경은 너희도 아는바라.(예루살렘은 황폐하고, 성문은 불탔다)

(2)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 하고 요청함

(3) 하나님의 선한 손이 어떻게 나를 도왔는지 간증하고, 왕이 허락해 준 일을 고하면서 성벽을 건축하자고 제안하자 모두가 힘을 내어 선한 일을 하려했다.

4) 산발랏과 도비야와 게셈이 느헤미야를 업신여기고 비웃으며 왕을 배반하느냐고 왜곡함.

: 느헤미야는 이들의 간섭을 무시하고, 예루살렘 재건에 합류하기를 원치 않음.

 

[2차. 본문의 내용을 나의 글로 재정리하는 시간입니다. 요점과 강조점이 드러나는 시간입니다.]

 

느헤미야 2장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어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총독 자격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을 보여준다. 아닥사스다 왕의 허락이 있었을 뿐 아니라, 왕이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할 수 있는 도움까지 미리 주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 모든 도움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도우셨다는 것을 느헤미야는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두 가지 장면을 볼 수 있는데, 하나는 느헤미야의 주도면밀함이다. 느헤미야갸 동생 하나니를 통해서 예루살렘의 형편에 대해서 들었을 때가, 20년 기슬르월(히브리력으로 9월)이었다. 그리고 왕이 느헤미야의 얼굴에 수심이 있는 것을 보고 물었을 때가 같은 해 니산월(히브리력으로 1월)이다. 대략 4개월간의 시간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 사이에 느헤미야는 참 고민을 많이 했을 것이다. 기도했을 것이다. 어떻게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유다의 총독으로 발령이 난다면 효과적일 것이다. 또한 많은 자재가 필요한데 그런 물량을 공급받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그곳에서 안정적으로 일하려면 왕의 명확한 조서가 있어야 할 것이다라는 것과 같은 것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얻어낼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느헤미야는 근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말못하고 있는 느헤미야로 하여금 입을 열게 한 오히려 사람은 아닥사스다 왕이다. 그리고 왕의 질문 앞에 묵도하고 답을 하는 느헤미야는 지난 4개월간 정리했던 요구사항들을 하나씩 하나씩 말한 것이다. 이런 요구는 하나라도 들어주기가 쉽지 않은 것을 왕은 요구하는 것마다 다 허락해 주었다. 이것을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선한 손이 도왔다고 표현한 것이다. 예루살렘에 온 느헤미야는 이런 상황과 의도를 섣불리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예루살렘의 형편을 정확히 파악하고 가장 적절한 때가 되었을 때, 효과적으로 사람들에게 말했고.. 하나님의 도우심도 확인시켰다. 느헤미야의 주도면밀함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더불어 함께 봐야 할 것은 산발랏으로 대표되는 대적자의 등장이다.(10절) 이들은 처음에 긴장하고 있다가 가볍게 쨉을 날려본다.(19절. 왕을 배반하고자 하느냐?) 이들이 느헤미야의 이야기를 더욱 흥미진진하게 할 요소들이다.

 

이런 자료있으면, 대략 느헤미야 1장과 2장 사이의 간격이 어느정도인지 생각해 볼 수 있겠지요. ^^

 

[3차. 묵상과 적용입니다]

1. 느헤미야의 고민과 기도는 주도면밀한 계획으로 이어졌습니다.

기도는 막연히 부르짖는 열심만이 아닙니다. 기도는 생각입니다. 아니, 기도하면 생각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많은 가능성들을 생각나게 해주시고,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지혜를 주시기도 합니다. 기도는 간절함만이 아닙니다. 느헤미야가 4개월간 기도할 때 많은 생각들이 오고 갔을 것입니다. 그것이 정리되고 압축되었을 때가 4개월 쯤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제 기도가 여물어 열매를 딸 수 있을 때가 되었을 때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결정적인 용기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아닥사스다 왕의 입을 통해서 말을 하게끔 합니다. 느헤미야의 말이 즉흥적인 말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기도가 여물어야 합니다. 생각이 여물고 내용이 정리되고 불필요한 것들이 제거되고 마음 속에 단순해지고 단단해지는 것... 이런 것들이 기도가 우리 안에서 일으키는 것들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사역을 위한 기도를 하면서 이런 경험들을 많이 합니다. 기도할 때 길이 열리고, 열리는 길이 어떤 길이 보이게 되는 것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2. 대적자들은 기도의 응답과 함께 등장합니다.

