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 루이스는 현재 악이 권세를 장악하고 있다면, 그보다 윌등한 하나님은 왜 아무런 조치를 취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라는 질문은 한다. 루이스는 선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더불어 그 선한 세상이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일어나기를 원하신 것도 그의 뜻이라고 말한다. 루이스는 반대자들의 논리에 대응하면서 이제 그들을 궁지로 몰아넣는다. 이 장에서 본격적으로.



<이전논의들>

악에 대한 설명은 기독교적 관점과 이원론적 관점이 있는데, 생각해보면 악이란 선과 독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의 왜곡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선과 악을 대등한 관계로 보는 이원론의 관점은 적절치 않다. 오히려 기독교적 관점이 실재에 더 근접한다고 볼 수 있다. 


<새로운 질문들>

그렇다면 악한 권세가 현재 이 세상의 군주로 행세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된다. 만약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다면 하나님은 그야말로 이상한 분이 되고, 일치하지 않는다면 절대적 권세를 가진 존재의 뜻에 반하는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하는 새로운 질문으로 이어진다.


<루이스의 설명>

1. 자녀의 방을 깨끗하게 청소해 놓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뜻과 실제로 그 일을 행하는 자녀와는 차이가 있다. 

  1) 자녀에게 자유를 준것도 어머니의 뜻이었다. 

  2) 마찬가지로 분명히 어머니의 뜻한 바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뜻한 바로 인해 일어난 일이다.


2. 이 우주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들을 창조하셨습니다. 

  1) 자유 의지를 가졌다는 것은 옳을 일을 할 수도 있고 그른 일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것은 사랑이나 선 그리고 기쁨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자유 의지에 있기 때문이다.  

  3) 자유의지로 말미암아 전쟁 상태가 일어나는 한이 있더라도, 어쩌면 자유 의지를 통해서 나오는 진짜 선을 행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그것을 치러야 할 과정으로 생각하셨던 것으로 봐야 한다. 


<자유의지와 관련된 또 다른 질문들>

1. 하나님은 왜 이리 쉽게 부패하는 재료로 피조물로 만드셨을까? 

  좋은 재료일 수록 옳은 길로 가면 더 선해지지만, 그른 길로 가면 그만큼 더 악해지는 법이다. 소보다는 개가, 개보다는 어린아이가, 어린아이보다는 어른이, 어른 보다는 천재적인 성인이 더 그렇습니다. 초인적인 영도 마찬가지입니다. 


2. 어두운 권세는 어떻게 타락하게 되었을까?

  1) 인간이 확실하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임에는 분명하다.

  2) 그러나 우리 자신이 타락했던 경험에 비추어 보면 분명하다. 

   (1) 인간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욕심에 의해서 타락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성적인 문제와 관련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틀렸다. 성적인 것은 죄의 결과지 원인이 아니다. 

   (2) 사탄이 지은 죄도 이와 같은 죄이다. 

  3) 이런 사탄과 인간의 시도(하나님을 배제하고 스스로 가려는)는 성공할 수 없는 시도였다. 


    왜? 우리는 하나님을 넣어야만 달릴 수 있는 인간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휘발유를 넣어야 달리는 엔진을 만든것 처럼)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넣고 달리려고 할 때 문제는 발생하고 만다. 하나님을 제외하고 평화나 행복은 만들어질 수 없다.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문명과 제도들은 처음에는 잘 굴러가는 것 같으나 곧 비참과 파멸로 빠지게 되었다. 


3. 이와 같은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는가?

  1) 무엇보다 먼저 우리에게 양심, 즉 옳고 그른 것에 대한 분별력을 남겨 주셨다. 

  2) 좋은 꿈이라는 것을 인류에게 보내 주셨다.(인간에게 새 생명을 주는 신에 대한 이야기와 같은 희망)

  3) 하나님은 한 특정한 민족을 택하여 자신이 어떤 하나님인가를 수세기에 걸쳐 그들의 머리에 심어 주셨다. 

    : 그 민족인 바로 유대 민족이고, 그 심어주신 과정을 기록한 것이 바로 구약성경이다. 


4.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유대인 중에서 한 사람이 나타나 자신을 하나님으로 자처하면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는 권한이 자신에게 있음을 주장하며 다니는 사람이 나타났다.


  1) 이 사람은 범신론자는 아니다. 이 사람은 유대인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세상 밖에 계셨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이 진짜 하나님이 아닌 다음에는 이상한 사람으로 밖에는 인식할 수 없다. 


