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격을 넘어서, 또는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첫걸음

  1. 만드는 것과 낳는 것


  1. 이제부터 신학적인 이야기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이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실제로 경험한 사람에게 교리라는 것은 한낱 시시하고 현학적인 이야기로 들릴 뿐이다. 
  2. 마치 대서양을 경험한 사람에게 교리는 지도에 그려진 대서양의 그림 같겠지만, 기억할 것은 대서양의 지도는 대서양을 경험한 수 많은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서 그려진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3. 해변을 걷기 원하는 사람에게는 지도가 불필요해 보이지만, 해변을 건너 가려면 지도가 필요하다. 
  4. 교리는 하나님이 아니다. 다만 지도에 불과하다. 더 멀리 가려면 반드시 지도를 봐야 한다. 
  5. 신학에 귀 기울이지 않는 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 개념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고, 그것은 오히려 잘못된 개념(여러가지가 뒤섞인)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6. 오늘날 유행하는 이야기들은 이미 옛날에 폐기된 이야기들에 불과하다. 기독교를 하나의 고귀한 권고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은 아무 영향력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1. 성경에서 말하는 것들에 대한 이해


  1.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2. 그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3. 그리스도가 죽음으로써 우리를 죄에서 구원했다. 
  4. 우리가 그리스도께 붙어 있기만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이것은 또한 무슨의미인가? 


  1.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 창조되신 것이 아니라, 나셨다.
  1. 개념 정리: 낳다는 것은 아버지가 된 다는 것이고, 그것은 같은 종류에 속한 것이다. 그러나 창조한다는 것은 다른 종류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 하나님은 하나님을 낳는다. 사람이 사람을 낳듯이 말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창조하지는 않는다. 
  3.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과 같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같은 본질을 가지고 있지만, 사람은 조각한 상이나 초상화에 가깝다.)
  4.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과 닮은 속성이 있지만, 하나님과 같지는 않다. 그 중에서 가장 하나님과 닮은 존재가 있다면 바로 사람이다. 그럼에도 차이가 있는데 결정적인 차이 중 하나는 영적인 생명이다. 
  1. 자연적인 생명은 바이오스(Bios)
  2. 영원전부터 하나님 안에 있는 영적인 생명, 자연 세계를 만들어 낸 생명은 조에(Zoe)
  3. 따라서 사람이 바이오스를 가졌다가, 조에를 갖게 된다는 것은 석상이 진짜 사람으로 변하는 것만큼이나 큰 변화가 아닐 수 없다. 
  4. 기독교는 이 세상이 조각가의 작업실이고, 우리는 그 조각가가 만든 조상이다. 그런데 이 작업실에서 우리 중 일부가 언젠가 생명을 얻으리라는 소문이 떠돌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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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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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을 하다보면 맞춤법을 틀린 글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맞춤법을 틀리면 그 사람의 인상까지도 영향을 받는다고 하네요. 호감이었던 사람이 멍청해 보이거나, 비호감으로 바뀌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많이 틀리는 단어 위주로 정리 해 보았습니다!!

1. 몇일?? 며칠??

- 아마 가장 많이 틀리는 맞춤법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무조건 며칠이 맞습니다. 몇일이라는 단어는 아예 사전에도 없습니다 :)

몇일 전에, 몇일이나 걸리냐, 몇월 몇일이지? 몇일만 있으면 등등 전부다 틀린 단어입니다.

네이버에 몇일이라 치면 며칠의 잘못된 표기 라고 나오는 것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수강신청이 며칠까지인가요??' 라고 해야 맞는 문장입니다.

2. 대요?? 데요??

- 대요와 데요도 많이 틀리시는 맞춤법입니다.

데요의 예문으로는, 
'제가 지금 코트를 사려는데요' 
'제가 모쏠인데요' 등등이 되겠습니다.

즉 자신의 상태나 행동을 얘기할 때는 데요 가 맞습니다.
대요가 쓰이는 예문으로는, 
'이마트에서 지금 세일한대요' 
'여친이 저를 사랑한대요' 등이 되겠습니다.

즉 자기의 행동이 아닌 남의 행동이나 남에게 들은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전할 때는 대요가 맞습니다.

3. 다르다?? 틀리다??

- 다르다와 틀리다는 저도 넋 놓고 쓰다보면 자주 틀리는 맞춤법 입니다. 다르다는 주로 비교할 때 많이 쓰여요.

