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욕에 대하여 1]


1. 정욕 

   다른 이름: 타는 갈증에 마시는 바닷물


2. 정욕은 서구 사회에서 특별히 말하지 않아도 가장 치명적인 죄로 인식되어 왔다. ... 정욕은 기독교 문화가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쳐 온 서구 사회에 '부도덕'의 대명사처럼 취급되어 왔고, 따라서 사람들은 이 욕망을 매우 은밀하고 음성적으로 추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언제 그런 시대가 있었냐는 듯, 성이 거리와 광장에서 당당히 활보하고 있으며 성애가 공공연한 볼거리이자 대중적인 즐길거리가 된 상황이다. ... 피터 크리프트는 "만약 성이 현대 사회에서 제거된다면 우리 사회는 경제 공항에 빠질 것"이라고 말한바 있다. 


오늘의 젊은 세대는 로고스적인 이성보다 에로스적인 감성을 더 중시하여, '너 자신을 알라'는 고대 스토아주의 보다는 '너 자신을 즐기라'는 에피큐리아니즘에 훨씬 큰 영향을 받고 있다. (182쪽)


[개인생각] 현대에 가장 큰 죄악은 '고리타분'이 아닐까 싶다. 고전적인 윤리관이나 가치관 혹은 전통은 '고리타분'한 것이 되고 말았고, 그것은 혐오스러운 것이며 현대인들에게는 비상식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뭔가 전통적인 입장에서 말하려고 하면, 사람들이 고리타분한 사람이라는 눈길을 보내며 상대를 하지 않으려 한다. '고리타분'은 이 시대의 대죄에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다.  



3. 성욕은 그 자체로 죄가 아니다. 하나님이 성을 만드시면서 성적 욕망을 인간에게 선물로 주셨기 때문이다. 

  (중략)

   성의 이런 독특한 기능과 성격 때문에 몸은 일종의 성례적 기능을 가진다.(184쪽)


4. 정욕은 성욕과는 다르다.

  일반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과도한 성적 욕망'으로 정의되는 정욕은 왜곡된 성욕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을 위해 상대의 육체와 감정을 허랑방탕하게 사용하는 성적 욕망을 정욕이라고 한다.(185쪽)


헬리 페어리는 진정한 사랑과 육체적 정욕의 차이를 솜씨 있는 대조하며 그 차이점을 설명한다. 


사랑이 상대에게 관심이 있다면, 정욕은 짜릿한 욕구 충족에 더 관심이 있다. 

사랑은 인격적 교감으로 따듯해지지만, 정욕은 외롭고 고독하다. 

사랑은 미래를 위해 때로 절제하지만, 정욕은 현재 감정과 만족에만 골몰한다. 

...

사랑은 잠자리를 나눈 사람과 또 다른 방식으로 함께 있기 원하지만, 정욕은 아침이 되면 남의 눈을 피해 남남이 된다. 


[개인정리] 죠이 스피릿이 빠진 성욕은 정욕이 되고 만다. 

  * 죠이 스피릿이란: 예수님을 첫째로 이웃을 둘째로 자기 자신을 마지막에 둘때 참된 기쁨이 있다는 스피릿.


[정욕에 대하여 2] 


1. 육체적 죄이자 영적인 죄


  마귀는 금욕 생활을 하는 수도사들이 육체의 쾌락을 추구하도록 유혹하는데, 정욕과 탐식은 가장 대표적인 것이었다. 이들은 마귀가 사람을 탁식에 빠지게 함으로써 정욕으로 유인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탐식으로 인해 마음과 몸이 느슨해지고 게을러지면 쉽게 인간의 마음으로 들어가 이성과 정신을 장악하여 혼미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욕은 육체에 속한 죄인 것 같지만 근원적으로는 마음과 정신에서 말미암는 죄다. 


2. 정욕의 원인들: 최상 정욕과 바닥 정욕


세이어즈는 인생이 최상의 상태에 오를 때와 바닥으로 내려갈 때 모두 정욕에 취약하다고 분석했지만 최상의 상태에 오를 때는 쉽게 정욕에 빠지듯이 극복하는 것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기 때문에 덜어렵다고 보았다. 반면 바닥에 내려간 상태에서 정욕에 빠지만 다시 해어나오지 못하게 되기 쉽다. 이 경우 정욕을 벗어날 수 있는 기운이 왕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C.S. 루이스도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이와 같은 관점에서 글을 쓴 것이 있다.) 


3. 정욕을 이기는 길


  1) 자리를 피하라: 부딪혀 이기려고 하기보다는 우선 피해야 한다. 요셉처럼.


  수도사 에바그리우스는 정욕이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말한다. 그는 사실 정욕으로 인생의 치명적인 위기를 맞은 수도사였다. 4세기 콘스탄티노플에서 이단과의 신학 논쟁으로 명성을 얻어 신망과 입지를 굳히고 있을 즈음, 에바그리우스는 한 교회 중직자의 아내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걷잡을 수 없이 끌리는 마음과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위치 사이에서 갈등하던 그는, 어느날 밤 여자의 남편이 군인들과 함께 집에 들이닥쳐 그를 끌어내고 감옥으로 집어넣는 꿈을 꾸었다. 잠에서 깬 에바그리우스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정욕의 수렁에 빠져 죽기보다는 지위와 명성을 잃더라도 수렁에서 벗어나는 길을 택한 것이다. 그녀를 보는 한 그 수렁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은 그는 콘스탄티노플을 박차고 나와 예루살렘으로 피했다. 더 이상 머물렀다가는 인생이 파멸에 이르고 말리라는 정직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2) 이 시대의 거짓말을 간파하라.

    [이 시대의 거짓 가치관]

   (1) 나는 내가 원하는 사람과 함께 무엇이든 즐길 권리가 있다. 

   (2) 성적 즐거움은 그 어느 것보다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 


  3) 배우자와의 친밀함을 높이라. 


