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해설] 


11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다.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제부터 바울은 본격적인 자신의 논지를 펴려고 한다. 우선 <바울이 전한 복음의 신적 계시성>에 대한 강조다.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이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배운 것도 아님을 강조한다. 이와 같은 강조는 갈라디아서를 시작하는 첫 구절부터 드러났던 방식이다. 


 바울의 사도됨이 사람에게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갈 1:1)임을 강조한다. 


방식은 비슷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좀 다르다. 갈 1:1은 <바울의 사도성>에 대한 강조이지만, 갈 1:11,12은 <바울이 전한 복음이 직접적인 계시>로 말미암은 것에 대함이다. 바울의 서신서 여러곳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성>을 변호하는 경우가 종종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에서의 주 내용은 바울의 사도성에 대한 변호가 아니라,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직접적 계시성>에 대한 것이다.


13절.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하기 전의 자신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사도행전 9장에 잘 드러나 있다. 유대인 중 다른 누구보다 유대교에 열심이었고,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려고 했던 자였다. 


 (행 9:1-2)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16절.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을 부르셔서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실 때, 사울은 이미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된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을 만나러가지 않았다.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세멕으로 돌아왔다. 이 부분에 대한 역사적인 배경은 사도행전은 9장에 언급되는데, 바울이 아라비아로 갔다는 것에 대해서는 사도행전에 언급이 없다. 따라서 사도행전의 기록과 갈라디아서의 기록은 조합해 보면, 사울은 다메섹에서 아나니아를 통해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전도를 하다가 유대인에게 미움을 받고 생명이 위험해지자 그것에서 피신해서 <아라비아>로 간 것 갔다. 


거기서 사울은 3년 정도의 시간을 보낸 것 같다. 이 때 바울은 하나님을 통해서 직접적인 복음의 내용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 기간 중 셋째 하늘에도 올라갔다 온 신비한 경험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후 12:2, 개역)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여기서의 핵심 논지는 사울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이방인의 사도로 세워졌을 때, <복음의 내용>에 대해서 사람에게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순수하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직접적인 계시를 통해 받은 것임을 강조한다. 


 이는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사울에 대해서 어떤 모함을 했는지 짐작케 하는 근거가 된다. 갈라디아 교회들을 교란하기 위해서 들어온 자들은(1:7) 바울은 다른 사도들보다 늦게 부름을 받았고, 예수님을 직접 따라다니면서 배운 사도가 아니기 때문에 사도로서의 권위도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사도들에 비해서 떨어지고, 그가 가르치는 복음은 아직 미숙하기 때문에 예루살렘 사도들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을 것이다. 즉 복음의 내용에 있어서도 예루살렘의 유대 사도들보다 바울의 복음은 불완전하여 보완이 필요하다고 넌즈시 말하자, 갈라디아 교회들은 쉽게 그들의 논리에 넘어갔던 것 같다. 



[묵상]


1.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의 권위는 어디에 있는가?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의 권위를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했다. 즉, 신의 직접적 기원에 둔 것이다. 바울 뿐 아니라 유대 사도들의 복음도 실은 다 마찬가지다. 다만 이들은 복음을 전해야 하는 대상이 다른 것이었다. 그래서 본질은 다르지 않았지만, 구체적인 요구사항은 약간의 차이가 있었을 수 있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가? 지금도 바울과 같이 <신의 직접적 계시>를 받아야만 하는가? 그건 아니다. 이미 바울을 통해서 그리고 유대 사도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도들의 복음은 정리가 된 것이다. 우리의 과제는 그것과 다른 <복음>을 직접적으로 받는 것에 있지 않다. 이미 신적 기원을 통해서 기록되고 정리된 복음을 명확하게 파악하여 아는 것에 있다. 


우리는 누군의 복음이 어떤 방식으로 주어졌는가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는 없다. 그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 성경적인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아무리 신비한 역사와 권세가 나타난다고 해도,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을 떠난 내용을 권위를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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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개역개정]


[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2]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3]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5]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해설]


1. 바울의 서신은 주로 편지를 받는 대상의 교회의 이름을 따거나 받는 사람의 이름을 따서 지어져있다. 그리고 보통 바울이 교회에 편지를 보낼 적에는 본인이 전도하여 개척한 교회에 대한 AS차원에서의 서신이다. 물론 <로마서>의 경우는 예외다. 그러나 고린도전후서나 데살로니가 전후서 그리고 빌립보서와 같은 서신들은 바울의 전도 활동을 통해서 세워진 교회에 보낸 편지다.