'제 취향하고 완전 다르시네요' 
'핸드폰 번호가 다르네요' 이렇게 쓰이죠.

틀리다는 올바르지 못하거나 맞지 않을 때 쓰여요 
'너의 행동은 틀렸다' 
'답이 틀렸다' 이런 식으로 쓰입니다.

'제가 갖고있는 것과는 틀리네요' 는 '틀린' 문장이 되겠죠?

4. 되?? 돼??

- 되와 돼는 저도 며칠 전까지 많이 틀리던 맞춤법인데 친구의 설명을 듣고 한번에 알았어요.

되 대신에는 하, 돼 대신에는 해를 넣어서 어색하지 않으면 맞게 쓴거라고 합니다.

'이거 해도 되요(하요) 돼요(해요) 둘중에는 해요가 어색하지 않으니 이거 해도 돼요?? 가 맞는 말입니다.

5. 왠?? 웬??

- 이것도 많이들 헷갈리시죠??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오늘은 왠지 라고 쓸 경우를 제외하고는 전부 웬이 맞습니다.

웬 떡이니, 웬 일이니, 웬 오징어가 저기에 모두 웬이 맞습니다.

왠지는 왜인지의 준말이므로 절대 왠 혼자서 쓸 수 없고 뒤에 항상 지가 따라와서 왠지 라고 해야 맞습니다.

따라서 왠지 말고는 전부 웬으로 생각하셔도 무방하다고 생각되네요^^

6. 어떻하죠?? 어떡하죠??


- 이거는 정말 꼭 알아두셔야 합니다. 제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본 결과 어떻하죠라고 쓰는 사람이 제일 무식해 보인다고 암튼 어떻하죠는 절대절대 틀린 말입니다.

표준어는 어떡하죠 가 맞고 어떻이 정 끌리신다면 어떻게 하죠? 어떻게 해요? 라고 쓰시면 됩니다.

7. 문안하다, 어느게 낳나요, 아픈거 어떻게 낮나요. 어의없네

- 문안하다 : 어르신께 문안인사 드리세요.
어느게 낳나요 : 누군가 애기를 낳겠죠.
아픈거 어떻게 낮나요 : 자세를 낮추면 나아요.
어의없네 : 너란 여자 정말 어의없다.

진짜 아직까지 이거 틀리시는분은 없으시겠죠~? 
무난하다 어느게 낫나요. 아픈거 어떻게 낫나요. 어이없다 가 표준어 입니다.

8. 드러나다?? 들어나다??

- 결론부터 말하자면 무조건 드러나다 입니다. 들어나다 라는 말은 사전에 없어요.

드러나다는 알려지지 않은 것이 밝혀지다 나타나다 라는 뜻으로 정확한 표준어 입니다. 따라서 '여자친구가 바람피는게 드러났어요!!' 가 맞는 말입니다.

9. 사람으로서?? 사람으로써??

- 서와 써도 많이 헷갈리는 맞춤법입니다.

서는 자격을 나타냅니다.
'내가 사람으로서' ' 내가 니 남친으로서' 둘다 자격을 나타내니까 서가 맞습니다.
써는 도구나 수단을 나타냅니다.
'내가 몽둥이로써 커플을 막겠다' 
'내가 유용한 정보를 올림으로써 사랑 받고있구나' 
도구나 수단이므로 써가 맞겠지요 ^^

일단 가장 많이 틀리시는 단어 위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말씀드리지만 저도 정말 많이 틀리는데 조금이라도 도움 드리고자 쓴거니 너무 안좋은 눈으로 보진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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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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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보도


http://media.daum.net/society/nation/metro/newsview?newsid=20130227033104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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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1) 


1.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믿음의 두가지 의미

  1) 단순한 신념(Belief): 기독교 교리를 사실로 여기거나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는데, 루이스는 자신이 하나님을 믿기 전에 충격을 받은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하나의 덕목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증거가 충분하면 믿는 것이고 증거가 충분하지 못하면 믿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충분한 증거에도 믿지 못한다면 명석하지 못다하는 것이고, 증거가 충분하지 못한데도 믿는 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으로 간주하면 되는 것이라 본 것이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믿음과 이성은 하나가 되어 증거를 충분히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정과 상상이 반대편이 되어 믿음을 약화시키는 것을 경험하곤 한다는 것이다. 