느헤미야의 기도가 응답될 때,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대적자들은 그 때 그곳에서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란 대적자를 견디고, 대적자를 넘고, 대적자에게서 승리하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대적자가 없이는 하나님의 역사도 없는지 모릅니다. 아니, 대적자의 역할은 하나님의 역사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역할로서 우리의 삶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대적자를 만나는 것은 피곤한 일이 아닙니다. 흥미진진한 일입니다. 음악에 있어서는 장단과 같고 리듬과 같고 클라이맥스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성도들의 삶이 단조롭지 않고 흥미진진하다는 것은 끊임없는 대적자들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의미도 되겠지요. 대적자를 부정하지 말고, 받아들이면 편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나를 발견하고 하나님을 발견하세요. 나를 발견하고 하나님을 발견하는 일에 대적자들만큼 유용한 사람들도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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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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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는 느헤미야로 들어왔습니다. 에스라에 이어지는 성경인데, 역사적인 시점으로 볼 때, 스룹바벨로부터는 93년 시간 차, 에스라의 귀환으로부터는 13년의 시간 차이를 가지는 이야기 입니다.

[정리1. 본문 내용을 중심으로한 재 배열]

 

1. 느헤미야가 들은 유다 땅 예루살렘의 형편(1-3절)

1) 아닥사스다 왕 20년 기슬르월에 느헤미야가 수산 궁에 있을 때의 일이다.(B.C. 445년)

* 에스라의 귀환은 아닥사스다 왕 7년 다섯째 달에 있었던 일이다.(B.C 458년, 13년 전)

* 고레스의 명령으로 스룹바벨과 함께 1차 귀환한 때가 주전 538년.(93년 전)

2) 예루살렘을 다녀온 사람들 중 동생 하나니로 부터 그 형편을 듣게 됨.

(1) 그 지방 거기에서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2)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을 불탔다.

2. 예루살렘의 소식에 대한 느헤미야의 반응(4-11절)

1) 그 소식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함.

2) 느헤미야의 기도

(1) 하늘의 하나님,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

(2)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3) 우리와 우리 조상들이 모세의 명령한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않았다. 지금 당하고 있는 자신들의 형편이 자기들의 죄로 말미암은 것임을 확인하고 고백함.

(4) 그러나 하나님이 흩으신 곳에서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행하면,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서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기억하소서.

(5) 이 백성들은 일찍이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님의 종들이요 백성입니다.

(6) 주여 종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소서.

3. 그 때 느헤미야는 왕의 술 맡은 관원이었다.(11절)

 

[정리2. 본문 내용을 내 것으로 만들어 재 배열]

 

느헤미야의 이야기다. 느헤미야는 에스라가 귀환한 시점보다 13년 후의 일을 다룬다. 스룹바벨의 귀환과는 93년, 성전 재건과는 73년 이후의 일이다.

예루살렘의 형편은 100여년 전에 1차 귀환한 백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나아진게 없다. 여전히 유다와 예루살렘에 사는 동포들은 환난과 능욕 가운데 살았고, 성은 허물어진 상태며 성문들도 불타 재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지만, 여전히 보수할 여력이 없는 상태로 방치되고 있었던 것이다.

스룹바벨과 함께 1차 귀환을 했을 때(93년 전), 방해 속에서도 성전을 재건했을 때(73년 전), 에스라가 2차 귀환하여 개혁을 시행했을 때(13년 전) 경건한 유다인들은 뭔가 기대했을 것이고, 특히 멀리 타국에 있은 신실한 유다인들 중에는 자기 고향 예루살렘에서 뭔가 새로운 일과 옛 영광의 회복이 소식을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첫 귀환 후 100여 년의 시간이 지나고 성전의 재건도 에스라의 개혁도 있었지만, 여전히 그 땅의 자기 백성은 비탄 속에 방치되어 있는 듯한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다시 한 번 속에서부터 하나님을 의뢰하며 고민하던 유다인이 있었으니 그가 당시 왕의 술관원이었던 느헤미야였던 것이다.

 

[정리3. 묵상과 적용]

1. 바사 왕 고레스에 의해 시작된 돌아온 백성 공동체는 처음 기대하고 꿈꿨던 것처럼 이루어지지 않았다.