  2) 이 사람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준다고 하였는데, 이것도 이상한 행동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용서라는 것은 피해를 입은 사람이 피해를 준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것인데,  자신이 피해를 입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한다고 할 때 이런 일은 그가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죄는 하나님의 법을 깨뜨리는 것이며 그의 사랑에 상처를 내는 것이기에 그렇다. 


  3) 그런데 성경은 이런 사람, 예수에 대해서 우스꽝스럽거나, 자만심에 차있다는 인상을 받지 않았다. 우리는 그가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그의 말을 믿는다. 사실은 온유와 겸손과는 관계가 먼 이야기(자신을 하나님으로 묘사하는 말들)를 그가 많이 했다는 것을 잊은 채로 말이다. 이것은 예수를 단순히 도덕적인 스승 정도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사람들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서 하는 말이다. 예수는 그렇게 평가할 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판단의 결단을 촉구하는 루이스]

우리는 예수가 그의 말대로 정말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미치광이거나 그보다 못한 인간으로 여겨 그의 입을 틀어 막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며 그 발 앞에 엎드려 하나님이요 주님이라고 고백해야 할 것이다. 위대한 인류의 스승이니 하는 헛소리는 삼가해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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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한 기독교. 2-2 하나님의 침공] 실재하는 우주의 선과 악에 대한 대립. 이원론으로 풀것인가? 아니면 기독교적 관점으로 풀것인가? 루이스는 기독교적 관점이 우주의 실재성을 더 잘 설명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악이란 독립된 힘이 아니라 선에 종속된 변형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악마를 타락한 천사라고 말한 것도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1. 루이스가 말한 단순하기 그지 없는 말.


 1) 무신론자들의 주장: 우주는 무의미하다.

 2) 물 탄 기독교의 주장: 하늘에 선한 하나님이 계시니 만사형통이다. 여기에서는 죄니 지옥이니 악마니 구속이니 하는 어렵고 무서운 교리들은 전부 제쳐 놓는다. 


2. 실재하는 세상이 단순하지 않기 때문에 종교도 단순할 수 없다.(복잡하고 어려울 수 밖에 없다.)


  1) 단순하게 보이는 것도 실재에 들어가면 매우 복잡하여 이해하기 어렵고 심지어 신비롭기까지 하다. 

  2) 단순한 대답 이상의 것을 요구하면서 왜 대답이 단순하지 않냐고 불평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 6살짜리 어린애한테나 맞을 기독교를 내세워 놓고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것은 어리석다.(너무 단순회 시킴)

  3) 종교뿐 아니라 실재는 매우 복잡하고 말끔하지 않고 분명하지 않다. 

예) 의자를 보는 과정, 태양과 행성간의 모습과 규칙에 대해서도 

  4) 오히려 짐작할 수 없고 인간이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이 기독교를 믿는 이유다. 기독교는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부류의 어떤 것이 아니다. 

  5) 기독교도 우리의 예상과 맞지 않는 기묘한 비틀림이 있다. 실재하는 것들이 대게 다 그렇다. 


3. 본론적인 논지: 우주에 분명하게 존재하는 좋은 것과 나쁜 것에 대해서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관점은 두가지다. 


   1) 기독교적 관점으로 세상은 원래 좋았는데, 나빠졌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가야 할 원래 모습의 기억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보는 관점

  2) 이원론적 관점으로 모든 것의 배후에는 선과 악이라는 두 개의 동등하며 독립적인 힘이 있어 우주는 그 두 힘의 끝없이 싸우는 전쟁터라고 믿는 것이다. 

    (1) 두 힘 내지 두 영 또는 두 신(하나는 선하고 하나는 악한)은 아주 독립적인 존재이다.

    (2) 두 힘은 모두 영원 전부터 존재했다. 그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만든 것도 아니고, 하나님으로 자처할 수 있는 권리를 더 가진 것도 아니다. 아마 두 힘은 각각 자기가 선하며 상대방이 악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4. 이원론적 관점의 오류에 대해서 

  1) 어떤 신은 선하고 어떤 신은 악하다고 규정할 때, 이것은 제 3의 존재 즉 두 힘 중에 하나는 거기에 부합되지만 다른 하나는 부합되지 않는 어떤 법칙 내지는 기준을 우주에 끌어들이게 되는 셈이 된다. 

  2) 이는 그 기준을 따라 두 힘을 판단하게 되는 것을 볼 때 그 두 힘보다 더 오래 전부터 있었을 것이고, 더 높은 곳에 있을 것이기에 그 제 3의 존재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일 것이다. 