  예) 거짓말을 하는 이쁜 아가씨에게 속지 말아야지.... 사람은 물에 뜨니까 수영 선생님의 손을 놔도 괜찬지...


기독교가 충분히 믿음만한 증거가 있다는 판단이 들었더라도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끼여 있거나, 이런 저런 공격을 받고 기독교를 믿는 것이 손해보는 것 같은 상황이 되면 우리가 가지고 있던 충분한 증거에 의해 생긴 믿음이 흔들리게 되더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아무리 기분이 바뀌어도 한번 받아들인 것은 끝까지 고수하는 기술입니다. 기분은 이성과 상관없이 변하는 법이다. 따라서 믿음의 습관을 훈련해야 한다. 


   믿음의 습관을 훈련하는 

첫 단계는 사람의 기분은 바뀌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

다음 단계는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상 날마다 조금씩이라도 시간을 내어 그 주요 교리들을 찬찬히 정신에 새겨 나가는 것이다.(매일 기도하며, 성경과 경건서적을 읽고 교회에 나가는 일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수적인 이유) 신념은 계속 북돋워 주어야 한다. 


믿음을 잃어버리는 사람의 대부분이 분명한 논증을 거쳐 믿음을 버린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저 어쩌다가 믿음을 잃어 버리는 것이 대부분 아닌가? 



두번째 믿음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이해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 


   (1) 선을 행하기 위해 한 주간이 아니라 6주간 정도를 살아보도록 하자.(이 정도면 충분히 자신에게 실망할테니...)

   (2) 선을 행하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기울여 보기 전까지는 자기가 얼마나 악한 인간인지 깨닫지 못하는 법이다. 

     - 누워서는 바람의 세기를 알수 없다. 바람을 거슬러 본사람만이 바람의 세기를 안다. 따라서 정작 악한 사람들은 악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한다. 왜? 늘 악게 굴복해서 살아왔기 때문에. 악과 진짜 싸워보기 전에는 악의 힘을 알 수 없다. 

   (3) 이 상황이 되었을 때(하나님은 이 상황이 될 때까지 기다리신다.)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가진 모든 기능, 즉 생각하는 능력이나 순간 순간 팔다리를 움직이는 능력은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한 것이 사실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임을 알게 된다. 

    예) 아빠, 아빠 선물사게 6펜스만 주세요.


믿음(2) 


두번째 믿음은, 기독교 도덕을 실천하려고 최선을 다했는데도 실패한 후에야, 또 설사 실천에 성공했다 해도 그것은 원래 하나님의 것을 돌려드린 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후에야 비로소 대두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지킬려고 힘껏 노력해 본 다음에서야 비로소 알게 된다. 그렇게 해서 깨달은 자신의 한계 때문에 자신에게는 소망이 없고, 다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데까지 인도해 주시리라고 믿는 믿음이 두번째 믿음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맡겼다고 해서 노력을 포기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신뢰하는 사람의 충고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즉 전만큼 안달하지 않으면서 노력하게 됩니다. 행위에 대한 보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천국을 이미 맛보았기 때문에 자연히 이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구원에 있어서 행위에 대한 조건을 제기하고, 어떤 사람은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말하면서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둘다 틀렸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도덕적인 노력을 기울여 봐야 항복할 수 있고,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어야 그 절망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한 구절로 표현하고 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선행을 강조)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하나님의 역할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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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


1.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는 일은 도피주의나 몽상의 한 형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자세다. 


2. 역사를 더듬어 보면 이 세상을 위해 가장 많이 일한 그리스도인들은 다음 세대에 대해 가장 많이 생각했던 이들이었음을 알게 된다. 


3.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다음 세대를 생각하지 않게 되면서, 기독교는 세상에서 그 힘을 잃고 만다. 천국을 지향하면 세상을 덤으로 얻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지향하면 둘 다 잃을 것이다. 


4. 천국에 대한 생각들

  1) 어리석은 사람이 택하는 방식: 지금 현재의 부족함을 모두 환경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계속해서 조건을 바꾸어가면서 뭔가 신비한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평생을 보낸다. 이번에는 진짜겠지 하고 생각하지만 매번 실망하게 된다. 


