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정리]


[성도 간의 세상 법정에서의 송사 문제]

1. 성도 간에 문제를 세상 법정으로 가져가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훗날) 세상이 교회로부터 심판 받을 텐데, 너희들이 지극히 작은 일을 판단하지 못하고 세상 법정의 판단을 의존해야 한다니 부끄럽다.


2. 교회 지도자를 어떻게 세운 것이냐? 너희 형제간의 문제를 판단할 만한 지혜로운 사람이 교회에 아무도 없단 말이냐? 어떻게 교회 성도 간에 서로 고발하게 만들며, 그 일을 믿지 않는 사람들 앞으로 가져가게 만드는가? 


3. 이미 피차 고발했다는 것이 너희 가운데 뚜렷한 허물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그들은 너희의 형제가 아니냐?

  : 너희 자신들도 불의하고, 음행하였으며 우상숭배와 간음을 행하고 도적이나 탐심을 가졌던 자가 아니냐? 너희가 그와 같은 처지에 있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로움을 받은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너희 형제가 그와 같은 문제로 인해서 교회 안에서 일이 발생했을 때, 세상 법정까지 가도록 하는 것은 삼가야 하지 않겠느냐? 그냥 불의를 당하고, 속임을 당하는 편이 나은 것이 아니냐?) 


4. 모든 것이 가하지만,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다. 가능하다고 무엇이든 하려고 해서는 안된다.(절제) 왜?

  1)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2)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3) 너희 몸을 창녀와 합할 것인가? 아니면 주와 합할 것인가?

   (1) 사람의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는 것이다. 

   (2) 너희 몸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너희 몸을 하나님께서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생각 정리]


1. 바울은 교회 공동체가 올바른 판단을 못내리고, 세상 공동체(가치관)에게 판단을 맡기는 자리로 나아간 것에 대해서 마음 아파했다. 


이 말은 교회 성도들간의 문제는 세상 법정으로 가져가면 안된다는 것이라기 보다는, 마땅히 교회 안에서 다루고, 다룰 수 있는 문제조차 세상 법정을 의존해야 하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표현한 말일 것이다. 이것은 고린도교회 공동체가 그만한 것도 제대로 판단할 수 없는 수준의 상태라는 것에 대한 바울의 안타까운 마음의 표현이다. 이런 분명한 문제조차 교회가 판단하지 못한다면, 훗날 종말의 중요한 판단을 내려야 할 교회가 어떻게 그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란 말인가!


교회는 세상의 수준보다 높은 혹은 더욱 고상한 판단을 내리는 공동체여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교회에 대해서 놀라게 되는 것이다. 무조건 용서하고 관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그러면 세상은 교회를 우습게 알것이다.) 갈라디아서의 말씀처럼, '온유한 심정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더불어 자신을 돌아보아 더욱 거록한 공동체로 성숙해져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받는 평가는, 교회가 세상만 못하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현실인가! 그것이 교회가 세상에서 조롱받게 된 이유이다. 


2. 복음은 '자유'를 말하지만, 그릇된 사람들은 '방종'을 따른다.


복음은 확실하게 '자유'를 강조한다. 갈라디아서는 그것을 선명하게 한다. 그러나 바울이 복음 안에서 말하는 '자유'는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라는 방식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즉,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라를 법으로 말미암아 <구속된 삶>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의롭게 되기 위해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법에서 자유롭게 된 것이다. 사람이 의롭게 되기 위해서 <율법>에만 묶여있었지만, 이제 그리스도 예수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서 <율법>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의를 얻게 되었다는 측면에서의 '자유'인 것이다. 


율법과 무관하게 살아도 된다는 '방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이 그릇된 이해를 풀기위해 늘 복음을 설명하면서 추가적인 설명을 해야 했다. 자유지만 방종이 아니다. 


탐식에 사로잡힌 자들... 아무거나 자신이 먹고 싶고 먹을 수 있는 것은 다 먹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자유라는 이름으로 과거 전통이 부여했던 '가치관'을 무시했다. 심지어 윤리적인 가치관에서도 그와 같은 일들이 벌어졌다. 자신의 몸을 함부로 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복음 안에서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그것을 자신의 욕구(육체적 소욕)의 근거로 생각한 사람들이 고린도교회에도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성경이 가르쳐준 복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를 지지하는 근거를 '복음으로부터 뽑아, 복음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에 불과한 것이다. 


[적용 생각]


1. 교회가 성장한다는 것은 교회의 가치적 판단이 성장한다는 것이다.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교회가 그 일을 어떻게 판단하고 진행하는가가 그 교회의 성숙도를 드러내 준다고 할 수 있다. 예루살렘 교회에 '헬라파 과부와 히브리파 과부'간의 갈등이 생겼을 때, 사도들은 그 문제를 통해서 자신의 한계를 발견하고 오히려 자신의 본연의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고 그 일에 집중하게 되었다. 


또한 교회에 사도들이 아닌 '일꾼'일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도적인 장치가 따라와야 했던 것이다. 교회는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뭔가를 결정해야 하는 과정 속에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 결정과 과정을 중요시하면, 성장을 위한 계기로 삼아야 한다. 늘 최상의 선택만 할 수는 없다. 그런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전체적인 성숙이 함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2. 복음은 언제나 오해스럽기에 늘 보완되어 설명되어져야 한다.