  토마스 아퀴나스는 정욕의 반대 극단에 있는 '성에 대한 무감각'과 '성 혐오증'을 정욕 못지않은 해악이라고 지적했다. 즉 부부들은 하나님이 상대를 섬기고 누리도록 허락하신 성적 즐거움을 최대한 누릴 수 있도록 상호적으로 의식하고 노력해야 한다. 남편과 아내가 각자 자기 몸을 배우자가 주관하도록 하라는 바울의 권고를 따라(고전 7:4) 서로의 욕구를 존중한다면, 마귀도 틈을 탈 기회를 결코 얻을 수 없을 것이다. 


  4) 우정을 극대화하라. 


   천국에는 성이 없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정이 그 자리를 대치할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5) 궁극적 대안: 근원적 쾌락

   물질적 쾌락보다 더 근원적인 쾌락인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진다면 인간이 누리를 성적 욕구에 대한 것보다 더 풍성한 풍요를 누리를 수 있게 되며, 결핍으로부터 극복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성 어거스틴도 방탕한 생활 이후 회심하고 나서는 홀로 살았는데 이전보다 더욱 큰 기쁨을 가졌다고 한다. 


[개인생각] 어떤 감정이나 욕구가 처음부터 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길로 직진하듯이 아무 의식없이 달려간다면 우리는 큰 죄악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로 인해 스스로 통제할 능력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우측 도로로 늦지 않는 순간에 나와야 합니다. 초행길을 가는 사람처럼 고속도로 어느 중간에 나와야 할 지를 늘 신경쓰지 않으면(이정표를 경고삼지 않으면) 우리는 돌아오기 힘든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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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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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식에 대해서 1]


탐식: 꽉 찬 배와 텅 빈 영혼


탐식을 죄로 규정하고 경계해 온 중세 교회의 전통은 4-5세기 수도원 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 수도사들은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분량만 먹어야 했고, 그만큼 음식에 대한 유혹이 키질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마른 빵을 물에 적셔 부풀려 먹고 채식을 해야 했던 수도사들은 풍족한 음식과 이전에 먹던 고기에 대한 생각으로 종종 괴로워했다. 


에바그리우스는 마귀가 '여덟 가지 악한 생각'으로 수도사들을 유혹하는데 그 첫 번째가 식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대죄들 중에서 탐식이 가장 낮은 수준의 마귀로 말미암은 것이지만 극복하기는 가장 힘든 죄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인간 생존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욕구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160쪽)


그레고리우스는 탐식을 다섯 유형으로 좀더 세분화했다. 


1. 급하게 먹는 속식: 마치 음식이 곧 없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허겁지겁 재빨리 먹는 것. 이것의 문제는 단지 빠르게 먹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대하면서 감사하지 않는 것이다. 생각하고 음미할 겨를도 없이 먹으면서 감사를 잃어 버린다. 탐식자는 먹는 일 자체에 골몰할 뿐 감사가 없다. 


2. 게걸스럽게 먹는 탐식: 음식에 대한 욕심과 집착으로 맹렬하게 먹는 것을 뜻한다. 마치 며칠 굶은 사람처럼 입안 가득 음식을 넣고, 얼굴을 음식에 바짝 붙여서 다른 사람이 먹기 전에 먼저 먹으려는 욕심으로 맹렬히 먹는 것이다. 이런 식사는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사라진 것이다. 


3. 지나치게 많이 먹는 과식: 배가 부르지만 수저를 놓지 못하는 것이다. 한계 그 이상으로 음식을 집어 넣는 것이다. 동물은 배가 부르면 음식에 더 미련을 두지 않지만, 인간은 배가 불러도 맛있는 것이 있으면 더 먹고 싶어한다. 


4. 까다롭게 먹는 미식: 이는 조금을 먹더라도 까다롭게 먹는 것으로 음식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곤혼스럽게 한다. 이들은 자신이 많이 먹지도, 비싼 음식을 원하지도 않고 그저 소박하게 먹는다고 생각하며 '이 간단한 것 좀 제대로 해주면 안 되나?'하고 생각한다. 


C.S.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 등장하는 삼촌 악마는 조카 악마에게 식사량이 줄어든 사람에게는 전략을 바꾸어 입맛을 까다롭게 만들어 주라고 조언한다. '제가 원하는 건 잘 우려낸 홍차 한 잔이에요. 엷게 타 주시면 좋겠는데, 그렇다고 너무 연하게는 말고요. 그리고 바삭바삭한 토스트 한 조각만 곁들여 주시구요..'


5. 사치스럽게 먹는 호식: 음식 자체도 고급스럽고 질이 좋을 뿐 아니라 세련된 분위기 우아한 식탁과 같은 여러 조건을 갖추 식사를 바라고 고집하는 것.


  -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신원한), 162-164쪽.


[개인생각] 기본적인 욕구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중간적인 균형을 잃어버린 채 과도한 욕심으로 달려가는 것이 탐식인듯 하다. 죄라고 보기 보다는 미련하게 행동했다는 것으로 무마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급하고 게걸스럽고 지나치게 많이 먹는 식사는 우리가 물질적으로 가난할 때 일어나는 현상일 것이다. 그러나 까다롭게 먹고, 사치스럽게 먹는 것은 물질적으로 부유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지난친 가난은 탐식으로 몰고간다. 지나친 부 역식 탐식으로 몰고간다. 


[탐식에 대하여 2]


에바그리우스 역시 탐식은 '정욕의 어머니'라고 말했다. 탐식에 빠지면 지성이 흐려지고 욕적이 고조되어 행동이 난잡해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제자 카시아누스는 그 누구보다도 이 점에 대해 매우 설득력 있는 주장을 폈다. 그는 일곱 대죄를 육적인 죄와 영적인 죄로 나누었고, 죄는 육적인 죄에서 점차 영적인 죄로 나아간다고 보았다. 육체에 속한 죄 중에 탐식이 먼저 오고 그 다음은 정욕이 오는데, 이들은 사슬에 연결된 것처럼 앞의 욕망에 사로잡히면 반드시 그 다음 욕망으로 나아가게 된다. 