  2) 환멸에 빠진 '지각 있는 사람'이 택하는 방식: 이런 사람들은 모든 것을 환상이라는 결론을 일찌감치 내려 버린다. 어린적에 누구나 가지는 꿈 정도,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여 지난친 기대를 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환상을 좇는데 쓰이는 기능을 억제하려고 한다. 앞의 경우보다 낫다고 볼 수 있지만.. 

 

  3) 그리스도인의 방식: 피조물이 태어날 때부터 느끼는 욕구가 있다면, 그 욕구는 채워 줄 것 또한 있는 것이 당연하다. 배고픔을 느끼니까 음식이 있고, 성욕을 느끼니까 성관계라는 것이 있고, 이 세상에서 채워지지 않는 어떤 것이 있으니까? 그것은 이 세상과 다른 세상에서 채워질 것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정리]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안에서 이 소망은 나중에야 이루어지겠지만, 그 욕구가 다른 욕구에 밀려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5. 천국을 하프나 타면서 재미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을 어린이처럼 읽은 것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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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만의 덕목 3가지: 믿음, 소망, 사랑.


1. 사랑을 다루려고 한다. 사랑은 앞에서 용서라는 주제로 부분적으로 다루었다. 


2. 사랑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자선이 있는데, 그러다 보니 사랑이 자선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다. 

  1) 자선이 사랑의 전부는 아니다. 

  2) 기독교적인 사랑은 감정이 아니다. 의지의 상태로 자연적으로 가지고 있지만, 배워서 익혀야 하는 것이다. 


3. 사랑한다는 것과 좋아한다는 것은 구분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랑해야 한다고 해서 꼭 호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좋아 한다는 것은 호감이 있다는 것인데, 좋아한다는 것은 선과 악의 가치가 부여되지 않는다. 


4. 물론 좋아하는 마음이 있으면 사랑하는데 도움이 된다. 


5. 비그리스도인들은 좋아하는 몇 몇 사람에게만 친절하게 대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친절하게 대하려고 애쓴다. 그러는 가운데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좋아하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6. 선과 악은 복리로 증가한다. 


7. 루이스는 사랑한다고 치고 행동하라고 제안한다. 가만히 앉아 사랑의 감정을 만들어 내려고 하지 말고,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한다고 치고 행동하라. 


8. 사랑한다는 것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기독교적 사랑은 의지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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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인정하지 않는, 세상의 도덕과 가장 날카로운 차이를 보이는 것에 대해서 나누려 한다.  이 악은 누구에게나 있으면서도 세상 사람들은 자기에게 그와 같은 악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 누구에게라도 그와 같은 악이 나타나면 한치의 용서를 베풀지 않는다. 


그 악이란 바로 교만(Pride)과 자만(Self-Conceit)이다. 이와 반대로 기독교적인 덕목은 <겸손>이다.


1. 겸손은 기독교가 말하는 도덕의 중심이다. 

  성적 부정, 분노, 탐욕, 술 취함 같은 것들은 교만이라는 악에 비하면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 악마는 바로 이 교만 때문에 악마가 된 것이다. 교만은 다른 악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하나님과 전적으로 맞서는 마음 상태다. 


  교만은 본성상 경쟁적이다. 교만은 단순히 무언가를 가지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옆사람보다 더 가져야만 만족한다. 우리를 교만하게 만드는 것은 남과의 비교다.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데서 오는 즐거움이 사람을 교만하게 만드는 것이다. 


2. 교만한 행동들

  1) 두 남자와 한 여자와의 관계: 교만이란 그 여자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단지 자신이 더 나은 사람임을 입증하기 위해서 남이 좋아하는 여자를 빼앗아 간다. 

  2) 어떤 물건이 충분하지 못할 때: 탐욕이 경쟁으로 몰아갈수도 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 이상을 얻었을 때에도 단지 자기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더 많은 것을 얻고자 한다. 

  3) 돈에 대한 탐욕과 교만은 차이가 난다. 탐욕은 더 좋은 집, 더 좋은 휴가, 더 좋은 먹을 거리를 위해 돈을 갖고 싶어하게 만든다. 그러나 어느 정도까지만 그렇다. 어느 정도 이상되면 더 많이 쓰기 위해서 더 벌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때부터는 다른 부자보다 더 부자가 되고 싶다는 바람 때문이다. 이것의 극대화가 권력욕이다. 권력은 교만한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꼭두각시처럼 좌지우지하는 것만큼 우월감을 가지게 하는 것은 없다. 