  3) 즉 선하고 악하다는 것은 사실상 하나는 진정한 궁극적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그릇된 관계를 맺고 있다는 뜻인 것이다.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면]

  악을 악하기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악을 행할 때에는 악을 통해 쾌락을 느끼거나(가학성 변태성욕자 처럼) 아니면 악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얻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이 추구하는 것들은 본래적으로 악한 것들이 아니라 그것들은 선한 것인데, 그것을 그릇된 방식으로 추구하기 때문에 (혹은 과도하게) 악이 되는 것이다. 


  선은 선 그 자체이지만, 악은 선이 부패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악한 힘이 악해지려면 먼저 선한 것을 원하고, 그 다음에 잘못된 방식으로 그것을 추구해야 한다. 충동을 왜곡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왜곡시킬 좋은 충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악이란 선의 왜곡인 것이다. 악한 힘이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선한 힘이 다스리는 세상의 일부에 불과한 것이다. 


  성경에서 악마를 타락한 천사라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은 이유입니다. 악이 원형이 아니라 원형에 기생하는 것임을 인식한데서 나온 말이다. 


5. 기독교적 관점이 더 실재에 근접한 설명이다. 


  1) 루이스는 참된 기독교가 이원론에 아주 가깝다는 것을 인정한다. 

  2) 그러나 기독교는 이 우주 안에 있는 어두운 권세 역시 하나님이 창조하신 존재로서 본래는 선하게 창조되었으나 후에 악하게 변한 존재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이원론과 구별된다.

  3) 이 우주가 전쟁중이라는데는 기독교도 이원론과 동의한다. 

  4) 그러나 이 전쟁이 독립적인 두 세력간의 전쟁은 아니다. 기독교는 이 전쟁을 일종의 내란 내지는 반란으로 생각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가 반역자들에게 일부 점령당했다고 생각한다. 

  5) 적들의 점령 지역, 이것이 현재 이 세상의 모습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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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믿는가?


2-1. 하나님과 경쟁하는 개념들


1. 우선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믿는가 말하기 전에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믿을 필요가 없는가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1) 그리스도인이라면 '기독교 외의 모든 종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틀렸다'고 믿을 필요가 없다. 

 

  2) 무신론자들이 믿는 것은, 세상 모든 종


교를 지탱하는 중심점은 하나의 거대한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다른 종교와의 차이에 있어서 기독교가 옳고 다른 종교들은 틀렸다고 생각한다는 뜻을 의미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틀린 것이 모두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정리]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는 다르기 때문에 차별성을 가지지만 그렇다고 모든 다른 종교를 전적으로 무시하지는 않는다. 다른 종교 속에서도 정답에 근접한 답이 있는 법이라는 열린 마음을 가진다. 


2. 믿음과 관련하여 인류를 나누는 기준

  1)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다수와 믿지 않는 소수로 나눌수 있다. 

     (1) 그리스도인: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 현대의 미개인들, 스토아학파, 플라톤주의자, 힌두교도, 회교도 등과 같음

     (2) 현대 유럽의 유물론자(소수)은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2) 하나님이 선악의 구분 너머에 있는 존재인가? 아니면 선한 존재 혹은 의로운 존재로서의 고유성을 가지고 있는가?로 구분해 볼 때


   (1) 범신론(선악의 구분 너머에 있는 존재): 헤겔과 힌두교도들

   (2)  선한 존재: 유대인과 회교도와 그리스도인


    [신과 피조물과의 관계] 범신론은 인간이 제 몸을 움직이듯 우주를 움직이는 존재가 바로 하나님이라고 믿는다. 우주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 기독교의 개념은 전혀 다르다. 사람이 그림을 그리고 작곡을 하듯 하나님이 우주를 창안하고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화가와 그림은 별개의 존재이기 때문에 그림이 파괴되어도 화가는 죽지 않는다. 


3. 기독교는 전투적인 종교다.(기독교가 믿는 것)

  1) 기독교는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다고 믿는다.

  2) 또한 기독교는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에서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잘못되어 버렸다.

  3)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다시 바로 잡으라고 명하신다. 

  4) 그것도 아주 큰 소리로 명하신다고 우리는 믿는다. 


  [이 믿음에 대한 무신론자들의 질문] 선하신 하나님이 만든 세상이 왜 잘못되었는가? 


이 질문에 대해 범신론자들은 암이나 빈민가를 보면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신적인 관점에서 보기만 한다면, 이런 것들 역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텐데' 라고 답한다. 무신론자들은 오히려 '지적인 존재가 만든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라고 쉽게 답을 할 수있을 것이다. 무신론자인 자신은 오랫동안 그리스도인의 답변에 귀를 막아왔었다. 