현대인들은 먹을 것은 포기하지 않은 채(맛은 포기하지 않은 채) 좀 더 까다롭게 먹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저열량, 저지방, 무가당 식품을 찾기 시작했으며 설탕이 없으면서도 톡 쏘는 사이다, 카페인이 없으면서도 여전히 자극적인 콜라, 지방이 적은 음식, 유기농 과일 등을 찾게 되었다. 그레고리우스는 까다로운 식습관을 탐식으로 분류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이것도 탐식의 한 유형이라고 볼 수 있다.(168쪽)


<탐식을 이기는 길>(170-177쪽)


1. 신령한 양식에 길들라: 몸은 담백하고 적은 양으로도 만족하도록 길들이고 영의 양식을 채우기에 힘써야 한다. 


2. 금식: 금식은 일정 기간 음식을 끊어 몸을 지탱하는 에너지의 근원을 차단하는 일종의 자기부인 행위다. 에바그리우스는 수도사들이 육체의 욕망에 사로잡히는 경우에 타오르는 욕망을 끄게 하는 방편으로 '배고픔'과 '노동', '독거'라는 특별 처방을 내리곤 했는데 이중 배고픔은 금식을 가리킨다. 


기독 교회 역사를 통해 매년 교회 안에서 시해되어 온 두 행사는 바로 금식과 만찬이었다. 둘은 모두 음식과 관련된 것으로 금식은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으로 채우는 것이며, 만찬은 떡과 포도주를 나누며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하고 한 떡을 떼어 먹음으로써 서로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임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3. 음식을 감사함으로 받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금식을 윤리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오히려 감사함으로 받고 누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개인생각] 금식은 소극적인 경건이라면, 감사는 적극적인 경건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4. 구제: 그레고리우스는 탐식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훈련은 다름 아닌 사랑의 실천이라고 주장했다. 음식을 금하는 것보다 가난한 사람에게 음식을 나누는 연습을 하는 것이 몸의 욕망을 다스리는 훨씬 효과적인 훈련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수도사들은 몸이 필요로 하는 최소한의 양만 먹고 남은 음식은 먹지 못하는 빈곤한 이웃들에게 나눠 주었다.


5.  이웃을 식탁에 초대하기:  나눔을 일상에서 더욱 풍성히 살아내는 실제적인 방법은 바로 이웃을 식탁에 초대하는 일이다. 그런 삶이 몸에 익으며, 음식은 더 이상 자기 만족의 도구가 아니라 이웃과 연결되고 사랑을 나누는 거룩한 매개체가 된다. 


  [개인생각] 탐식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신령한 양식으로 채우고, 필요한 양을 먹는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육체적인 훈련을 한 후 점점 이웃과 나누어 먹는 훈련으로 나아갈 때 가장 건강하고 자연스럽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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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는 분뇨와 같아서 축적되면 악취를 내고, 뿌려지면 땅을 비옥하게 한다>.(레오 톨스토이)


<수도사 에바르리우스>

"강물이 모여 바다로 흘러 들어가지만 결코 바다를 채우지는 못하듯이(전 1:7), 탐욕도 어떤 것으로도 만족시킬 수 없다는 점에서 바다와 같다"


<탐욕을 이기는 길>


1. 근원적 안전감과 만족


  1) 탐욕의 근원은 여러가지겠지만 사막의 수도사들이 제시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자신을 지키고 삶을 안전하게 유지하려는 마음이다. 이런 안정감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확보하려는 마음이 탐욕을 부른다. 따라서 물질적인 안정감, 임시적인 안정감을 주는 것에서 자신을 자유하게 하고 영원한 안정감을 주시는 하나님을 반석으로 삼아야 한다. 


[생각] 탐욕의 시작은 무리한 욕심, 과도한 욕심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욕구, 부족하지 않고, 불안하지 않으려는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욕구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욕구는 <조금만 더>는 있지만, <이제 그만>이라는 말은 없다고 한다. 과도한 안정감은 탐욕을 정당화한다.


   2) 사막 수도사들은 두번째 이유로 내적 결핍을 제시한다. 

   영혼과 정신의 가난을 우리 인간은 물질로서라도 채우려고 한다. 채울 수 없는 내적 결핍은 채워지지 않는 물질적 탐욕으로 나타난다. 


  [생각] 청소년기 학생들이 고가의 등골블랜드에 집착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내적 결핍이 아닐까? 불안정한 자존감과 과시욕 혹은 소외에 대한 두려움 등이 그들로 하여금 고가의 브랜드에 집착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겠는가? 내적 결핍과 정신적 결핍이 과도한 물질적 탐욕으로 표면화됨을 보게 된다. 


2. 자족과 단순한 삶


  1) 단순한 삶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은 삶의 규모를 줄이고 단순화하는 것이다. 


  로날드 사이더(Ronald Sider)는 의식주와 관련된 것을 '필수품', '있으면 유용한 것', '없어도 되는 것', '사치품' 등 크게 네 가지로 분류했다. 그리고 필수품 이외의 것들은 '잉여 소유물'로 취급하고, 단지 생활을 좀더 편하게 만들어 주는 이와 같은 물건들은 계속 줄여 가야 한다고 했다. 


3. 나누기


  삶을 단순하게 살아가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더 나누기 위함이다. 

  로날드 사이더는 현대인들도 일상에서 '누진 십일조'를 실천함으로써 좀더 많은 소유를 나눌 수 있다고 제안한다. 누진 십일조란, 생활에 꼭 필요한 필수 소득의 액수를 정하고, 그 액수를 넘어서는 잉영 소득에 관해서는 소득이 증가하는 범위마다 헌금의 비율을 높여 누진율ㅇ르 적용한 더 많은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다. 