갈라디아서도 그렇지만, 고린도전서도 마찬가지다. 바울의 전한 복음은 늘 어떤 대상들로 인해 오해를 받는다.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이 완전할 수 없다. 바울의 입장에서도 그렇고 받아들이는 고린도 교회의 사람들의 입장에서도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자는 듣는 자가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그와 같은 행동하는지 살펴야 한다. 그릇되게 이해하는 부분이 반드시 나타나게 될 것이고 그것을 수정하고 교정하는 것이 또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몫이어야 한다. 


복음은 완전하지만, 복음에 대한 설명은 늘 보완되어져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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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해설]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바울의 복음은 '자유를 위한 부르심'이다. 그러나 이 표현은 바울의 논지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유를 위한 부르심'이란 말만 떼서 의미를 확대하는 것은 바울의 의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갈 5:1에서 바울의 언급한 '자유'도 마찬가지다.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라는 개념을 잘 못 이해해서 '방종'으로 나아갔던 사람들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바울이 복음 안에서의 자유를 말할 때, 그 자유는 단순히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의'를 통한 구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모든 사람들을 율법 혹은 마음에 새긴 율법(양심)에 의존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때가 차매, 그리스도 예수의 속량으로 말미암아 이제 '새로운 법,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의'로 구원을 이루시는 시대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법이 드러나면서, 이전 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로마서에서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의 전환이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이라는 표현으로 사용되다 보니, 그릇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여전히 이 '복음이 말한 자유'를 자기들의 방탕을 합리화하는 방식으로 오용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순수 복음'의 핵심은 교리적으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3,4장)를 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완전한 복음의 의미는 '새로운 종'으로의 부르심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을 단순히 교리(이론, 3,4장)와 적용(실천, 5,6장)으로 구분하는 것은 충분하지 못한듯 하다. 오히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복음은 총체적인 것으로, <율법의 종으로부터의 자유와 사랑의 종으로의 부르심>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자유를 육체의 기회(육체의 정욕을 합리화하는 기회)로 삼아서는 안됨을 바로 이어서 지적한다.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14절을 통해서 볼 때, 바울이 말한 복음 안에서의 자유가 '율법 자체'에 대한 단절을 의미하지 않음을 분명히 한다고 본다. 바울은 온 율법이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는 말씀으로 이루어짐을 분명히 하고 있고,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5:1)고 권면함으로서 오히려 참된 복음은 '율법의 완성, 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짐을 분명히 한 것이다. 


따라서 복음으로 인해서 '방종'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은 복음을 자신의 정욕을 위한 근거로 받아들인 사람이지 '순수한 복음'을 온전히 받아들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또한 복음 안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인 것이다. 



 갈라디아서에서는 '순수 복음'이 왜곡될 수 있는 두 가지 변종을 보여준다. 하나는 '순수 복음'이 사람의 생각에 불완전하게 보인다는 것이다.(행위에 대한 요소가 하나도 없으므로... 허전하다.) 또 다른 하나는 '순수 복음'을 근거로 자기의 욕구(정욕)를 정당화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 두가지 모두를 경고한다. '순수 복음'에 다른 것을 가미(할례)하든지, 아니면 용도에 맞지 않게 오용(방종)하려고 할 때,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갈 5:19-21)




[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이 구절을 통해서 볼 때, 갈라디아서 안에 심각한 논쟁이나 분쟁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 갈등은 어느 정도의 도를 넘어 서로 '물고 먹는', 즉 죽자고 싸우는 형국이 되었을 정도로 심각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지 말라는 것이다. 서로 죽자 살자 싸우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옳고 그르냐를 떠나 피차 멸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사기 19-21장에 보면, 베냐민 지파 불량배들의 악행으로 인해 이스라엘의 11개 지파가 베냐민 지파를 전멸 시킬 뻔했다. 서로를 견제하고 권면하고 바로 잡아야 할 대상이지만, 형제란 서로 죽여서는 안되는 관계다. 가인이 아벨을 죽여서 안되는 것처럼, 11개 지파는 한 개의 지파를 전멸시켜서는 안되는 것이다. 교회 안의 성도들도 마찬가지다. 서로 죽자고 싸우는 것은 아니다. 살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어야 하고, 죽지 않을 정도로만 싸워야 한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안에서 발생한 구체적인 다툼에 대해서 아직 언급하지 않았지만, 심각한 갈등이 극단적으로 가지 못하도록 권면하고 있다. 서로에게 사랑의 마음으로 종이 될 것에 대해 권면하면서 말이다. 



[묵상]


해설을 쓰는 가운데 중간 중간 묵상의 내용이 있으므로 생략한다.



참고자료. 

'자유'란 오늘날 누구의 입에나 오르내리는 말이다. 자유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고, 다양한 사람이 자유를 주창하고 권한다. 자신의 나라를 위해 '민족 독립'을 얻은 아프리카 민족주의자가 있다. 식민 통치로부터의 자유다. 자유 무역, 관세 철폐를 믿는 경제학자가 있다. 중앙 통제가 자유 기업을 방해하기 때문에 그것을 싫어하는 자본주의자와 프롤레타리아를 자본주의의 착취에서 자유케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공산주의자가 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1941년에 처음 선언한 네 가지 자유가 있다. 그것은 '어디서나 말할 자유, 어디서나 예배할 자유, 어디서나 궁핍하지 않을 자유, 어디서나 두려워하지 않을 자유'다.

  - 존 스토트, 갈라디아서 주석, 173쪽.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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