루이스의 질문은 세상이 너무 잔인하고 불의하다는데 있었는데, 생각해보면 <정의>니 <불의>니 하는 개념은 어떻게 갖게 된 것인가? 직선이라는 개념이 없이는 굽은 선이라는 개념이 없는 것이 아닌가? 세상이 악하고 굽었다고 인식하게 되는 것은 내 안에 선과 직선에 대한 인식이 선재하기 때문이 아닌가?(물고기는 축축하다는 느낌을 가질 수 없다. 내가 축축하다고 느끼는 것은 내가 물고기가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만약 우주에 아무 의미가 없다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아예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주에 빛이 없고 따라서 눈을 가진 생물도 없다면 우주가 어둡다는 사실 자체를 알 수 없는 것이다. 


  [정리] 무신론자가 왜 세상이 불의하고 악한가? 라고 질문한다는 것은 이미 세상의 절대적 기준을 가진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틀에서 나올 수 있는 질문이다. 정말로 절대적 기준을 가진 신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이 잘못되었다라는 인식조차 갖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질문을 던진다는 것 자체가 신에 대한 인정인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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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자신의 <종교를 선전>하기 위해서 여기까지 우리를 데리고 왔다고 생각해 심기가 불편한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고 우려했다. 어떤 사람은 종교문제는 이미 과거에 끝난 문제로 시계를 거꾸로 돌릴 생각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반감을 가지고 있는 분들을 위해 3가지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1.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1) 시계가 잘못 가고 있을 때에는 오히려 거꾸로 돌리는 것이 더 현명한 일 아닌가!

  2) 잘못된 길로 접어들엇다는 것을 알았을 때, 진보를 위해서는 다시 올바른 길로 되돌아가는 것이 선재해야 한다. 

  3) 수학의 예로도 설명할 수 있다. 잘못된 공식으로 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실수를 인정하고 바른 해법으로 풀어야 한다. 


  [소결론] 지금 세상의 상태를 보면 인정하시겠지만, 인류는 명백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 그렇다면 되돌아 가야 한다. 그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2. 본격적인 <종교 선전>은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 


  1) 지금까지 도덕률 배후에 누군가 또는 무엇인가 존재한다고 까지만 이야기했지, 특정 종교의 신에 대해서는 아직 언급도 하지 못했다. 성경이 없이도 알아올 수 있는데까지 온 것뿐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충격적인 두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1) 누군가 우주를 만들었다는 것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2) 그가 우리 안에 둔 도덕률이다. 이것은 내부 정보이기 때문에 더 좋은 증거가 된다. 

     이것을 볼 때, 우주 배후에 있는 존재가 옳은 행동(공정한 처신, 이기적이지 않은 마음, 용기, 신뢰, 정식, 신용 등)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하나님이 '선하시다'라는 말에 동의할 수 있다. 


   (3)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이 선하시는 말의 의미가, 무슨 짓을 해도 다 받아주는 상냥하고 동정많은 분이라는 뜻에서 말한 것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도덕률에는 어떤 짓을 해도 다 받아 준다는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도덕률은 올바른 일을 하라고 명령할 뿐, 그렇게 하기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4) 만약 절대 선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우리의 행동 대부분을 미워하리라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절대 선이 우주를 지배하지 않는다면, 어떤 노력을 해도 우리는 소망을 가질 수 없고, 반면에 절대 선이 우주를 다스린다면 우리는 매일 그 선의 원수가 되는 셈이다. 다음날이라고 사정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 선 없이 살 수도 없고, 그 선과 더불어 살 수도 없다." 

   "하나님은 유일한 위안인 동시에 최고의 공포이다."

3.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용서를 약속한다. 

   따라서 자신이 회개할 일을 저질렀다는 생각을 모르는 사람, 자신에게 용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기독교가 아무 의미도 가질 수 없다. 이 모든 것을 깨닫기 전에는 정말이지 기독교는 여러분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좀더 유쾌한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기독교는 결국 지금 말하는 것과 같은 낭패감에서 출발하는 종교다. 따라서 그 낭패감을 먼저 겪지 않는 한 아무리 위안을 얻으려고 노력한들 소용이 없다. 