  존 웨슬리

  "할 수 있는 한 많이 벌고, 할 수 있는 대로 많이 저축하라. 그리고 가능한 한 모든 것을 나누어 주라."


[정리] 탐욕이 벗어나기 힘든 것은 그 근원이 정당한 안정감에 대한 욕구에 있기 때문에 죄라고 인식하기 어렵다. 안정감의 욕구로부터 시작해서 자라나는 탐욕은 언제나 충분한 만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늘 충분하지 못한 결핍의 상태에 있다고 느낀다. 따라서 자신이 무엇을 나눌 수 있는 충분한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평생...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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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만족도 700위까지


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1136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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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에 대해서 1]


세상에서는 나태를 관용이라 부르고, 지옥에서는 절망이라고 부른다.(도로시 세이어즈)


사람들은 나태라고 하면, '몸이 굼뜨고 행동이 느리 모습'을 연상하고 그 정의를 '좀처럼 움직이거나 일하기 싫어하는 것' 정도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교회가 죄로 규정해 온 나태는 이와는 성격이 무척 다르다. 이 전통은 나태를 단순히 몸이 느슨하고 느린 상태가 아니라, 영혼이 병든 것처럼 의욕과 활력을 잃어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 빠진 것으로 이해했다.(111쪽)


이처럼 나태는 의욕이 없어서 무기력해지고 어떤 일에도 감정이 동하지 않아 마침내 손을 놓고 아무것도 행하려 하지 않는 마음의 상태를 가리킨다. 그래서 세이어즈는 나태를 이렇게 정의했다. 


"아무것도 믿지 않고, 신경 쓰지 않고, 알려고 추구하지 않고, 간섭하지도 않고, 즐기지 않고, 사랑하지도 않고, 미워하지도 않고, 위해서 살아야 할 그 무엇도 없고, 또 죽어야 할 어떤 이유도 없기 때문에 그저 살아 있는 죄다."(112쪽)


나태가 다른 죄들에 비해 독특한 점은, 행하는 죄가 아니라 행하지 않는 죄라는 점이다. 어떤 흉악한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행해야 할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다. 


[나의 생각] 나태란 자기 관리를 잘 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변명이 아니라는 것이 충격적이다. 우리는 죄를 지어도 술먹고 한 잘못은 실수로 봐주며 관대하듯이, 나태를 단순히 자기 관리를 잘못하는 정도로 관대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나태란 영적 무기력이며 생명력을 잃어 버린 것으로 마땅히 해야할 선을 하지 않는 죄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관리를 못하는 것과 나태를 혼돈하는가? 자기 관리의 부족은 지혜의 문제지만, 나태는 죄의 문제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기억하자.


[나태에 대해서 2] 


<나태의 별명: 정오의 마귀> (수도사 에바그리우스) 


정오에 이르는 재앙처럼(시편 91:6) 밝을 때 넘어뜨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마귀는 수도사들이 오전 10시 경만 되면 찾아와 슬그머니 말한다. '중천에 떠 있는 해가 족히 50시간은 지지 않을 거라고' '이 따금식 창밖을 내다 보라고' '골방에서 나와 태양이 중천에서 얼마나 움직였는지 바라보라고' '다른 수도사들도 밖으로 나와있는지 확인해 보라고' 유혹한다. 그래서 하루의 일과를 미루게 하고 결국 그 수도사를 수도원 밖으로 밀어내고 만다.


<단테>

나태한 자는 일생 동안 미루는 습관을 갖고 있다가 더러는 회개하는 일까지도 미루고 만다.


[나의 생각] 미룸, 미룸, 미룸... 그것은 의욕을 잃은 것이지요. 우리 안에서 의욕이 있고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늦은 밤에도 하기 마련이고 없는 시간을 쪼개서라도 혹은 덜 중요한 일을 포기하면서까지 하니까요. 미룬다는 것은 그것을 향한 내 안에 생명력, 열정, 사모함이 없다는 증거가 됩니다. 결국 그것은 미룸, 미룸, 미룸이 되고 말지요.



[나태에 대해서 3] 나태를 이기는 길


1. 목적의식과 소명

   : 에바그리우스는 수련에 소홀하고  태만한 수도사들에게 기도나 성경 암송, 노동 시간을 늘리라고 주문하지 않았답니다. 그는 모든 것에 앞서 왜 수도를 해야 하는지, 왜 하나님을 섬기고 욕망을 절제하는 일에 힘써야 하는지 등을 생각하며 목적을 재확인해 보라고 독려했습니다. 


확고한 목적의식과 소명이야말로 일을 힘차게 추진할 수 있는 동력이 됩니다.


2. 구체적 목표 설정

   : 목표가 명확하고 적절하면 확실히 나태할 수 없게지요.

   : 인생을 여러 단계로 나눌 때, 특히 중년기에 가장 위협적으로 작용하는 죄가 바로 나태다. 중년기는 자녀들을 다 키우고 생활도 안정되어 있으며 특별히 더 추구해야 할 목표가 없기에 현실에  안주하고 싶어지기 쉬운 때이기 때문이다. 


3. 수도사들의 덕목을 따름

   : 여러가지가 있지만, 특히 몸과 마음이 느슨해져 있는 수도사에게는 무엇보다 육체적인 노동이 좋은 치유책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육체적인 노동은 나태를 극복하는 좋은 도구가 되기에 수도사들은 육체적인 노동을 중시한답니다. 