성전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성전을 건축한 후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에 있어서도 외부적으로나 내부적으로나 쉽지 않았다. 오히려 외부적인 어려움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막혔던 길도 열여졌다. 그러나 내부적인 것은 그렇지 않았다. 모세의 말씀을 따르겠다던 백성들은 금새 타락한 것이다. 성전은 다시 엉망이 되었고, 구별된 백성을 통해 세운 귀환 공동체는 다시 이방 여인과의 결혼으로 부정하게 되었다. 이것이 스룹바벨과 에스라의 1,2차 귀환 공동체를 통해서 보여준 모습이었다.

에스라를 통해서 회개하고 하나님의 편에 설것 같았던 백성들은, 여호수아의 결단 촉구 이후 사사시대에 혼잡했던 모습처럼 그렇게 되고 만 것이다. 단순한 땅의 귀환, 성전의 재건, 직분의 회복, 제사의 다시 드려짐 만으로는 예루살렘 언약의 성취가 필요충분의 조건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귀환 공동체를 통해서 보여준 것은 외부로부터의 하나님의 역사는 충분히 보여주었지만, 내부로부터의 변화가 없이는 온전한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래서 내면으로부터의 변화를 주도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신약 시대에 와서 강조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그런 측면에서 신약시대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과 더불어 성령 하나님의 사역이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2. 반복되는 절망 속에서 느헤미야가 다시 붙잡았던 것은 다시 하나님의 언약이었다.

  죄를 지어 온 땅에 흩어졌을지라도,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 지라도(9절) 돌아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언약의 말씀을 느헤미야는 붙잡은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은혜와 긍휼을 기대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이다.

  회복은 한 번에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귀환한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서도 수차례의 회개과 개혁이 진행되었다. 그러고도 형편이 나아진 것이 없었다. 절망하게 되고 회의주의에 빠질 수도 있다. 아니, 대부분은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렇지 않았다. 어떤 결과를 미리 볼 수는 없었지만, 다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았고, 그 약속을 가지고 은혜를 구하며 기도했다.

  다시 시작하는 믿음, 다시 도전하는 믿음, 다시 희생하는 믿음.

  느헤미야는 수많은 실패의 역사 속에서 안정된 자신의 상태를 버리고 다시 그 실패의 역사 속으로 뛰어든 것이다. 약속을 끝까지 믿는 믿음이 참된 믿음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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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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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에스라 7장입니다. 성전 재건에 대한 이야기가 6장까지 나오고, 이제 그 이후로 약 58년의 시간이 지난 아닥사스다 왕 때의 이야기 이면서 동시에 성전 재건의 의미를 좀 더 명확하게 구현해줄 에스라의 출현을 보여주는 장입니다.

 

[1차. 성경 본문의 내용을 중심으로 충실하게 정리]

성전건축(주전 516년)으로부터 약 58년이 지난 후의 에스라 이야기(아닥사스다 왕,주전 458년)

1. 성전 건축 후 약 58년 후, 대제사장 아론의 16대 후손인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에 올라왔다.(5절)

1) 에스라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였다.

2) 여호와의 도우심을 얻어,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을 정도의 사람이었다.

3) 아닥사스다 왕 제 7년에 이스라엘 자손과 레위 사람, 노래하는 자, 문지기, 느디님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올 때에 에스라도 함께 올라왔다.

4) 넉달이 걸리는 거리를 하나님의 선한 손이 도우심으로 안전하게 도착했다.

5) 에스라는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함.

2. 아닥사스다가 에스라에게 내린 조서의 초본 내용(11절)

1)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중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뜻이 있는 자는 누구든지 에스라와 함께 가라.

2) 목적: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유다와 예루살렘의 형편을 살피기 위해 왕과 일곱 자문관의 보냄을 받았다.

3) 왕과 자문관들이 예루살렘에 거하시는 하나님께 성심으로 은금의 예물을 드리게 함.

4) 바벨론 온 도에서 얻은 모든 은금과 백성들과 제사장들의 예물을 가져다가 신속히 제물로 사서 하나님의 제단위에 드리고, 남은 것은 좋게 여기는 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쓰라.

5) 그 외에도 부족한 것이 있으면, 궁정 창고에서 내다가 쓰도록 해라.