2. 갈라디아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바울의 전도여행 내용을 읽어보면 '갈라디아'라는 언급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곳은 빌립보와 같은 식의 한 지명이 아니다. 갈라디아라는 지역의 이름인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2절에서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이라고 언급한다. 비시디아 안디옥,루스드라, 이고니온, 데베라는 도시를 포함하고 있는 지역이 갈라디아인 것이다. 

 

3. 그러나 사실 일반적으로 <갈라디아 지역>이라고 하면 위에 언급한 지명이 있는 남갈라디아 지역이 아니라, 북갈라디아 지역(위 지도 참고)이다. 남갈라디아 지역은 나중에 갈라디아 지역으로 편입된 곳이기에 <갈라디아 사람들>(갈 3:1)이라고 했을 때 일반적으로는 북갈라디아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래서 여기에서 약간의 논란이 있다. 


4. 일반적인 북갈라디아 지역의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라면, 바울의 갈라디아서는 적어도 2차 전도여행 이후가 된다. 왜냐하면 바울이 1차 전도여행을 통해서 전도한 지역은 남갈라디아 지역이기 때문이다. 2차 전도여행때 1차 전도여행한 지역인 남갈라디아 지역을 지나 유럽으로 넘어가기 전에 북갈라디아 지역을 다녀간거 같다.(행 16:6) 그렇게 되면 적어도 2차 전도여행 이후에 갈라디아서를 쓰게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안에 중요한 이슈 중에 하나인 '할례'문제를 다루는데 이 문제와 관련하여 사도행전 15장에 공식적으로 다루고 있고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공식적인 결론을 맺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갈라디아 지역 교회에서 '할례' 문제로 복음의 내용에 있어서 혼선이 있다는 것은 갈라디아서가 사도행전 15장 이전, 즉 예루살렘 공의회가 있기전(주전 49년)에 기록된 것이라는 견해가 있는 것이다. 그게 맞다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이란 바울이 1차 전도 여행을 통해서 세웠던 <남갈라디아 지역> 교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 하겠다.  



   * 좀 더 세부적인 논의가 더 있긴 하지만, 이 정도로만 정리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어떤 분은 남갈라디아 지역과 북갈라디아지역에 있는 모든 교회를 포함하여 말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기도 하신다. 

  * 갈라디아서의 저작 시점에 대한 논의가 있는데... 정작 논의를 하는 분들도 갈라디아서의 본문을 파악하는데 저작 시가 이르던 좀 늦던 큰 상관은 없다고 보는듯 하다. 



5. 이제 다른 주제로 넘어가서 바울이 자신의 사도됨을 설명할 때,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예수님과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은 표현은 본론에 가서도 자주 반복된다. 특히 자신의 사도됨을 <사람>으로부터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대한 것을 분명히 한다. 그러니까 바울은 갈라디아서의 시작부터(1:1) 자신의 이야기 하려는 논지의 <색깔>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 갈라디아서를 읽다보면 논지 파악이 혼란스럽다고 한다. 나도 다르지 않은데... 읽으면서 느낀 것은 갈라디아서는 차분히 앉아서 쓴 글이라기 보다는, 약간은 감정적으로 흥분한 상태에서 쓴 글로 보인다. 그래서 중간 중간 차분한 설명을 하다가 갑자기 감정적 표현들을 한다. 논리적인 글이 아니라는 느낌 보다는 바울의 감정이 많이 뭍어나는 글이라 생각하면 보면 좋을 것 같다. 


 

6. 한 절에 축약한 복음(4절)


간략하게 정리하면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주셨다>는 것이다. 왜?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지시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그리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역사는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된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짧지만 명확한 복음의 내용이다. 


자세한 설명보다는 갈라디아서의 편지의 서문의 특징을 생각해 보자. 다른 편지 서문에 비해 상당히 짧은 편이다. 이 짧은 인사말 속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성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과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밝힌다. 갈라디아서의 글이 상당히 밀도 있고, 공격적(?)인 글이 될 것임을 예견해 볼 수도 있겠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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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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