4. 소망의 끈

   : 절망은 낙심을, 낙심은 우울을, 우울은 나태를 만들어 냅니다. 신학적으로는 종말론적인 소망을 가지라는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기가막힌 상황에서도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시 42:5)고 말씀해 주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도움이 없는 상태(helplessness)보다 소망이 없는 상태(hopelessness)가 훨씬 무서운 것임을 알고 궁극적인 미래에 대한 소망으로 인내하며 구체적인 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나의 생각] 청소년이나 청년 사역자들이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과 미래에 대한 비전을 치우치듯이 강조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나태함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의 아이들을 봐도 제일 답답한 것은 이녀석들이 시간을 죽이면서 인생을 낭비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에 대한 부르심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무엇을 위해서 살며,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가에 대한 동기부여와 그림이 없기 때문에 이들에게 정체성과 비전을 강조한다고 생각해 보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적절한 처방인듯 합니다. 중년들은 안주하지 않는 것, 끝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성장하기 위해 배우기를 힘쓰는 것이 나태함에 빠지지 않는 길인듯 합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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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지도자 만들기, 로버트 클린턴, 베다니출판사(81쪽)


<수렴 단계>는 하나님께서는 지도자를 은사에 적합하고 사역 경험에 맞는 역할로 인도하여 그의 사역을 극대화시키는 단계이다. 지도자는 자신이 가진 최선의 것을 사역에 활용하는 때요, 그의 재능에 적합하지 않은 사역은 하지 않아도 되는 때이다. 이 시기는 인격적인 성숙과 사역의 성장이 함께 만나 절정을 이루는 황금기다. 


많은 지도자들이 이 수렴 단계를 경험하지 못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어떤 경우에는 인격적인 개발 부족이 원인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을 소속 단체에서 제한된 직책에 예속시킴으로써 더 이상 지도자로서 크지 못하게 가로막기도 한다. 


도슨 트로트만(네비게이토 창시자)의 경우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몇 가지 섭리가 존재하지만 우리는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것은 우리 손에 종합적인 그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수렴 단계에 이르면 지도자의 잠재력은 최대한도로 드러나게 된다. 


<수렴 단계>에서 필요한 것은, 


지도자가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드러낼 수 있는 직책과 역할로 이끌어주는 일이다. 지도자는 하나님의 인도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심령에 평온을 유지하면서 지금까지 개발된 모든 자질들을 함께 구현하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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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각]


최대의 역량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자신이 준비해야 할 것과 공동체가 준비해야 할 것이 모두 맞아야 한다. 어느것 하나 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한 개인의 성숙 뿐 아니라, 공동체의 성숙함이 사람의 역량을 극대화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둘 중 하나만으로는 불충분하다.



1. 해당 되는 사람이 자신의 인격적인 개발이 충분하지 못했을 경우 수렴 단계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 


   자신의 역량이 극대화 될 수 있는 리더십은 기능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기능만으로는 한계에 부딪히고 만다. 관계를 이끌어 갈 수 있어야 역량이 극대화되는데, 관계를 이끄는 힘은 인격을 기초로 한다. 인격은 짧은 시간에 형성되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도 아니다. 오랜시간 꾸준히 단련하여 오는 것이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사람들에게 신뢰도 얻고 인정도 받게 된다. 이런 기초가 있어야 무슨 일을 하고자 할 때, 집중력이 나오고 열매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평소부터 인격을 훈련하는 기회로 삼지 못한 사람은 이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다. 


2. 소속되어 있는 단체(장)은 해당되는 사람의 역량이 극대화될 수 있는 직책을 맡겨 환경을 조성해 주어야 한다. 


  그래야 그 사람은 불필요한 한 일 혹은 다른 사람이 할 수도 있는 일로부터 분리되어 자신의 은사에만 집중하여 열매를 거둘수 있게 된다. 이것은 그 사람의 성취이면서 동시에 공동체의 열매가 된다. 그런 측면에서 인사가 매우 중요함을 알게 된다. 잘못된 인사는 제한된 직책에 예속 시키는 결과를 낳고 그 결과 불필요한 일에 매이게 되어 집중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그로 인해 성취감도 얻지 못하게 되고 만다. 결국 사람을 잃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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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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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노에 대해서1]


고대 그리스 철할자 플라톤은 용기 있는 자만이 분노할 수 있다고 말하며 분노를 현자가 마땅히 지녀야 할 덕으로 간주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화를 낼 만한 일이나 대상에 대해 적절한 때에 화를 내는 일은 칭찬받을 만하며, 이것은 악이 아니라 도리어 미덕이라고 주장했다.
-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신원하), 87쪽.

분노가 악의 도구가 되기도 하지만,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도 함께 생각해 봐야 하는데, 우리는 너무 분노를 용서와 사랑이라는 덕목으로 <억압>만 한 것은 아닌가 반성해 보아야 할듯 합니다.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분노가, 뒷담화로 나타나기 쉬운데 분노에 대해서는 격하게 정죄하면서도, 뒷담화에 대해서는 서로 관대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분노에 대해서2]

인간이 화를 낼 때 그것이 치명적인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 화가 의로운 것이든 아니든 좀처럼 통제하기 쉽지 않다는 데 있다. 바로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발생하는데, 분노해야 마땅한 대상에게 마땅한 몫으로 갚아 주는 정의의 수준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89쪽)

흔히 분노가 극에 달하면 이성을 잃는다고 표현하는데, 이 말은 복수에 대한 욕망으로 정신이 한 곳으로 몰린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하다. 이성은 실종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수할 계획과 전략을 짜는 쪽으로 몰린다.(91쪽)

-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 신원하.

분노에서 태동하는 복수는 그래서 강력하고 집요하며 사악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낼 수 있는 최대치의 악이 집중되는 것은 분노로부터 올라온 것이다. 따라서 분노를 다스리지 않고 방치하거나 방임한다면 우리는 지옥으로 가는 문을 열어놓고 사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래서 분노는 위험하다.


‎[분노에 대해서3]

분노를 이기는 길(98-106쪽)

1. 원수 갚는 일은 나에게 속해 있지 않다.
: 하나님께 심판을 맡기고 내가 심판하지 않기

2. 용서하기
: 분노의 씨앗이 자라지 못하도록 용서해 버리기

3. 분석하고 소통하기
: 객관화하여 분노의 대상을 분산시키기라고 보면 될 듯

4. 입 안에 침이 고이기까지
: 일단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고 참기

5. 생산적 에너지로 전화하라.
: 루터는 화가 나면 화를 솟구치게 하는 그 에너지를 이용하여 글쓰기와 연구에 몰두했다는...

