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단순화 시켜서 정리해 본다면,

종교 개혁당시 로마 카톨릭은 성경의 권위를 넘어 교회의 전통에 선 기독교고, 
재세례파는 교회의 역사적 성취(전통)보다는 성경, 좀 더 엄밀하게는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선 기독교라고 볼 수 있겠다.


개혁주의자들은 사실 이 둘 사이에 신학적인 둥지를 틀었다고 볼 수 있는데
가장 극단적인 두 입장 사이에서 균형을 잡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자칫 잘못하면, 자신의 편의대로 때로는 성경의 잣대를 가져다 쓰고, 때로는 전통의 잣대를 가져다 썼기에 이중 잣대를 자신의 입맛에 따라 쓴다는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다.


지금의 개혁주의에 두가지 큰 문제가 있다고 보이는데


하나는 로마 카톨릭이나 재세례파(메노나이트)가 무리가 되는 부분도 있지만, 한 잣대를 꾸준히 사용하면서 나름 그 '진정성'을 인정받아가는 것 같은데, 개혁주의 교회는 이중 잣대를 일관성이 아닌(자기 희생의 관점이 아닌) 자기의 편의대로 사용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줌으로 그 '진정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싶다.


다른 하나는 로마 카톨릭은 그 교황의 영향력(전통 해석의 결정권자?)이 크고, 재세례파(메노나이트)는 예수의 가르침과 삶에 영향력이 크다.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의 혁신적인 행보(예수의 삶과 닮은)는 세속 세상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가난한 자, 소외된 자를 향한 교황의 말과 행동이 삶의 현장을 파고들기 때문이다. 재세례파(메노나이트)의 가르침도 급진적이다. 삶에 있어서 예수의 가르침을 문자적을 실천하려는 결단이 진보적 진영에서 적지 않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다. 반면 개혁주의들의 태도는 애매하다. 구체적인 실천에 있어서는 미온적이면서 이사람 저사람들을 판단하는데는 능숙하기 때문이다. 개혁주의 교리로 이 신앙, 저 신앙을 칼질하는 것에는 익숙하지만 제대로 된 요리를 만들어 내지는 못하고 있다. 관념만 남고 실천과 삶에서는 격리된 기독교로 전락되는 것은 아닌가 우려되는 지점이다.


나는 개혁주의 입장의 신학을 공부했고, 지금도 만족스럽게 생각한다. 그것은 개혁주의가 어느 한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전통과 성경을 모두 존중한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이 가지는 이런 귀한 장점을 살려내지 못하고, 위에서 우려하는 바 이중 잣대를 자의적으로 사용하는 것과 양 진영과의 치열하게 싸워오면서 몸에 밴 '싸움꾼'적 기질을 극복하지 못하면 개혁주의의 칼은 망나니의 그것일뿐 요리사의 그것이 되지는 못한다.


_ 메노나이트 신학자인 존 하워드 요더의 책(급진적 제자도, 죠이)을 읽다가 괜히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어 급히 글을 남긴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불의한 권력에 대한 개혁주의의 저항적 전통>

역사상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정치권력에 대한 복종의 한계가 어디인지를 물었다. 

1572년 프랑스 왕은 전국에 있는 개신교도, 즉 위그노 수만 명을 학살하라는 칙령을 내렸고, 그 명령은 실제로 집행되었다. 이 '성 바돌로메 날의 학살' 사건 이후 프랑스 위그노들은 "과연 그리스도인은 모든 정치권력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217쪽

정부가 정의가 아니라 불의의 주체가 되고, 공공선이 아니라 권력자들의 사리사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그런 때에도 기독교인들이 정부에 순종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16세기까지의 지배적인 대답은 "그래도 정부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로마서의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는 본문은 왕권신수설의 근거로 사용되었다.

••• 그러므로 위정자들이 무슨 짓을 하든 폭정 하에 신음하는 백성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었다.

••• 그러나 칼빈주의 신학자들에 의한 로마서 13:1-7 등 성경본문들의 새로운 해석은 상황을 완전히 바꾸어 놓고 말았다. 신학자들은 사무엘서 등에서 사울과 다윗이 일찍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으나 실제 통치권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백성들이 그들을 왕으로 선택하고 추대한 후였다는 본문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성경본문들에 근거하여 그들은 하나님이 위정자들에게 권세를 주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직접(immediately)이 아니라 백성들을 통해 '간접적으로(mediately)'라는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다. 즉, 본래 하나님의 것이던 권세가 지상에 내려와서 머무르는 첫 번째 좌소(the first seat of the power)는 왕이 아니라 백성들이라는 것이었다. 지상에서 권력의 일차적 수령자(the first receptacle of the power)는 왕이 아니라 국민이라는 이 생각은 주권 이론에 관한 한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이었다. 정치사상에 혁명이 일어난 것이었다.

••• 프란시스 쉐퍼가 자신의 저서 [그리스도인의 선언]에서 지적한 것 같이, 칼빈주의가 가장 널리 보급된 나라들 - 미국, 영국, 스위스, 스코틀란드, 프랑스, 화란, 덴마크 - 에서는 17,8세기에 예외없이 폭군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저항이 일어났다. 

••• 캐나다의 기독교 철학자인 폴 마샬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역사적으로 칼빈주의자들은 결코 폭군들에게 만만한 백성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정부의 통치를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판단했다. 교회사, 특히 칼빈주의 교회사는 예외없이 정치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고 도전하고 그것을 재정의하는 역사였다." 그리하여 칼빈주의적 기독교는 절대 권력의 제한과 현대 입헌 정치를 위한 기초를 제공했다.
218-221쪽
역사적 칼빈주의의 정치적 전통은 보수적인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다소 과격하게 들릴지 모른다. 물리력의 사용은 어떤 경우에도 비기독교적이며 비성경적이라 여기는 한국 교회의 보편적 정서에 비추어 볼 때, 폭정에 대한 무력 항거를 정당화하고 실행한 칼빈주의의 역사는 생경한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

••• 물리력의 행사가 기독교 윤리적으로 정당화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다. 그러나 보다 지배적인 견해는 몇 가지 조건 하에서 물리력의 사용이 정당화 된다는 것이다. 북한이 우리를 무력 침공할 때 그것을 군사력으로 격퇴해야 한다는 것에 반대하는 재세례파적 평화주의자는 대한민국 국민 가운데 아무도 없을 것이다. 혁명의 경우에 있어서도 소위 '의로운 전쟁'의 경우와 비슷한 조건으로 그것을 정당화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224쪽

정부가 불의한 혹은 우리의 신앙 양심에 반하는 명령을 한다면, 우선 합법적으로 그것을 시정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잘못된 법 개정을 위해 입법 활동이나 건전한 로비나 관계자 설득을 해야 한다. 

모든 합법적 방법을 다 동원하고 모든 적법한 절차를 다 사용해도 불의하고 부조리한 규정이 시행되지 않는다면, 그때는 양심적 불복종, 혹은 시민 불복종 운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보다는 인간 권세를 거스르는 것이 낫다. 인간의 법보다는 하나님의 법이 우위이며, 국가의 법보다는 신앙양심의 명령이 우선이다. 물론 그 신앙양심은 자신의 주관적이고 엉뚱한 고집이나 심지어 불순한 이익에 대한 고려의 산물이 아니라, 성경에 의해 충분히 지지받는, 그리고 객관성이 있는 확신이어야 한다.

228-229쪽

출처: 개혁주의를 말하다, 루로우니 님 (페북)담벼락에서...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