6) 왕의 명으로 강 건너편 창고지기에게 명하니, 은은 백달란트, 밀은 백 고르, 포도주는 백 밧, 기름도 백 밧까지 하고 소금은 정량 없이 주라고 명함.

7) 귀환하는 유다인들에게 조공과 관세와 통행세를 받지 않도록 하라.

8) 너희들은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하나님의 율법을 아는 자를 법관과 재판관을 삼아 강 건너편 모든 백성을 재판하게 하고, 그 중에 알지 못하는 자는 너희가 가르치라.

9) 네 명령을 지키지 않는 자는 죄를 정하여 죽이거나 귀양 보내거나 가산을 몰수하거나 옥에 가두라.

10)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하늘의 하나님이 명하신 것을 삼가 행해서 그 진노가 왕과 왕자의 나라에 임하지 않도록 하라.

3. 여호와를 찬양하는 에스라

1) 왕의 마음으로 예루살렘 여호와의 성전을 아름답게 할 뜻을 두셨다.

2) 나로 하여금 왕과 그의 보좌관들 앞과 모든 방백 앞에서 은혜를 얻게 하셨다.

3) 내 하나님 여호와의 손이 내 위에 있으므로 내가 힘을 얻어 이스라엘 중에 우두머리들을 모아 나와 함께 올라오게 하였다.

 

[2차. 1차 정리한 내용과 이전의 흐름, 더 나아가 작성자가 가지는 기초 정보를 기반으로해서 본문의 내용을 자신의 것으로 정리한다]

 

1. 성전을 완공하고 나서 약 58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의 이야기다. 아닥사스다 왕 때 학사 겸 제사장인 에스라가 어떻게 왕의 은혜를 얻고 사람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오게 되었는지를 묘사한다. 특히, 에스라가 하나님의 말씀에 능통한 자임과 하나님의 율법으로 예루살렘에서 다스리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을 보여준다.

2. 이와 같은 그림은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으로 이스라엘 통치하시려고 했던 과거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기억나게 하고 에스라의 역할이 모세의 역할임을 연상케 한다. 또한 아닥사스다 왕이 적극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종이 되어 에스라의 귀환을 돕고, 예루살렘에서의 성전 제사 회복을 지원하는 모습은 출애굽 당시 바로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물론 바로는 자발적인 지원이 아니었다. 아닥사스 왕도 자발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에게도 모 종의 두려움에 기인한 것이다. 23절에 언급되어 있는 것처럼 ‘어찌하여 진노가 왕과 왕자의 나라에 임하게 하랴’라는 왕의 고백은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내쫓은 것이 재앙을 피하기 위한 것인 것처럼, 아닥사스다 왕도 크게 다르지 않는 이유 속에서 에스라와 함께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을 명하는 것 같다.

(딴 이야기지만, 에스더서를 보면 모르드개가 애굽에서의 요셉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

3. 에스라가 아론의 16대 후손이라는 것과 모세의 율법에 능통한 자라는 것은 성전 제사와 모세 율법 통치의 회복을 위해, 약 60여년 전에 다시 세워진 성전을 근거로 그 토대를 온전케 하고 확대를 목적으로 한 귀환 공동체를 위한 2차 부르심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3차, 묵상 및 적용]

1. 에스라서는 지금 아닥사스다 왕 때에 일어나고 있는 일을 과거 출애굽 역사와 유사한 패턴으로 해석해 내고 있는 것 같다. 저자는 과거 출애굽 역사를 기억하면서 독자로 하여금 지금과 그 때를 비교해서 보도록 하고, 그것은 지금 이시대가 그 때와 같은 하나님의 때로 전에는 실패한 공동체(제사와 말씀 중심)의 회복의 때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2. 따라서 제사장이면서 율법 학자인 에스라의 귀환은 마치 모세의 등장, 그러면서도 모세보다도 어느 면에서 뛰어난(모세는 예루살렘에 들어오지는 못했고, 모세는 제사장은 아니었으니...) 존재로서의 에스라를 보여준다. 에스라는 이스라엘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 사람으로 기대된다.