-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 신원하.

올 해는 우선 실천하기 쉬운 것부터 해 봅시다. 입 안에 침이 고일때까지 말하지 않는 것으로 분노를 다스려 보는 것부터 해 봅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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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여기서부터는 3부로서 기독교와 도덕에 대해서 논의를 시작한다. 도덕은 인생을 훼방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잘 사용하기 위한 메뉴얼과 같은 것이다. 도덕을 말하기 위해서는 3가지 관련성을 고려해야 한다. 첫째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대부분이 공감할 것임) 둘째는 각 인간의 내부에 있는 것들, 셋째는 인간과 인간을 만든 힘과의 관계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루이스는 둘째와 셋째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조망하고자 한다. 첫째는 대게 공감하니까.



3. 그리스도인의 행동

3-1. 도덕의 세 요소


1. 도덕이란 말에 대한 일반인들의 생각

  하나님은 '누가 재미있게 지내나 맨날 감시하다가 결국은 훼방을 놓는 분'이라고 말함(초등학생)

  도덕이란 무엇인가 감섭하는 것, 우리들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 못하도록 막는 훼방꾼이라는 생각


2. 도덕 규칙이란 인간이라는 기계를 잘 움직이게 만드는 지침이라고 볼 수 있다. 

  1) 도덕 규칙이란 인간 기계에 무리가 생기지 않게 하면서, 적절하게 잘 사용하기 위한 매뉴얼이다. 

  2) 아직 익숙하지 않는 사람이게 '그렇게 하면 안돼요'라고 말하는 것은 간섭처럼 들리겠지만, 잘 사용하려면 반드시 들어야 하고 그 규칙에 익숙해 져야 한다. 


3. 그렇다고 여기서 도덕 규칙이라는 것이 도덕적 이상(완벽성)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1) 도덕적 이상을 포함한 모든 완변함의 요구를 이루어낼 수는 없기 때문에

   (1) 완벽한 테니스 선수도 없고, 완벽한 직선을 그릴수도 없다. 완벽한 운전사가 될 수도 없다. 


  2) 도덕적 이상주의는 단순히 이상적인 취향처럼 주관적인 것이 아니다. 절대적인 것이다.


  3) 도덕적으로 좀 더 '이상'에 가깝게 되었다고 해서 '이상'이 높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 거짓말을 좀 덜 하고, 음란한 짓을 좀 덜하려고 노력하고, 횡포를 좀 덜 부린다고 해서 스스로 이상이 높아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그렇게 생각하다보면 점점 교만해지게 되는데) 이런 것은 계산을 좀 더 잘하게 되었다는 것 정도로 이해해야 한다. 계산을 완벽하게 하길 원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칭찬받아야 할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계산을 완벽하게 하지 못할 때, 자기가 불편해 지는 어려움을 겪을 뿐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도덕적으로 실수를 저지르게 되면 나중에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불편을 끼칠 수 있게 된다. 


4. 인간이라는 기계는 두가지 방식으로 고장이 날 수 있다. 

  1) 개인들이 각기 따로 놀거나 충동함으로써 서로에게 해를 끼치는 경우로, 속임수를 쓰거나 횡포를 부릴 때 일어남

  2) 각 개인의 내부에 무언가 문제가 생기는 경우, 즉 한 개인을 이루고 있는 서로 다른 부분들(각기 다른 기능과 욕구 등)이 각기 따로 놀거나 충돌하는 경우.


   예) 편대를 지어 항해하는 배들에 비유: 서로의 항로에 방해를 받지 말아야 하고, 양호한 엔진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어떤 곡을 연주하는 악단에 비유: 연주가 좋은 결과를 얻으려면, 연주자들의 악기가 잘 조율되어야 하고, 다른 악기들과 잘 융화될 수 있도록 정확한 순간에 소리를 내야 한다.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배들의 경우 목적지가 틀리면 실패한 것처럼, 도덕 규칙이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어디인가가 중요하다. 


5. 도덕 규칙의 목적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세 가지 관련사항

  1) 도덕은 각 개인이 서로 공평하게 처신하며 조화를 이루는 일과 관련있다. 

  2) 각 개인의 내면에 있는 것들을 정돈, 또는 조화시키는 일과 관련이 있다.

  3) 인류의 삶 전체가 지향하는 보편적인 목적, 즉 인간은 무엇을 위해 창조되었는가와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보통 1) 항에 대해서만 고려를 하는 경향이 있다. 1)항에 대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아니니까 괜찮아'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기준이다. 2)항과 3항에 대한 것도 고려해야 한다. 배가 서로 부딪히는 경우는 서로에게 해를 끼치는 경우에서 나타나기도 하지만, 내부적으로 엔진과 같은 것이 고장나서 발생하는 것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1)항부터 도덕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거기에서 머물러서는 안된다. 


  2)항이 더 근원적일 수 있다. 아무리 배를 잘 조정하는 실력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배가 조종이 불가능할 정도로 낡고 결함 투성이라면 충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제도의 개선이 필요없다는 말이 아니라, 각 개인의 용기와 이타심 없이는 어떤 제도도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인간은 새로운 제도 속에서도 예전에 하던 짓을 계속할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법으로는 인간을 선하게 만들 수 없다. 