  4) 예쁜 여자가 가는곳마다 남자들의 마음을 빼앗아 불행하게 만드는 이유는 성적 충동 때문은 아니다. 교만이다. 

  5) 교만은 세상에 나보다 나은 사람이 단 한 명만 있어도 경쟁자로 여기고 적으로 여긴다. 이것이 교만의 특성이다. 


3. 교만은 본질적으로 관계를 깨뜨리고 상호 적대적일 수 밖에 없다. 


4. 교만하면서도 자신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아주 신앙적으로 행세하는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합니까? 

  1) 이들은 상상속의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2) 하나님이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더 인정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3) 우리도 그렇지 않은지 테스트 해 볼 수 있다.

    : 내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 선한 사람으로 느껴질 때(특히 다른 사람보다 낫게 느껴질 때)는 확실히 하나님이 아니라 악마를 따르고 있다고 보면 된다. 


5. 인간의 다른 죄는 동물적 본성에서 나온다. 그러나 교만은 동물적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옥에서 곧장 나온다. 교만은 순전히 영적인 악입니다. 그래서 다른 악들에 비해 훨씬 더 교묘하고 치명적이다. 그래서 종종 교만이 선한 일에 효과적인것 처럼 보여질 때가 있다. 자신의 체면과 수준 혹은 품격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지 말라고 요청할 때 효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동상을 치료하는 정도일 뿐, 실은 더 큰 병, 암을 유발하는 원재료가 되는 것이다. 


6. 이야기를 마치기 전 있을 법한 오해를 풀어주는게 좋을 듯 하다. 

  1) 칭찬받고 즐거워하는 것은 교만이 아니다. 

    나로 인해 칭찬해 주는 그 사람이 즐거워하고 좋아 하니까 기쁜 것은 좋은 것이지만, 그것을 내가 그런 칭찬을 받고 상태를 즐겁게 해주다니 나는 대단해! 로 가면 문제가 된다. 자기 자신으로 빠지면 최악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2) 허영심이 문제이긴 하지만 그래도 교만에 비한 그래도 인간적이다. 왜냐하면 허영심이란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고 이것은 다른 사람을 인정한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만은 다른 사람을 얕본 나머지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지 전혀 신경쓰지 않게 된다. 


  3) 자랑스러워 한다는 것이 교만인가요? 루이스는 만약 그 의미가 '애정어린 마음으로 어떤 것에 경탄을 느낀다'는 의미라면 죄와는 거리가 멀다고 말한다. 그러나 만야 그것이 유명하기 때문에 자랑스러워 한다면 그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그럼에도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것보다는 좀 나은 편이다. 완전한 영적 파멸로부터는 좀 벗어나 있다고 볼 수 있다. 


  4) 하나님이 교만을 싫어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교만하셔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나님과 우리는 교만의 상대가 아니다. 다만 하나님은 우리가 뒤집어 쓴 가면을 벗겨주길 원하시는 것이다. 


  5) 정말로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겸손을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잊는 것에서 부터 겸손이 시작된다. 


[결론] 겸손의 첫 걸음은 자신이 교만하다는 사실을 먼저 깨닫는 것이다. 자신은 우쭐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사실 아주 우쭐대고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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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독교 도덕 중 <순결>보다 더 인기 없는 것은 <용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1) 용서가 훌륭한 일이라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한다. 

  2) 그러나 정작 용서할 일이 생기면 우리는 용서하라는 말에 화를 내게 된다. 


2. 기독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은 용서다.

  1) 우리가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준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명백한 사실이다.)

  2) 용서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정도 먼저 생각하면 좋다.

   (1)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정말 있다면, 먼저 쉬운 대상과 일로부터 시작하라. 

 

   (2)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명확하게 알 필요가 있다. 

     먼저, 우리 자신을 어떻게 사랑하는지 생각해 보자. 우리는 우리 자신이 호감이 있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하기 때문에 호감을 느끼는 것이다.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호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랑하라는 요구는 실제로 악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을 마치 그렇지 않는 것처럼 여기라는 말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좀 더 생각해 보면, 우리는 누군가의 잘못은 미워하면서도 그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인가까지 생각이 든다. 그러나 늘 그렇게 대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우리의 잘못에 대해서는 싫어하면서도 우리 자신을 사랑한다. 제 자신의 행위는 미워하면서도 저 자신은 사랑해 온 것이다. 


