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살펴 본 바로, 갈라디아 교회에 대한 문제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1.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전했던 <순수 복음>으로 이방인 교회가 세워졌다.


  - 순수 복음이라는 것이 다소 오해스럽지만, 예루살렘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했던 복음과 차별을 두기 위한 표현이다. 유대인들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하나님의 의를 얻게 되었다. 이것이 순수한 복음이나 이들은 자신들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이미 오래전부터 율법(의 문화와 가치관)의 옷을 입고 있었다. 이 말은 어디까지가 순수한 복음인지 어디까지가 문화적인 요소인지를 엄밀하게 구분하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 사도행전에 베드로의 고넬료 만남을 통해서 이방인에 대한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뜻(행 11장)과 바울의 증언으로 이루어진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행 15장)이 예루살렘의 사도들로부터 인정되었지만, 이들의 생각을 쉽게 바꾸지는 못했던 것 같다. 유대인들은 태생적으로 이것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 그런데 바울은 이 둘을 명확하게 구분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들고 나아갈 때 불필요한 유대인의 문화와 습관을 요구하지 않았다. 순수 복음만을 전했다.




2. 바울이 전했던 <순수 복음>은 갈라디아 교회에 두 가지 방향으로 연약함이 드러났다.


  1) 순수 복음은 그 내용 자체 만으로는 그 의미를 정확하게 개념화하기 힘든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은 언제나 <율법>이라는 상대적 개념과 대조해서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로마서에서는 복음에 대한 이런 특징을 잘 설명해 준다.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설명할 때, 이들은 이미 율법에 대한 기초적 이해(와 경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방인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순수 복음>은 두 가지 측면에서 연약함을 드러낸다. 첫째는 율법적 삶에 대한 무시를 만들어 낸다. 성도들로 하여금 율법 폐기론과 같은 행동을 제어할 수 없는 근거처럼 나타난다. 


  - 보통 이것은 율법에서 자유하게 되었다는 말로 대표될 수 있는데, 이들은 순수 복음을 그렇게 이해해서 육체의 소욕을 따르는데 전혀 문제의식을 느까지 않게 되기도 한다.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육체의 소욕을 따라가는 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 갈라디아서 5,6장에 나오는 바울의 권면은 바로 이와 같은 태도를 가진 자들에게 주는 권면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그릇되게 이해한 자들이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5,6장에서 매우 율법적인 권면들을 한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라는 것을 말하며,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에 대한 삶을 요구한다. 


  - 따라서 갈라디아서는 율법 자체를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그런 가르침을 주고 있지 않다. 복음은 율법을 버리는 삶이 아니다. 다만, 복음에 대한 그릇된 이해로 육체의 소욕을 따르고자 했던 자들의 삶을 바로 잡아 주려고 했던 것이 갈라디아서를 쓴 주요한 이유중에 하나다.


  - 보통 갈라디아서의 핵심을 이야기 할 때, 이부분을 보지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5,6장에 대한 오해가 생긴다. 이전까지 율법이 아닌 믿음이 복음이 핵심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가 갈라디아서의 마지막 5,6장은 다시 율법적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니 말이다. 



  2) 다른 한 가지의 연약함을 이방인 교회에 전해 주었던 바울의 <순수 복음>은 예방 주사를 맞지 않은 복음과 같았다. 그래서 작은 변형과 왜곡이 왔을 때, 쉽게 넘어져 버리는 복음이었던 것이다. 일부 유대 그리스도인들에 의한 <거짓 복음>(율법적 요구가 가미된 복음)이 들어오자 면역력이 없었던 <순수 복음>은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이로 인해 제일 당황하고 분노하게 된 것은 바울이다. 갈라디아서는 바로 이와 같은 상황하에서 쓰여진 것이다. 


  - 그래서 바울은 <거짓 복음>에서 율법적 요구를 제거하고 순수 복음이 무엇인지 다시 선명하게 해줌으로서 바울이 전해주려고 했던 복음의 핵심을 좀 더 분명하게 해준 것이다. 이전의 복음과 다른 것은 아니지만, <다른 복음> 중 어떤 것이 순수 복음이 아닌지에 대해서 설명해 줌으로서 갈라디아 교회는 <순수 복음>의 명확성을 이전보다 가지게 된 것이다. 


  - 갈라디아서는 처음부터 4장에 이르기까지 이야기를 중심으로 진행한다. 그래서 율법과 복음과의 관계성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가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서의 복음을 설명함으로 복음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를 이루려던 시대를 마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음 통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이루는 시대임을 밝힌다. 



이 두가지 측면에 대한 이해가 갈라디아서를 읽는 사람들에게 먼저, 선명하게 들어와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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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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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히브리서 9장에 대한 내용 정리를 해봅니다. 복잡할 것 같은 내용도 논리적 전개를 따라 저자의 맥락을 놓치지만 않는다면 좀 더 단순화될 수 있고, 강조점이 무엇인지 알 수도 있게 됩니다.

우리가 익히 익숙한 구절이 오히려 초점을 흐리게 되는 것도 발견합니다.

22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

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

와 같은 구절들은 본 장에서 말하고자하는 내용의 주인공은 아닌 구절인듯 합니다. 물론 조연으로서 필요한 구절임은 당연하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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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언약(첫 언약)에도 제사장이 성막에서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예법과 성소는 비유지 실제로 온전하게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개혁할 때까지 임시적으로 맡겨 둔 것이다.