  3) 항은 종교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배에게 피해룰 주지 않는다(1항)는 한계 내에서 내가 타고 있는 이 배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나 그 배의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내가 주인이라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주인이 아니라면, 주인의 뜻을 따라야 할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모든 인간은 영원히 산다고 하는데, 그렇게 믿을 때와 대략 70세 정도를 살다가 죽을 존재로 믿는 것과는 전혀 다른 판단을 하게 된다. 70년 정도 살다 죽을 인생은 못된 성질과 시기심이 있다 손  치더라도 70년 정도 지난다고 한들 크게 심화되지는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일이 100만년 동안 강화된다면 그야말로 완벽한 지옥이 되고만다.  또한 이 차이는 전체주의와 민주주의 간이 차이와 관련이 있다. 만약 각 개인이 70년만 살다가 죽는다면 천년동안 계속될 국가나 민족 혹은 문명이 개인보다 중요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영원히 산다면 개인은 국가나 문명보다 단순히 더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 아예 비교 자체가 불가한 존재로 격상하게 된다. 


6. 결론

  도덕에 관해 생각할 때, 세 가지 분야를 모두 생각해야 한다. 첫번째 분야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협력할 수 있는 것이다. 불일치는 두번째에서 심각해 지면, 세번쩨 분야에서 더욱 커집니다. 이번 장부터 다루게 될 3부에서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 조망할 생각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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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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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루이스는 새로운 생명이 우리에게 어떻게 올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한다. 믿음, 세례, 성만찬. 대표적인 세 가지 통로를 말하면서, 새로운 생명이 어떻게 유지되고 어떻게 확장되어지는지에 대해서도 말한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구원론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토록 간결하고 담백하게 설명하다니...새롭고 놀랍다. 그리고 새 생명으로 초대까지 한다.


2-5 실제적인 결론.


1. 예수의 사역을 통해서 우리 안에 새로운 종류의 인간이 나타났고, 이 새로운 생명은 우리 안에도 들어올 수 있다.


2. 그렇다면 이 일이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평평한 옛 생명을 어떻게 얻게 되었는지 연상해보자)

  1) 새로운 생명은 우리와 상의하지 않고 진행되었고, 상당히 기이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에게 전파되는 방식 3가지>

   (1) 세례

   (2) 믿음

   (3) 신비한 행위(성만찬, 미사, 주의 만찬 등 다양한 이름을 불리우는 것들)


   * 루이스는 이 방식 말고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전파될 수 없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통상적인 방법이라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제기동에서 송내까지 어떻게 가냐고 물으면 저는 전철을 타라고 말해줄 것이다. 물론 버스로도 자건거로도 다른 방식으로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다 말하지는 않듯이 나도 이정도만 말한다. 신학적인 성향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믿음을 더 강조하길 원할 수도 있겠으나 기독교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세가지를 다 말할 것이기에 이 세가지만 말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 분명한 것은 예수가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새 생명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전달된다고 가르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니만큼 명백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루이스는 그렇게 말한 예수의 권위에 입각하여 그렇게 말한다고 한다. 



   * 권위에 입각하여 어떤 것을 믿는 다는 것은 믿을 만한 사람의 말이므로 믿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대부분의 것을 그런 권위에 입각하여 믿게 됩니다.(뉴욕을 가본적은 없지만, 사람들의 말을 통해서 믿게 됨, 노르만 정복 사건을 직접 본 사람은 없겠지만 역사적 증언을 통해서 우리는 믿게 됨, 이런 믿음을 부정하는 사람은 평생 믿을 것이 없게 됨)



3. 새로운 생명은 어떻게 유지되는가?


   * 그렇다고 해서 세례와 믿음과 성만찬만 있으면 그리스도를 본받으려는 노력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잘못이다. 우리의 자연적인 생명이 부모로부터 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노력없이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그 생명을 소홀히 다루다가 영영 잃어버릴 수도 있고 자살함으로 의도적으로 없앨 수도 있다. 따라서 생명을 유지하려면 영양을 공급해 주어야 하며 잘 돌봐야 한다. 그러나 역시 이것은 생명을 만드는 일은 아니고, 생명을 돌보는 일이라는 한계도 인정해야한다. 


  1) 우리 몸에 자연적인 생명이 있는 한, 그 생명은 몸을 회복하기 위해서 많은 일을 한다. 

   (1) 상처를 입었을 경우는 어느 정도까지는 상처를 스스로 치유할 수 있다. 

   (2) 상처를 절대로 입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 살아있다는 것의 증거다. 

   (3) 마찬가지로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회개하고 다시 일어나 몇 번이고 새롭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매번 그를 회복시킨다)


  2) 그리스도인이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여타의 사람들과 구별된다. 

   (1) 여타의 사람들은 선하게 삶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만족시키거나(신이 있다고 믿는다면), 아니면 적어도 자신이 선한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2)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선한 행동은 모두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 창 자체가 밝아서 햇빛을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라, 햇빛이 먼저 창을 비추었기 때문에 밝아지는 것처럼...

       *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있고, 그리스도 안에 내가 있다는 것은 실제로 그리스도가 우리를 통해 움직인다는 뜻.


4. 새로운 생명은 어떻게 확대되어 가는가?

   믿음: 정신적인 행위를 통해서

   세례와 성만찬: 물리적인 행위를 통해서


  이 생명의 전파는 단순히 사상의 전파만이 아니다. 사상의 전파보다는 진화, 즉 생물학적 사실 내지는 초생물학적 사실에 더 가깝다. 인간은 원래 순전히 영적인 피조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것이 떡이나 포도주 같은 물질을 사용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이유다. (하나님은 물질적인 것을 통해서 생명을 불어 넣어주시고 확대하신다.) 


  [반론] 그리스도를 들어 볼  기회를 얻지 못한 자들에게는 이 생명 수여의 방법이 불공평한 것이 아닌가?

  (1) 하나님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들어본 바가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가 없다. 우리는 다만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만 알 뿐이다. 

  (2) 여러분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의 운명이 걱정된다면, 여러분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주변으로 불려나가야 할 것이다. 


  [반론] 왜 지금 당장 와서 세상의 악에 대해서 전복시키지 않는가? 

  잘 모르지만, 하나님은 때가 되면 대군을 이끌고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 때가 언제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 일을 지체하시는 이유는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자진해서 그의 편에 가담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다. 전쟁을 다 이기고 나서, 혹은 패하고 나서 편을 옮기는 것이 무슨 상을 받을 수 있겠는가? 