    기독교는 잔인한 행동이나 배신 행위에 대한 미움을 티끌만큼이라도 줄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마땅이 그와 같은 악한 것을 미워해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가 말하는 것은 나를 대하는 똑같은 방식으로 상대방의 잘못을 미워하라는 것이다. 그 행위를 미워하면서, 왜 그렇게 되었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대하라는 것이다. 


3.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그의 잘못을 벌하지 말라는 것을 의미하는가?

  1) 나를 사랑한다고 해서 나의 죄를 벌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할 수 없듯이, 잘못에 대해서는 벌을 행해야 한다. 

  2) 살인을 저질렀을 때 기독교적으로 옳은 행동은 경찰에 자수해서 사형을 받는 것이다. 

  3) 기독교 판사가 사형을 구형하거나 그리스도인 병사가 적을 죽이는 것은 전적으로 옳은 일이라 본다.(루이스 입장)

    (1) 살인하지 말라는 <죽이다>와 구별되는 의미다. 군인으로서 전쟁에 나가서 적과 싸워야 하는 상황에서 적을 죽이는 것은 <살인하는 것>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성관계가 모두 간음이 아니듯, 구분되어야 한다. 

    (2) 평화주의자를 존경하지만 그들의 견해를 찬성하지는 않는다. 반(세미)평화주의자도 마찬가지다.


4. 그렇다면, 원수의 행동을 정죄하고 벌을 주며 심지어 죽일 수도 있다면, 그리스도인의 도덕과 보통 관점의 차이는 무엇인가? 

  1)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다. 

  2) 중요한 것은 우리의 중심, 즉 영혼의 내부를 천국의 피조물로 만들어야지 지옥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1) 따라서 전쟁이나 사형처럼 불가피한 경우 사람을 죽일 수는 있어도, 미워하거나 미워하기를 즐겨해서는 안된다. 

   (2) 불가피한 경우 벌을 줄 수는 있어도 그것을 즐겨서는 안된다. 우리 안에 적의나 복수심이 자리잡지 못하게 해야 한다. 

   (3) 누구나 결심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마음이 고개를 쳐 들때마다 평생토록 그것을 쳐 내야 한다. 

  3) 우리는 잘못한 사람을 죽이거나 벌하는 순간에도 그 사람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품기 위해 애써야 한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하는 의미다. 

  4)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그에게 호감을 가지라는 것이나 그가 근사한 사람이 아닌데도 근사한 사람이라고 말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5. 우리가 우리 자신을 (행위와 상관없이) 대하듯 우리의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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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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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56445(원문)



목사로 살아온 그의 삶과 고민, 그리고 결론

▲제1회 바른교회아카데미가 남서울은혜교회 홍정길 원로목사를 강사로 초청한 가운데 경기도 용인 향상교회에서 열리고 있다. ⓒ김진영 기자

얼마 전 남서울은혜교회를 은퇴하고 원로가 된 홍정길 목사가 지금까지 목회자로 살아오며 깨달은 ‘목사의 삶’을 간증했다. 그는 19일 경기도 용인 향상교회(담임 정주채 목사)에서 열린 제1회 바른교회아카데미 강사로 나섰는데 주제는 ‘목사,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였다.

홍 목사는 한국교회에서 나름 ‘성공한’ 목회자로 통한다. 젊은 시절 학생복음화에 헌신하며 전문성을 인정받았고 교회를 개척해선 수 천의 성도들을 모으기도 했다. 게다가 故 옥한흠·하용조, 이동원 목사와 함께 ‘복음주의 4인방’으로도 거론되는 인물이니 그 이름 앞에 ‘성공’이 붙는다고 그리 어색할 건 없다.

하지만 스스로는 그렇지 않은 듯했다. “어떤 면에선 실패한 목회자”라는 그의 말에는 지나온 날들에 대한 회한이 묻어 있었다. 그는 목회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여전히 ‘목사의 삶’을 고민하고 있었고 그것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아 보였다.