[결론] 여러분이 진리를 구한다면 결국 위안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위안 그 자체를 구하다면 위안도 진리도 얻지 못한 채, 오로지 감언이설과 몽상에서 출발해서 절망으로 마치고 말 것이다. 지금 우리의 현실처럼 전쟁 전 국제 정치에 품었던 몽상에서 이제 막 깨어난것처럼 우리는 종교에 대해서도 몽상에서 깨어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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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하면,


1. 돌이나 나무에 해당하는 이른바 자연법칙은 단순히 하나의 표현법(현상에 대한 설명)에 불과함으로 보이는 것에 대한 설명으로서 그 너머에 무엇인가 실재한다고 할 수 없다. 


2. 반면 인간 본성의 법칙 내지는 옳고 그름의 법칙은 인간 행위(보여지는 것)라는 현실의 사실들 너머에 있는 어떤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가 창안해 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마땅히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실재적 법칙이기 때문이다. 


이런 법칙이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에 대해서 어떤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인지 이제 논하려고 한다.


1. 인간이 우주에 대해서 가지는 두 가지 관점

  1) 유물론적 관점: 물질과 공간은 우연히 생긴 것으로서 늘 존재해 왔지만, 그 존재 이유는 알 수 없다. 

    우연의 산물로서 우주와 생물은 발생하게 되었다고 본다. 

    [결론] 우주의 배후에 어떤 인격적인 존재가 없다.


  2) 종교적인 관점: 우주의 배후에는 그 어떤 것보다 정신(mind)과 비슷한 무언가가 있다고 본다. 

     그 존재는 어떤 목적을 위해 우주를 만들었다고 본다. 

     [결론] 우주의 배후에 어떤 인격적인 존재가 있다.


2. 그렇다면 무엇을 통해서 우주의 배후에 존재하는 자의 여부를 파악할 수 있을까?

 

  1) 일반적으로 과학이라는 방식을 통해서 확인하려고 하는데 과학은 그것을 파악하는데 한계를 가진다. 



   * 과학은 관찰을 통한 사실을 다루는 학문이다. 과학이 관찰하는 사물들의 배후에 무언가가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는 과학이 던질 질문이 아니다. 배후에 무엇인가가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술은 과학이 할 수 있는 진술은 아니다. 과학이 훗날 전 우주에 있는 것을 낱낱이 알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우주는 왜 존재하는가? 우주가 지금처럼 지속되고 있는 목적은 무엇인가? 우주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게 될 것이다. 따라서 과학만으로는 그 배후의 존재에 대한 힌트를 얻기란 불가능하다.


  2) 과학 말고 하나의 길이 있는데, 그것은 우주 중에 하나이면서 내면을 관찰할 수 있는 인간을 통해서다. 


  * 그러나 하나의 길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인 인간이다. 우리에게 인간은 단순한 관찰대상자 일뿐 아니라, 우주의 내부 정보를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우리가 앞에서 확인한 것은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 내지 아니한, 도덕률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잊혀지지 않는 것이다.  


3. 따라서 우리 자신을 볼 때, 우리는 우리 자신 말고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앞에서 도덕률, 인간 본성 법칙, 옳고 그름의 법칙과 같이, 우리 안에 누군가가 심어놓은 법칙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이것을 심어놓은 배후의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반론]  인간만의 경험을 놓고 모든 우주에 다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논리가 아닌가?

    우체국 아저씨가 집집마다 봉투를 두고 갈 때, 우리는 그것을 다 열어보지 않았지만 그 안에 어떤 내용들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모든 편지 봉투를 열어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내가 연 봉투에서는 언제든지 편지가 나왔기 때문에 그렇게 일반화해서 말할 수 있다.(다른 사람의 봉투는 열어볼 수 없으니까...)


   인간으로서 우리가 열 수 있는 유일한 봉투는 인간 자신뿐이다. 우리는 나라는 인간을 열어보았을 때, '나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며 어떤 법칙 아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또한 '내가 일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기를 원하는 누군가 또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이다. 


[정리] 루이스는 지금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에게까지 나아간 것이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 아직도 먼 길을 가야 한다. 지금 루이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주를 지휘하고 있는 무언가가 존재하며, 그 무언가는 내 안에서 옳은 일을 하도록 재촉하고 그릇된 일에는 책임감과 불편함을 느끼게 만드는 하나의 법칙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말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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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일반적인 자연 법칙(중력과 같은)과 다른 <인간 본성의 법칙>이 실재하는 법칙(존재하고 영향력을 미치는 법칙)이라는 것을 논증한다. 



1. 일반적인 자연법치과 인간 본성의 법칙의 차이점


  1) 우리가 보통 말하는 자연 법칙은 엄밀한 의미에서 진짜 법칙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표현법에 불과하다.

