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 17장] 우리가 익숙하게 들었던 표현들이 오늘 본문에 많군요. 상상력을 자극하는 예레미야의 표현은 매우 자극적이며, 스토리를 연상케 합니다. 유다의 죄가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었다는 표현, 여호와는 인간의 심장을 살피고 폐부를 시험하신다는 묘사, 불의한 자의 성공은 자고새가 품은 알처럼, 중년에 그를 떠날 것이라는 비유..성경을 읽다가 보면, 문학을 배우게 됩니다. 



[정리1.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게 정리하는 작업]


1. 유다의 죄가 깊이 새겨져 있다.

  1)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제단 뿔에 새겨졌다.

   (1) 너희의 자녀들은 항상 높은 언덕 위 푸른 나무 곁에 있는 제단들과 아세라를 생각한다.

  2) 그래서 너희들은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잃고, 알지 못하는 땅으로 가서 원수를 섬긴다. 

  3) 무릇 사람을 믿고 의지하며 육신으로 그 힘을 삼고, 여호와에게서 떠난 사람은 저주받음.

  4)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다. 이들은 물가에 심은 나무 같을 것이다.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결론]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그것을 알겠는가마는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고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신다.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않은 알을 품은 것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날 것이다. 


2. 여호와께 자신은 구원해 달라고 요청하는 예레미야

  1) 재앙의 날에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요청하는 예레미야

   (1)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2) 나는 목자의 직분을 물러가지 아니하고, 주를 따랐습니다. 

   (3) 주는 내게 두려움이 되지 마옵소서. 재앙의 날에 주는 나의 피난처시니이다. 

   (4) 나를 박해하는 자로 치욕을 당하게 하시고, 나로 치욕을 당하지 않게 하소서.


3.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명하시는 하나님

  1)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유다 왕들이 출입하는 문과 모든 예루살렘의 문에 가서 안식일에는 스스로 삼가서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지 말라. 너희 집에서 짐을 내지 말라. 

  2) 어떤 일이라도 하지 말고,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함 같이 안식일을 거룩히 할지어다. 

  3) 그러나 이들은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했다. 

  4) 그러나 만일 너희가 삼가 나를 순종하여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면, 다윗왕의 옛 영광을 회복시켜 주리라. 하지만 너희가 나를 순종하지 않고 안식일을 거룩되게 하지 않고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면 내가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겠다.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하는 과정을 통해서 파악한 내용을 다시 내 글로 풀어놓는 작업]


 오늘 본문에서는 유다의 죄가 얼마나 깊고, 지울 수 없는 죄인지(돌이킬 수 없는 죄인지)를 표현해 주고 있다. 예레미야는 금강석 끝 철필로 마음 판에 새겨져 있다고 표현되어 그것은 지워질 수 없으며, 감출수도 없음을 묘사한다. 따라서 이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기업을 잃고 알지 못하는 땅으로 끌려가며 원수는 섬기는 비참함을 경험하게 된다. 이들은 하나님을 의존해야 할 백성들임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사람을 믿고 육신을 의지함으로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것은 마음인데, 그것을 사람들은 모르지만 하나님을 아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중심을 살피고, 폐부를 시험해 보시기 때문이다. 지금 이들(불의한 자)이 누리를 향락은 자고새가 품은 알처럼 중년이 되면 날아가 버리는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예레미야는 유다를 중보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 가운데서 자신에게는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요청한다. 자신은 목자로서의 성실을 다했다고 고백하며, 재앙의 날에 자신의 피난처가 되어 달라고 요청한다. 


유다 백성들이 대표적인 죄악 중에 하나가 안식일이었던 것이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엄중한 안식일 명령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안식일에 왕부터 평민까지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안식일에도 짐을 옮겨 장사를 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이를 금하도록 지시했으나, 역시 이들은 듣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면 다윗의 옛 영광을 회복시켜 주시겠다고 약속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결국 이들은 안식일도 지키지 않으므로 멸망은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정리3. 정리1과 정리2를 하면서 도드라지거나 새롭게 정리되는 내용들을 내 사고의 개념으로 풀어냄]


1. 예레미야도 유다 백성의 중보에도 한계가 있음을 알았다. 