홍 목사는 “속지 말라. 좋은 생각을 한다는 게 좋은 사람이라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다. 좋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 중에 실제론 나쁜 사람이 많다”며 “특히 기독교인들이 ‘내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가장 많이 속인다. 말을 멋지게 하고 굉장한 글을 쓴다. 그런데 그 삶에 실제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언제나 진리는 예배에만, 말에만, 신학 속에만 있지 실제 삶 속에는 없다.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수치고 또 나의 수치”라고 고백했다. 삶이 없다는 것, 이것이 바로 원로가 된 그의 고민, 누구보다 치열하게 목사의 길을 걸어온 그의 자기 성찰이었다.

▲홍정길 목사는 후배 목회자들에게 목사로서의 그의 삶과 고민,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그의 미래 등을 담담하게 털어놨다. ⓒ김진영 기자

홍 목사는 “나는 예수 믿기만 하면 이 땅에 천국이 올 줄 알았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민족복음화에 매달렸다”며 “천만 성도를 달라 했고, 이 나라 5만9천 마을에 교회를 세워 달라고 간구했다. 보이지도 않았던 서쪽 대륙, 중국을 위해서도 기도했다. 그런데 마침내 이것이 이뤄졌다. 마을마다 교회가 섰고 중국도 마음대로 다닐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그래도 교인들의 삶은, 목회자들의 삶은 바뀌지 않았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아, 예수 믿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되는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겠다’고. 그래서 제자훈련을 참 열심히도 했다”며 “하지만 마찬가지였다. 성도들의 삶에 엄청난 지식들이 쌓여갔지만 삶은 그대로였다”고 회고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원로의 진지함은 어느새 젊은 목회자들의 마음에 흘러들고 있었다. 말보다 삶이 중요하다는 것, 그들이라고 왜 알지 못하겠나. 아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테다. 그러나 마음에 존경하던 이, 누구보다 모범적인 목회를 해온 원로의 고백은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울림으로 그들의 귀를 때렸다.

홍 목사는 “평생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영혼들을 섬겨야 할 우리 목사들이 과연 지금 바른 목회를 하고 있는가. 늘 남을 향해 이렇다 저렇다 하지만 과연 나는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는가”라며 “우리의 지식적 축적과 논리의 세계가 전혀 내 삶과는 상관 없다는 생각에 목회자로서 절망도 했었다”고 전했다.

결국 그가 내린 결론은 ‘자녀 교육’이었다. 홍 목사는 ‘삶의 변화’를 놓고 치열하게 고민한 끝에 이것에 도달했다. 그는 “내 자녀들에게 좋은 아버지가 되어주지 못한 것이 가슴 아프다. 이 후회는 아마 내가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며 “우리 아이들이 어떻게 저 세상에 나가 승리할 수 있겠나. 부모밖에 답이 없다. 바른 신앙을 가르쳐 바른 삶을 살게 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홍 목사는 다시 말했다. “삶이 문제다. 어디까지 생각할 수 있느냐보다 지금 내 삶이 바른 삶인가가 더 중요하다. 오늘 한국교회의 문제는 삶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은퇴하고도 계속 내 마음에 남은 가장 큰 흔적”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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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C.S.루이스가 그리스도인의 결혼 문제에 대해 다루면서, 혼외정사, 이혼,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는 아내에 대한 견대를 말합니다. 이시대의 가치관으로 볼 때, 여성의 관점으로 볼 때 논쟁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생각을 정리하는데는 유익합니다.



1. 이전에 성적 충동에 대한 부정적인 면에 대해서만 다루었으나 이제는 올바른 쓰임새, 즉 결혼생활에 대해 다루려 함. 다루기가 꺼려지는 주제이다. 

  1) 이 주제에 관한 기독교의 교리는 지극히 인기가 없기 때문이다. 

  2) 본인이 결혼 해 본적이 없으므로...(이 당시까지는 독신이었다. 후에 1956년 미국 여성과 결혼했다.)


2. 기독교의 결혼관: 남편과 아내는 하나의 단일한 유기체라는 말씀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래서 모든 면에서 짝임.


  [혼외정사에 대한 입장]

  1) 혼외정사가 그토록 흉악하게 보이는 것은 원래 모든 차원에서 연합되도록 이루어진것에서 딷 하나(성적인 연합)만을 때어낸 땃이다. 