새 언약의 중보자 되시는 그리스도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이 땅에 오셔서 손으로 짓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하늘)장막으로 들어가셨다.

따라서 옛 언약 아래에서 제사장이 동물의 피로 그 백성들의 부정을 정결하게 했다면,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완전한 제물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지 않겠는가? 또한 너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지 못하겠는가? 충분히 넉넉히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과거 동물의 피(죽음을 통해)가 있을 때 죄사함의 효력이 인정되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피)이 있어야만, 유언한 자의 죽음이 유언의 효력시점이 되듯이 그를 의지하는 모든 사람들의 죄 사함의 효력시점이 되는 것이다.(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역사적 시점이 성도가 죄를 사함받는 역사적인 시점이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와 같은 것을 번거롭게 여러번 하신 것이 아니라(구약의 제사장은 여러번 할 수 밖에 없었다. 제물 효과의 불완전함 때문에) 마지막에 단 한번으로 모든 죄사함을 완성시키신 것이다.

이제 두 번째 다시 나타나시겠지만 이것은 또 다른 죄사함을 위함이 아니다. 죄와 상관없이 성도를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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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4장을 읽고 정리하면서 디모데후서 전체를 정리해도 좋을듯 하다. 전체적인 강조점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디모데후서는 목회자인 디모데를 위해서 쓴 책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상황에서의 목회서신은 아니다. 목회 사역으로 낙심한 디모데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쓴 목회서신이다. 따라서 그런 상황에 있는 목회자들 혹은 말씀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분들에게 더 직접적인 내용인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후서에서 몇 가지 핵심 메시지만 집중해서 다룬다.

1.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에 집중해야 함을 강조한다.

  : 다른 헛된 이야기와 변론에 주력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정치든, 경제든, 이념이든, 철학이든, 교육이든, 사회선교든, 문학과 예술이든... 그런 분야들이 강단의 전면에 나서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특수 목회(교회)라는 것도 잘 생각해 볼필요가 있다. 요즘처럼 교회가 많은 곳에서 어떤 특성(차별화)을 가지지 못하는 교회는 메리트가 없기 때문에 색깔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특성을 강조하는 교회들이 많아진다. 그와 같은 것은 '선교회'(파라처치)라고 봐야 더 맞을지 모르겠다. 그런 특성을 가졌다고 해서 설교를 안하는 것도, 성경공부를 안하는 것도 아니겠지만 결국 그 차별화된 특성이 교회의 본질을 희석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역으로 '성경 중심'인 교회라는 차별화를 가지는 교회가 있다는 것은 지금의 교회가 얼마나 성경과 멀리 떨어지게 했는가를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교회는 성경을 중심으로 하나님이 우리 인간과 세상을 향해 주시는 말씀을 깨닫고 그 뜻가운데 순종하도록 하기 위한 곳이다.  기능을 강조하다가 본질을 훼손시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라 본다.

2. 목회자는 하나님이 맡기신 일(사명)에 흔들리지 말고 충성할 것을 강조한다.

  : 자신의 부족을 발견했다손 치더라도 나약한 모습으로 자기 연민에 빠져있거나 해서는 안된다. 우리를 행위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뜻가운데 부르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맡겨진 것은 충성이고, 성실함이다.

    부족함을 고수한 채 일만 열심히 하라는 것이 아니다. 부족함을 발견할 때, 그 부족함 때문에 그만두어야 한다는 근거로 삼지 말고, 그 부족함을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노력하고 수고하라는 의미다. 그래서 자신의 성장을 온 교회로 보이도록 하라는 것이다. 이런 변화에 교회는 소망이 있고, 기대가 있는 것이다.

   부족해 보이는 목회자를 향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이라 믿고) 기다려주고, 인내할 때 목회자는 또한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부단히 연마하며 노력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이 부끄러움이 되지 않도록 자신의 성장을 교회 앞에 드러내도록 노력해야 교회는 성숙해 지는 것이다.

3. 목회자는 복음(목회)을 위해서 고난을 감당해야 한다.

  : 많은 인간적인 갈등과 실망 더 나아가 배신이 존재하지만 그 모든 어려움을 참고 사랑으로 목회의 사명을 감당하려고 했던 사람들에게는 하늘의 상급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주는 상급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이라는 것을 잊지는 말자.

   그러나 사람이 모두 어려움만 주는 것은 아니다. 바울에게 디모데와 같은 사람도 있었고, 누가처럼 어려움중에 함게 해준 사람도 있다.(9,11절) 또 바울이 볼 때 믿고 사역의 현장으로 보낼만한 두기고와 같은 사람도 있었다.(12절) 많은 사람들은 바울은 다 버리는 것같았고(16절) 알렉산더와 같은 사람은 아무리 주님의 사랑으로 품으려고 해도 품을 수 없었던 사람도 있었다.(14,15절)

   그러나 이 모든 어려운 일에서 바울은 건져주시고, 끝까지 힘이 되어주셨던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셨다.(17,18절) 목회자의 마지막 보루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위로와 힘인 것이다.

떠날 사람은 떠나고, 보내야 할 사람은 보내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불러야 할 사람은 부르고 곁에 두어야 할 사람은 두어야 한다.

목회 현장에서 어려움 중에도 모든 악에서 건져주시고 힘을 주시는 분은 역시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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