늘 자기 백성을 생각하고 중보하던 예레미야가 오늘은 다른 모습을 보인다. 진노와 재앙 중에서라도 자기 자신만은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요청을 하는 것이다. 원수들과 같은 취급을 하지는 말아달라는 것이다. 이들은 수치를 당할지라도 자신은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예레미야의 자기만 살겠다고 기도하는 것같은 요청이 믿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죽했으면.... 하는 심정이다. 천로역정에서 크리스찬이 가족들도 그 진노에서 건지겠다고 같이 나가지고 요청했음에도 오히려 비웃음만 당하자 홀로 나올 수 밖에 없었던 것처럼, 예레미야는 완악함으로, 죄를 금강석 끝 철필로 마음에 새긴 백성들을 돌이키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했다. 이제 남은 것은 다가올 재앙에서 자신 만이라도 살아남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에도 한계가 있다는 말인가?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사역에 한계가 있을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의 무지와 완고함은 그런 한계를 느끼게 한다. 심지어 하나님이 그런 한계를 느끼시는것처럼 보여진다. 더이상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들려진다. 하나님의 백성이 누구인가? 하나님의 한계를 보여주는 자들아닌가? 우리의 죄는 어디까지 인가? 하나님의 한계를 보여주는데 까지 가지 않는가? 


고집불통 인간의 완악함.


2.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인간의 마음, 하나님은 아신다. 


누가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인간의 마음을 알겠는가? 그렇게까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 이야기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마음을 감찰하신다는 것이다. 여호와는 심장(중심)을 살피시고, 폐부를 시험하여 마침내 그 행실과 행위를 명확하게 밝혀 내신다. 그리고 그것에 합당한 보응을 하신다. 


유다는 우리 인간의 거짓되고 부패한 마음을 보여주는 백성이다. 이들만의 모습이 아니고, 우리 인류 전체의 모습이고  실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우리의 거짓됨과 부패를 잘 모른다. 나 자신의 이야기 이지만, 가장 잘 모르는 것이 바로 인간이 아닌가 싶다. 나의 거짓과 나의 부패를 인식한다면, 우리는 교만할 수 없다. 늘 조심하고 신중할 수 밖에 없으며 누군가 외부적인 존재의 객관적인 비평을 받아 들일 준비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귀를 막고 만다.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넘어, 거짓과 부패를 보지 못하니 무슨 개선이 가능하며 무슨 대화가 이루어지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신의 한계를 직면하는 것이고, 그것은 자신의 거짓됨과 부패를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은 보고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한다. 이것이 우리의 문제다. 


3. 불의한 자의 성공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고새가 품은 알과 같은 것이니, 부러워하지 말라.


자고새는 다른 알을 품고 결국 그 알은 자고새를 떠나 날아가 버린다. 불의한 자가 품고 있는 부와 성공은 자신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결국은 주인을 찾아 날아갈 수 밖에 없음을 우리는 잊으면 안된다. 곧 날아갈 부와 성공이라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어야 한다. 


자고새를 부러워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게라도 부와 성공을 품어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성도들이 있을런지 모르겠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만큼 어리석은 것이 없음을 말한다. 자기 것도 아닌 것을 자기 것처럼 품고 있을 자가 당하게 될 허망과 부끄러움을 우리는 더 크게 보아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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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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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7장] 예레미야를 읽다가 보면, 수십년 간의 결혼 생활 속에서 참고 살았던 남편이 아내와의 별거를 통보하기 전 사람들에게 자신이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그간의 사정에 대해서 토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듣고 있노라면, 정말 오래 참고 인내했구나, 할만큼 하셨구나... 하는 생각과 그 아내 해도 너무하네.. 하는 생각을 반복하게 됩니다.(내용이 기니 읽으시려면 <묵상과 적용>부분만 읽으세요.) 



[정리1. 내용의 일목요연한 정리]


1.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성전 문에서 예배하러 오는 유다 사람들에게 선포함

  1)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 곳에 살게 하리라.(3절)

  2)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말라.

  3) 지금 하고 있는 죄악에서 돌이키면 너희는 이곳에 살게 되리라.

  4) 너희들은 도둑질하고 살인하며 간음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면서도 이 집에 들어와서는 <구원을 얻었나이다>하면서 가증한 일을 행하고 있다.(10절)

  5) 너희는 이 집이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여호와 하나님이 처음 계셨던 실로에 가서 이스라엘의 형편을 보라. 그들이 불러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실로에서 행한대로 이곳에서도 그와 같이 행하리라.