3. 하나님은 이 일을 주도적으로 역사하고 있고, 아닥사스다 왕은 그 일의 종처럼 일한다. 하나님은 아닥사스다로 하여금 두려움을 가지게 했고,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어 그 위협을 피해보려고 했던 것 같다. 하나님은 이 땅의 권세도 사용하시고, 그들의 두려움도 사용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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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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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에스라 4장입니다. 성전 재건 사업이 잘 진행되는 것 같았는데.. 갑자기 문제가 생기네요. 그리고 별거 아닐거라 생각했던 문제가 성전 재건 사업을 방해하고 결국은 13년간 성전 재건과는 무관하게 살아가는 생활을 하게 합니다. 그렇게 되었던 배경을 설명해 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1차 내용정리] 본문에 있는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함.

[반전] 성전 건축을 멈출 수 밖에 없었던 당시의 상황 설명

1.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 사마리아인?)들이 유다와 베냐민의 성전 재건사업에 함께 하기를 원했다.

1)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성전 재건 사업에 그들이 상관없다고 거절함.

: 이들은 귀환 후 첫 일이 계보를 확인하는 것이고 선별하는 것이었다. 그만큼 이들에게 있어서 혈통은 중요한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함께 하면 순탄하고 좋지 않았겠나 생각도 들지만, 만약 그리되었다면 귀환한 유다민족은 금새 혼탁해졌을 것이다.

2) 이것이 불씨가 되어 그들이 적극적으로 유다와 베냐민의 성전재건 사업을 방해함.

3) 성전 재건 사업은 다리오 제 2년까지 중단되었다.(이렇게 약 13여년의 시간이 지난다.)

2. 성전재건이 아닌 그 이후(아하수에로 왕과 아닥사스다 왕 때의 비슷한 사건들)에 일어난 일들

1) 주변의 다른 민족들을 선동했을 것이고

2) 아닥사스다 왕(당시 왕)에게 조서를 보내, 유다민족은 예부터 위험한 민족인데, 이들이 지금 성전과 성읍을 재건하도록 둔다면 강 건너편 땅을 잃게 될 것입니다.

3) 아닥사스다 왕이 옛 사기를 읽고는, 예루살렘에 큰 왕이 있어서 그 주변 땅을 다스리고 조공과 관세와 통행세를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성전 재건을 중지하도록 명령함

4) 사마리아 인들은 이런 내용의 왕의 조서를 근거로 유다로 성전재건을 못하도록 억제함.


 

[2차 내용 정리] 여러 가지 정보들을 종합하여 내 표현으로 다시 정리함.

순조롭게 잘 진행되던 성전 재건 사업은 아닥사스다 왕의 갑작스러운 제동으로 멈추게 된다. 그리고 다시 공사를 시작하는데까지 13여년의 시간을 성전 재건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보내게 된다.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논간 때문인데, 그들이 처음에 성전 재건 사업에 함께 할 것을 요청했을 때 스룹바벨과 예수와 그리고 기타 이스라엘의 족장들은 그들이 민족적으로 정통성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전 재건 사업에 함께 해야 할 근거가 없기 때문에 그들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들은 유다인들의 대적이 되었고, 구체적으로 성전 재건을 하지 못하도록 정치적인 술수를 동원하기도 했다. 결국 성전 공사는 다리오 왕 2년까지(약 13년간) 중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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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성전 이야기가 아니라 성읍과 관련된 이야기 이면서 아하스에로 왕(에스더서 배경)과 아닥사스다 왕(느헤미야서 배경)에 대한 이야기가 삽입되었다. 역사적인 순서와 진행은 맞지 않지만, 당시 계속해서 유다인들을 방해하려는 세력이 시대별로 계속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삽입으로 볼 수 있겠다.

뭔가 될 듯한 분위기였는데, 대적자들에 의해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버린 상황이 된 것이다.

 

[3차 묵상/적용]

1. 민족적 정통성을 지키는 것에 대한 대가를 생각보다 크게 지불함.

2.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민족과 혼합되어 일을 쉽게 하거나 수월하게 하려고 했다면 더 큰 문제를 야기했을 것임

3. 결국 다시 성전을 재건하게 끔 인도하시는 과정을 통해서 볼 때, 스룹바벨과 지도자들의 결정이 옳았다는 것을 보게 됨.

4. 바른 길을 가면, 순결한 길을 가면 생각보다 큰 장애를 만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되면 순결한 길, 의인의 길, 바른 길에 선 자들의 손을 하나님이 들어주신다.

5. 이와 같은 일들의 역사적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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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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