  2) 기독교적 자세란, 성적 쾌락이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먹을 것을 입에 넣어 씹어서 미각적 쾌락만 얻으려하면 안되는 것처럼, 성적 쾌락 역시 그것만 떼어내 즐기려 해서는 안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혼에 대한 입장]

  1) 교단마다 기독교적인 입장에 조금씩 다른 것이 유감이지만, 적어도 이혼이 일종의 외과수술처럼 살아 있는 몸을 잘라내는 일과 같다는데에는 모두 동의한다.(이는 현대인들의 관점과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2) 이미 살펴본 덕목에서 <정의>란 약속을 지키는 일이 포함되어 있다. 교회에서 한 결혼에는 죽음이 서로를 갈라 놓을 때까지 배우자에게 충실하겠노라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서약했는데, 그것에 충실해야 함은 당연한 덕목이다.

  3) 성적 충동 역시 다른 충동과 마찬가지로 약속의 제재를 받아야 한다. 진지하게 한 서약이 아니라는 것으로도 변명이 되지는 못한다. 거짓으로 서약하는 사람들에게 대해서 순결에 대한 요구를 하고 싶지는 않다. 

  4) 이혼을 피하기 위해서 결혼을 하지 않고 동거를 하는 것은 또 다른 죄인 간음의 죄(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를 짓는 것입니다. 

  5) 서약은 사랑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약속으로 자신을 묶으려는 현상이 나타난다. 사랑하는 이에게 진실하겠다는 약속은 사랑의 감정이 사라진 후에도 유효하다. 

  6)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데도 굳이 같이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1) 자녀들을 위해 가정을 지킨다.

   (2) 여성들이 남성들이 싫증낼 때마다 피해를 입지 않도록 보호한다. 

   (3) 추가적인 이유: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감정은 시동만 걸어주고 점차 사라져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된 사랑의 엔진이 돌아가면서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자꾸 극적 감정의 사랑만을 찾아서는 안된다.(그런 감정적 상태를 유지할 수도 없고, 유지 해서도 안된는 것이다.)

    * 사랑을 느끼는 감정과 사랑을 하는 관계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사랑을 느끼는 감정은 차의 시동을 걸어주는 것과 같은 것이고, 사랑하는 관계의 유지를 통해서 결혼의 엔진을 계속 가동시키는 것은 두번째 사랑이다. 


 6) 이혼을 막으려는 그리스도인들의 과도한 생각

   (1) 그리스도인들이 유권자나 의회 의원으로서 이혼 법률에 자신들의 관점을 반영하여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그들의 관점을 강제하려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2) 만약 회교도가 누구도 술을 못 마시게 하도록 법으로 정한다면 본인은 화가날 것이라고 말한다. 

   (3) 비그리스도인들도 함께 공존하는 사회 속에서 모든 국민에게 적용되도록 하는 법으로 통제하는 것에 대해서는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국가가 법을 통제할 것과 교회가 교인들에게 법으로 통제되는 결혼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할 것을 서약하는 것에 대해서]

1. 머리가 왜 필요한가? 부부가 서로 동등하게 살면 되지 않습니까? 설사 머리가 필요하다 하더라도 왜 남자여야 하는가? 

  1) 그것은 결혼이 영속적이기 때문이라고 루이스는 본다. 서로가 의견이 일치한다면 머리는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의견이 달라질 경우 어떻게 하는가? 할 수 있다면 대화를 통해서 결정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는가? 두 사람이라 다수결로도 불가능한다. 서로 일치 할 수 없다면 결론은 둘 중에 하나다. 각 자 따로 자기의 결정대로 살든지 아니면 둘 중에 누군가는 최종 결정권을 가지는 것이다. 그런데 결혼은 영속적인 것이기에 따로 살 수는 없는 것이고, 둘 중에 한 명은 결정을 내리는 머리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어떤 연합체도 지속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다. 


  2) 루이스의 관찰에 의하면, 여성 자신들도 아내에게 휘둘리는 가정을 자연스럽게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보았다. 또 하나의 이유는 남성은 가정 밖 사람들에 대해서 언제나 더 공정해야 할 입장에 있으며 대게는 더 공정하다. 그러나 여성은 자녀와 남편을 위해 세상과 싸우는 일을 한다. 여성들이 더 가정 중심적 편향을 가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인데, 남편의 역할은 이러한 여성의 자연스러운 편애가 가정을 주도하지 못하도록 살피는 것이다. 


  - 루이스의 견해에 대해서 여성분들의 견해가 다를 수 있겠습니다만, 루이스는 이렇게 정리를 했지요.^^;;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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