    예) 돌이 <중력의 법칙>을 따른다는 말은, 돌이 떨어져야 하기 때문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법칙) 돌은 던지면 떨어지게 마련이다라는 뜻이다. 즉, 그 사실 너머에 무엇이 존재하여 마땅히 일어나야 하는 법칙이 따로 존재하는지 여부는 분명히 알 수 없다.(따로 다루어야 할 문제다.) 


  2) 그러나 '인간 본성의 법칙'이나 '바른 행동의 법칙'에 이르면 사정은 달라진다. 이 때의 법칙은 확실히 '인간이 실제로 늘 하는 일'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미 말한 것처럼(1장에서) 많은 인간들이 이 법칙을 따르지 않으며, 단 한명의 인간도 완전하게 따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 본성의 법칙은 인간의 실제적 설명과 차이를 드러내게 된다. 즉, 다른 무엇인가가 더 들어오게 된다. (인간은 실제로 어떻게 행동하는가?와 다르게 인간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더 있게 된다.)



2. 자연법칙에 대해서는 윤리적 평가를 할 수 없지만, 인간 본성의 법칙에 대해서는 윤리적 평가를 할 수 있다. 


  1) 자연 법칙을 따르는 대상을 향해서 좋다 나쁘다를 규정할 수 없다. 종종 그렇게 표현하는 것은 다만 그것으로 인해 내가 유익하다와 그렇지 않다 정도로 구분할 수 있을 뿐이다. (이 나무는 충분한 그늘을 제공하니 좋은 나무다. 그렇지 못하니 나쁜 나무다 / 이 돌은 모양이 영 나쁘다 와 같이)


  2) 그러나 사람들이  <그는 지금처럼 행동하면 안된다>라는 말을 할 때, 물질에 좋고 나쁘다는 평가를 하듯이 같은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 나의 이익과 불이익으로 평가할 수 없는 문제다. 


     (예) 기차에 먼저와서 창가에 앉은 사람과 나 몰래 내 가방을 치우고 앉은 사람으로 인해 우리는 둘 다 불편하지만, 전자는 비난하지 않지만, 후자는 비난한다.(불이익=나쁨)

     (예) 내게 유익을 준다고 할 찌라도 우리는 악하게 판단하기도 한다. 전쟁중에 적국의 배신자는 우리에게는 유익하지만, 우리는 그를 버러지로 여기기 때문이다.(이익=나쁨)



[정리] 중력법칙(자연법칙)은 단순히 무거운 물체가 움직이는 방식에 대한 사실에 불과하지만, '도덕률' 곧 '인간 본성의 법칙'은 단순히 인간이 행동하는 방식에 대한 사실이 아니다. 그렇다고 단순한 공상도 아니다. 인간은 이 생각을 도저히 없앨 수가 없다.(만약 이것을 없앤다면 우리가 인간에 대해 언급하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것들은 모두 헛소리가 되고 만다.) 따라서 <옳고 그름의 법칙> 혹은 <인간 본성의 법칙>은 여하튼 실재하는 것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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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크리스천과 문화

 

작성자: 김수억 목사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17:23)

 

1. 다음은 월트디즈니사가 제작한 라이언 킹에 대한 기독교계의 평가다. 어떤 것이 옳다고 여겨지는가? 왜 그런가?

1) 무비라인(Movie Line): 미국 가톨릭 교회가 운영하는 영화 상담 전화


2) 한국의 한 기독교 문화 운동 단체


 

 

2. 세상 문화와 기독교 문화를 구분짓는 기준이 과연 무엇이라고 보는가 나누어 보자.

 

 

 

3. 성경과 기독교 역사는 세상 문화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 왔는지를 살펴보자

1) 성탄절(1225) / 그리스 정교회(16)


2) 십자가


3) 성경의 언어


4) 건축(예배당)


5) 악기


6) 그리스 아덴에서의 바울의 태도(17:22,23)


 

4. 위의 내용을 고려해 볼 때 처음부터 기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이 구별되어 있는 것인가?

무엇을 통해서 참으로 기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을 구별하여 평가하여야 하는가?(p56)

 

 

5. 진정으로 기독교적인 소설가(영화감독)란 어떤 소설가(영화감독)이어야 하는가?


 

 

6. 진정으로 기독교 문화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우리 청년들이 지금 해야 할 준비가 무엇인가?


 

 

7.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에는 두 라인이 있다고 이재철 목사는 말한다. 두 라인이란?