2. 이 백성을 위해서 기도하지 마라.(16절)

  1) 그런즉 너는 이 백성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라. 위하여 구하지 말라. 듣지 않으리라. 

  2) 이들의 하는 행위를 보라.

   (1) 자식들은 나무를 줍고, 아버지는 불을 피우고, 부녀들은 가루를 반죽해 하늘의 여왕을 위해서 과자를 만들며, 또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부음으로 하나님의 노를 일으킨다. 

 3) 하나님은 사실 애굽에 나올 때 번제와 희생제물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했는데,  그런데 너희들은 순종하지 않고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완악하게 하여 등을 돌렸다. 

   (1) 너희 조상들이 애굽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되 끊이 없이 보냈으나, 너희가 순종하지 않았고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목이 곧아 너희 조상보다 더 악을 행했다. 

   (2) 예레미야 네가 이 백성에게 이 말을 할지라도 그들은 순종하지 않을 것이다.(27절)


3. 유다가 도벳 산당을 지은 것에 대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

  1) 유다가 여호와의 눈 앞에 악을 행하여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에 그들이 가증한 것을 두었다. 

  2)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여 그곳에서 자녀들을 불살랐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명령한 것도 아니고, 마음에 생각하신 것도 아니다. 

  3) 이곳을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고 하지 않고, 죽음의 골짜기라고 할 만큼 이곳을 죽음의 시체로 가득 채우겠다. 

  4) 내가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기뻐하는 소리, 즐거워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라 끊어지게 하리니 땅이 황폐하리라. 


[정리2. 내용의 재구성, 서술적으로 표현하기]


유다의 죄악에 대한 메시지를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성전 문 앞에서 예배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다. 


내용은 너희들이 지금의 죄악에서 돌아오면 이곳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인데, 지금 이곳에서 아무런 문제없이 살고 있고 향락가도 아니고 성전에서 예배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메시지가 전혀 먹혀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예측된다. 역시 이들은 예레미야의 이 메시지를 미친 사람의 이야기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여호와의 성전이 여기에 있고, 나는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고... 하는 신앙적 안심을 가지고 있겠지만, 그런 생각은 헛된 생각이다. 이들은 예배를 드리면서 성전을 도둑의 소굴로 만들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삶은 전혀 신앙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실로에서도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간구에 응답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제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간구에도 응답하지 않으실 것임을 말씀하신다. 이들의 죄가 가증하기 때문이다. 


이들을 위한 중보와 간구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이들은 조상들의 악함보다 더 완악하기 때문이다. 많은 선지자들을 보냈지만, 그들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고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예레미야가 그것을 지적한다고 한들, 이들은 이것조차도 듣지 않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세운 도벳 사당은 하나님 앞에서 대놓고 악을 행한 것인데, 하나님께 이곳을 도벳이라 혹은 힌놈의 아들 골짜기라고 하지 않고, 죽음의 골짜기라고 말하도록 그곳에 시체를 쌓을 것이다. 


[정리3. 묵상과 적용]


1. 참된 메시지는 나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들려지곤 한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보냈고, 예배드리러 오는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게 하셨다. 예레미야의 지적은 그들의 죄에 대한 것이고, 회개하고 돌아오면 이 곳에서 평안이 살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우리는 당시 이스라엘의 죄와 유다의 죄악을 객관적으로 봐서 이 장면이 이상해 보이지 않지만, 당시 유다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이상한 장면처럼 보일 것이다. 

 

  1) 죄를 지적하려면 성전이 아니라, 향락가를 찾아 가는 것이 적절할텐데... 적어도 이들은 예배드리러 오는 정도의 신앙은 되는 사람들인데... 왜 이들을 향해서 죄를 회개하라고 하는 것인가? 

  2) 이들은 문제없이 유다 땅에서 잘 살고 있고, 성전에서 예배드리고 있는 사람들인데, 예레미야의 요청은 너희가 회개하면 여전히 이곳에서 살게 해주겠다는 약속은 별 효력이 없는 것 같다. 