그 때는 우리가 참으로 어느 편을 선택했는지 드러나는 때이고, 우리가 그 사실을 전에도 알았는지 몰랐는지 깨닫게 되는 때이다. 오늘 이 순간이야말로 옳은 편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의 때이다. 


우리는 지금 이 기회를 잡든지 버리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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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본 장에서 루이스는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이 상식적인 선택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예수의 사역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 사역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가에 대해서 말한다. 루이스는 영향력이 미치는 과정에 대한 설명(다양한 견해가 있으므로)에 대해서는 이해를 돕는 부차적인 것으로 보고, 본질은 암튼, 효력이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는 것에 강조점을 둔다. 그리고 루이스가 이해한 설명을 해본다.(대속, 인간의 상태, 회개의 개념, 회개의 필요성, 회개의 능력,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셔야 하는 이유, 대속의 개념 등)



<예수에 대한 판단>

우리는 그를 자기의 주장대로 하나님으로 보든지 아니면 그를 미치광이 혹은 그 보다 못한 자였을 것이라고 봐야 한다. 그런데 루이스는 아무리 봐도 예수를 미치광이나 그보다 못한 자라고 볼 수는 없다고 본다. 따라서 정말 경악스럽기는 하지만 그가 하나님이고 지금도 하나님이라는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예수는 이 땅에 왜 오셨는가?>

<예수의 죽으심이 어떻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인가?>


1. 성경은 예수가 고난 받고 죽임당하기 위해서 이 땅에 왔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1) 루이스는 예수의 죽음이 어떻게 우리에게 그와 같은 효과를 이루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이론들은 그 자체로 기독교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떻게 효력을 갖느냐에 대한 설명일 뿐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다양한 설명중 어떤 것을 택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임무는 아니라고 한계를 정한다. 


  2) 루이스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예수의 죽음이 효력을 갖는다는 것에 대해서 모든 그리스도인이 인정한다. 

    예) 우리는 음식을 먹으면 체력적으로 회복되고 원기를 되찾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비타민이나 단백질 이론을 통해서 더 구체적인 이해를 얻을 수는 있겠지만, 혹 그런 설명이 틀렸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원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음식을 먹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져온 영향력]

  (1)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무언가가 바깥에서부터 우리 세상으로 뚫고 들어온 역사의 지점이다. 

  (2) 우리가 원자도 그림으로 그려낼 수 없는 것처럼, 이런 사건을 완전하게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3) 음식이 우리에게 어떻게 효력을 주는지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음식을 먹음으로 효과는 얻을 수 있다.


2. 예수의 죽으심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 (기본)공식

  1)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죽임을 당했다.

  2) 그 죽음이 우리의 죄를 씻어 주었다. 

  3) 그가 죽음으로써 죽음의 세력이 힘을 잃었다.


  [루이스가 제안하는 하나의 이론]

   (1) 그리스도가 자원해서 우리 대신 벌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사면받았다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이론.

      : 어떤 사람은 사면해 줄 작정이면 그냥해 주면되지 왜 죄없는 사람에게 벌을 준다는 말인가? 질문할 수 있음.

     [답] 이 벌을 즉결재판소의 '처벌'로 생각하지 말고, '빚'으로 생각하면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죄값을 치른다'는 개념을 '계산을 치른다'나 '비용을 부담한다' 정도로 이해하면 쉬울 것이다. 


   (2) 인간이 빠진 곤경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 그것은 스스로 서려고 하는 것으로 자신의 주인인 양 행세하는 것이란 점이다. 타락한 인간은 개선의 필요가 있는 불완전한 피조물이 아니라 손에 무기를 내려놓아야 하는 반역자라는 것이다.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면서 그 동안 잘못된 길을 걸어왔음을 깨닫고 삶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 '회개'다. 회개란 수천 년 간 익혀 온 자기 만족과 자기 의지를 버린다는 뜻이다. 여러분 자신의 일부를 죽이는 것, 일종의 죽음을 겪는 것을 뜻한다. 


   (3)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를 해야 하는데, 회개를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가? 

      : 하나님이 도와 주실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이 도와 주신다는 것은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조금 넣어 주신다는 뜻이다. 그분 자신의 추론 능력을 우리에게 조금 빌려주셨고, 그분 자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조금 넣어 주셨기에 우리는 생각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어린 아이가 글을 배울 때, 부모가 함께 손을 잡고 글을 써주듯이 그가 우리 손을 잡고 있는 것이다. 


      : 사실 하나님은 회개와 관련하여 한번도 경험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돕기 위해 사람이 되어 사람으로서 경험해야 하는 자기 뜻을 포기하고, 고난을 겪으며 심지어 죽을 수도 있게 되었으므로 이 모든 일을 완전하게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써야 할 모든 과정을 함께 써내려갈 수 있는 존재가 되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이 되셔서 죽음까지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존재가 되셔야 했다. 


     <질문: 예수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죽음의 고통이 지극히 쉬웠던 것 아니냐?>

 

   그렇게 질문하는 것은 어떤 오해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가 하나님이시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 쉬웠다는 것이 우리가 그를 거절해야 할 이유가 아니라, 오히려 그를 의지해야 할 이유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1) 어린 아이의 손을 잡아 글씨를 지도하고 있는 어른의 실력이 어린 아이보다 낫기 때문에 불공평하다고 말하면서 그 어른에게서 배우지 않고 오히려 아직 글도 모르는 동료들에게 배우려고 한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짓이 어디있는가? 

    (2) 물에 빠진 사람이, 한 다리를 강둑에 두고 팔을 뻣어 손을 내민 사람을 향해서 불공평하다고 말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오히려 그 사람의 유리한 조건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자기 보다 더 강한 자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겠는가? 


    (3) 이것이 저자가 <대속>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그림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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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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