1) 진짜 행동파:

2) 진짜 실력파

 

8. 내가 하나님의 쓰임을 받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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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친구가 길을 가다 왕을 만났다. 둘 중 한 명은 욕심이 많았고, 다른 친구는 시기심이 많았다. 왕은 두 사람에게 "만약 너희 중에 한 명이 요청하면 무엇이든지 그대로 주겠다. 단, 옆 사람에게는 요청한 것의 두 배를 주겠다."고 말했다. 


왕의 말을 들은 시기심 많은 친구는 먼저 나서서 요구하려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친구가 두 배로 받는 것이 달갑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욕심 많은 친구도 마찬가지였는데, 자신이 친구보다 더 많이 차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 머뭇거리며 눈치를 보고 도무지 요청하려 들지 않았다. 


기다리던 왕이 부탁이 없으면 그냥 가겠다고 말하자, 시기심 많은 친구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임금님, 저의 왼쪽 눈을 빼 주십시오!"


  -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 / 신원하 / IVP / p. 71,72


시기심이란 자신이 친구보다 더 가질 수 없다고 판단이 되면, 상대에게 더 많은 피해를 주기 위해 자신의 피해를 기꺼이 감수하게끔 하기도 한다. 내 눈을 한쪽을 빼는 한이 있더라도... 기필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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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 교만, 시기,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정욕


단테는 이 7가지 대죄를 사랑과 관계되어 3가지로 구분합니다. 

왜곡된 사랑, 불충분한 사랑, 과도한 사랑.

사랑이란 이름만 붙인다고 다 아름다운 건 아닙니다. 

어쩌면 모든 죄는 사랑의 돌연변이 입니다. 





4세기 사막 수도사로 부터 규정된 죄의 규정은 조금 변화되고 정리되어 로마 가톨릭 안에서 7대죄(죽음에 이르게 하는)로 자리를 잡았다. 


교만, 시기,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정욕


이 일곱가지 죄는 모든 죄의 머리가 되는 죄로 다루어졌다.




단테는 대죄를 그릇된 세 유형의 사랑으로 분류했다.


첫째,  교만, 시기, 분노와 같은 죄를 <왜곡된 사랑>이라고 구분했다.

둘째, 나태와 같은 죄를 <불충분한 사랑>이라고 구분했다.

셋째, 탐욕과 탐식과 정욕은 <과도한 사랑>이라고 했다. 



20세기 소설가이자 단테 연구가인 도로시 세이어즈(Dorothy Sayers)는 

크게 두가지로 7대죄를 구분했는데


첫째, 정욕, 분노, 탐식을 <뜨거운 마음의 죄>

둘째, 탐욕, 시기, 나태, 교만을 <차가운 마음의 죄>


구분했다. 


추가적인 설명으로 뜨거운 마음의 죄는 최소한 공동체 생활을 무너뜨리지는 않지만, 

차가운 마음의 죄는 인간관계와 공동체를 균열시키는 더욱 파괴적인 죄로 여겼다. 


 -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 / 신원하 / IVP / p.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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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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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1장에서 루이스가 인간은 <인간 본성의 법칙>을 누구나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본성적으로 가지고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런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2장은 루이스의 이 논리에 대한 반론에 대해서 답변하는 형식으로 2장 내용을 전개한다.

 


[반론1] 당신이 말하려고 하는 도덕률이란 사실상 인간의 집단 본능에 불과한 것처럼, 다른 본능들처럼 발전해 온 것이 아닙니까?(도덕률과 인간의 본능을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견해)


[루이스의 답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도덕률과 인간 본능이 차이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함


<예1>

위험한 지경에 처한 사람이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가 들려올 때 우리는 두가지 욕구를 동시에 느낌.

 1.  당장 달려가 도우려는 욕구(집단 본능에서 나온 것이다.)

 2. 위험을 피하려는 욕구(이것은 자기 보전 본능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이 두가지 충동 외에 <도망치려는 충동을 누르고 도우려는 충동을 북돋우라>고 말하는 제 3의 어떤 무언가를 내면에서 발견하게 된다. 즉 두 본능 사이에서 판단을 내리고, 그 가운데 어떤 본능을 따라야 할지를 결정해야 하는 이것이 두 본능 가운데 하나 일 수는 없다. 즉 제 3의 또 다른 욕구가 있다는 것이다. 


  루이스가 말하고자 하는 <도덕률>이라는 것은 제 3의 욕구에 대해서 말하는 것으로, 1,2번의 본능이 단지 건반 키들에 불과하다면, 제 3의 욕구인 도덕률은 마치 연주해야 할 곡으로 비유할 수 있는 것이다. 