예배를 드리러 오는 유대인들.. 이들은 완전하지는 않겠지만, 그나마 유다 백성들 중에서는 좀 나은 사람들일텐데 이들의 입장에서 예레미야가 성전에서 예배드리러 오는 사람들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전혀 어울리지도 적절하지도 않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자기 자신보다는 저 도심에 있는 죄인들에게나 적용된다고 생각하면서 예레미야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들만이 하나님의 예레미야를 통해서 회개의 말씀을 전할 때,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자기는 아닐 것이라고, 자신에게 하는 말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들만이 유일하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고, 돌아올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유일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이들마저도 이 메시지를 무시한다면 더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전혀 없게 되는 것이다. 


전혀 나와 상관없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음성을 자신을 향한 음성으로 받아 들일 수 있는 겸손과 자기 성찰이 있다면 우리는 멸망의 위험 속에서도 소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 예레미야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결혼해서 살면서 맺힌 억울함을 쏟아내는 책이다. 


예레미야를 읽다가 보니 마치 결혼하고 참고만 살았던, 남편이 더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까지 와서는 아내와 별거를 선언하기 전에 왜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그간의 억울함과 황당함을 사람들에게 털어 놓고 있는 모습같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사람들마다 '맞아 맞아' 맞장구를 치며 아내의 잘못을 또한 남편이 정말 힘에 넘치도록 인내하며 사랑하며 견디어 왔구나 하는 것을 공감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억울함을 들는 마음으로 예레미야를 읽으시면 더욱 공감가시리라 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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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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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3장] 죄악이 훨씬 큰 북이스라엘보다 유다가 더 큰 책망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온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언약궤는 더 이상 필요없게 된다고 말씀하셨을까요? 그 이유를 묵상에서 좀 다루어보았습니다. 


[정리1. 본문 내용을 문맥 파악해서 정리해 보기]


1. 유다의 음란과 행악

  1) 그들은 말한다. 음란한 아내를 다시 받아 준다면 그 땅이 크게 더러워지지 않겠는가!라고.

  2)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가 바로 음란을 행하는 여인과 같다. 행음하지 않는 곳이 없다.

  3) 그래서 단비가 그쳤고, 늦은 비가 그쳤는데도 창녀와 같아서 수치를 알지 못한다.

  4) 너희가 갑자기 버린 나를 다시 찾으며, 청년 때의 보호자라 말하며 노여움을 풀라 말하지만, 그러면서도 여전히 너희들은 악을 행하고 너희 욕심을 이룬다. 한 마디로 가증스럽다.


2. 이스라엘의 케이스를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유다

  1) 요시야 왕 때에 이스라엘은 온통 행음으로 가득했다. 돌아오라고 했으나 돌아오지 않았다.

  2) 이스라엘의 자매 유다는 이 모든 것을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도 가서 행음하였다. 

  3) 여기서의 행음이란 우상 숭배를 지칭하는 것인데, 그 행음으로 이 땅을 더럽혔다. 

  4) 유다는 진심으로 돌아오지 않고, 거짓으로 돌아오는 척 할 뿐이다. 


3. 반전: 이스라엘과 유다의 회복을 말씀하심

  1) 배역한 이스라엘이 반역한 유다보다 자신이 더 의로움이 나타났으니 북으로 가서 선포하라.

  2)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니 노를 한없이 품지 않을 것이다. 

  3) 너는 오직 너희 죄를 자복하라, 돌아오라. 나는 너희의 남편임이라.

  4) 내가 너희를 택하여 시온으로 데리고 오리라. 내 마음에 합한 목자를 세워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 그래서 이제 여호와의 언약궤가 다시 필요없을 것이며, 예루살렘이 여호와의 보좌가 되어 예루살렘에 모이는 자들이 악한 마음의 완악함을 그들이 행하지 않을 것이다. 

  5) 그 때에 유다 족속이 이스라엘 족속과 동행하여 북에서부터 나와 조상에게 기업으로 준 땅에 함께 이르리라. 

  6) 하나님은 어떻게 하든지 너희를 자녀들 중에 두고, 너희는 나를 나의 아버지라하고 나를 떠나지 말 것이라.

  7) 그런데 너희들은 아내가 남편을 속임같이 확실히 하나님을 속였다.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 


4. 진실한 회개

  구원은 하나님께 있는데, 우리가 청년 때부터 우리 조상들의 산업인 양 떼와 소 떼와 아들들과 딸들을 삼켰사온 즉 수치 중에 눕겠고, 치욕이 우리를 덮을 것이며 청년 때부터 오늘까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하였다. 