<예2> 두 본능이 우리 안에서 싸울 때, 강한 본능이 이겨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약한 편을 들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물에 빠지 사람을 돕는 편보다는 자신의 안전을 도모해야 하는 편을 더 바랄 것이다. 그러나 도덕률은 그래도 그를 도와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도덕률은 옳은 충동을 원래보다 더 강화시키기 위해서 애쓰라고 할 때가 종종 있지 않은가? 건반은(본능 1,2) 자신을 다른 건반보다 더 크게 치라고 지시할 수는 없다. 


<예3> 도덕률은 단순히 본능 중 하나가 아닌 또 다른 확인은 도덕률이 본능의 하나라며, 언제나 선하고 옳은 충동 하나를 우리의 내면에서 짚어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충동이란 없다. 모성애나 애국심은 선하지만, 성충동이나 싸우려는 충동은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런 충동들은 상황에 따라 필요한 것이기도 하고 과도한 충동은 악을 유발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충동에는 원래 좋거나 나쁜 것이 없다.(심지어 보편적인 인간애도 그릇될 수 있다. 인간애를 핑계로 정의를 무시한다면 말이다)


도덕률은 본능 중 하나도 아니고 본능을 모아 놓은 것도 아니다. 도덕률은 본능들을 지휘하여 일종의 곡조(우리가 선이나 옳은 행동 이라고 부르는 곡조)를 만들어 내는 어떤 것이다. 




[반론2] 당신이 말하는 도덕률이란 교육을 통해 우리에게 주입된 사회적 관습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까?(도덕률이라는 것이 본성적인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 그 사회의 문화 가치관의 영향력에서 파생된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루이스의 답변] 루이스는 몇 가지 측면에서 답변을 제시한다. 


1. 인간 본성의 법칙을 수학과 같은 부류에 포함시켜야 한다. 

  1) 우리는 누구나 학교에서 구구단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사막에 혼자 자란 아니는 구구단을 모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구구단이 단지 인간의 관습, 즉 인간이 스스로 구성해서 낸것으로 원한다면 얼마든지 달리 만들 수도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2) 물론 학습을 통해서 좌측 통행, 우측 통행과 같은 것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수학과 같은 것은 그럴 수 없는 것인데 루이스는 인간 본성의 법칙을 수학과 같은 것으로 본 것이다.  그 두 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한 시대 한 나라의 도덕관은 다른 시대나 다른 나라의 도덕관과 다를 수 있지만, 사실 그 차이가 그렇게 크지 않다. 그리고 그 모든 도덕관들을 관통하는 동일한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2) 민족마다 다른 도덕들에 대해서 생각할 때, 우리는 모두 한쪽의 도덕이 다른 쪽의 도덕보다 더 낫거나 못하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다. 또한 한 민족의 도덕에 있어서도 도덕적인 진보란 이전보다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이 말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나치의 도덕이나 지금 우리의 도덕에 우열을 나눌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이 둘(두 민족의 도덕관, 혹은 두 시대의 도덕관)을 비교할 만한 어떤 기준이라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은 <참 도덕>이라는 어떤 것과 비교해서 그렇다고 판단하는 행위가 아닌가! 진정한 <옳음>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루이스의 결론] '바른 행동'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 차이 때문에 종종 자연적인 '행동 법칙'이란 없다는 의심을 하게 되긴 하지만, 사실은 이런 차이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이 상황이야 말로 오히려 그런 '행동 법칙'이 존재한다는 정반대의 사실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추가적인 반론에 대해] 300년 전 영국에서는 사람들을 마녀로 몰아서 잡아 죽이는 일이 벌어졌다. 그것이 당신이 말하는 '인간 본성의 법칙'이나 '바른 행동의 법칙'이란 말이오?


[루이스의 답변] 마녀사냥이 없어진 것은 더이상 마녀의 존재를 믿지 않기 때문에 없어진 것이지, 여전히 마녀가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오늘날에도 마녀사냥은 존재할 것이다. (마녀란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판 대가로 초자연적인 능력을 받아, 그 힘으로 이웃을 죽이거나 미치게 만들고 날씨를 궂게 만드는 사람들인데, 이들이 우리 주변에 여전히 살고 있다고 믿는 다면 아마 이 불쾌한 이적 행위자를 사형시켜 마땅하고 하는데 모두 동의했을 것이다.)


마녀가 없다는 지식의 진전은 있었던 것이지만, 이것을 도덕적 진보라고 볼 수는 없다. 집에 쥐가 없다고 쥐덫 놓기를 그만 둔 이를 인도적인 사람이라고 부를 수 없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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