[정리2. 정리한 내용으로 내 표현으로 바꾸기]


유다는 말한다. 음란한 아내를 남편이 용서하고 받아 준다면 이 땅이 윤리적으로 타락하여 더러워지지 않겠는가 하고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가 영적으로 그 음란한 여인과 같기에 너희를 다시 받아 줄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이 있는데도 자신의 잘못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창녀와 같이 수치를 모른다. 어려울 때는 하나님을 찾지만 진심함이 그 안에는 없다. 


유다는 이스라엘에 대한 상황을 옆에서 지켜본 이스라엘의 자매다. 그런데도 유다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들도 가서 음행을 행했다. 우상을 섬겼으며 그로 인해 유다 땅을 더럽혔다. 그들은 진심이 없고 언제나 돌아오는 척만 했다. 따라서 유다에 임한 진노와 심판은 돌이킬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반전이 있다. 하나님은 긍휼이 있는 분이고 노를 영원히 품지는 않는 분이라고 말씀하시며, 이들을 향해 돌아오라고 요청하신다. 죄를 자복하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들의 남편이시기 때문이다. 남편으로서의 자신의 역할은 신실하게 감당하실 것이기에 그렇다. 하나님은 이제 이들을 다시 시온으로 데리고 와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목자를 세우고, 그들을 지식과 명철로 가르쳐서 더 이상 완악함으로 행하지 않도록 할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더 이상 필요없게 될 것이고, 예루살렘은 여호와의 보좌가 되어 예루살렘에 모인 자들은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할 것이고, 하나니은 너희를 자녀들 중에 둘 것이다. 


[정리3. 묵상 및 적용]


1. 유다가 이스라엘 보다 더 나쁜 이유


유다는 이스라엘과 한 민족이다. 그러나 두 나라가 되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법을 떠나 음행을 행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이른다. 이스라엘의 죄는 유다보다 급속해서 이스라엘이 먼저 멸망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유다가 이스라엘보다 더 악한(?) 분위기에서 책망하신다. 


이유는 무엇인가? 유다는 이스라엘의 죄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돌이키기나 새롭게 되지 못했다. 오히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이스라엘이 한 것을 그대로 따라했다. 그래서는 유다 땅 전역을 더럽혔던 것이다. 이런 유다를 하나님은 더욱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에게는 반면교사가 없었다. 그러나 유다는 바로 곁에서 반면교사로서의 이스라엘을 보지 않았는가? 그런데 전혀 깨닫거나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자멸의 길로 가게 된다. 


죄의 깊이와 정도에 따라서 죄의 심각성을 결정하는 것이 아닌듯 하다. 하나님은 알려주는대도, 경고하는대도, 가르쳐주는대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고 돌이키지 않는 완악한 자들을 가장 악하게 보신다. 따라서 교훈과 책망을 듣지 않고 자기 욕망의 고집대로 사는 것만큼 큰 죄가 없으며, 돌아오기 어려운 죄도 없는 것이다. 


2. 여호와의 언약궤가 없고, 예루살렘이 여호와의 보좌가 되리라.


하나님은 쫓겨난 자기 백성들을 다시 불러 모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남편이고, 쫓겨간 인생들은 그 분의 아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들을 시온으로 다시 불러 모으고, 그들 중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목자를 세워서 이들을 지식과 명철로 양육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의 언약궤가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목자가 세워져 이들을 바르게 가르칠 것이기에 더이상 언약궤가 필요하지는 않다는 것을 말한다. 예루살렘으로 다시 모인 백성들은 다시는 악한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하지 않을 것이다. 부드럽게 행동할 것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지혜로운 목자를 통해서 그의 백성들이 완전히 변화되어지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목자이셨다. 그래서 우리에게 지식과 명철로 가르치셨다. 예수님의 말씀 뿐 아니라 그분의 사역에 있어서도 그것은 모두 우리에게 지식과 명철로 가르치셨고, 지금도 가르치신다. 성령 하나님께서도 지금 우리에게 그와 같은 사역을 하고 있으시다. 이는 모두 학생의 훌륭함 때문이 아니라, 목자의 훌륭함 때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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